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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292화 (292/573)

근육조선 292화

2부 5장 1화 세자와 함께(1)

완연한 봄이 되었지만 나무에 물이 오르건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건 내 기분은 전혀 좋지 않았다. 양송정에 나오라는 이황의 말을 듣고 한 달에 네 번밖에 없는 휴일을 쪼개 나왔더니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네가 능력이 뛰어나도 화를 자초하는 법을 모르더냐! 내가 눈치를 줘도 드러내고 앉아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구나! 오차를 조금 크게 만들어야 네가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고 보니 이황이 세자와 함께 온 일 자체가 이례적인 경우였으며 내 도면에 연필로 선을 덧대어 그린 것도 나를 돕기 위한 일이었다.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정확도를 떨어뜨려 세자와 주상전하의 관심을 줄이라는 소리였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이황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젊은 시절에 공명심으로 날뛰다가는 제 명에 죽지 못하고 궐에 얽매이는 것이다. 옛적 청해군 한명회가 그리하였고 근래에는 문경(文景: 남곤의 시호) 대감이 그리하였지.”

“청해공은 들은 적이 있지만 문경대감께서는…….”

“여든이 다 되어서야 관직에서 은퇴하셨다. 그나마 다행인 일은 궁궐의 회화를 그리기 이전에 몇 달을 쉬다 올 수 있게 배려하실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감내하여야지 별수가 있더냐.”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는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한명회의 처절한 관료생활이야 책으로 읽은 바가 있었지만 여든이 다 되어서야 관직에서 은퇴하였다고?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잘못하면 나도 은사인 회령군처럼 일흔까지 현직에서 정승생활을 하고 모자라 여든까지 자문위원 노릇을 할지도 몰랐다.

돌아오는 길에 절로 푸념이 나왔다.

“애초에 현대랑 중앙집권 기반의 군주정을 동일하게 놓은 것이 실수였어. 이 시대의 관료들이 현대인처럼 행동할 이유가 없었는데.”

내가 이 꼴이 된 이유는 간단히 말해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이 시대 관료들의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심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평범한 직장인이라 대했다.

현대라면 회사원은 충성심보다 동료애가 강하니 서로 어르고 달래서 일감에 치이지 않게 보호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아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니 푸념이 절로 새어 나왔다.

“임원들 친인척쯤 되는 충성심이 이 시대 관료의 표준이라니.”

이 시대에 관료가 된 이들은 종묘사직에 대한 충성심이 전제로 깔려 있으며 군주가 연산군과 같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사람이면 몰라도 올바른 군주면 이 충성심은 절대적이다.

나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궁궐을 재어 보겠다고 말했고 이국형은 이를 여과할 이유가 없으니 주상전하에게 보고하였다.

당연히 평판측량으로 궁궐을 잴 정밀도라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충분하다.

하지만 직접 나설 수 없으니 세자의 업무 능력을 기르기 위하여 나를 시험하라 했을 것이다.

현대라면 이국형이 다른 곳을 재어서 눈에 띄지 말자 말했겠지만, 이 시대에는 자신의 몸만 건사하는 일에 벅차다.

결국 사흘의 휴가 동안 모든 이들이 내 소식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자신의 몸만 건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나마 스승인 이황도 귀띔을 해준 것이 전부이니 답답하여 푸념이 새어 나왔다.

“이런 인외마경 같은 궁궐이니 주변 관료부터가 적이네. 일 하나하나 하면서 눈치를 보고 해야 해? 서러워서 빨리 품계를 올려 아래 애들에게 떠넘기든가 해야지.”

내가 만약 왕의 친인척인 종친이거나 최소 당상관 이상의 고위관료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있었겠지만 나는 정7품의 관료일 뿐이다.

이번에 경복궁의 배치도 아니 회화를 그리는 이유는 회화로 묘사된 궁이 아닌 머나먼 하늘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온전한 궁궐을 보고 싶어서라 하였다.

하지만 궁궐에 돌아가니 의외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유 박사께 주상전하의 명이 내려왔다네. 지정된 관원들에게 평판측량에 대해 가르치고 넉 달의 시일을 줄 것이니 의주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며 가르치라 하였다네.”

이국형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으니 앞으로의 고난을 혼자 감내할 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으리라.

슬쩍 장계를 살펴보니 넉 달은커녕 두 달이면 해치울 일이 적혀 있었다.

이황에게 들은 바로는 큰 사업으로 고난을 겪을 관료는 앞뒤로 한 분기 정도는 휴식할 시간을 준다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의주목사가 아버지인데 한번 만나보고 오라는 소리겠지.

* * *

이현전의 관료들이건 공조 관료들이건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고 발뺌하던 것과 달리 현장에 있는 이들은, 정확히는 지방에 있는 하급 관료들은 평판측량에 대하여 삽시간에 배웠다.

물론 현장실습을 통해 배우니 나도 지방관들도 현장에 나와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이들이 밭에서 낑낑거리는 동안 원두막에 제도판을 세워두고 장부를 도면으로 변환하고 있었다.

“나리! 박사 나리! 이거 후 시점과 전 시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금방 가겠소이다!”

다시금 이론에 대해 철저히 설명하니 멀뚱멀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평판측량은 세자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량하였기에 많이 쉬워졌지만 여전히 새로운 개념이니 다시금 설명을 시작하였다.

“명주실의 한도는 이백 보이니 측량기를 세울 적에는 가급적 일백오십 보 이내의 거리를 두어 세워야 하오. 그러하니 처음 점을 정하고 다음 점을 미리 정해둬야 하는 법이 아니겠소.”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각도는 어찌 정하는 겁니까?”

“처음 평판을 세울 적에는 기준점 하나를 정하여 방향을 두고 두 번째로 평판을 세우면 처음 점에 실을 늘어트려 그곳을 정북으로 정하시오. 이를 시준(視準)이라 하는 것이오.”

설명을 마쳤지만 왜 북쪽이 마음대로 정해져? 라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각도계에 북이라 새겨진 한자를 손톱으로 박박 긁어 지워 버렸다.

사람들을 그제야 감탄하며 말하였다.

“아하 나침반에는 북이라 새겨져 있었기에 저희가 착각하였습니다. 듣고 보니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를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육방관속도.

가까스로 소과에 합격해서 하급 지방관으로 있는 이들도 닷새쯤 가르치면 평판의 사용법을 익혔으니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현전에 있는 이들 대다수가 하루만 연습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씁쓸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농부들이 우리를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현전에 오신 나리께 송구합니다만 저희가 멋대로 은결을 늘렸으니 어떠한 벌을 받게 됩니까?”

“엄밀히 말하면 농토를 명확히 하려는 것이오. 은결이 많으면 고된 일은 있을 것이나 형무소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다시 보조선을 그어가며 땅을 삼각형으로 나누어 계산을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주판이 존재하였지만 산관들은 산가지를 사용해서 계산하니 주판 사용법은 스스로 터득해 버렸지.

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판알이 움직이며 삼각형의 면적이 하나씩 계산되었고 면적이 합산되었다.

측량한 도면의 오차를 감안하여 최종 면적에서 2할을 공제하니 억울한 일은 적으리라.

계산이 끝나고 농부의 이름을 불렀다.

“유순익 거기 있소? 지금 막 면적이 계산되었으니 나오시오. 기존 양안에는 소유한 땅이 삼 등전 밭으로 한 결 하고 네 마지기라 하였는데 은결을 포함하여 계산하니 한 결에 열세 마지기이구려.”

“아홉 마지기가 늘어났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늘린 땅은 훨씬 부족합니다!”

“도본을 보니 기껏해야 여섯 마지기를 늘렸을 것이나 기존의 땅이 작게 측정된 것이오. 이를 감안하여 장계가 전해질 것이나 큰 벌은 내리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농부를 보니 쓴웃음이 밀려왔다.

내 앞에서는 이렇게 굴어도 내가 돌아가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일이 태반이었으니까.

지방관은 몰라도 밭을 경작하는 농부는 자신이 소모하는 종자의 양을 계산하면 자신이 소유한 농지의 넓이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결국 뻔히 알면서 수십 년 동안 대대손손 토지세를 절감한 것이다.

물론 이들을 일일이 징계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이니 벌을 내릴 순 없고 봉사활동을 내려야겠지.

주저앉은 농부에게 호패를 내놓으라 하였고 도면 귀퉁이에 호패의 번호가 찍혔다.

죽을상을 한 농부에게 통지를 내렸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세 가지 방안을 마련하셨소. 첫 번째는 늘어난 토지를 나라에 파는 것이요. 두 번째는 늘어난 토지에 대해 지세를 두 배로 내는 것이지요.”

“그러하면 저희는 굶어 죽습니다!”

“마지막 방안은 묘목 구백 그루를 인근 숲에 심는 것이오. 아전들이 나와 일을 소홀히 하였는지 알아볼 것이니 제법 고된 일일 것이 아니겠소.”

현재 조선의 건국 초기와 비교하면 산림이 제법 훼손되었다 하였다. 거대한 목재는 대만과 연해주에서 가져올 지경이고.

결국 농부들에게 벌을 내리는 대신 노동력을 받아내기로 정한 것이다.

벌이 아니라 생각한 농부는 환호성을 지르며 돌아갔다.

생각보다 땅이 많이 늘어나고 있으나 간혹 땅이 줄어드는 경우도 생겨났다. 지금 계산한 토지가 그런 사례였다.

“장유국 당신의 땅은 두 결 네 마지기라 하였는데 두 결보다 약간 적소이다.”

“네? 그러하면 저는 네 마지기 어치의 지세를 이유 없이 납부한 것입니까?”

“은결 세 마지기를 포함하여 두 결이니 실제로는 일곱 마지기의 지세를 더 낸 것이오. 이런 경우에는 십 년 동안 과도하게 부과된 지세를 면하기로 하였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허탈한 표정의 농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호패의 아랫부분을 찍어서 서류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농부의 흥분한 표정을 보니 내 앞이라 환호성을 참나 본데 갑자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망할 최가놈아! 진동이가 혼약을 맺으면서 혼수 대신 땅을 바꾸기로 하였는데 당시에는 두 결 네 마지기라 하였지 않더냐!”

“나는 모를 일이야! 증조부님부터 대대로 두 결 네 마지기라 하였는데 고스란히 믿어야지!”

“땅 파먹고 사는 놈이 뭘 몰라! 생각보다 소출이 형편없다 하였는데 두 결을 주고 그보다 못한 땅을 받았어!”

농부들이 멱살을 잡고 뒤엉켜 주먹질을 하였고 내가 끼어들어 둘을 갈라놓았다.

씩씩거리는 두 가장의 모습을 보니 가정이 무너지고 농촌 사회가 황폐화되겠지만 이후 벌어질 송사는 내 책임이 아니다.

* * *

북쪽으로 올라올수록 조금씩 보이던 농가들이 사라졌다.

북쪽으로 갈수록 농사를 짓기 힘든 일은 당연하지만 이 시대에는 수확량이 5할 이상 증가한 사종이라는 밀이 있으니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고작 정7품 관료인 나를 위해 정주목사는 정예병사인 훈련원 출신 병졸 세 명과 일반 군관 스물을 붙여 호위병을 꾸려주었다.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구려. 옛적에는 왜구들이 날뛰었다 하는데 요동도적들의 기세가 그렇게나 험악하오? 기껏해야 유생에 불과한 이를 습격한단 말이오?”

“요동은 유월(음력 6월)에 보리를 수확합니다. 지금 이 시기는 보리의 수확이 늦은 도적들이 날뛰고 있으니 침략도 빈번하지요. 저쪽을 보시지요.”

해안가에는 무언가 타들어 간 흔적이 있었는데 산천을 유람하라면서 받은 작은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시체 여럿이 뒹굴고 배가 불탄 흔적이 있었다.

군관은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보탰다.

“보름 전에 요동 도적들 서른 가량이 짓쳐들어와 농가를 약탈하였습니다. 저희가 늦지 않게 출두하여 도적들을 몰살시키고 배를 태웠기에 망정이지요.”

“그러하면 도적들이 얼마나 많단 말이오.”

“요동 일대의 인구는 오십만 명이 넘지만 대다수가 도적이라 하였으며 기세가 흉흉합니다. 몇 년 전에는 요동총병관이 전사하여 그의 아들인 이성량이 대를 이었다 하였습니다.”

그럼 적게 잡아도 오천 이상의 도적이 요동에 들끓으니 이를 막아내는 의주는 요새도시나 마찬가지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수많은 망루는 물론이요, 기병대가 훈련을 하는지 뿌연 먼지가 치솟아 오르더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 전령을 보내놓길 잘했습니다. 자고로 오위에 속하는 병졸이 나서야 하는 법이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대충 보아도 서른 기, 아니, 마흔 기 정도인데 기세가 어마어마하다.

내가 타고 있는 말도 궁궐에서 빌려온 것이라 부족함이 없는데 어느새 도열하여 나를 맞이하였다.

“유 박사께서 이현전에서 명을 받고 오셨다 들었습니다. 저는 호분위(虎賁衛)에 속한 사정(司正: 정7품 군관)인 이균이라 합니다.”

“바…… 반갑소. 그런데 이균이라 하면…….”

이균이면 임차손을 통해 들은 이름이고 이름은 같지만 선조는 아니다.

수양대군의 후계자는 손자부터 배우자가 다를 것이니 유전적으로 따지면 머나먼 친척이리라.

문제는 상대를 비롯한 기병들의 모습이었다.

마갑을 씌운 거대한 흑마를 타고 있는데 둔탁한 사지를 보니 유럽산 품종이다. 착용한 갑주도 두정갑이 아닌 조선에서 만든 것이 분명한 판금갑옷에 투구도 제대로 벼린 판금투구이다.

눈빛도 흉흉하기 그지없으며 갑주가 사방이 일그러지고 흠집이 나 있으니 충분히 실전을 경험한 이들이리라.

하지만 이균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전의 일은 부끄러울 뿐이니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지금은 종친도 아니며 입신체비사도 아닌 한낱 족친위에 속하는 군관에 불과하니 마음을 놓으시지요. 목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본래 역사의 선조는커녕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소할 지경이었다.

여하튼 안내를 받았는데 병사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는 것이 본래 사신들이 드나들던 대도시가 아니고 도시 자체가 거대한 병영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음력 6월이라 제법 더운 시기인데 옷을 걸쳐 입고 푸른색 철릭을 덧입어서 이마에서 땀이 새어 나왔다.

깊게 인사를 올리니 아버지는 내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받았다.

“소자 머나먼 길을 통해 부족한 배움을 전하려 하였습니다. 별래무양하셨는지요.”

“부족한 배움이라. 젊은 시절의 내가 들었다면 기겁할 노릇이니 우스운 말은 하지도 말거라. 조만간 관원들을 소집할 것이니 편히 쉬도록 하여라.”

편히 앉아 있으라 하였지만 아버지의 복장이 철릭이다.

아버지는 엄연히 목사이며 문관인데 철릭을 입었다면 전쟁이나 전쟁에 준하는 상황이 분명하리라.

하인이 가벼운 다과를 내오자 아버지는 나를 보며 감탄을 늘어놓았다.

“네가 보낸 서신으로 이야기는 들었다. 요즘은 이 직전과 입신체비를 행하는 것 같던데 효험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근육이 적어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참으로 열심인 사람이었지.”

“제 상관인 사람의 방식을 배우니 아직 적응할 수는 없지만 절육(커팅)과 분절(세퍼레이션)에는 일가견이 있기에 배워서 나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절육과 분절이라, 네 배움이 그러한 경지까지 이를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내 임기도 끝에 도달하였는데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의주를 넘어서 새 요새를 만들려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이라 하여도 함부로 나서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를 따라 옆방으로 향하니 거대한 원탁 위에 지형을 표현하였는지 점토와 나무로 의주와 일대의 지형도가 묘사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인근 해안가를 지목하고는 말하였다.

“너도 의주목사로 부임할지도 모르니 잘 알아두어라. 요동 도적들이 침입하는 길은 산길로 셋이요 평야로 하나이다. 그리고 강을 건너 위화도를 넘어선 여기가 핵심이지.”

아버지가 짚은 장소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는데 조선에서도 병사를 보내 요동 도적들을 여러 번 공격한 것이 분명하였다.

아버지는 나무로 만든 동산을 들어내더니 요새로 보이는 모형을 올려놓으며 말하였다.

“백 년 전에 문종대왕께서 수양대군을 시켜 북방의 하르빈으로 나아가 요새를 축성하고 와라부의 달자를 상대하라 하였지. 당시의 성을 측량하여 옮겨온 것이다.”

“성을 그대로 옮겨왔다 하셨습니까?”

“물론이다. 듣자 하니 사방으로 뻗은 뿔에서 화포를 쏘아 달자들을 격퇴했다 하더구나.”

아버지의 모형을 보니 코웃음이 나오려다가 말았다.

수양대군에 빙의한 사람은 이론은 알지만 실제로 만들어 보거나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 이론만 앞세워 하르빈이라는 도시에 요새를 만들었다.

이건 성형요새도 아니요, 요새도 아니다.

내가 대학시절에 서양건축사를 하며 모형을 만들어보고 레포트도 작성해 봐서 알지만 이건 과도기에나 쓰일 뿔 달린 요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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