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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269화 (269/573)

근육조선 269화

2부 2장 6화 잡기(雜技)

본래대로면 스승이 오건 말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토론에서 결론을 만들어낸 날이니 이황에게 간단한 보고를 올려야 하리라.

하지만 생각 외로 이황의 퇴궐이 늦어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군, 해가 빨리지는 겨울이니 유초(酉初: 오후 다섯 시) 무렵이면 퇴청(退廳)함이 마땅하거늘.”

조선시대를 비롯한 전근대에는 새벽 동틀 무렵에 일터로 나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관료들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으니 밤늦게까지 일하고 저녁까지 먹고 퇴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하지만 이 세상은 아니었다.

관청도 근육화가 진행되어 수면을 거르면 근손실이 일어난다고 일찍 퇴근하거나 아예 궁궐이나 기관에 부설된 입신체비장에서 입신체비를 하고 숙박까지 하였다.

중요한 건 지금 김성일이 시간을 끈다는 사실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스승님을 뵙고 예자문집에 대한 해설을 전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다음 수를 바라는 제 마음도 간절할 지경입니다.”

“어허! 서애 자네가 바둑을 두는 방식과 내가 두는 방식은 다르다네. 자고로 바둑은 대세를 보고 큰 틀에서 움직이는 법이 아닌가.”

김성일과 나는 비는 시간을 이용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내 바둑 실력은 현대에서 아마 1단 수준인 아버지에게 철저히 배우고, 처음 일했던 회사 사장이 다시 나를 가르쳤기에 접바둑을 두면 프로선수와 둘 수 있었다.

더군다나 유성룡의 두뇌로 갈아탄 덕분에 실력이 더욱 상승했다.

바둑을 제법 두던 김성일도 적당히 봐주는 나를 이길 수 없었고 대부분 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김성일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더니 푸념을 늘어놓았다.

“에라 모르겠네! 자네는 바둑을 누구에게 배웠기에 이리도 빠르고 치밀하게 둔단 말인가!”

“자고로 큰 형국은 작은 여럿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행마는 상대에게 악수를 강요하며 제 손실을 막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가 바둑을 배운 방식이 이렇다.

특정 상황에서 이득을 보는 법을 외우고 이걸 바탕으로 부분마다 이득을 챙겨 최종적인 승리를 달성한다. 더군다나 한 수에 5분 이상 생각하는 시대라서 초읽기를 지키는 내 바둑은 엄청난 속기(速棋)로 보이겠지.

상대방은 대부분 내가 착수한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속도보다 빠르게 두다 삽시간에 무너져 내린다.

결국 김성일도 결정적인 실수를 시작하여 한 변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자충수를 두었군. 허허! 이러다가 귀퉁이가 완전히 무너지게 생겼군.”

김성일의 허탈한 웃음은 현실로 돌아왔다. 몇 수를 더 두자 그나마 온전하게 만들었던 집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나마 적당히 봐주기에 150수를 넘게 둘 수 있었지.

김성일은 돌 세 개를 떨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불계(不計)패이네. 약속대로 부와도약(버피)을 오십 회 할 것이니 바둑판을 정리하게나.”

바둑은 잡기(雜技)라 여겨 천대받는 형편이었지만 입신체비와 결합되면 천대받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슨 내기를 해도 재산에 관련되지 않고 입신체비로 귀결되면 허용되었다.

지금까지 적당히 져줘서 승률 7할을 유지했지만 아예 박살 낼 각오로 두면 백전백승이리라.

김성일이 쉴 새 없이 버피를 반복하는 동안 바둑판을 정리하고 돌을 가지런히 넣었다.

이황이 소유한 바둑돌이며 이 시대 기준으로 고급품인 규석과 흑요석으로 만든 녀석이라 공들여 닦았다. 어느새 땀으로 범벅된 김성일이 오십을 외치고 일어섰다.

“오십 회 모두 마쳤네! 다음번에는 자네에게 부와도약을 시킬 것이니 각오하게.”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저도 사지가 뻐근하니 몸을 조금 놀려야 시원할 것 같군요.”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바둑 실력을 올리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해 주변에는 상대할 사람이 없다. 이지함이 잘한다 하던데 나중에 한양으로 돌아오면 좀 두어봐야 하리라.

본래 유성룡은 국수(國手)에 가까운 바둑 실력을 자랑하였으니 내 행동이 틀리진 않겠지.

생각해 보니 수백 년이나 앞선 바둑을 조선시대에 전파했으니 국수를 넘어서서 바둑의 신기원을 열지 않았을까.

“또 바둑을 두었느냐?”

“스승님 퇴청하셨습니까?”

이황이 툇문으로 슬쩍 돌아왔던 덕분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럴 시간에 입신체비나 할 것이지 왜 바둑을 두냐는 질문 대신 내 바둑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성룡이는 바둑을 능히 두며 즐기나 너무 빠지지 말거라. 바둑에 몰두하면 잡기의 폐단이 나타나는 법이라 항시 주의해야 한다. 그나저나 늦은 때인데 어찌하여 나를 기다렸느냐.”

“스승님께서 얼마 전에 받으신 예자문집의 정체를 알아내 말씀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박승임이 정리한 내용을 전달하자 이황은 아예 등잔을 가져와 내용을 상세히 살폈다.

종교서적을 학술서적으로 인식하였으니 무슨 결론이 나올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황은 제법 상식적인 결론을 내렸다.

“결국 서방의 학자들을 들여와야겠구나. 그 선교사(宣敎師)인지 뭔지 하는 족속들이 아국에 들어오려다 왜국에 드나들게 되었으니 그들을 통하면 서역의 학자들을 들여올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려다 실패했다고? 종교적 지식이 없지만 본래 조선 말기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궁금한 마음에 질문하려 했지만 김성일이 먼저 나서서 물어보았다.

“선교사라 하셨습니까? 그들을 만나 뵌 적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이다. 십여 년 전에 서반아인인 사바로(사베리오, 프란체스코 하비에르)라는 선교사가 여송(필리핀)에서 말썽을 부린 적이 있었다. 그는 왜국에서 명을 달리하였지만 다른 이들이 계속 왜국과 명국을 드나든다 하였다.”

벌써 선교사가 일본까지 닿았나? 그런데 조선에는 오지 못한다니 아마 유교 문화권이라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시선을 가진 덕분일 것이다.

이황은 한숨을 내쉬고 설명을 덧붙였다.

“아국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어 서역인들은 모두 대양도(대만) 남쪽에 머물며 교역을 실시하지만 선교사가 그들의 상선을 통해 왜국까지 드나드는 형편이다. 다만 서반아(스페인) 사람이 올 것이지만 어쩔 수 없구나.”

“하지만 서반아인은 교역을 행하다 손해를 보면 해구(海寇: 해적)로 돌변하는 이들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작금에 이르러 여송 남쪽의 섬 여럿을 정벌하고 약탈을 저지른다 하였습니다.”

“여송 남쪽은 해구로 들끓는 무법천지이다. 수많은 국가가 난립하여 명나라에 조공을 바친다 하지만 실지로는 해구이니 서반아에서 이들을 매로 다스리는 것이 나을 지경이다.”

대체 동남아가 어떤 상황이기에 스페인 상선들의 약탈을 반길 지경이란 말인가. 아마 현대 소말리아처럼 해적들의 천국이 아닐까?

이황은 우리의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려는지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내일부터 성룡이는 상체를 단련하도록 하자. 네 수준이 근래에 들어 일취월장하였으니 이제 본격적인 가르침을 시작해도 될 것이 아니겠느냐. 밤이 늦었으니 어서 돌아가 보거라.”

“제자 물러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양팔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김성일이나 형님같이 신체가 완성된 이들은 상체 단련 위주의 입신체비로 전환하는데 나도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상체는 삼대운동 합을 늘리는 데 불리하다. 하체는 공좌(스쿼트)와 시거(데드리프트) 두 개이지만 상체는 의압(벤치프레스) 하나지 않는가.

형님은 내 고민을 알아채고는 애써 위로하였다.

“하체는 여러 회 반복하는 것이 답이지만 상체는 스승님께서 자주 단련하신 부위이기에 다양한 단련법을 마련하였지. 또한 스승님이 너를 위해 특별한 가르침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특별한 가르침이라 하셨습니까?”

“스승님께서 가장 아끼는 제자가 너이니 너를 위한 방법을 마련할 것이 아니겠느냐. 더군다나 지금까지 다채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셔서 견문을 넓히신 분이 아니겠느냐.”

아끼긴 하는데 아낀다는 의미가 좀 왜곡되어 있지. 학문적 완성이야 충분하다고 칭찬하면서 근육적인 완성도 추구하니까.

학문적 완성만 추구하면 좋을 것 같지만 방법이 있나.

* * *

다음 날, 아침 구보를 마치고 양송정에 돌아오니 다른 이들은 박승임과 함께 전신 입신체비를 시작하였지만 나는 아니었다. 안채로 들어가니 이황이 바둑판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둑판을 높게 올려두고 좌우로 벤치프레스에 쓰이는 평대(平臺: 벤치)와 다양한 무게의 소역기를 주변에 늘어놓았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있으니 이황이 나에게 손짓을 하고는 말했다.

“성룡이는 앞으로 상체를 행할 적에는 나와 함께 입신체비를 행하면서 바둑을 두어라.”

“하지만 바둑판이 입신체비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네가 바둑을 두는 방식을 많이 지켜보아서 알고 있다. 네가 대략 한 다경(茶經: 15분)에 열 수 정도를 착수하지 않더냐. 매번 이를 지키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15분에 10수, 실제로는 현대바둑의 규칙보다 약간 느슨하게 1분 조금 넘는 시간에 1수를 착수하는 버릇과 바둑 간에 무슨 상관이 있을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황은 나에게 선공을 위한 검은 돌을 주면서 말했다.

“네 실력이 뛰어나지만 이 방식으로 두면 내가 유리할 것이다. 처음 이십 수 정도는 생각할 일이 없으니 그대로 착수하고 이후에는 내가 행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따라 하면 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바둑을 두는데, 이황은 갑자기 내가 착수하기 이전 공격 방향을 정하는 와중에 소역기를 집더니 좌비막(坐臂莫: 시티드 컬)을 시행하였다.

한동안 당황하다 생각을 정하여 제대로 착수하니 이황의 눈이 바둑판으로 향했고 좌비막도 끝났다.

이황은 나에게 소역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우수로 좌비막 12회를 행하여라. 열다섯 근(9.6㎏)이면 네가 행하기 적당하지 않더냐.”

“대체 이게 무슨 방식입니까?”

“어허! 상대가 착수하기 이전에 상체를 마쳐야 하지 않겠느냐.”

지시에 맞게 입신체비를 하니 팔 근육이 뻐근하게 당겨왔지만 나도 입신체비를 제법 많이 해서 충분히 부담할 수 있는 하중이었다.

잠시 팔을 진정시키는 사이 이황은 바둑돌을 두면서 말했다.

“다음번엔 좌수로 행하는 좌비막이다. 내가 입신체비를 마치기 전에 착수하고 다시 내가 착수하기 이전에 입신체비를 행하는 방식이다. 이제 이해할 수 있더냐?”

내가 알게 모르게 지키던 현대 바둑 규칙과 입신체비는 공통점이 있었다.

초읽기 때문에 바둑은 1분에 1수를 두어야 하며, 입신체비는 동작을 시행하고 휴식을 마치면 1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보디빌딩과 바둑을 결합하다니. 이황의 발상에 무릎을 탁 치고 싶지만 너무 경박한 행동이라 하지 않았다. 나조차 상상하지 못한 참으로 근육적인 발상이라 오기가 생겼다.

“제자 충분히 이해하였습니다. 입신체비로는 스승님을 이길 수 없어도 바둑만큼은 절대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바둑으로는 너의 상대가 되지 않아도 입신체비를 가르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나와 이황의 바둑 실력 차이보다 입신체비 실력 차이가 몇 배는 되었다. 평소라면 거뜬히 이황을 꺾었겠지만 입신체비와 바둑을 병행하니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고통은 물론이요 상체 운동을 시행하니 상반신의 힘이 쭉 빠져나왔다.

결국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관성적으로 두었으니 생각하지 않는 고수와 철저히 생각하는 하수의 싸움이 되었다. 이황이 점점 유리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팔 힘이 빠져나가니 제대로 된 수를 둘 수 없었다. 마지막 운동을 시행하고 착수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바둑알 두 개가 바둑판 위로 떨어졌다.

“어허, 지금 착수를 한 것이냐 아니면 불계를 뜻한 것이냐.”

“아…… 으…… 착수를 하였습니다.”

마지막 과정으로 상체 악력을 기르는 운동인 완찰(腕紮: 리스트 롤러)을 실행하니 악력마저도 고갈되었다.

이 운동은 철봉에 끈으로 소역기를 달아두고 끈을 감아올리는 악력 강화 훈련이다.

손에 힘이 빠져 손가락 끝도 바들바들 떨려왔다. 지금까지 겨우 육십 수를 두고 상체의 기력도 빠져나갔으며 오늘의 입신체비도 끝났다.

이황은 혀를 차며 마지막 수를 두었다. 이제 입신체비도 끝나 가는데 바둑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바둑돌을 보존하려는지 커다란 덮개를 가져와서 바둑판 위에 얹어둔 이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바둑을 행할 적에 항상 즐기는 모습을 보았는데 입신체비를 같이하니 즐길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떠하더냐.”

마음 같아서는 신성한 바둑을 더럽히지 말라 하며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 보니 내 바둑 실력은 조선 제일이며 입신체비가 부족한 것이 전부였다.

내가 상체를 완성하고 바둑과 입신체비를 결합한 이 운동을 퍼뜨리면?

수많은 이들이 나에게 와서 바둑을 배우려 할 것이고, 입신체비를 배우면서 고통받으리라.

나는 억지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참으로 훌륭한 방식을 창안하셨습니다. 제가 상체에 능하게 되면 이 방식을 널리 퍼뜨려 바둑이 더 이상 잡기가 아닌 입신체비를 익히는 일을 돕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황은 내 표정을 보고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숨이 넘어갈 것 같이 크게 웃었다.

한참 웃고 있던 이황은 눈가의 눈물을 닦더니 밖에 나가서 말했다.

“성일이 게 있느냐? 내가 새로운 상체 단련을 창안하였으니 너도 와서 거들도록 하여라.”

김성일도 이황보다 바둑을 잘 두는 편이긴 하지. 벌써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고통받을 사람이 생겨나 기쁘다 못해 행복해질 지경이었다.

최소한 상체를 단련할 이유가 생겼으니 끝없는 입신체비의 길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친 기분이었다.

#작가의 말

서애 유성룡은 본래 역사에서도 국수로 꼽힐 정도로 바둑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변한 역사의 서애 유성룡은 현대 바둑을 두지만 입신체비도 가르치며 상대를 고통에 빠뜨릴 목적을 품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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