근육조선 303화
2부 7장 1화 – 이웃이 적이라니
이제 돌아갈 차례지만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었다. 내 인수인계를 한사코 거절하며 솔선수범하는 산시양의 열정을 경원부사인 김종인에게 보고하니 그는 내 눈을 한참 바라보다 점잖게 말하였다.
“왜국 출신이라 걱정이 많은 것이 분명하네. 염려하지 말고 도성으로 돌아가면 좋겠네만.”
“그래도 애단현에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유빙을 막아내도록 항구도 확충하여야 하고 여름 장마를 견딜 수 있도록 둑도 세워야 합니다.”
“자네와 같이 빼어난 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다른 이들은 범재가 대다수이니 몇 년에 걸쳐 차근차근히 행하면 좋을 일이지. 여하튼 자네 덕분에 득을 많이 보았네.”
“제가 한번 살아보려 궁리를 취한 것이나 효험이 있어서 다행이었지요. 국원(김종인의 호) 대감께서도 아직 부족한 제 말을 믿어주셔서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본래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역사에서는 정말 정승의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지. 항구로 갈 채비를 마치니 니당개가 같이 항구로 가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올 적에도 만나더니 갈 적에도 만나는구려.”
“우연이라 하여도 세 번이 반복되면 필연인 법이지요. 그나저나 고란 그 친구를 도성에 보내 무관으로 부임시킬 줄 알았는데 다른 이에게 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 스물에 불과한 데다 내가 가르침을 적당히 하여 정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였으니 방도가 없네. 하지만 내 벗인 여해는 가르침이 혹독한 사람이니 일취월장할 것이네.”
이순신의 아래에 들어갔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하다. 일기에 ‘무관 고란이 근무가 태만하였다. 장을 열다섯 대 쳤다’라고 적힐지도 모른다. 니당개도 상황을 이해하였는지 단칼에 포기하고는 말했다.
“그 친구가 정음을 떼지 못했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나마 율도에서는 경원과 마찬가지로 향시(鄕試)가 열리니 무과로 나아갈 길도 있겠지요.”
“무과를 너무 쉽게 보는구려. 복시부터는 사서삼경은 기본이요 무경칠서(武經七書)도 마땅히 익혀야 하는데 어디 쉬운 일이요?”
“학식을 쌓지 않는지라 일전에 부친께서 고란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적장의 목을 따오면 관직에 오를 수 있으니 문제도 아니라 하였지요.”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누며 배를 기다리는데 니당개가 지시를 내리는 이들은 수십 명이 넘어 어느새 수백 명에 달할 지경이었다. 경원에서 만든 철물을 이렇게 많이 어디로 보내지?
보통 철물은 하마 일대에 방문한 도매상이 품질에 따라 분류하고 사들여 전국 각지로 팔아넘기는데 왜 하마 니씨가 직접 움직인단 말인가. 더군다나 복식을 보니 명백한 왜인이 여기에 있다.
“저들은 왜인이 아니오? 왜인이 어찌하여 험난한 경원까지 당도하였소?”
“이번 거래 상대인 상삼(우에스기)씨의 사람들입니다. 조선의 후원을 받는 이들인데 경원산 병장기가 좋은 줄은 알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관료로 일하면서 암암리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선은 일본의 내전, 정확히는 전국시대라 불리는 백 년의 내전에 알게 모르게 개입하고 있었다.
북쪽의 우에스기와 남쪽의 오우치를 후원하며 조선으로의 확전을 억제한다 하였다. 상자를 열어 철을 확인하니 무기는 아니고 쇳덩어리인데 제법 잘 정련된 녀석이 아닌가. 니당개는 내가 확인한 물건을 보면서 우습다는 듯이 말하였다.
“경원에서 나는 철은 상등품도 있고 하등품도 있는데 상삼 씨에게 보내는 철물은 대다수가 하등품이지요. 왜국은 사철을 사용하는지라 철의 질이 형편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궁금한 점이 있소. 남만(서양인의 총칭)인들이 왜국과 교역을 하는데 이들이 질 좋은 철물을 팔면 활로가 막히는 것이 아니요.”
“우스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왜국에서 사람을 팔아 사들이고 떠받드는 남만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배의 아래에 두어 흔들리지 않게 보호하는 저하철(밸러스트)입니다.”
“그러한 줄은 몰랐구려. 이거 많은 것을 배웠소.”
흔히 일본 영화에서 전국시대를 묘사할 적에 남만제 철로 만든 무기가 나오면 사람 정도는 거뜬히 썰어버리는 절세보검이라 말했는데 정체가 배의 아래에서 염분에 시달리던 철물이라니.
뭔가 내가 알고 있던 일본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붕괴하는 것 같았는데 현실이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니당개는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에 있는 단도를 슬쩍 뽑아보고는 말하였다.
“제가 소지한 단검이 서반아국(스페인)에서 제작한 것인데 우리 가문에서 만든 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으며 일부는 앞서기까지 합니다. 기회가 되면 서역의 장인을 고용하여 더 좋은 철을 만들 방법을 모색해야겠지요.”
“철물을 다루는 이들은 국가의 중역이 아니겠소. 쉽사리 구할 수 없을 것이오.”
“혹시나 이현 어르신께서 나라의 중역이 되면 저를 위해 장인을 구해주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정승의 자리에는 오르실 분이 아닙니까.”
지금 철을 가장 잘 만드는 지역은 스페인의 톨레도일 것이다. 내가 유럽여행을 다녀오면서 들은 바로는 로마시대부터 기술을 축적하여 17세기에 정점을 찍었다 했으니까.
조선시대니 2년 넘게 항해를 하여 다녀와야 하는데 이리도 쉽게 이야기하다니. 내가 만약 스페인까지 다녀올 일이 있다면 니당개 이놈을 물귀신처럼 끌고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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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로 파견되었던 관리가 도성에 돌아와서 만나야 할 사람은 궁궐에 있는 임금이다. 물론 한낱 현감 따위가 임금을 만날 연유는 없었으니 대신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로 찾아가서 서류를 제출하였다.
“자네도 참······ 대단한 사람일세, 현감으로 인사고과를 항목이 많지만 마을을 임기 내에 옮긴 이는 없었는데 이를 어찌 판단할지 모르겠네. 여독이 쌓여 피로할 것이니 어서 들어가 보게나.”
당장 아내를 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었지만 이놈의 시대에는 예의를 표시할 자리가 차고 넘쳤다. 오래간만에 양송정에 당도하여 잠시 기다리니 스승인 이황과 장인어른인 조식이 함께 땀을 흘리며 들어왔다.
“성룡이 왔느냐. 내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머나먼 변방에서 몸이 상하지 않아 다행이구나. 나도 이제 일흔에 가까워 몸이 쇠하였으니 앞으로는 네가 입신체비를 행하면 될 것이다.”
“불초제자가 스승님께 누를 끼쳐드렸으니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네 나이에 같은 일에 직면하였으면 마음이 혼란하고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여 행실을 온전히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참 대단한 일이로구나.”
이황도 조식도 예순이 넘어 일흔을 향해가니 몸이 쇠하고 근육이 빠져나가 덩치가 큰 노인이 되었다. 덩치가 큰 노인과 몸이 쇠하였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이황이 저렇게 나를 추켜세우는 반면 조식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였다. 지난번 회령군과 외할아버지의 장례 때에는 찾아보지 못하였지만 내 소문을 들었는지 가장 먼저 호랑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토록 경고하여도 산군과 맞서 싸우다니 자네는 충고를 무엇으로 아는가? 더군다나 앞으로 나아가 산군을 쏘아 잡다니! 산군이 조금만 빨랐어도 자네를 물어 죽였을 것이네!”
“빙장어른께 송구합니다만 제가 거둔 사람이 위태로우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네가 거두었다면 훌륭한 무관으로 길렀어야지. 내가 김황(金滉)을 통해 헌이를 제자로 가르쳐 문과에 급제시켰는데 자네는 아직도 가르치는 법을 모르니 답답하군.”
그렇게 말은 해도 조식은 내 무사 귀환을 반기는 눈치였다. 헌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부대낄 사람이니 나중에 만날 수 있겠지. 두 어른에게 인사를 올리니 이제 정말 집에 돌아갈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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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왔는데 아내도 내 도착을 알았는지 며칠 전부터 집에 돌아와 방을 정리하고 나를 맞이할 준비도 마쳤다. 아니다! 아내 혼자 기다리던 게 아니고 이현전의 관료들이 속속들이 들어왔다.
“자네가 돌아왔으니 머나먼 북방에서 상한 몸을 다스릴 연회를 준비하였다네. 북방에 다녀온 이들은 대다수가 겨울을 버티려고 살집을 늘리니 앞으로 절육을 실행할 것이 아닌가.”
익숙한 얼굴들이 일찍 퇴근해 나를 맞이하니 눈물이 다 나려 하였지만 앞으로의 고난이라. 그러고 보니 집이 내가 돌아갈 때와 달리 변해 있었다. 옆집도 새로 지었는지 형태가 변하였다!
“아내와의 해후를 방해하여 미안하군. 우리는 잠시 옆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일이 끝나면 다시 방문할 것이네. 염려하지 말게나.”
취미 삼아 후원에 기르던 감자와 고추밭은 모두 앞마당으로 옮겨 왔고 아직 다듬지 않아 훗날에 늘리려던 후원이 정비되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내를 바라보니 아내는 부끄러운 듯이 말하였다.
“실은 집을 사용할 적에 입신체비기구가 부족하다 여겨 입신체비기구와 장소를 후원으로 옮기려 마음을 먹었지만 낭군께서 일에 매진하는데 제가 욕심을 부리는 것 같았습니다.”
“입신체비기구가 모자랄······ 수도 있겠구려.”
안 모자라! 내가 만들어둔 회역기만 5개가 넘고 튼튼한 대역기봉이 여섯 개이며 공령(플레이트)을 합치면 톤 단위가 나오겠지. 다채로운 기구가 부족하지만 내 집이 입신체비장은 아니지 않는가.
아내의 안내를 받아 변한 집을 돌아보는데 어느새 다섯 살이 된 진성이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고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날 회임한 것이 분명한 딸 인진이가 아장아장 걸어와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아부지 다녀오셨서요.”
자식들을 양손에 안아 드니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역시 한양이 최고고 가족이 최고니까 앞으로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조선 팔도에서만 돌아다녀야지. 그런데 후원에 놓인 입신체비 기구 중에 처음 보는 물건이 보인다.
현대에 보디빌딩을 몰라도 동작은 아는 버터플라이. 팔을 ‘ㄴ’ 자로 만들고 가슴을 향해 조이는 운동에 쓰이는 기구인데 이론은 있어도 시행할 이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확흉압(덤벨 플라이)라고 훨씬 좋은 운동이 있으니까.
“이건 누가 만든 것이오? 보아하니 빼어난 장인이 손을 쓴 것이 분명한데.”
“제가 만들지는 않고 이웃이 만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인근으로 이사 오신 율곡 선생님께서 낭군님께서 돌아오시길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지요.”
지금 아내가 뭐라 했지? 이이가 인근으로 이사를 와? 후원에 툇문이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라는 듯이 문이 열려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고 문을 여니 관료들 모두가 후원에 주안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조로 부임하여 집을 옮겼지. 이현 자네와 함께 입신체비의 새 길을 만들려 하였는데 마침 좋은 사람도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입신체비귀신 이이가 내 이웃이라고! 본래 하급관료 두 명이 사이좋게 나와 대화도 나누고 반찬거리도 나눴는데 이 무슨 끔찍한 일인가. 하지만 이이는 자랑스럽게 기구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집이 아직 정돈되지 않은 것 같아 조금 힘을 써봤다네. 내 집도 자네의 집 옆에 두었는데 후원을 이어두면 서로 학문에 대해 논하기도 편할 것이 아닌가.”
“후원이 넓다 하였습니까?”
“사실 집 두 개를 사들여 합친 다음 후원을 만들어 자네의 집과 이어버렸지. 모친께 자네의 이야기를 전하니 평생을 어울려 살 사람이라며 은자를 잔뜩 보내오셨네.”
이이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쉬운 일인가? 아무리 옆의 두 집이 작은 편이라 해도 합치면 은자 오백 냥, 정3품 당상관의 4년 어치 연봉이다. 개수비용을 합치면 훨씬 늘어났겠지.
이이의 외가가 강릉 일대에서 손꼽히는 집안이라 했는데 이런 일을 덜컥 시행할 수 있다니 대단한 일이지만 불안함이 밀려왔다. 잠깐 신사임당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올해가 정묘(丁卯 - 1567년)년이며 자당(慈堂 - 남의 모친의 높임말)께서는 갑자(甲子 - 1504년)년에 태어나신 분이니 환갑이 넘으셨습니다. 하온데 이렇게 거금을 쾌척하시다니요.”
“내 외가는 풍족한 데다 모친께서는 내 이야기를 듣고 기력이 날로 늘어나 얼마 전에는 도성으로 올라오셔서 회화 하나를 내 집에 남기고 내려가셨다네. 그러니 염려하지 말게나.”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적어도 두 달 이상의 장기 휴가를 받아 천천히 몸을 추스르며 쓸데없이 붙은 지방을 절제할 마음을 먹었는데 이이가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울적한 기분을 이기려 술도 마시고 음식도 먹으니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것 같아 살 것 같았지만 이이의 집 후원에 전시된 입신체비기구를 쳐다보니 속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였다.
“불행한 일이지만 앞으로 입신체비의 새 길을 열 방도가 생겨서 다행이라네. 자네가 애단현에서 삼 년간 지내는 동안 입신체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
“불행한 일이고 변화라 하였습니까?”
“자네가 애단현에 파견된 직후 예진원 대제학인 순흥군 대감의 후임자이자 장손인 진안군 대감이 백호풍(통풍)으로 인하여 차기 대제학의 자리에서 물러났다네. 이후에는 몸을 추스르는 데 전력을 다한다 하였지.”
그 양반 통풍이었어? 생각해보니 권율도 통풍이라 의심하였고 외상도 없는데 발을 절룩거렸으니 엄청난 인내심으로 병증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이의 말을 듣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진안군은 외동아들이기에 후임자가 없었네. 결국 주상전하께서 차기 예진원 대제학으로 조카인 이균을 순흥군 대감의 양자로 두게 하였지.”
“이균이라 하셨습니까? 그자는 제가 알기로 무관이었는데요. 더군다나 집안이······.”
“젊을 적에 난행을 벌인 일을 예의주시하고 있기에 앞으로 오 년 동안 철저히 가르치고 예진원 대제학의 업무를 담당하라 명하셨네. 다만 한 번이라도 실수를 저지르면 즉시 파면할 것이라 하였지.”
난행이라 해도 개성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임꺽정에게 두들겨 맞아 사경을 헤맨 일이지만 위치가 위치인지라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이는 술이 거하게 오른 얼굴로 기구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하지만 진안군 대감의 지식은 나에게 전해졌다네. 앞으로 고립운동(단일 관절 운동으로 근육의 심미성과 크기에 관여한다)이라 칭할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였으니 이를 연구해 보세나.”
기구들의 면모를 보니 시험용 기구들이 태반이요 하나같이 내 몸을 부위별로 작살 낼 용도가 분명하기에 소름이 돋았다. 고립운동은 영직이가 난이도가 끔찍하고 자극이 출중하다 했던 운동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