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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276화 (276/573)

근육조선 276화

2부 3장 4화 젊은 시절의 인연(2)

내가 술맛에 곤욕을 치르며 물을 찾아 입을 헹구건 말건 정철은 주변을 돌아보며 시구를 생각하다 다시 술을 들이켜기를 반복했다.

배는 하염없이 흘러 강화도에 도착하였고 숙소에 배정되었다.

다음 날 새벽이 밝기도 전에 눈이 절로 번쩍 뜨였다.

아침 일과의 시작은 입신체비이니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권율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정철이 내 옆에서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이보시오 송강, 어스름이 걷힐 무렵이니 어서 일어나시구려.”

저녁에 잠시 어디로 나갔다 오더니만 술을 더 마시고 온 것이 분명하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흔들어보았는데 손사래를 치면서 이불을 덮었다.

이런 사람을 깨워봤자 내 손해다.

“인사고과가 엉망이 되어도 송강 자네가 감내해야 할 일이지. 입신체비나 하러 나가겠네.”

이황이 말하기를 훈도로 생활하며 쌓은 업적은 지방관에 의해 인사고과에 반영되며 항상 몸가짐에 주의하라 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짙은 바다 안개가 깔려 있었다.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마당이나 뛰어다녀야겠는걸.”

잘못하다가는 도랑에 빠질지도 모르니 방법이 있나.

하지만 누군가 저 멀리서 맨몸운동으로 몸을 풀고 있었는데 듬직한 덩치를 보니 권율이 분명했다. 역시 권율다운 모습이라 절로 인사가 나왔다.

“권언신(권율의 자) 자네인가? 아침 일찍 일어나는군.”

“유이현(유성룡의 자) 자네도 이리 일찍 무슨 일인가. 나야 부친께서 매섭게 가르치시지만 자네가 이리 일찍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내 스승께서도 매섭게 가르치기로는 비할 데 없으신 분이 아니겠는가. 송강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우리 둘이서 몸을 놀려야겠네.”

내가 맨몸운동을 마치고 마당을 뛰어다니자 권율은 나에게 손짓하며 따라오라 하였다.

“입신체비는 행하지 못하더라도 가볍게 몸을 놀려야 한다네. 이 주변의 지리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따라오게나. 어둡다 하여도 길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네.”

권율이 어린 시절 강화도에서 살았다고? 권율의 뒤를 따라 주변을 뛰어다니니 새벽부터 농사에 나가는 농민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새 훈도님들이 오셨군요. 그런데 한 분은 어디 계시는지요? 본디 이 고장에 배정되는 훈도가 세 명이 아닙니까.”

“피로가 심하여 잠을 청하고 있다네.”

“아무렴요. 일전에 계신 훈도님들도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몸이 제일이지요.”

농민의 순박한 물음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새로 부임한 훈도가 첫날부터 술에 취해 늦잠을 잔다 하면 걱정이 앞설 것이 아닌가.

정철과 함께 일 년을 지낼 일이 까마득하였다.

운동을 마치고 세수까지 끝낼 무렵 정철도 방에서 기어 나오듯 움직였다.

정철은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 우리의 행색을 보고 고개를 돌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 미안하네, 새로운 벗을 사귄 기쁨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으니 앞으로는 업무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술을 즐기도록 하겠네.”

“알면 되었다네. 오늘은 훈도로 나서는 첫날이니 어서 세안이나 마치고 동헌으로 나아가세.”

사람들이 하나둘씩 동헌 앞의 공터에 모이고 있었다. 구석에 놓인 입신체비기구를 보니 쓴웃음이 나왔지만 이 시대가 이렇게 변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지방 관청은 상대적으로 업무가 적으니 매월의 초하루, 보름, 그리고 말일 정도에 관원들과 육방관속을 소집하여 업무 보고를 받고 명령을 내리는 일이 전부라 하였다.

한 사내가 동헌 옆문으로 나오더니 틀에 박힌 것 같은 움직임으로 걸어와 크게 외쳤다.

“도호부사님 오십니다!”

기세등등하고 체격이 우람하니 아마 도호부사와 같이 부임한 육방관속의 우두머리이자 하급 무관인 비장(裨將)이리라.

사람들이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으니 동헌에서 도호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무가 짙으니 보리 작황에 유념해야겠구려. 새로운 달이 되었으니 업무를 보고하시오.”

나이는 오십 대 정도로 보였지만 어딘가 얼굴 형태가 이상하였고 권율도 이런 사실을 알았는지 눈을 찌푸리며 얼굴을 바라보려 애썼다.

그가 관원 앞에 서자 관원이 업무 진행에 관해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대답이 나왔다.

“근래에 들어 간척지의 염분이 빠지며 아마 대신 벼와 보리를 심을 수 있게 되어 머물고 있는 지장(종이 만드는 장인)들이 일손을 놓을 지경입니다.”

“인근 고을을 통하여 아마와 닥나무를 들여오겠네. 본디 배움의 근본은 서적이며 서적의 근본은 종이이니 주상전하께서도 명을 내리실 것이네. 다만 일이 해결되려면 몇 달은 걸리겠군.”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대부분의 업무가 해결되었고 더 이상의 업무가 없어진 시점이 되자 도호부사는 비장에게 귀엣말을 하였다.

비장이 성큼성큼 걸어와 우리 셋을 앞으로 이끌었다.

“오늘은 예조에서 배정한 새 훈도 세 명이 강화도호부에 부임하는 날이오. 다들 면면을 살피고 이번 일 년 동안 함께 업무를 행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시구려.”

관원들과 악수를 나누니 어느새 도호부사의 차례까지 왔다.

하지만 도호부사의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서양인이 아니겠는가. 코가 오뚝하고 눈두덩이 도드라져 있으니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반갑네. 부족한 몸이지만 강화도호부사로 부임하고 있는 비륜(佛倫) 상씨의 자는 압진(狎眞)일세. 새 훈도들의 면모를 보아하니 내가 부족할 지경이군.”

지방관은 파견될 훈도의 신상명세에 대한 파악이 끝나 있다 하였다.

당연히 시선이 나와 정철 그리고 권율을 향해 움직였지만 다른 이들은 비륜 상씨라는 성씨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 상씨라 하시면…….”

나는 서양인 같은 외모에 놀랐고 권율은 희귀한 성씨인 상씨라는 말에 놀랐으며 정철은 비륜이라는 본관에 놀란 것 같았다.

도호부사는 킬킬거리며 웃더니 손가락 세 개를 들었다.

“자네 세 명이 다른 연유로 놀라다니. 외모는 조부님께서 라마국의 비륜제(피렌체)의 상갈로라는 가문의 피를 물려받고 조선으로 돌아와 독특한 것이네. 증조모님께서 향수병에 시달리다 어린 조부님과 함께 아국으로 돌아왔다 하였지.”

안평대군의 저서에는 서른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이 홀몸으로 지낼 수 없으니 말년에 대부분 혼인을 올렸고 이들이 신성로마제국으로 남편을 따라 이주했다 하였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만족할 수 없어서 몇 명이 돌아왔다 하는데 그 후손이 여기에 있다니.

도호부사는 자기의 오뚝 솟은 코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당연하지만 본관이 다르니 지금 영의정으로 계시는 송현(松峴: 상진의 호) 어르신과 어떠한 연관도 없다네. 다만 예전부터 착각하는 일이 많은지라 많은 편의를 보아주시지.”

이런 일이 자주 있었는지 도호부사는 얼이 빠진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다 본론에 들어갔다.

우리 셋에게 무언가 시키려는 것인가.

하지만 맥이 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자네 셋에게는 별다른 일을 시킬 것이 없네. 기껏 하여야 추수를 올릴 적에 육방관속들의 부정을 단속하면 될 일이고 간혹 백성들의 고충을 새겨들어 나에게 보고하면 될 일일세.”

스승인 이황도 장인어른인 조식도 내가 훈도로 부임한다는 말에 귀에 못이 박이도록 했던 말이 있었다.

훈도의 마음가짐이며 유생이라면 모름지기 행해야 한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본래 훈도의 의무는 백성을 교화하고 부정을 막아내며 지방 향교에 나아가 논의하여 학업을 부흥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남명 대감이 젊은 시절부터 그러한 일을 행하였으나 여기는 도호부이며 도성에서 지척이 아닌가. 부정이 일어나도 도성에서 먼저 알아챌 것일세. 또한 향교에 나아가는 일도 문제로군.”

내 신상명세를 파악하고 있으니 남명 조식의 사위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향교는 왜 문제라 하는 것인가. 본래 향교는 지방의 핵심 지역에 있지 않은가?

“향교에 나아가 학식에 보탬이 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문제라 하시는지 연유를 알 수 없습니다.”

“강화향교는 전조 시절 안효왕(安孝王: 고려 고종)의 명령으로 머나먼 교동현의 볼음도로 이전하였다네. 이곳에는 분원을 두어 유생 여럿이 머물 뿐이지.”

그렇다면 우리가 머물 자리를 마련하기 힘들 것이다. 할 일이 없어진 정철은 술을 마셔도 문제없다 여겼는지 표정이 풀려가고 있었지만 나는 우울함이 밀려왔다.

훈도로 부임하기로 정한 날 조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위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 제안을 하겠네. 자네는 어린 시절부터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으니 훈도로 생활하며 백성들의 고난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겠네.

물론 할 일이 없어서 일을 못 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식도 적잖이 실망할 것이 분명하며 아내도 실망하고 이 소식은 주변을 통해 퍼져 나가겠지.

지금까지 조용하게 살아왔다면 모르겠지만 생원시 장원급제에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사람이 훈도로 부임하고 맥을 추지 못한다며 질시의 눈길이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내 고민을 이해했는지 도호부사는 이방을 불러 우리에게 붙여주었다.

“여기서 어린 시절에 지냈던 권가의 자제가 있으나 어린 시절과 많은 곳이 변했을 것이네. 이방을 붙여줄 것이니 주변을 둘러보도록 하게나.”

“도호부사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강화도는 도호부답게 하루 동안 돌아볼 수 없이 거대한 섬이었다.

권율은 어린 시절과 제법 달라진 강화도를 보면서 감회에 젖어 있었지만 내 눈은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술을 그렇게 드시면 근손실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저야 입신체비를 별로 행하지 않았지만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내 체질은 특이하여 술을 많이 마셔도 근손실이 일어나지 않는다네.”

당나귀 등 위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는 와중에도 술을 홀짝홀짝 들이켜는 정철의 모습을 보니, 마흔 이전에 위나 간이 박살 나 죽을 것이라 걱정했지만 본래 역사에서도 환갑 직전까지 살던 사람이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보게나. 내 강화도에서 살 때에는 간척지가 세 겹이었는데 어느새 네 겹으로 늘어났는가?”

“이십 년 전부터 간척을 시행하여 십 년 만에 끝냈지요. 작년부터 벼를 심지만 아직 염분이 덜 빠져 작황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현대라면 거대한 둑을 쌓아 간척사업을 진행하지만 조선시대이니 철근콘크리트나 중장비가 없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간척을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방은 볼 일이 없다는 듯이 당나귀를 몰고 산으로 향했다.

산으로 향하기를 한참, 본래 역사에서 고려 고종이 묻힌 홍릉 인근으로 올라가는 중에 기묘한 마을이 있었다.

권율은 이 마을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어린 시절에 와보았던 곳이군. 라마국에서 이주하였던 이들이 세운 고장인데 옛 모습 그대로 머물고 있으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

“권언신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산세와 어우러지지 않는 모습이라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네. 더군다나 저 거대한 건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홀로 튀어나와 있으니 상서롭지 않은 일이라네.”

정철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웬 성당 하나가, 그것도 피렌체의 걸작이라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아주 간략하게 축소한 형태로 있었으니까.

이방은 손을 싹싹 비비며 건물을 소개하였다.

“백여 년 전에 강화도에 머물렀던 라마국의 사람들이 세운 소비오래 사당입니다. 자신들의 고향에 있는 사당을 축소하여 세웠다 하더군요. 나무로 건물을 세운 이후 조금씩 돌을 쌓아 이 모습으로 바꾸어 나갔다 하였습니다.”

“소비오래라 하였소? 참으로 독특한 이름이구려.”

십 년 만에 세운 성당이니 크기는 기껏해야 백 명이 들어가기도 힘들 지경이다. 본래 대성당이라 하면 백 년 이상의 공사기간을 기본으로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외부에는 이리저리 금 간 석재를 때우기 위함인지 구리 죔쇠가 박혀 있었고 지붕 아래로 물이 샌 흔적이 역력하였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를 복구할 엄두가 나지 않아 창문을 모두 판자로 막아두니 어두컴컴하였다.

정철은 등잔불 하나에 의지하여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당이라 하였는데 음산한 기운이 맴도는 데다 저 벽화는 머리가 떨어져 나갔군.”

“조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라마국의 사람들이 머물 적에는 사방에 납촉(촛불)이 켜지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주변에 울려 화기애애하다 하였지만 지금은 이런 형국입니다.”

성당이 제대로 돌아갈 시점에는 작지만 제대로 된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벽에 남겨둔 프레스코화도 박락되기 시작하였으며 바닥에 깔아둔 대리석도 하나둘씩 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으로 새긴 글귀는 뭐란 말인가.

“누구인지 몰라도 자신의 성명을 남기기 힘들어 파자하였음이 분명하네. 일가사구(一家士口)라니. 파자를 하여도 너무 심하게 하였군.”

“일가사구? 어떠한 성명 별호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라네.”

동헌으로 돌아와 오늘 하루를 정리하였다.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하였는데 조만간 시행할 모내기에서 외할아버지가 말했던 대로 하체나 단련해야겠다.

하지만 정철이 고함을 쳤다.

“허어 이럴 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는가!”

“송강? 자네 지금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나.”

정철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와 권율도 놀라서 정철을 노려보았다. 잠을 청하기 직전에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정철은 말없이 글귀를 보여주었다.

“향(珦)은 또 왜 나오는가. 그 글자는 문종대왕께서 쓰시던 휘(諱: 왕의 이름)가 아닌가.”

“소비오래 사당의 바닥에 있던 파자를 합치니 이 글자 외에는 나올 겨를이 없네. 하필 라마국 사람이 만든 사당에 방문하셨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어찌하면 좋기는. 당장 도호부사에게 보고하여 문종대왕의 발길이 스치고 간 서역인의 사당이 엉망진창이니 수리하자고 건의해야지.

보고서를 올리려고 붓과 종이를 꺼내는데 정철의 손이 나를 가로막았다.

“이대로 두면 될 일이 아닌가. 혹여나 자네가 소비오래 사당을 보수할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모를 일이지만 일은 늘어나서는 아니 되는 법이라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나와 권율의 입에서 동시에 호통이 터져 나왔다.

권율은 선대왕의 손길이 닿은 사당을 폐허로 두자는 정철의 말에 분노하는 것이고 나는 정철의 태도 자체에 분노하는 것이다.

결국 정철도 두 손을 들었다.

“그…… 그러고 보니 자네가 회령군 대감의 아래에서 학식을 쌓았다 하니 충분한 지식이 있을 것이 아닌가. 내가 괜한 염려를 하였군.”

“혹여나 일이 번잡해지더라도 자네에게 피해가 갈 일이 없도록 하겠네.”

아무리 등잔에 의지했다지만 현대에서 수도 없이 보수해 본 사당, 아니, 성당이기에 문제점과 보수 부위를 정확하게 짚어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문화재 보수 사업을 많이 하였고 현대에서 석조 문화재의 보수도 많이 해 봤으니 쉬운 일이지.

다음 날 보고를 받은 도호부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비오래 사당에 문종대왕께서 머문 흔적이 있다니 참으로 기묘한 일이로군. 듣자 하니 수양대군이 차디찬 바닥에서 패도(플랭크)를 하며 심통(심장병)을 앓고 있던 이의 쾌유를 기원한 장소라 하였건만.”

수양대군이 다녀간 장소란 말인가?

실질적으로는 형인 문종이 수양대군과 함께 다녀온 장소가 분명하였고 도호부사도 이 사실을 인지하였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이현 자네가 올린 장계에 따르면 조만간 사당이 무너질 것이 아닌가. 그러하면 사당을 내버려 둔 나와 내 전임자의 문책이 이어질 것이네. 당장 시급한 채회파리(彩繪玻璃: 스테인드글라스)를 우선 보수하고 후임자에게 인계하는 방식을 택해야겠지.”

“십 년 동안 세운 사당을 다시 만들자 하면 너무 번잡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보수하는 일에 십 년이 걸릴 것이 분명합니다.”

“알면 되었다네. 훈도로 부임한 첫날부터 이러한 일을 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이들을 내 아래에 두었군. 자네들의 인사고과에는 이번 일이 제대로 남을 것이네.”

보수공사에 대한 설계를 하라고 명을 내리면 당장 시작할 수 있었지만 아직 내 능력을 상세히 모르니 일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첫날부터 성과를 올렸으니 하체를 단련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으리라.

#작가의 말

소비오래 사당은 1부에서 수양대군이 문종에게 갈굼당한 성당이 맞습니다.

문종도 동생인 안평대군의 제자이자 동료가 만든 사당이라 여겨 오래오래 남을 수 있도록 어필을 파자해 두었지요. 하지만 파자의 정도가 지나쳐서 정철이 이 파자를 파악했을 뿐입니다.

파자를 풀이하면 일가사구에서 한 일(一)과 선비 사(士)를 합쳐 임금 왕 변이 되었고. 집 가에서 집 면(宀) 부수를 떼어내고 입 구(口)를 합쳐서 향할 향(向)을 만들었습니다.

모두를 합치면 문종의 휘인 향(珦)이 됩니다. 몇 번이나 꼬아댄 덕분에 넘어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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