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281화
2부 4장 1화 입장자유 퇴청불가
물론 다 안다고 해서 그대로 적용할 방법이 없었다. 조선시대의 풍수지리설과 현대의 도시설계 이론 그리고 유교 경전에서 기반을 두어 적당한 지식을 섞어둬야지.
고민을 거듭하다 붓을 움직였다.
몇 번이고 되새긴 답안이 서서히 작성되었는데 큰 흠집은 없는 것 같았지만 너무 딱딱하지 않게 적당히 완급을 조절하며 세부적인 사항까지 작성하였다.
[가장 먼저 행해야 할 일은 지세를 파악하여 마을의 축을 정하는 일입니다. 배산임수의 지형은 좋으나 언제나 산이 연유는 없으며 강이 있다 하여도 수해와 한발(旱魃: 가뭄)을 염두에 두어 택지를 정하며…….]
이전처럼 삼천 자를 채울 필요도 없었고 핵심만 요약한 실무적인 내용 위주로 적으니 어느덧 두 시진이 흘렀다.
답안지가 거의 다 채워지고 혹시나 오자나 오기입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니 세 시진이 다 될 지경이었고 한 명씩 제출을 시작하였다.
“자네는 또 세필을…… 아니군.”
나에게 크나큰 엿을 먹이려다가 실패하여 내 공적만 쌓게 만든 이양원이 지나가면서 말했다.
세필 안 쓴다니까! 사용해도 다 채울 수는 있지만 하지 말라 했잖아!
할 일은 모조리 다 했다. 밖으로 나와 손을 툴툴 털고 기지개를 켜니 김성일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그렇지 않아도 이황이 최근 여송도 일기를 김성일을 시켜 편집하게 하였는데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일까.
“천만다행일세. 스승님께서 나에게 일기를 전해주시어 좋은 성과를 거두었네. 자네는 두말하지 않아도 잘 행하였을 것이나 이번에는 내가 장원일세.”
“그러하다 을과에서 으뜸(실질적으로 6위)을 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내가 세필을 들려다가 참았는데 자네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이네!”
“이자가 대역죄를 논한다! 세필을 사용하려 한다!”
서로 낄낄거리며 집으로 돌아가 술을 마셔댔다. 이틀 뒤에 결과가 나온다는데 지금쯤이면 전시 답안을 한창 분석하고 있으리라.
잘만 하면 단숨에 종6품이다! 못해도 갑과에 들면 종7품이 확정이고!
* * *
관원 여럿이 궁궐의 탁자에 도열하여 답안지를 훑어보았다. 본래 법도로는 모든 답안을 국왕이 들어봐야 하지만 너무 번잡하고 할 일이 많았다.
그들은 먼저 하위권에 속하는 병과 33인을 걸러내기 시작하였다.
“이건 내가 보기에는 병과일세.”
“제가 보기에는 을과입니다.”
관원들은 순서대로 답지를 돌려보며 판단하였다.
마지막으로 답지를 확인한 관원은 다섯 개의 병이라는 첨지(籤紙)를 확인하더니 거들떠보지 않고 병(丙)이라는 도장을 날인하여 답지를 대충 접어 구석의 상자에 던져 넣었다.
“아무리 보아도 병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필적이 온전하나 내용으로 따지면 중언부언을 일삼으니 당장 제명시키고 싶을 지경이군요.”
“이번 책문은 너무나 힘든 일이니 조금은 양해하세나.”
“주상전하께서 책문을 단 하나만 묻는다 하셨는데 여러 책문을 모아서 하나로 만든 격이기도 합니다. 하긴 이 책문을 관료들에게 제시하여도 선뜻 답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번 식년시에 응시한 현지 관료는 세 명에 불과하였다. 관료들의 상당수는 작년에 시행된 별시에 응시하였으니 대부분 훈도 생활이 관직의 전부인 이들이었다.
이런 이들에게 철저히 실무적인 지식을 제시하라는 책문을 전했으니 제대로 된 답만 제시하여도 을과에 둘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답안이 걸러진 상황에서 국왕인 이호가 영의정인 상진과 함께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주…… 주상전하를 뵙사옵니다!”
“병과를 먼저 걸러내었군. 잠시 확인하여 볼 것이니 개의치 말라.”
개의치 말라 하여도 혹시 모를 실수가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관원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답지를 내려놓는 이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이호는 병과를 벗어난 12개의 답안을 들어보며 말하였다.
“여기에 있는 답안들은 언행이 명백하고 글의 핵심이 남아 있는 답안이 분명한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어느 정도 일이 진행되었으니 이제 법도대로 독권관은 낭독을 시행하라.”
자리에 앉은 이호는 관원이 낭독하는 답지를 들으며 세필을 들고 백지에 내용을 축약하고 간략한 평가를 내렸다.
이윽고 한 답안을 들은 그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움직였다.
“천자는 간쟁(諫爭: 옳지 못한 행동을 간언함)하는 신하 일곱을 두면 천하를 잃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러하니 새로운 고장에는 간쟁하는 이를 여럿 두어 토관의 잘못과 관리의…….”
“마음에 드는군. 이 답안을 작성한 이는 문장도 빼어나며 가장 큰 문제를 바로 알아챘다네. 대체 누구인가?”
“최립(崔岦)이라 하옵니다.”
조선이 외부 영토를 개척할 때에 가장 염두에 두는 문제는 토착 세력과 새로 들어온 관원 간의 유착이었다.
이런 문제를 실무 경험 없이도 짚어냈으니 갑과는 당연하며 장원도 노려볼 만한 이가 분명하였다.
답안이 몇 개 더 낭독되었고 냉정한 평가가 이어졌다. 이윽고 한 답안을 낭독하던 관원의 말이 더듬거리며 끊기기 시작하였다.
“준천(濬川: 개천을 보수함)과 목재의 보호는 언제나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법입니다. 하천과 산악은 언제나 백성들을 아우를 수 있는 가장 큰 경계이니…….”
“자네의 사견이 들어간 일을 낭독하는 것인가 혹여나 그러한 답안을 작성한 이가 있는 것인가. 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니 어찌하면 좋겠나.”
실은 이호가 주목하는 이가 있었으나 답지를 낭독할 때에는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너무나 상식을 벗어난 답안이기에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하였다.
국왕이 판단이 흐트러질 경우 보좌로 나설 목적이었던 상진도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답지를 낚아챘다. 자신이 듣기에도 논리정연하며 흠이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문제였다.
“이 답안을 작성한 이는 유성룡이라 합니다. 일전에 소과에 장원급제하여 작년에 훈도로 강화도호부에 머물며 옛 사당을 보수하는 데 힘을 보탠 이가 확실하옵니다.”
“지금 무어라 하였는가.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이러한 답안을 작성하였다고? 관직에 오르지도 않은 약관의 젊은이가?”
답안을 빼앗듯이 낚아챈 이호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분명 옳은 말이었으며 관직에 오른 이가 이러한 의견을 제시한다면 관원들이 충분한 논의와 검토를 거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충분한 논의와 검토를 거친다는 말은 한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지식이 섞여 있다는 뜻이었다.
지형지물, 하천, 농토 심지어 관아의 배치에 대한 상세의 내용은 이십 세의 나이에 쌓을 수 없는 지식이었다.
심지어 이 답안을 기반으로 설명을 덧붙이고 사례를 추가한다면 서적 하나를 작성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안을 돌려주며 말하였다.
“유성룡 이자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십 년은 관직에 머무는 이도 이렇게 다양한 지식을 가지는 일은 흔치 않은 법일세. 영상이 보기에는 어떤가.”
“신도 주상전하의 뜻과 동일합니다. 실제로 적용할 때에는 고스란히 쓰일 수 없지만 약간만 손을 보아 지침으로 삼아도 될 지경이 아니겠습니까.”
이호는 눈을 감고 생각을 시작하였다.
단순히 공조에 두려 하였는데 공조에 머물면 이자의 재능을 모조리 파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장원으로 올릴 마음을 먹었지만 오히려 안타까운 일이었다.
“글솜씨로만 따져도 갑과이지.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모든 자질을 시험할 자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십조를 기준으로 삼아도 한 군데 둘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하오면 장원이나 탐화(3위)에 두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일반적으로 장원을 비롯한 갑과의 상위 3인은 자신의 책문에 대응하는 관직을 수여받아 전문성을 키운다.
하지만 유성룡의 경우에는 최소한 호조, 수조, 외조, 공조 그리고 농조의 5개 관직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5개의 관직을 돌아다니게 하면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었다.
마음을 정한 이호는 어쩔 수 없이 유성룡의 품계를 낮추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관례를 무마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성룡의 순위는 갑과 말석으로 정하겠네. 종7품의 관직을 수여할 것이며 이현전에 두어 재능을 모조리 파악하도록 하겠노라.”
유성룡의 답안지에 갑과의 도장이 날인되고 곱게 접혀 5위라는 순위가 매겨졌다.
가장 많은 지식을 담았기에 순위가 떨어진 모순이 발생한 것이었다.
* * *
이틀이 지나고 대과 전시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제도가 바뀌어 식년시 대과 급제자 세 명은 가마에 올라 도성을 한 바퀴 돌 자격이 주어진다 하였다.
당연히 가마에 오를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장원 급제자는 나도 김성일도 아닌 최호라는 자였다. 최호는 김성일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는지 서로 악수를 나눴고 김성일은 2위인 아원이라 같이 가마에 올라 있었다.
3위? 이사영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지방관원이라 하더라.
여하튼 나는 5위이다. 갑과의 말석이라 가마 옆을 따라갈 자격은 되었지만 김성일의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원이라네. 자네보다 한 품계가 높으니 앞으로 나에게 존대를 하게나!”
“훈도로 부임하였던 일은 잊었나? 실질적인 품계는 대등하니 절대 존대를 하지 않겠네!”
말은 험했지만 서로 눈은 웃고 있었다.
그래, 갑과만 달성해도 훌륭한 일이지만 나는 조금 억울했다.
내 답안이 부족한 점이 있었나? 아니면 현대 지식을 너무 섞어 이질적으로 보였나?
갑과의 3위까지 탑승한 가마는 궁궐 앞에서 멈추었고 셋은 임금을 만나러 궐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옆에 있는 고경조라는 사람은 영의정인 상진이 친히 홍패(紅牌)를 건네주며 관직을 부여하였다.
“고경조 자네는 사 위이니 집현전에 소속될 것이네. 제법 나이가 많지만 심혈을 기울이게나. 내가 관직에 있을 적에 자네 조부님께 많은 지도편달을 받았다네.”
“대감께서 마음을 써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훈훈한 모습과 달리 상진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내가 대체 뭔 짓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홍패를 하사하라는 명이 떨어졌으니 소매에서 홍패를 꺼내 건네주었다.
“유성룡 자네는 오 위라네. 갑과의 말석이지만 이번 시험은 순위를 나누기 힘들 지경이어서 많은 심사가 있었지. 자네는 이현전에 근무할 것이니 이틀 뒤부터 관청에 나오게.”
“분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룩하겠습니다.”
입맛이 썼다. 아마 1~5위까지 모든 이들이 비슷한 수준의 의견을 제시하였을 것이나 내 이론이 너무 이질적이기에 순위가 떨어진 것이 분명하니까.
대신 이현전에 들어간 일은 나쁘지 않았다. 이현전의 직전(直殿: 정4품의 관원) 두 명 가운데 하나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율곡 이이라는 소식을 들었지.
드디어 율곡 이이를 만나 보게 되니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다.
* * *
관직에 오른 다음 일어나니 새벽 공기가 맛있을 지경이었다. 평소 같으면 몸을 풀고 입신체비를 하러 나서야 하지만 이제는 입신체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관원이 된 이후의 입신체비는 퇴근한 이후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였으니까.
하지만 어제 이황이 했던 의문스러운 말이 떠올랐다.
-네가 참 할 일이 많구나.
할 일이 많다 하였지만 얼마나 많겠는가. 근손실을 극도로 꺼리는 조선이니 해가 지면 퇴근하는 일이 당연하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서니 아내가 무리해서 밖으로 나와 있었다.
“처음 궁궐에 나서는 일이니 부디 몸을 조심하십시오.”
“아직 몸조리를 하여야 할 때가 아니오! 바람이 스미면 몸이 크게 상하는 법이니 어서 들어가시구려!”
사실 몸조리도 필요가 없었다. 아이를 낳고 두 달이 지났지만 아내는 완전히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백 일을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내의 인사를 받으며 관청으로 휘적거리며 걸어가니 김성일이 따라붙었다.
“이현전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었네. 암 이현전은 좋은 곳이지.”
“공조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었네. 나와 자네의 관직이 바뀌어야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궁궐에 들어서면서 조금 걱정이 밀려왔다. 면신례 대신 면체례라는 이상한 의식을 한다는데 대체 뭐일까.
집현전은 이현전과 대치되는 관청답게 경복궁의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건물 형태가 수정전과 완전히 동일하군.”
새벽부터 출근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지만 이현전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면서 아침 업무를 준비하여야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혹시나 조례(朝禮)를 행하나 염려하였지만 조례를 치르는 날도 아니다.
“아흠! 자네가 유성룡인가?”
“그…… 그렇습니다?”
옆의 문이 열리면서 한 관료가 사지를 뒤틀며 들어왔다.
관복을 입었지만 몸 곳곳에 습기가 있었으니 입신체비를 하고 목욕까지 마쳤나? 잠깐, 지금 새벽 5시인데?
관원은 몸을 더듬더니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이렇게 바삐 올 줄 알았다면 입신체비를 조금 게을리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직제학을 역임하는 행주 기씨의 자는 명언, 호는 고봉일세. 그냥 직제학 어른이라고 불러주게나.”
이 사람이 본래 역사에서 이황과 8년에 걸친 논쟁을 벌인 기대승이란 말인가.
업무에 능하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내 상관이자 이현전 직제학이라니! 그런데 이 이상한 모습은 뭐란 말인가.
기대승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아차, 자네가 모르는 일이 있었군. 본디 집현전과 이현전은 야근은 물론이요, 며칠 동안 퇴청하지 못하는 일도 많다네. 그러하니 여기서 숙식하며 입신체비를 행하지.”
내가 조카나 사촌 동생에게 누누이 했던 말이 있다.
회사에 수면실이 있으면 절대 입사하지 말라는 충고이자 내 뼈에 스민 원한이었는데 여기에도 수면실이 있다고?
관원들 대다수가 몸을 씻고 왔는지 습기가 스민 채로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수면실은 물론이고 피트니스 센터를 두어 몸을 단련하게 하다니! 이게 무슨 지옥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