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275화
2부 3장 3화 젊은 시절의 인연(1)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 양송정에 당도했다.
이황의 제자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다들 내 상황을 알고 있기에 나를 배려해 주려 애쓰고 있었다.
“자네 괜찮은가? 점점 피골이 상접하여 못 볼 꼴이 되는 것이…….”
소과 장원급제 이후 나의 재능을 견제하는 마음 반에 배려하는 마음 절반이었던 김성일조차도 염려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홀쭉해진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그나마 몸이 튼튼해서 버티고 있지 이대로 몇 달만 지나면 바짝 말라 버리겠네. 내 몸이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네.”
“그 몸이 시시해서 죽고 싶어지다니 농담도 정도껏 하게나. 참으로 고생이 많군.”
김성일이 사라진 입신체비장에 혼자 남아 있으니 절로 푸념이 새어 나왔다.
이대로 몇 달이나 버틸 수 있을까.
한창 하체에 열을 올리니 이황이 찾아왔다.
“성룡이가 요즘 많이 고단한 것 같더구나. 일전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훈도에 부임한다 하였는데 아무래도 견디지 못하는 것 같구나.”
“제 입신체비가 부족해서…….”
우리 세대, 정확히는 20대 초반까지의 젊은이들은 모르고 있지만 우리 윗세대 가운데 조식과 인연이 있는 이들은 조식의 딸들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이황은 공좌(스쿼트)를 하는 내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상세히 알아보니 큰사위는 척추가 틀어져 석 달을 정양하였고 둘째 사위는 피골이 상접해 가다 탐라도 현감으로 자원하였더구나.”
“척추가 틀어져서 석 달을 정양하다니요? 피골이 상접하다니요?”
“다른 사위의 벗들을 통해 알음알음 전해지던 일이라 알아내는 데 시일이 걸렸지. 다행히도 큰사위가 도성으로 돌아와 너를 만나려 한다니 조언을 구하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
며칠이 흐르고 정월 대보름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손님이 찾아왔다.
놀랍게도 나를 방문한 손님은 종친의 말손(末孫)이었다.
“현조부이신 금성대군의 말예 영흥부정(副正)일세. 얼마 전에 보성군수에서 진급하여 충훈부에서 말직을 행하고 있지. 자네가 남명 대감의 막냇사위인 이현인가?”
“성명 존함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형님을 뵙게 되어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세조가 저지른 계유정난이 없으니 금성대군의 후손이 제거당할 이유도 없으니 역사상에 없는 인물이 살아 있는 것이다.
영흥부정은 내 몸을 훑어보더니 다짜고짜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찍으려 하였다.
반사적으로 힘을 주어 허벅지를 굳혔는데 퍽 소리가 나며 주먹이 튕겨 나갔다.
“허벅지가 튼튼하기 이를 데 없으니 약관(弱冠) 이전의 나이임에도 입신체비의 경지가 수위에 오른 것이 분명하네. 자네의 경지는 지금의 나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으니 조언을 할 것도 없군.”
“제 입신체비가 부족한 일이니 더욱 매진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족하다? 내가 보기에 자네에게 부족한 것은 육질(단백질)일세. 자고로 정사를 행하면 육질이 부족해짐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 좋은 물건을 가져왔다네.”
단백질 문제가 아니고 그냥 힘들고 지쳐서 그런 것이지만 보양식품을 주면 감사한 일이지.
영흥부정은 선물로 가져온 작은 항아리를 건네줬는데 안에는 유청단백도 아닌 누런색의 밀가루만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자네를 위해 돌드레(하늘소) 애벌레를 구하였는데 수양대군께서 말년에 남기신 저서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육질 가운데 하나라 여겨 귀중하게 여기는 물건이지.”
밀가루에 손을 넣은 영흥부정이 꺼낸 물건은 내 손가락보다 거대한 하얀색 애벌레였다.
자세히 보니 목재의 대표적 해충으로 지목된 하늘소 애벌레가 아닌가.
영흥부정은 기억을 더듬으며 설명하였다.
“수양대군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도원군께서 입신체비에 관한 서적을 정리하셨고, 개중에 한 서적에서 눈처럼 하얗고 향이 없으며 약간 고소한 맛의 육질이 이상적이라 적힌 서적이 있었지.”
무언가 했는데 단백질 보충제다. 영직이가 죽어라 퍼먹는 단백질 보충제는 맛이 없고 향도 없는 보충제여서 순도가 높다고 했었지.
여기에 이런저런 물건을 섞어서 먹는다더라.
하지만 조선시대에 보충제가 있을 리가 없다.
“그리하여 서책에 적힌 이상적인 육질을 찾아내기 위하여 수많은 이들이 노력하였고 결국 진가루로 기른 돌드레 애벌레가 가장 근접하였다 했지. 내 이것으로 많은 효험을 보았다네.”
“형님께서 저를 위하여주시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부디 몸을 조심하게. 내가 막 혼인하였을 무렵에도 몸을 건사하기 힘들 지경이었는데 자네를 보니 앞길이 막막해지는군. 이만 빙부께 인사를 올리러 가보겠네.”
그날 저녁 반찬은 난생처음 먹어본 하늘소 애벌레 구이였다.
정성껏 석쇠에 구워 온 물건을 씹어 보니 곤충 특유의 향은 적은데 은은하게 올라오는 기름기가 입안에 맴돌았다.
현대 기술로 공장에서 정제한 보충제가 해답이지만 이 시대에는 만들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생각해 보니 수양대군에 빙의한 사람은 영직이와 비교할 수 없이 현명한 사람이 분명하다.
아마 세월이 지나도 보충제의 이상향을 찾아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을까.
이윽고 정월 대보름이 되고 부모님도 만난 이후 내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 * *
정월 대보름은 연휴이며 친구들 대다수는 소과에 장원급제하고 훈도로 부임할 예정인 나를 위해 선물을 한 아름 들고 왔다. 당연히 술자리의 주인공인 나는 눈을 돌릴 틈도 없이 술을 들이켰다.
“어허 이 친구 보게나, 안색이 창백하고 몰골이 파리한 것이 얼마나 학업에 몰두하였는지 알 길이 없군! 그런 몸이면 안사람이 걱정할 것이 아닌가. 술을 마시세!”
정탁이 소주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는데 안사람이 걱정한다는 말에 분통이 치밀어 올라 단번에 들이켰다.
독한 소주의 맛이 올라오는데 안주가 게 눈 감추듯 사라져 있지 않은가.
범인은 거대한 몸집을 뽐내는 임차손이었다.
녀석은 고향으로 돌아가더니 몸이 급격히 성장하여 주변에 견줄 자가 없는 무인이라 하였다.
그런데 지난 과거시험장에 임차손이 없었는데?
“승우(承友: 임차손의 자) 자네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네. 대체 무관에 어떻게 부임하였는가? 지난 무과 시험장에 자네가 당도하였다면 나를 찾아왔을 것인데.”
“아직 무과시험에 나설 정도로 학문에 익숙하지 않아 이 년 전 훈련원 초모에 응시하였으니 자네를 볼 시일이 없었지. 무과는 훗날 치르게 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나.”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무리 보아도 변명이 분명하였다.
그의 형이나 다름없는 정탁은 혀를 차면서 임차손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말했다.
“학문에 익숙하지 않다 변명하지 말게. 세상에 이 덩치를 보게! 체중이 백칠십 근(110㎏)에 달하여 기마 연습을 하는데 말의 다리가 상하여 당분간 포기한 것이네.”
“말의 다리가 상하였다 했나?”
이 시대의 말은 품종개량이 덜 되어 있어서 준마(駿馬)라 칭하는 무관들의 말이 현대로 따지면 관광지에서 마차나 끌고 다니는 수준이니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임차손도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근돈도 아니고 복근이 여덟 갈래로 갈라질 정도로 수련에 매진하였지만 근육이 너무 많은 것을 어찌하겠나. 하지만 거마(巨馬: 샤이어종 말)를 구할 길이 생겼으니 조만간 무과에 응시할 것이네.”
“거마? 거마는 불란서(프랑스)나 영길리(영국)에서 들여오는 귀한 말인데 자네가 거마를 구한다고? 대체 누구를 통해 거마를 구하는가.”
거마가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말이며 들여오기도 힘들고 번식시키기도 힘들어 한 마리에 은자 삼백 냥에 달하는 가격이었다.
무관이면 말 세 마리는 필요하니 구백 냥이 필요하다.
하지만 임차손의 체중에 갑옷과 각종 무기를 합치면 버틸 수 있는 말은 거마 외에는 없으리라.
주변을 살피던 임차손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진흥부정의 셋째 아들 이현문(顯文: 이균의 자)일세. 그 양반이 나에게 먼저 찾아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더군.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다음에 들여올 거마를 나에게 준다 하였네.”
“그 사람 때문에 선대인께서…….”
“상세한 일은 직접 만나서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닌가. 나는 이야기를 듣고 진흥부정은 몰라도 이현문 그 사람은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네.”
임차손도 더 이상은 사사로운 일이라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였다. 점심부터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는데 누군가 서신을 배달해 왔다.
초록색 봉투에 담겨 있는 서신은 관직에 대한 서신이니 모두 내 손에 들린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자네 훈도로 부임한다 하였지? 대체 어디로 부임할지 모르겠지만 어서 열어 보세나. 회령군 선생님께 수학한 자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훈도로 부임하니 관직에 출사하는 일이 아니겠나.”
“자네와 같이 학식이 뛰어난 사람은 도성 인근에 배정될 것이야. 부인을 독수공방시키지 않게 배려하지 않겠나.”
미안하지만 배려는 없을 것이다.
예조에 단단히 찍힌 나를 좋아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봉투를 뜯으니 빳빳한 한지 위에 구구절절이 훈도의 마음가짐이나 근무 방식이 적혀 있었다.
“어디일까. 탐라나 경원만 아니면 좋으련만.”
“강화도가 아닌가! 자네 복 받았군! 강화도에 부임하면 한강을 통해 반나절 만에 오고 갈 수 있지 않은가?”
이산해의 말을 들으니 소름이 좍 돋아 올라왔다. 내 눈으로 확인했지만 나의 부임지는 강화도다. 명백히 강화도에 부임한 훈도라 적혀 있었으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내도 친구들도 서신을 돌려보더니 나를 응원해 주었다. 아내를 독수공방(獨守空房)시킬 일이 없다며 기뻐하는 이도 있었고 질시하는 이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지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다.
예조에서 나를 만났던 이양원의 나이 차이는 16세이다.
그러하면 그의 동료 가운데 몇 명은 조식의 장녀나 차녀와 혼인한 사람과 친구일 것이며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나갔을 것이다.
“참으로 잘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본디 훈도를 배정할 적에는 사심이 들어가지 못한다 하였는데 같은 스승을 모신 분이 힘을 쓰시어 문책을 당할 일을 각오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아내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
같은 스승을 모신 분이 악의를 품고 내 신상명세를 파악한 다음, 문책을 당할 일을 각오하고 힘을 썼겠지.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닌가! 열흘을 근무하고 삼 일간 도성에 올라올 수 있다니 훈도 생활을 하며 아내를 돌볼 수 있어서 어찌 좋은 일이 아닌가.”
아무렴 좋은 일이다.
아마 도성에 올라온 첫날 거사를 치를 것이고 둘째 날 내 사사로운 일을 해결하고 내려가기 전날 밤에 다시 거사를 치르겠지.
이미 정해진 일이라 방법이 없었다.
그냥 시달리고 또 시달리며 죽어라 하체를 단련하길 두 달. 2월의 마지막 날까지 몸을 건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 * *
“그럼 다녀오겠소. 여드레 뒤에 돌아올 것이니 그동안 집을 잘 돌봐주시오.”
“집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간단한 짐을 챙겨 강화도로 향했다. 본래 내가 돌아오는 날까지 눈물로 밤을 지새울 것이라 각오하였던 아내는 해맑은 얼굴로 나를 배웅하였다.
강화도로 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배를 타고 가는 법이다. 말을 타거나 걸어가도 어차피 나루터에서 배를 빌려 옮겨가야 하니 한강부터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나은 법이다.
나루터에 짐을 짊어지고 도착하니 뱃사공이 손을 싹싹 비비며 나를 맞이하였다.
익숙한 일이었는지 지게를 내려놓자 짐을 바로 들어서 배로 옮겨놓으며 말했다.
“아이고! 훈도로 부임하시나 보군요. 이 배에 훈도로 부임하는 분이 두 분 더 계십니다.”
“두 분이 더 있다 하였소?”
“물론입니다. 제가 어떤 분들인지는 잘 모르는지라 소개할 수는 없지만 서로 말씀을 나누어보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강화도는 큰 고장이라 세 명의 훈도가 부임한다 하였던가.
인연을 만들면 좋은 일이니 짐을 똑바로 실어두는지 확인하고 뱃전으로 나아갔다.
한 명은 이미 배에 오르자마자 한 잔을 걸쳤는지 사지를 휘청거리고 있었으며 다른 한 명은 나보다 반 뼘은 큰 장신의 사내였다.
이윽고 사지를 휘청거리던 이가 몸을 돌려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복식을 보니 훈도가 분명한데 인사라도 나누세. 훈도로 같은 고장에 부임하는 것도 인연인데 같은 배를 타니 어찌 인연이 아니겠는가. 술이 절로 들어가겠군.”
“풍천 유씨의 자는 이현, 호는 서애라 합니다.”
“서애? 그 삼천 자를 작성한 기인 말인가?”
기인이라 칭하니 웃음이 나오려 하였다. 그런데 대낮부터 술을 홀짝이는 훈도의 얼굴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나?
그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연일 정씨에 속해 있고 자는 계함이며 호는 송강일세. 정송강이라 불러주게나.”
“혹여나 존함이 철(澈)이 아니십니까?”
“오호라. 내 성명별호를 알고 있다니 내 명성이 그리도 드높던가?”
당연히 알고 있지!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네가 만들었던 관동별곡부터 성산별곡까지 모조리 암기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본 이름이라 바로 답할 수 있었다.
“지난 진사시에 갑과로 급제하신 일은 익히 들었습니다. 듣자 하니 시가 빼어나서 손색이 없는 분이 진사가 되었다 하는데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이거 생원시 장원이 갑과의 말석을 차지한 나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런데 왜 존대를 하는지 모르겠네. 연배 차이는 여섯 살에 불과하니 서로 말을 놓으세.”
정철과 악수를 나눴는데 저 뒤에 있는 청년은 맥이 풀린 눈으로 우리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 외모이다.
내가 먼저 나가 인사를 올리고 손을 내밀었다.
“같은 배에 탄 것도 인연인데 일 년간 훈도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하지만 낯이 익은 분이시니 어찌 된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낯이 익기야 하겠네. 나는 안동 권씨의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일세. 혹여나 자네의 형제의 자가 응견이 아닌가?”
악수를 나누며 가만히 얼굴을 보니 형의 스승이었던 권철과 외모가 닮았다.
형님이 지나가는 말로 ‘스승님의 자제들 가운데 막내인 언신은 관직에 나설 생각이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하셨지.
관직에 나서지 않으려 하는 권철의 아들은 역사상에 단 한 명 외에는 없다.
내 생각이 맞는지 물어봐야겠다.
“형제가 아니고 두 살 많으신 형님이 계십니다. 일전에 쌍취헌(雙翠軒) 대감께 학문을 배운 적이 있는데 혹여나 존함이…….”
“외자인 율(慄)일세. 자네 둘 다 갑과에 속해 있는데 나는 가까스로 생원시 병과에 턱걸이를 하였을 뿐이지.”
권율이 왜 여기 있지? 이 양반 40대에도 음서로 나서지도 않고 가까스로 과거를 봐서 뒤늦게 관직에 오르지 않았나? 왜 20대의 파릇파릇한 나이에 과거를 보았단 말인가.
정철은 혀를 차면서 권율에게 술병을 건넸다.
“권언신 자네도 한잔 들게. 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이렇게 침울할 만하다네. 춘부장이신 쌍취헌 대감께서 자네를 모질게 대했다 하셨나?”
임진왜란의 명장이자 미래의 도원수 권율은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더욱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하였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부친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형들은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부족하여도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힘쓴다 하시며 과거를 보라 하셨지. 덕분에 병과로 턱걸이를 하였다네.”
“자네가 태공망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빼어난 재능을 가졌다면 익히 관직에 나아가 힘씀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관동별곡을 만들어서 후대 수험생을 괴롭히는 정철이기에 분노를 억누르느라 힘들 지경이었지만 남에게 일방적으로 술을 권하는 모습을 보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더군다나 술을 권하는데 남의 언급하기 싫어하는 가족사를 늘어놓아 짜증까지 솟구칠 지경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술병에 손을 내밀며 말했다.
“술을 권할 적에는 상대가 응하여야 하는 일이 법도가 아닙니까. 저는 술이 고프니 한 잔 나눠도 괜찮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풍류를 아는 친구로군. 잔뜩 취한 다음 드넓은 한수(漢水: 한강)의 모습을 보며 시구를 읊으세.”
익숙한 냄새가 나는 술병을 홀짝 들이켜니 알코올과 다른 짜릿하고 매캐한 맛이 올라왔다.
억지로 목으로 넘겼는데 이 기괴한 맛은 무엇일까.
정철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창안하여 고초를 넣은 술이라네, 잘 말린 고초를 빻아서 넣으면 술의 매운맛이 늘어나지만 쉬이 취하지 않게 되며 안주도 필요 없다네. 맛이 어떠한가?”
청주에 고춧가루를 타서 술안주와 술을 하나로 만들었다고? 성격도 괴팍한데 술버릇은 더욱 괴팍하다니!
대체 원래 역사의 유성룡은 이런 인간과 어떻게 친구가 되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