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279화
2부 3장 7화 뒤늦은 신혼여행(1)
훈도의 부임은 3월이지만 기한 종료는 1월이다.
실제로는 해가 바뀌기 전에 돌아가 공부나 하라고 더 빨리 기한을 종료시켰고 1560년이 되자마자 내 훈도 생활은 끝이 났다.
훈도 생활이 끝날 무렵 도호부사는 사재를 털어 우리에게 포상을 내렸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돈이 아니고 입막음 비용이지만 내 앞으로 배정된 금액이 금화 다섯 냥에 달하니 돈도 받고 공적도 새운 훌륭한 생활이 아니겠는가.
이황에게 내수린을 배우며 대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훈도로 지내며 친해진 권율이 찾아왔기에 인근 활터에서 궁술을 겨루기 시작하였다.
“이현 자네는 학식은 빼어나지만 궁술은 평범하기 그지없군.”
“자네가 너무 잘 쏘지 않는가. 여섯 순(30발)을 쏘아서 다섯 순 가까이 적중하였네. 무관이라도 이러한 일은 힘들 것일세.”
궁술은 여전히 유생이 갖춰야 하는 육예(六藝)의 하나였다.
듣자 하니 수양대군은 육량전을 일백 보를 날릴 수 있는 명궁이었으며, 달자(몽골)의 장군을 육량전으로 꿰뚫었다 하였으니까.
불현듯 진안군이 생각났다. 그 양반 상체도 대단하던데 화살은 얼마나 잘 쏠까?
수양대군이야 이야기에 살이 붙었겠지만 진안군은 현실에 있는 인물이니 소문을 듣지 않았을까.
“진안군 대감 말일세. 그분은 얼마나 할 것 같은가?”
“얼마나 하다니? 자네도 대감께 풍(風)이 들어찬 것 같은 조짐을 느꼈는가?”
“풍이라 하면 중풍 말인가? 설마!”
“중풍 말고 백호풍 말일세.”
백호풍, 현대로 말하면 통풍의 조짐이 있었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발목을 절룩거리는데 의원을 찾아가지 않아서 궁금하긴 했었다. 하지만 직접 본 경우는 처음이기에 알아차릴 수 없었지.
“백호풍은 외조부님께서 젊은 시절 앓았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이 없다네.”
회사 상사가 통풍을 앓아서 약을 먹고 맥주도 마시지 못하는 일은 보았지만 증세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고통스럽다는 말만 들었다.
하지만 권율은 친척이 통풍을 앓았었는지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활을 한 발 날리고 말을 이어갔다.
“내 큰형님이 백호풍을 앓아 입신체비를 그만두었기에 징후를 알 수 있다네. 감내할 수 없는 통증이 발가락부터 시작하여 사지로 스미는데 끔찍하기 이를 데 없지.”
“그러면 발걸음이 이상한 것도 통풍의 징후란 말인가. 고통을 감내하시니 그럴 법하겠군.”
“차라리 입신체비를 실패하여 발목이 다쳤으면 나은 일이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시침과 부항으로 몸을 다스리며 진통산, 강활탕 그리고 활혈탕 등을 거듭 복용하고 계셨을 것이네.”
생각해 보면 통풍은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다.
항생제로 관절염을 억누르며 약으로 요산수치를 낮추고 식습관을 변경하여 증세를 영원히 억누르고 사는 것이 전부이다.
이 시대에는 완전한 불치병이자 입신체비사로서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으리라.
권율은 더 이상 언급하기 싫었는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다시 활을 쏘고는 말했다.
“울적한 이야기는 그만두세나. 자네가 혼인한 지 일 년이 넘었다 하였는데 아직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군. 본디 입신체비에 빼어나면 회임까지의 시일이 얼마 걸리지 않는 법인데.”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서 문제이지. 지금쯤이면 자식 하나가 들어서면 참으로 좋으련만. 내가 관직에 나서면 아내 홀로 외로운 낮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우리의 사랑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 같은 사랑에서 승률이 한없이 낮은 전투적인 사랑으로 변화하였을 뿐이고 휴전이 절실히 필요했다.
권율은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더니 등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말했다.
“실은 나도 혼인한 이후 이 년 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서 곤욕을 치렀네. 하지만 방도가 있어서 단번에 안사람이 회임하였다네.”
“방도라 하였는가? 대체 무엇이기에?”
“부친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일을 잊고 마음을 편히 먹으면 몸도 변하는 법이라 하였는데 가장 좋은 방도는 유람을 다녀오는 것이라 하였지.”
이 시대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동래에 다녀오는 일만 하여도 한 달이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람이라니?
내 표정을 본 권율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고는 말했다.
“자고로 금전이면 세상만사가 편해지는 법이라네. 지나친 축재(蓄財)는 화를 부르지만 약간의 재물은 세상을 순탄하게 만들지. 덕분에 젊은 시절부터 많은 곳을 다녀왔다네.”
권율이 이런저런 잡다한 지식이 많다 했는데 본래 역사에서 온갖 장소를 여행하며 지식을 쌓은 일은 변한 역사에서도 같았나 보다.
하지만 여행은 힘든 일이 아닌가.
“금전을 좀 쓰면 여행이 달라지는가? 어차피 말 위에서 시달리느라 험난한 길을 다녀오는데 무엇이 좋은 일인가.”
“어허. 나만 하여도 안사람과 함께 대마도에 다녀오며 어떠한 고난도 없었다네. 당장 벽란도에서 대마도를 다녀오는 뱃삯이 은자 두 냥에 불과하였지.”
권율의 설득을 들으니 뒤늦은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올 법했다. 돈이야 충분히 있고 시간이야 넘쳐나니까.
어머니와 장인어른인 조식 그리고 의주에서 근무하시는 아버지에게도 서신을 보내보았다.
모두 다 특이한 일이지만 없는 경우는 아니라며 내 여행을 대수롭지 않게 허락해 주셨다.
* * *
대과시험을 일 년 이상 남겨놓고 돌아와 공부에 매진하라는 아버지의 요청이 있었으니 여행 장소를 찾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제주도와 대마도는 너무 좁은 곳이고 현대에도 다녀온 적이 있어서 제외하였으며, 대양도(대만)는 두 달 일정이라 제외하였다. 그렇다고 차디찬 북방으로 올라가자니 아쉬운 일이었다.
결국 형님이 근무하는 박다(하카타) 일대의 온천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한 달 전에 이야기를 정하고 서신을 통해 계약을 완료한 다음 벽란도로 향했다. 언덕에서 바라본 벽란도는 수십 척의 배가 모인 거대한 항구였는데 이런 고장은 본 적이 없다.
“참으로 장관이지 않소. 도성에 들어오는 물산이 모두 벽란도에 모인다 하였는데 그 말이 틀림이 없는 것 같소이다.”
“청계천과 육주비전의 물산이 모두 벽란도를 거치기에 권세가의 하인들이 물산을 미리 사들인다 하였는데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람을 다녀봐야 세상을 아는 것이 맞습니다.”
적은 수의 선박이지만 본래 역사의 주력선박인 판옥선과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였다. 이런 선박을 상선으로 굴릴 지경이면 본 함대의 위력은 상상할 수 없으리라.
벽란도의 관아는 상인들로 북적거렸는데 이미 나는 유람을 허가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기에 바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관원은 심드렁한 얼굴로 서류를 대조해보더니 유람허가증이라는 서류를 내밀었고 나와 아내의 호패를 찍어 신분을 증명하였다.
이미 상선에 타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으니 뒤의 일은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도성을 떠난 일도 없는 몸인데 옛 왜국의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낭군께서 훈도로서 힘을 쏟으시며 저를 위해 마음을 쓰신 덕분에 참으로 좋은 일을 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그러겠구려. 나도 처음으로 아국을 떠나 머나먼 외방으로 나가는 일이 아니겠소.”
현대에는 여행도 많이 다녔지.
일본은 교토와 오사카 그리고 대마도를, 대학 졸업하고 취업 직전에 스페인을 시작으로 유럽 여행까지 다녀왔다.
그런데 배를 타고 하루가 지나자 아내가 심한 멀미를 앓기 시작하였다.
“괜찮소? 이보시오! 의원이라도 있으면 어서 불러주시구려!”
“이런 상선에 의원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곽란증을 견딜 수 없으시면 쪽배로 인근 항구에 내려드릴 것이니 언제라도 말씀만 하십시오.”
나는 멀미에 강한 체질인지 끄떡없었지만 아내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먹은 물건을 모조리 게워냈다.
등을 두드리고 따듯한 물을 마시게 하였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나을 줄을 몰랐다.
“이러다가 몸이 축나게 생겼습니다. 제 몸이 병약하여…….”
“병약하다니! 내가 배를 잘못 고른 탓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병약하다면 순흥군쯤 되어야 평범한 몸이 되겠네!
나도 생각이 짧았다. 강을 거슬러가는 나룻배도 흔들리는데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이니 파도가 칠 때마다 배가 사방으로 요동치니 멀미가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멀미에 시달리고 이틀이 지나자 놀라운 방법으로 멀미에 대처했다.
등잔으로 밝혀져 어둑한 선실 안에서 장옷을 입어 얼굴만 덩그러니 보이는 아내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괜찮소이까? 앉아 있으면 곽란(癨亂)이 조금 덜하니 앉아 있으시오.”
“아닙니다. 제가 제 몸을 놀리는 법을 모르니 곽란이 심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하여 보니 대처할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대처할 방법이라 하였는데 아내는 난데없는 기마자세를 취했다.
평상시에도 저걸로 하체를 단련하고 시거(데드리프트)나 공좌(스쿼트)로 근육을 늘리는데 대체 뭘 한단 말인가.
“보십시오. 얕은 기마자세를 취하여 상체를 편안히 두고 하체로 바닥의 움직임에 대응하면 머리가 흔들리지 않아 곽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한 시간쯤 지나면 그만둘 것이라 생각했는데 해가 넘어갈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장옷을 입어 흰 얼굴이 보이는데 비둘기의 머리 움직임이 생각났다. 그만큼 하체를 격렬히 움직이는 것이다.
아내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예전에 부친께서 말씀하시기를 미주로 향하면서 배에서 시달려 근손실이 일어났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적용하면 하체를 단련할 수 있으니 근손실이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다.
그 장인에 그 사위라고 미주 관찰사로 발령받는 삼십 년 뒤의 나의 모습이, 기마자세로 한 달 하고 보름의 항해를 거치며 하체를 단련하는 끔찍한 모습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미쳤다고 미주를 다녀온단 말인가! 나는 절대 가지 않는다! 암!
다녀오더라도 여송이라 불리는 필리핀 정도에서 관직생활을 마칠 것이다!
* * *
힘들게 도착한 일본이라 해도 거리의 모습은 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물의 형태도 겨울이 춥지 않아 약간 개방적일 뿐 조선의 양식 그대로 만들어졌고 간혹 보이는 신사나 사당만이 일본 특유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왜국의 땅이란 말인가? 보아하니 왜국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친께 듣기로는 하주도(下州道: 조선 영토가 된 큐슈의 세 지방)는 변란으로 피폐해진 이후 아국의 사람들이 도시를 새로 만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나마 지방에는 옛 풍속이 남아 있다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길거리의 사람들도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일본어 어휘를 섞은 한국어를 사용하며 흥정을 벌이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보시오 킹까(금화) 한 칸(관)으로 닌징(인삼) 여섯 냥이라니 너무한 것 아니오?”
“어허! 이건 고삼(홍삼)이오. 닌징을 말리고 쪄냈는데 무게가 줄어들지 않겠소.”
반면 일본 상인과 대화하는 이들은 어엿한 일본어를 사용하였고 조선인과 대화하는 이들은 어설픈 국어를 사용하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비빌 언덕을 찾아야 하니 이미 주소를 알아낸 형님의 집으로 향했다.
“형님의 집에 이틀 정도 머물며 여독을 푼 다음 우리가 기거할 온천으로 향하겠소이다. 나는 관아에 계실 형님을 찾아갈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낭군께서도 여독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하면 맛난 저녁이나 준비해 주시구려. 박다는 아국과 왜국의 물산이 모이는 고장인지라 도성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물산을 사들일 수 있다 하였소.”
머슴에게도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아내를 맞이하였고 이제 형님을 만나볼 차례이다.
관아로 향하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축제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참 대단한 일이야, 전근대에 다른 민족의 동화는 쉬운 일이 아닌데 팔십 년 동안 죽어라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어떻게든 절반 이상을 조선 사람으로 만들어냈네.”
아마 커다란 문제가 없다면 조선의 영토가 된 하주도는 백 년쯤 지나면 완전히 조선 땅이 될 것이다.
관아 근처에 당도하니 사람이 빼곡히 몰려 있었다.
“질서를 지켜 줄을 서라 하지 않았소! 거기! 왜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오! 공납품을 마련한 업자라도 법도를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겠소!”
“저는 박다목에서 고ㅈ…… 아니, 고지기로 근무하시는 형님을 뵈러 왔습니다. 형님의 자는 응현(應見)이며 호는 겸암입니다.”
“누군지 알고 있소이다. 들어가서 왼쪽으로 쭉 돌아가시구려.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바쁠 것이나 친족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공납품을 마련한 업자라 하니 지금 벌어지는 일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의 풍속이 남아 얼마 뒤에 축제가 시작될 예정이며, 그 이전에 물자를 모조리 비축하고 첫 교역을 시작하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형님이 근무하는 창고에는 한창 약재의 입하를 진행하고 있는지 멀리서 진한 풀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수레의 행렬을 따라가니 형님이 피곤한 얼굴로 지시를 하달하며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형님! 성룡이 왔습니다!”
“성룡이라고? 생각보다 일찍 당도하였구나. 지금은 바쁜 와중이니 잠시 상인과 대화라도 나누어라. 왜국의 계(堺: 사카이)에서 박다로 온 약재상이니 혹여나 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묻도록 하고.”
계라 하면 사카이고 사카이는 교토의 외항이며 이 시대의 무역항이다.
약재를 납품한다 하면 분명 납품한 돈으로 홍삼을 사 가서 차익을 남기려는 목적이리라.
체격은 작지만 등골이 당차고 얼굴이 둥글둥글한 상인이 관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헛기침을 하자 상인은 나를 돌아보더니 흠칫 놀라서 되물었다.
“응현 어르신일 줄 알았는데 혹시 형님 되시는 분입니까?”
“동생이라오. 형님께서 바쁘신지라 이야기를 나누어보라 하였소.”
이놈의 삭은 얼굴 때문에 둘이 같이 있으면 내가 형같이 보인다더라!
대충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상인의 옆에서 눈길을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상인은 아이의 어깨를 잡아당겨 자기에게 데려오더니 소개를 시작하였다.
“저는 사카이에서 약재상으로 일하는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소서융좌)라 합니다. 이쪽은 제 차남인 고니시 야쿠로(小西 彌九郎: 소서미구랑)이지요. 세상 물정을 알리기 위하여 여기에 데려왔습니다.”
“고니시라 하였소?”
“선대부터 변변치 못한 약재상을 운영하다 홍삼을 들일 길을 열어서 풍족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조선에는 언제나 빚을 진 사람이니 반쯤 조선의 신하나 마찬가지지요.”
상인은 아들을 소개하려 했지만 내 정신은 다른 데에 팔려 있었다.
사카이의 약종상이며 고니시라는 성을 사용하는 가문은 훗날 임진왜란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태어난 가문 외에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아이는 고니시의 친척이자 형이 분명하다.
그는 내가 알기로 1558년에 태어났으며 지금 세 살이라 걸음마를 할 나이가 아니겠는가. 아이에게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여기서 어떻게 인연을 만들어야 할까.
임진왜란의 선봉장이면 단순한 권력다툼으로 쟁취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능력을 증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친척인 고니시 류사의 태도를 보건대 어떻게든 수를 쓰면 뛰어난 인재를 조선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지.
#작가의 말
고니시 야쿠로(小西 彌九郎: 소서미구랑)은 아명입니다. 훗날 고니시 유키나가로 본명을 바꾸게 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출생연도 관련해서는 일본 내부에서는 확실히 남은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1555년 설과 1558년 설이 있지요.
공신력이 높은 조선왕조실록 기준으로는 1558년생으로 나오지만 이미 작품이 진행되고 스토리가 많이 나온지라 수정하기가 힘든 상황이어서 1555년생으로 굳히려 합니다.
조선 측의 인물이면 철저히 따져야 하지만 일본 인물이니 검색 결과가 많은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결국 수정하기 힘들게 되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