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295화
2부 5장 4화 고통의 시작
산성을 강화할 방안은 차고 넘치지만 예산과 인력 모두가 부족하다.
애초에 나에게 주어진 인원은 한정되어 있고 예산도 지방 관아에 쌓여있던 여분의 곡식이 전부이다.
평소에는 지독하게 힘든 업무를 담당하거나 내가 업무를 힘들게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몸이 고생할 뿐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 아닌가.
정말 이게 전부인지 물어보니 군관들이 심드렁하게 답하였다.
“여기가 외방에 속하여 해구들이 밀려오거나 요동 도적들이 침략하는 고장도 아닌데 성을 굳건히 쌓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산성을 증축해도 십 년쯤 지나면 장마로 쓸려 내려가거나 흙이 쌓여 다시 보수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임진왜란이라는 네 글자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수비에 힘을 보태면 좋은 일이지. 어차피 보수공사를 하려면 산성을 한 바퀴 돌아봐야 하니 훗날의 개수 계획을 미리 세워두면 나쁘지는 않아.”
“부수찬 나리! 병졸들을 모두 소집하였으니 명령을 내리시지요!”
어느새 병사들이 모두 도착하였다. 밖으로 나서니 나에 대한 악명을 듣고 겁에 질려 있어 가엾고 딱한 노릇이 아닌가.
나도 일을 많이 시킬 생각은 없으니 간단한 명령만 내렸다.
“무너진 장소가 어설프게 내탁(內托: 밖을 돌로 쌓고 안을 잡석과 흙을 다져 내부를 채움)을 시행한 결과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이를 다시 쌓으면 좋지만 약간 손볼 구간이 있소.”
“약간 손볼 구간이 있다 하셨습니까?”
약간이라는 말에 병졸들은 어깨를 흠칫거리며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약간이 성을 다시 쌓으라는 의미로 이해한 것 같은데 정말 약간이다!
병졸이 패용한 보총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산성을 천 년 가깝게 보수하여 사용한다 하였소. 당시에는 보총도 화포도 없었지만 이제는 보총과 화포를 사용하는 시대가 아니오.”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화포에 무너지지 않도록 산성을 두껍게 쌓을 생각이시라면 불가한 일입니다.”
“보총과 화포를 쏘기 편하게 여장(女墻: 성 위의 담장)을 종전보다 높게 보수하며 보총을 사용할 총안(銃眼)을 만들고 적을 쏘기 편하게 능선의 잡목을 제거하면 될 일이오.”
생각 같아서는 성 전체를 모조리 개수할 마음이 있었다. 당장 입구에 적의 침입을 방지하는 치성도 쌓고 누각도 몇 개 만들어 화포를 사용할 공간도 만들어둬야지.
하부 능선을 모조리 깎아서 성벽의 실제 높이를 두 배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지. 아예 공격할 엄두도 나지 않게 만들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참아야겠다.
내 말을 들은 군관들은 병졸들의 등을 떠밀면서 명령을 내렸다.
“부수찬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였는가? 여장이 무너진 곳이 많으니 다시 쌓으며 총구를 내밀 구멍을 만들면 쉬운 일이 아닌가!”
“여기서 서로 보총을 쏘아 교전을 벌이는 일을 상상하여 보게. 상반신을 훤히 드러내 보총을 쏘면 성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군관들은 내가 많은 일을 시키지 않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현장으로 나가서 공사 내용을 지시하였다.
나도 여기까지 와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킬 이유도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각지의 산성에 머무는 보름 동안 산성의 도면을 작성하고 기본적인 방어계획을 작성하면 훗날 도움이 될 것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적의 침략이 발생할 것 같으면 몇 년에 걸친 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니까.
이후 육 개월에 걸쳐 각지의 산성을 보수하라 명령을 내리고 도면을 작성하여 훗날을 위한 증축 계획을 세워두었다. 이를 보고하려 했지만 또 일감을 늘린다고 잔소리를 듣기는 싫었다.
결국 이번 일은 묵혀뒀다 나중에 풀어놓기로 정했다.
작성한 도면을 손으로 베껴 제출하고 원본 도면을 집에서 작업하여 서적 하나를 만들었다.
제목은 수성전수방략(守城戰守方略)이면 적당할 것 같군.
* * *
업무가 끝난 11월에 도성으로 돌아와 보고를 마쳤다. 조만간 현감으로 발령받으리라 예상했지만 발령 대기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내 발령 대기는 내년 6월까지 연장되었다.
이국형의 아래에서 잡무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이는 나에게 대놓고 내수린을 배우자 하였다. 처음에는 완곡히 거절하였지만 한 달쯤 지나자 이국형조차 나에게 내수린을 배우기를 권하였다.
상관도 허가했고 나를 제자이자 친구로 생각하는 이이의 눈빛을 보니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마포나루 인근에 위치한 전문 내수린 시설에 가서 내수린장을 하나 빌렸다.
“첫 연습이니 기초적인 기술을 거는 일부터 배워야지. 휴일을 빼앗아서 미안하지만 자네에게 절실한 일이 내수린이니 내수린장 비용은 내가 내겠네.”
이황의 제자로 있으면서 내수린을 배운 적은 있다. 기초적인 접수 개념을 배웠으며 간혹 이황이 불러온 내수린꾼에게 기술을 걸어본 적도 있었고.
그래 봤자 아주 기초적인 내수린을 배운 것이 전부였다.
이황이 말하기를 ‘언쟁으로도 삼대운동으로도 해결이 나지 않으면 내수린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라며 기초라도 배워두기를 권했지만 이이는 달랐다.
갑자기 달려들더니 하늘이 번쩍하고 뒤집혔다!
“자네가 조만간 내수린을 행할 것인데 철저히 배워둬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왜 내가 내수린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이이가 쏜살같이 날아올라 전신투(바디프레스)를 날린단 말인가!
몸통과 몸통이 부딪히자 격통이 밀려왔다.
“크어으어어어억!”
“자네만 아픈가! 나도 아프다네! 소룡식 입신체비의 약점이 몸의 군살을 쏙 빼내어 충격에 약한 것인데 피멍이 들겠지만 조금 참게! 다음은 배신락(백 바디 드랍) 연습일세!”
내수린을 얼마나 하냐고?
입신체비를 배워서 진로를 정한 전문 내수린꾼이 대다수의 내수린을 시행하지 유생들은 내수린을 익혀두고 하는 경우가 없다 들었다.
하지만 이이는 눈에 불을 켜고 나에게 배신락을 날리고는 말했다.
“외방 관료로 부임할 적에는 두 시기만 있다네. 유월과 십이월인데 자네는 십이월에 발령받지 아니하였으니 유월에 북방으로 발령받을 것이네.”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일단 배신락 받으십쇼.”
이이의 상대적으로 가벼운 몸을 뒤로 훌렁 넘겨 버리니 쾅 소리가 나기 무섭게 온몸을 튕겨 벌떡 일어나서 나에게 기술을 걸었다.
어마어마한 민첩함을 자랑하는 이이와 함께 내수린을 연습하니 정신이 없다!
결정적으로 우리 둘 다 지방을 절제해서 몸이 딱딱하니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옛날 몸이었으면 지방이 충격을 흡수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바닥에 누워 헐떡거리니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그만하시오, 이러다가 몸이 상해 내일 관청에 나갈 수나 있겠소?”
순흥군의 동생이자 내수린꾼으로 명성을 떨치는 창원부정(副正)이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만 진하게 우려낸 차를 건네주며 쉬라 하였다.
온몸에 피멍이 들었는데 지방이 적으니 시퍼렇게 몸이 변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내수린을 열심히 배울 이유가 대체 뭘까. 내수린으로 실력을 겨루는 일은 극히 드물며 대부분의 내수린은 전문가인 내수린꾼과 함께하니 접수만 열심히 익히면 충분하지 않은가.
갑자기 이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친구가 북방으로 발령받을 예정이라 혹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혹여나 경원이나 심원(深原: 유주노사할린스크)라면 모르지만 북방의 변두리에 발령받으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뭐? 지금 북방이라 하였소? 그렇다면 내가 나서서 가르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최소 삼대운동 900근은 하고 남을 체격의 창원부정이 내수린장 위로 올라왔다.
이이와 어울려도 버거운 상황인데 몸무게가 한 배 반은 나갈 창원부정이 내 상대라니!
창원부정은 달려들어 허리를 안아들고 몸을 메쳤다. 폭락(파워 밤)에 당하는 순간 팔을 내리쳐 충격을 완화하였지만 등에서 쓰라린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팔꿈치가 내리 찍혀 몸을 굴려 피했다.
이건 내수린이 아니다!
“이건 법도가 아닙니다! 내수린은 본래 대화를 나누고 기술을 걸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게 북인들이 행하는 내수린이라네. 내수린의 역사에 대하여 알고는 있는가?”
“수양대군께서 달자들의 우두머리인 대총 한을 제압한 무술이며 이를 변용하여 역사를 재현하는 연극으로 만든 것이 내수린이라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북방은 뭔 소리고 사람 죽이려고 실전에 가까운 레슬링, 아니, 내수린을 하냐고! 하지만 창원부정은 고개를 저으면서 내 팔을 부여잡고는 말했다.
“대총 한을 제압할 적에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여진족이 있었고 이들이 훗날의 북인이 되었다네. 내가 젊은 시절 내수린을 퍼뜨리면서 이들을 교정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였지.”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다시 몸이 날아가 바닥에 메다 꽂혔다. 통나무같이 두툼한 다리를 피하지 못하고 배를 맞아 몸을 새우처럼 말았는데 허리를 잡더니만 집어 던진다!
끔찍한 고통에 바닥을 굴러다니는데 더더욱 냉정한 말이 이어졌다.
“이게 북인들이 행하는 내수린이라네. 그들은 내수린에 미쳐있으며 내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청년이고 장년이고 내수린을 행하다 몸이 상하는 이가 열 명 중 한 명은 된다네.”
“몸이 상하다니요! 내수린의 접수는 어디에 팔아먹었습니까!”
“접수를 알려주기 전에는 열 명 중 세 명이 몸이 상하였는데 많이 나아진 것이네. 북인들은 수양대군께서 행한 과격한 내수린을 즐기니 이마저도 훌륭한 성과이지”
“제가 내수린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내수린꾼을 불러 가르치면 될 일이지 않습니까!”
이건 뭔 미친 풍속이야!
맨날 말을 타고 다녀서 하체를 단련하고 활도 쏘고 다녀서 상체를 단련한 무인이나 마찬가지인 여진족, 아니, 북인이 절제도 모르는 과격한 내수린을 즐긴다고?
그럼 전문 내수린꾼을 불러야지!
내수린을 대충 배워도 전문가와 함께하면 그럭저럭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했는데 창원부정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고 이이는 무덤덤하게 말하였다.
“작은 고장에는 내수린꾼이 오는 일이 적어 부임한 관료가 내수린을 행하는 일이 많다 하였네. 나도 쌍봉(현 중국 흑룡강성 쌍압산 시)현에 부임했을 적에는 한동안 내수린을 했었지.”
이이의 체격은 평범한데 내수린을 했다고? 이쯤 되면 북인 모두가 내수린에 미쳐 있는 이들이 아닌가!
혹시나 내가 큰 고을 인근도 아니고 험난한 변방에 발령된다면?
무수한 내수린의 요청이 이어질 것이고 여기서 제대로 배워두지 못하면 살인기술에 휩쓸려 골병이 들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몸을 혹독히 단련해 주십시오!”
“알겠네! 거기 짚단을 준비하게! 역차돌리기를 경험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창원부정은 정말 역차돌리기를 해버렸다!
수십 바퀴를 돌아 구토가 나오려는데 낙법을 실시하라는 말이 들려왔고 엄청난 충격과 함께 거대한 짚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다.
제발 내가 발령받을 장소가 대도시인 경원이나 심계인근이기를 빌며 잔업과 내수린에 매진하기를 반복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 * *
삼 년간 도성을 떠나 있어야 하니 집에 아내를 홀로 둘 수 없었다. 장인어른인 조식은 미리 찾아와 아내와 진성이를 처가에 보내라 하였고 아내도 이를 당연하다 여겼다.
문제는 내 집을 삼 년 동안 비워두는 것이다.
한옥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습기가 들어차 망가진다. 이런 경우에는 도성으로 올라온 초임 관료에게 집을 임대하고 약간의 돈을 받으면 되지만 가장 좋은 사람이 있었다.
[갑자년(1564년) 식년시 무과 합격자, 병과 2위 이순신]
본래 역사보다 십이 년이나 빠르게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것이다!
병과라 해도 전체 순위에서 14위이니 관직을 바로 수여받을 것이며 초임 군관은 도성에서 몇 년간 머물며 기초를 쌓는다 하였다.
다짜고짜 이순신에게 서신을 보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곧장 나에게 도성으로 올라올 것이라 서신을 보냈고 오월이 되자 내 부임지가 정해지고 이순신도 도착하였다.
“이현! 내가 당도하였다네!”
이순신을 만나지 못하고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나보다 약간 큰 신장에 어깨도 듬직하게 넓으며 짙은 눈썹이라니. 외모만 보아도 용맹한 장수의 모습이 엿보일 지경이라니.
물론 이순신은 아직 성웅(聖雄)도 아니며 스무 살의 초임 무관에 불과하다.
오래간만에 만난 이순신과 손을 맞잡으니 이순신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렸다.
“여해 자네는 어린 시절에는 당당하더니 왜 이리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가.”
“이현전의 학사로 명망이 자자하여 품계가 삽시간에 올라간 자네가 나를 추켜세우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지경이네.”
어린 시절의 천방지축 날뛰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겸손함과 중후함이 있다니 내가 상상한 이순신이 아니겠는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이순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하였다.
“내가 관상을 볼 줄 아는데 명장의 자질을 가진 이를 세 명을 보았다네. 한 명은 명국의 장수 척계광이요 다른 한 명은 벗이 된 권언신(권율)인데 마지막 하나가 여기 있지 않겠는가.”
이순신이 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훗날 일기에 ‘유성룡은 관상을 볼 줄 안다’라고 적힐지 누가 알겠는가.
방 안으로 들어간 이순신은 집을 둘러보더니 책장을 보고 멋쩍은 듯이 말하였다.
“서책이 참으로 많군. 자네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몰두하였는데 결실을 맺은 모양일세.”
“여기는 학문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네. 오랜만에 벗을 만났는데 자네가 살아온 이야기나 들려주게나.”
이순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향에 내려가서도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호되게 매를 맞았으며 이후 정신을 차려 서적을 읽고 배움에 몰두하였다고.
덕분에 지방 유지인 방진의 마음에 들어 열여덟에 혼인하였고 아직 자식은 없다 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이순신은 내 방 벽에 걸려있던 지도를 보더니만 불현듯 물어보았다.
“내 부친께서 백력(伯力: 현 하바롭스크)의 북방형무소에 근무하고 계신다네. 북방에 일에 대해 부친께 들은 바가 있는데 자네가 부임할 고장이 어디인지 궁금하군.”
“애단현이라 하였는데 이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일세.”
이순신의 아버지인 이정이 내 근처에 산다면 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눈을 부릅뜨더니 내 몸을 살펴보고는 염려스러운 말을 하였다.
“애단현이라 하였는가! 북방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하는 지역인데 어찌하여 자네가 그곳에 부임하였는지 모를 일이네!”
“여해 자네는 걱정도 많군. 내가 자랑은 아니지만 이현전에서 촉망받는 신하인데 어찌하여 나를 험지에 보낸다 하는가. 삼 년 동안 편히 쉬다 오라고 사람이 적게 사는 고장에 보낸 것이겠지.”
갑자기 사람이 찾아와 서신을 건넸다. 필적을 보니 외할아버지가 보낸 녀석인데 올해 아흔일곱이나 되셔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분이 왜 서신을 작성한단 말인가.
펼쳐서 읽어보니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혁아, 네가 애단현에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젊은 시절 내가 부임할 적에 소문을 들었는데 산군이 백성보다 많이 살고 겨울만 되면 다섯 자씩 쏟아지는 눈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고장이라 하였다.]
지금 뭐라 적혀 있지? 다섯 자나 쏟아지는 눈에 사람보다 호랑이가 많이 사는 지역? 사람이 적게 산다 했는데 이 무슨 소리야!
하지만 이어지는 서신을 보자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았다.
[그나마 군수로 부임할 적에 인맥을 만든 일이 있다. 나에게 보답한다 하였으니 이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경원 인근에서 야장(冶匠)으로 명성이 자자한 하마(蝦蟆: 현 러시아 라즈돌노예) 니(泥)씨를 찾아 이 서신을 전해주거라.]
평시 인맥이고 뭐고 깐깐한 모습을 보였던 외할아버지가 대놓고 인맥을 찾으라 하였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어지간한 일은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고 말하시는 분이니까.
여진족의 후손인 북인들은 나에게 시시때때로 내수린을 하자 제안할 것이요, 겨울만 되면 폭설이 내려 눈을 치우느라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보다 호랑이가 많은 지역이라니.
#작가의 말
작중에 나오는 애단현은 러시아의 달네고르스크이며 시호테알린 산맥의 한복판에 있는 광산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