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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293화 (293/573)

근육조선 293화

2부 5장 2화 세자와 함께(2)

아버지 앞에서 성형요새의 원리부터 기본적인 구조까지 모조리 다 설명할 수 있었다. 이걸 만드는 것이야 어마어마한 예산이 소모되고 실행해 본 적도 없지만 이론은 안다.

하지만 이황이 했던 말이 떠오르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더듬거리는 입에서 무언가 말이 새어 나오자 억지로 말을 돌리며 요새의 모형을 더듬었다.

“사방에서 뻗은 뿔로 화포를 쏘았다니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배운 서책에서는 장수인 이징옥이 용력을 발휘하여 적을 무찔렀다 하였습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북방을 흔들려 한 와라부의 달자들은 요새를 앞에 두고 겁에 질려 보름 동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지. 상세한 일은 이 서책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쉽고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측량과 관련하여 호되게 당해보았는데 대놓고 말할 멍청이는 아니지 않은가.

또한 이 시대의 충성심은 물론이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는 전제조건이나 다름이 없다.

아버지라고 해서 나에 대해 감싸준다고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이 요새는 여기서는 쓸모가 없다.

내가 병법서를 참고서적으로 읽어보았으니 하는 말이지만 요새는 대규모 병력을 차단하고 요격할 목적으로 세우지 소규모의 도적을 막는 일에는 큰 효과가 없다.

모르는 척 서적을 덮은 다음 물어보았다.

“이 요새를 세우는 것 대신 전조처럼 장성을 길게 두르는 일이 좋지 않겠습니까?”

“첫 계획은 장성을 두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술년에 명국의 장성이 유린당하고 북경이 공격받은 일 때문에 도적을 막기 힘들 것이라 여겨 계획을 선회하였지.”

“장성이 유린당하였다는 말씀이십니까?”

만리장성이 뚫려? 그거 잘 안 뚫리는…… 것도 아니고 나도 배운 것이 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토목의 변이라고 해서 명나라 군대가 몰살당한 일도 있었으니까.

알지만 아는 척은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아예 모른다고 하면 내가 배운 내용을 말하지 않는다 하여 아버지가 화를 내실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요새의 튀어나온 뿔을 짚으며 말했다.

“소자가 많은 지식을 쌓지 못하여 이 요새가 어떤 면에서 효험을 보였는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하니 궁금한 것이 있는데 요동 도적들은 어떻게 침략해 옵니까?”

“말을 타고 있는 이들은 일 할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보병이다. 간혹 명국에서 약탈한 보총을 소지한 이도 있으나 백 명 가운데 서너 명 정도만 보총을 쓰는 형편이다.”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니 말릴 이유가 떠올랐다.

이런 거대한 요새를 만들어 병사를 주둔하게 하면 당장에는 억제 효과가 있어도 묘사된 지형도를 보니 침략할 경로가 곳곳에 보였다.

하지만 요동에서 한반도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압록강을 건널 도하 준비가 필연적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은 소규모 산성의 다량 축성 외에는 없다.

마음을 정리하고 아버지에게 의견을 제시하였다.

“소자가 군문의 일에는 밝지 못하고 요새의 축성은 풍문으로만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실 적에 건물과 석축에 관련된 일을 알려주셨지 다른 일은 배우지 못했으니까요.”

“생각하여 보니 그렇구나. 그리하여도 네 재능이라면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인데.”

“산세가 험하고 주변을 관망하기 좋은 장소를 정하여 산성 여럿을 짓고 소수의 병력을 주둔시키면 될 일입니다. 도적들을 모조리 소탕할 수 없다면 이들이 내려올 때마다 짓뭉개면 충분한 일입니다.”

지극히 원론적인 말이었는지 아버지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놀라움보다는 권태감이 느껴지는 표정이니 그냥 책에서 배운 내용을 알려준다 생각하리라.

여기다 한마디를 보태 쐐기를 박았다.

“제 배움이 부족하여 하르빈에 세워진 요새가 어떠한 효험을 보이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은 있습니다. 이 요새는 적의 침략을 막는 일에 쓰이기 좋아 보입니다.”

“아직 젊은 네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하였구나. 하긴 네 나이가 올해 스물하나이며 관료 생활을 시작한 지도 일 년을 모두 채우지 못하였으니 괜한 질문을 하였구나.”

“소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하지만 축성에 관련된 지식은 계속 쌓아두어야 한다. 외방에 나아가면 사방에 도적이 들끓으니 제대로 된 고장을 건사하려면 옛 습속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넘어설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요새나 축성과 관련된 책을 잔뜩 주셨는데 이건 의주목사의 임기가 끝나니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여기신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리고 돌아오니 앞으로 수행할 업무 때문에 마음이 막막해졌다.

* * *

넉 달의 시간을 주었지만 석 달 만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측량 결과를 비교 분석하였는데 큰 오차가 발생한 경우는 없어서 가르침을 되새겨주는 일이 전부였으니까.

한양에 돌아와서 출근하자마자 세자가 이현전 앞에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하나같이 손에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으니 뛰어난 도공(圖工)이 분명하리라.

천연덕스럽게 웃는 세자를 보자 속에서 위산이 끓어올랐다.

“늦지 않게 돌아오셨구려. 생각보다 가르치는 일이 능숙하니 유 박사가 조만간 시강원에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겠소.”

“저도 사람을 가르치면서 배운 것이 많아서 점점 더 실력이 늘어났사옵니다. 오히려 뛰어난 이들이 지방에 많은지라 제가 놀랄 지경이었사옵니다.”

지방관의 면모를 보니 죄다 양반가의 서자나 얼자더라. 예전에는 칠 년 정도 북방에서 잡무를 하다 내려오면 서자나 얼자를 면천 받았다 하는데 풍습이 변하였다.

인력난에 시달리는 조선에서 칠 년 동안 외방에서 굴릴 이유도 없으니 생원시와 진사시를 열어주고 합격한 서자나 얼자는 십 년 동안 지방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면천해 준다 하였던가.

세자는 내 말을 듣더니 평판측량기를 매만지면서 말하였다.

“그러하면 잘되었소. 궁궐을 실측하여 도본을 만드는 일이 제법 고단할 것이나 이번 일을 마치면 주상전하께서 품계를 하나 올려준다 하였으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성은이 망극하니 제가 낯을 들 수 없사옵니다.”

“또한 성과가 좋으면 약간의 포상이 내려질 것이오. 아 잠시, 하나를 빼놓았구려. 너희는 어서 그 물건을 가져오너라!”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술이라도 하나 내려주려는 것 같았다.

세자는 기본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는지 간략한 경복궁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평판측량기라는 기물이 성 내에서 돌아다니면 번잡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오. 그러하니 외부를 먼저 재어 틀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소.”

“세자 저하께 말씀드리기는 송구하오나. 제가 여러 번 전답을 측량한 결과 외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각 전각의 위치를 명확히 하며 담장의 내부만 재면 외부의 틀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법이옵니다.”

“훌륭한 말이구려. 그나저나 내가 원하는 바가 있으니 일전에 강화에서 좋은 일을 행했더구려. 집현전의 사람들이 일전에 만든 도본을 가져왔소. 이 도본대로 주요 전각의 도본을 만들어주시구려.”

공포가 치밀어 오르며 팔다리에서 닭살이 돋아 올랐다.

세자가 내민 물건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내가 훈도시절 작성하였던 소비오래 사당, 아니, 소 비올레 성당의 복원 도면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집현전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였고 집현전은 이를 갈고 나에게 복수할 기회를 엿보았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나와 관련된 기록을 홍문관에서 찾아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부담을 가지지는 마시오. 고작 한 달 동안 도본을 완성하였다 했는데 사람도 여럿 붙여줄 것이니 전각 열두 개의 도본이면 여섯 달에 끝날 일이 아니겠소.”

소 비올레 성당은 망가진 성당을 내 마음대로 설계해서 도면만 그렸으니 쉬운 일이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건물의 도면이라면? 당연히 부재 하나하나를 재고 그대로 옮겨서 정밀실측도면을 작성해야 한다!

지붕 곡선부터 서까래의 치수를 비롯한 건물의 모든 크기를 하나하나 작성해야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절망하는 와중에 세자는 어린아이는 아니고 동생으로 보이는 꼬맹이를 데려와서 말하였다.

“본래 일을 시행할 적에는 내가 같이 감독해야 하지만 조만간 방문할 명국의 장수 척계광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하니 주상전하와 논의할 것이 있소. 그러하니 내 동생 진해대군과 함께 놀아주시구려.”

“제가 행할 일은 제법 험난하옵니다.”

“진해대군에게 이야기는 해두었소. 궁궐이 번잡하더라도 자선당(왕세자의 거처)을 먼저 도본으로 만들면 될 일이 아니겠소. 집기는 모조리 마당에 두었으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이 코흘리개…… 세자의 동생이자 잘하면 왕이 될지도 모르는 꼬맹이와 당분간 업무를 진행하라니 이건 아이를 보라는 말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숨을 억눌러 삼키고 사람들을 인솔하여 자선당으로 향하였다.

* * *

동궁에 위치한 입신체비장을 이용할 수 있는 이는 왕실 종친에 한정되어 있었다.

한 나라의 지존인 임금은 당연한 일이며 세자를 비롯한 왕의 자식들 그리고 간혹 입신체비장에 방문하는 종친이 전부였다.

하지만 입신체비장에 원탁이 들어오면 민감하지 않은 국가 시책에 대해 논하는 자리로 변했다.

오십 세가 넘은 노령의 나이에도 땀에 흠뻑 젖은 임금 이호는 서신을 읽고는 세자에게 건네주고 말했다.

“의주목사 유중영의 장계를 보니 유 박사의 자질을 알 수 있더구나. 네가 한번 읽어보아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의 차남인 유성룡은 나이가 어려 군문의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하오나 시야가 넓고 영민하니 이는 훌륭한 자질이 깃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중략)]

[신이 욕심을 내어 하르빈에 있는 요새를 두자 하였다가 대소신료들에게 반박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나온 결론에 근접하였지만 상세한 일에 대해서는 모르니 이는 경험이 부족한 것이 분명하옵나이다.]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상세한 일을 정하려면 경험이 필요했다.

세자 또한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으니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였다.

“역시 나이가 너무 젊사옵니다. 안면만 보면 서른 남짓으로 보였는데 실지로는 스물하나에 불과하니 경험이 일천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렇지. 양현전에서 수많은 과업을 달성한 이들도 서른 무렵에야 자질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으니 이는 경험이 중요한 것을 증명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세자 이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나이가 열다섯에 불과하니 충분한 경험을 쌓지 않으면 준비된 왕이 될 수 없다는 조언을 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왕위 계승과 관련된 문제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호가 상왕의 자리에 올라 왕위를 양위한 이후에 세자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대신을 정하는 일은 끝났지만 실무직 관료가 절실했다.

하지만 유성룡은 가장 쓰기 어려운 신하였다.

왕위에 오르고 스무 해가 넘게 지난 이호의 입장에서도 그의 끝없는 재능은 한계를 예측할 수 없으며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참으로 어려운 사람이 아니겠느냐. 내가 이이를 궐에 들였을 적에도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어떻게든 자리를 찾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성룡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모르겠구나.”

“소자가 보기에는 세상 풍문을 익히는 일이 중요한 것 같사옵니다. 재능이 부족한 이는 남는 재능을 찾으면 되겠지만 유성룡에게 절실한 것은 경험이 아니겠사옵니까.”

“건축에도 자질을 보이는 이가 토목과 축성에 자질이 없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옛적 김사행(경복궁의 설계자)이 그러하였고 박자청(창덕궁의 설계자)도 그리하였지.”

조선에는 원칙이 있었다.

옛적 청해군 한명회가 우연한 기회로 항해에 대한 재능을 보여줬듯이 숨겨진 재능을 개화하려면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다니게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렇다고 힘든 업무를 주면 젊은 관료가 이겨내지 못할 것이요, 지나치게 중요한 일을 주었다가는 편애라 여긴 신하들이 탄핵을 감행할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호는 좋은 방안을 마련했다.

“당분간 군축을 행하며 내실을 다질 것인데 지방군의 수효가 줄어들 것이다. 네가 일전에 지방군의 수를 급박하게 줄이면 항의를 할 것이라 하였지.”

“그렇사옵니다. 병졸들이 땅을 구하여 농사를 재개하려면 일 년 정도는 걸리는 일이옵니다.”

“그러하니 각지에 있는 산성을 보수하고 증축하는 업무를 내려 일 년의 시간을 보내게 하면 어떻겠느냐. 본디 병졸들이 행해야 할 일이나 이 자리에 유성룡을 보내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연의 목울대에서 침이 꼴깍하고 넘어갔다.

산성을 보수하고 증축한다 하였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각 지역의 산세가 다르고 토질도 다르며 기존에 쌓은 산성의 형태나 특징도 다르다.

더군다나 고생에 비해 큰 치적도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산성의 보수는 해당 고장에 흉년이 들어 농사가 망했을 때에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자선사업에 가까운 일이다.

큰 문제를 해결하여 기뻐진 이호는 벌떡 일어나며 말하였다.

“몇 달 동안 야근을 행하며 몸이 축날 것인데 산에 올라가 신선한 공기를 쐬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이후에 적당한 자리를 마련하여 산에 익숙하게 만들면 충분한 일이다.”

“생각하여 보니 유성룡도 조만간 외방에 나아갈 시기가 되었습니까. 아바마마께서 정하신 장소는 어디인지 궁금하옵니다.”

“애단현(현 달네고르스크)이 적당할 것 같구나. 산군이 많아 험한 고장이지만 첩첩산중이니 현감을 마치면 아무리 험한 산이라도 익숙해질 것이 아니겠느냐.”

애단현은 인구가 200호에 불과한 현이라고 불리기도 민망한 촌락이었다.

그나마 현이라 불리는 이유는 원동산(아이신기오로 충샨)이 사금을 찾아 나서다가 납과 주석을 발견하고 수십 년이 지나 광산이 생겨나서 촌락이 아닌 현이라 불렸다.

하지만 그만큼 험난한 고장이다.

몇 년 전에는 현감이 호랑이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었으며 이십 년 전에는 폭설이 내려 현청이 붕괴되어 여럿이 사망하였다 했었다. 유성룡이 겪을 고난을 상상한 이연은 아버지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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