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1장 19화 – 임꺽정의 아들 (풍구 사진과 설명 추가) >
마당에 있는 비누로 손을 씻으니 매운 기운이 사라졌지만 얼마 동안은 손이 퉁퉁 부어 있겠지. 형님은 밭으로 향하면서 주변을 살피다 물어보았다.
“혹여나 사라진 닭을 누군가 훔쳐갔을까 염려하여 이런 일을 하였더냐. 하지만 저렇게 흉포한 닭을 어떻게 훔쳐갔는지 궁금하구나.”
“아무리 흉포한 닭이어도 밖에서 올무를 넣어 목을 틀어 죽이면 꺼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닭을 서리하였다면 깃털에 바른 고초가 손에 묻어 결국 눈이 상할 겁니다.”
형님도 머리가 좋은 편이라 내 계획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밭으로 돌아와 주변을 살피니 몇몇 아이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였다. 잡초를 뽑다 허리를 펴고 있는 이희신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한성부 서윤(庶尹 - 종4품 관직)댁의 아이들은 어디 갔어?”
“걔들은 애호박을 수확하고 밭을 갈아엎었으니 지금은 쉬고 있지. 해가 한풀 꺾이면 서총(양파)을 심을 것이라 하던데?”
“벌써 수확을 마쳤다고? 이놈의 고초는 왜 이렇게 기르기 힘든지 모르겠는데 나도 다른 작물이나 심을걸.”
고추를 보고 원망 섞인 이야기를 했지만 내 시선은 아이들의 면모를 살폈다. 스무 명의 아이들 가운데 여섯 명이 종적을 감췄고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었다.
뽑아낸 잡초를 한 아름 안아 밭의 바깥에 내던지러 가는데 이순신이 다가오고 있었다. 허우적거리며 밭두렁을 걸어오다가 나를 보고 달려오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희신이 형이야? 나 눈이 너무 아픈데 안질(眼疾 - 눈병)이 생긴 것 같아.”
“안질? 잠시 눈을 보여주지 않겠니?”
이순신은 내 목소리를 알아차렸는지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어린아이지만 얼마나 영악한지 긴장하지 않았으면 넋 놓고 당했으리라. 이순신이 몸을 돌린 순간 앞으로 박차고 나왔다.
“야! 왜 도망가!”
“형이 쫓아오니까 도망가지!”
이순신을 추격하며 생각했는데 이 시대의 서리는 범죄가 아니고 짓궂은 장난으로 인식된다. 기껏해야 회초리로 맞으면 끝날 일이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순신의 집안은 아무리 정6품이라도 양반 집안이며 녹봉이 부족할 이유도 없다. 기껏해야 출출한 배를 채우려고 과일을 서리하지 닭을 서리할 이유가 있나? 쏜살같이 뛰어가는 날 보았는지 아이들이 쫓아왔다.
“성룡아! 서리한 범인을 알아냈더냐!?”
“잠깐! 순신아! 대체 어디를 가는 게냐!”
형과 이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순신이 얼마나 날쌘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동산을 넘고 수풀을 지나 으슥한 산그늘이 진 곳으로 향했고 가까스로 추격에 성공했다.
“형! 탁(擢)이 형! 차손이 형! 들켰어!”
차손이면 얼마 전에 온 아이라 모르지만 탁이면 알고 있다. 한성부 서윤인 정명선(鄭明善)의 장손인 정탁(鄭擢)이다. 평소에는 데면데면하게 지냈는데 감히 닭을 서리해? 아마 이순신을 꼬드겨 닭서리를 시켰을 것이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야 잠깐만! 성룡아! 이건 꼭 필요해서 닭을······.”
“감히 형과 내가 기른 닭에 손을 댄다고! 넌 좀 맞아!”
엉거주춤한 정탁 대신 차손이라는 아이가 달려오는 나를 밀치려고 어깨를 들이밀었다. 나보다 어린아이이니 튕겨낼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온 몸을 던져 들이받았다. 그리고 어깨와 등에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내가 힘에서 밀렸단 말인가. 등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오니 밀린 수준도 아니고 내가 일방적으로 날아가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내 모습을 본 형님은 울화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척이 형한테는 손 못 대! 닭은 내가 먹었으니 내가 책임을 져야지! 어차피 쓸모없는 닭이니까 내 뱃속으로 들어가는 게 나았을 거야.”
“책임진다는 녀석이 내 동생을 밀쳐!”
몸을 뒹굴어 일어나니 기묘한 광경이 보였다. 형님이 허리를 낚아채 차손을 쓰러트리려 하였지만 상대도 자세를 낮춰 버티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용가리 통뼈라도 되나?
하지만 수 앞에는 장사가 없었는지 이희신과 이요신이 합류하자 차손이도 구석에 몰렸다. 먼지를 털어내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내가 합류하자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이희신이 이순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운룡이의 닭을 서리했느냐?”
“네 형님, 처음에는 작대기로 재미 삼아 닭을 괴롭혔는데 나중에 올무를 들이밀어 닭을 낚아채 서리하였습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릴 것이니 오늘 집에 돌아가 혼쭐 날 준비를 하여라.”
아마 이순신의 종아리는 오늘 수십 대의 회초리가 내리쳐질 것이다. 실행범인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으니 형의 입이 열렸다. 형은 방금 전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이야기는 들었다. 차손이 네가 쓸모없는 닭이라 했는데 그 닭들은 내가 서책을 보고 품종을 구분하여 사들였어. 네 말은 서책이 틀렸다는 말이야?”
“기르는 방법이 잘못되었으니까. 월국계(越國鷄)를 다른 수탉과 합사하면 다른 수탉들이 모조리 죽어버리니 쓸모가 없어. 마당에 풀어놓고 길러야 다른 닭이 도망쳐서 살아남으니까.”
형님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는지 어느 정도 분노가 누그러졌다. 하지만 차손은 어떻게 이렇게 세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형님이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한참 노려보니 차손이의 입이 열렸다.
“모든 일은 내 잘못이야. 내가 필요로 해서 닭을 서리할 계획을 세웠고 척이 형은 나를 도와줬고 몸이 날쌘 순신이를 보내서 서리했지. 나같이 더불어 사는 사람을 돌봐준 거라고.”
“더불어 사는 사람이라고? 그럼 네 성씨는 정씨가 아니고.”
“임(林)씨야. 선친(先親)께서는 양주 출신의 백정이시고 힘이 대단하신 분이셔서 훈련도감을 거쳐 취재(取才)로 군관이 되셨으니까. 존함은······.”
“임꺽정······.”
경기도 양주 출신의 백정에 임씨이며 힘이 대단한 사람이라면 이 시대에 임꺽정 외에 더 있겠는가?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는 실수를 해서 임차손이 나를 노려보았다. 함부로 사람 이름을 말했으니 손사래를 치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선대인(先大人 - 남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높이는 말)의 존함을 함부로 말해서 미안해. 소문을 듣기로는 황해도에 장사로 손꼽히는 이가 있었다 하였는데 호(號)를 들은 적이 없어서.”
“아버지는 호가 없으셨지. 귀찮은 일은 싫어하시는 분이셔서 호탕하게 살며 하고 싶은 일을 하셨어. 소문이 도성까지 퍼질 줄은 몰랐는데 알고 있으니 잘된 일이야.”
본래 역사에서 도적일 임꺽정이 군인이 되었으며 이런 튼튼한 후손을 남길 줄은 몰랐다. 정말 임꺽정의 아들이라면 천하장사의 자질이 있으리라. 임차손은 고개를 푹 숙이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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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 산골에서 태어나 백정으로 자란 임꺽정은 어린 시절부터 힘이 장사로 손꼽혔다. 그가 열셋 무렵에 멧돼지를 창 하나로 잡았으며 열여섯 무렵에는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삼대운동에서 거뜬히 800근을 달성하였다.
하지만 양주 산골은 비좁고 더 이상의 땅이 없었다. 결국 장남인 형이 가업을 물려받게 되었으나 차남인 임꺽정은 호탕하게 부모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나이 18세인 1539년, 임꺽정은 노잣돈을 약간 받아 황해도로 이주를 택하였다. 본래 백성들의 이주는 불가하지만 백정은 중인(中人)에 가까운 계층이기에 이주가 허락되었고. 백정답게 기술을 살려 황해도 해주에서 푸줏간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임꺽정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요동 일대의 치안이 붕괴된 이후 이십 년이 지나자 요동해적들이 기승을 부렸으며. 이들은 육로로는 의주 일대를, 해로로는 황해도 일대에 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결국 화는 임꺽정이 거주하는 마을에 미치게 되었다.
“내가 네놈들의 명줄을 따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구나! 내 평생 내 벗 서림이를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운 네놈들을 소탕하고 말겠다!”
타고난 용력으로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 일조하였지만 자신이 살던 고을이 불타고 친구들이 죽은 임꺽정은 더욱 강해지기 위하여 1543년 훈련원 초모에 응시하여 가볍게 통과하였다.
각지를 떠돌며 공훈을 쌓던 임꺽정은 마침내 1549년 훈련원 출신 병사를 대상으로 한 무과 별시(別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황해도 해주의 참군(參軍 - 정7품 무관)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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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에 대한 기나긴 이야기를 듣자니 어느새 해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살기 위해 도적으로 내몰린 임꺽정이 역사가 변한 덕분에 정식 무관으로 복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는 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무렵에 해주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해안을 수비하는 일에 몰두하셨지. 그 사건만 아니었으면 여전히 살아 계실 거야.”
“그 사건이라니?”
“순흥군 대감의 조카인 이균(鈞)이라는 사람이 해주 읍내에서 행패를 부렸던 일이 있어. 수양대군의 후손인 진흥부정(副正)의 아들이라 가문의 위세에 힘입어 날뛰었지.”
본래 역사의 하성군 이균이자 훗날의 선조겠지. 순흥군의 형이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는데 형도 그의 아들도 죄다 망나니라서 장남의 신분으로도 예진원 대제학을 물려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부정이면 대군에서 시작된 종친의 끝자락이요. 이균은 부정의 아들이니 종친조차 아니고 일반 사대부였으리라. 임차손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시던 아버지께서 그 광경을 목격하셨고 사태를 수습하려고 이균의 팔을 붙잡고 조용히 말씀하셨지. 더 이상 행패를 부리면 손을 쓸 것이라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입신체비를 했다면 힘으로는 견딜 수 없지 않아?”
“입신체비사는 힘이 대단할 뿐 싸움은 덩치보다 부족해. 아버지는 한 대 맞으신 다음 명치에 한 대, 정수리에 한 대 그리고 등판에 한 대를 후려치셨고 상대는 찍 뻗더라고.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 시작되었어.”
순흥군보다 못해도 말릴 사람이 없다 하면 범상치 않은 체격일 것이다. 그런데 단 세 방에 기절시켰다면 임꺽정의 힘은 짐작하기 힘들 지경이며 임차손도 마찬가지이리라. 임차손은 한숨을 쉬며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균의 아버지 진흥부정은 매일같이 해주병영에 들이닥쳐 아버지를 파직하라고 소란을 피웠고, 아버지는 소란을 피하려고 의주에 나아가 요동 도적들을 소탕하려 하셨지. 거기서 변을 당하셨어.”
“대체 왜? 아무리 도적 떼라 하여도 정병의 상대가 될 이유가 없잖아.”
“아버지가 속한 병사들이 요동 도적들의 본거지를 급습하였는데 다른 병력들과 같이 함정에 빠지셨거든. 다른 병사들 대신 퇴로를 막아서신 덕분에 병사들은 구했지만 부친께서는 명을 달리하셨어. 그 충격으로 폐병에 시달리시던 모친께서도 명을 달리하셨고.”
조선 정규군을 요동 도적들이 함정에 빠트렸다고? 대체 요동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지만 본래 여진족이 살던 변방에서 인외마경으로 탈바꿈된 것이 분명하였다. 임차손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거듭했다.
“천애고아가 되었으니 경기도 양주로 돌아가려 하였지만 선친과 친하시던 서계(西溪 - 정명선의 양부 정세호. 본래 역사 선조의 외할아버지) 대감께서 나를 돌려보낼 수 없다 하시고 한양으로 데려오셨지.”
“잠깐. 네가 닭을 서리하는 거와 네 생애와 무슨 관계가 있는데.”
형님의 말대로 집안이 좋으니 더더욱 닭을 서리할 이유가 없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에 형님이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는데 임차손의 입에서는 상상도 못 한 대답이 나왔다.
“요동 도적들에게 복수하려면 강해져야 하고, 강해지려고 어린 시절부터 입신체비가 아닌 아버지가 즐겨 하시던 훈영제식법으로 몸을 단련했지. 하지만 내 모습을 본 집안 어른들이 수련을 금지하였어.”
“몸을 단련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고기를 줄여?”
“관례를 올리기 전에 몸을 놀리라고 하시며 양을 많이 줄이셨어. 그래서 육질이 부족하니 다른 데서 보충할 방법을 생각하다 꾀를 낸 거야. 닭이야 어머니의 폐병을 다스리려고 많이 길러봤으니 이론은 몰라도 지식은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이유였기에 형님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복수의 칼날을 갈아대는 아이를 말리는 양부모, 그리고 어떻게든 수단을 찾아내려는 아이의 대립 사이에 우리 형제가 끼인 상황이니까. 형님은 한참 고민하다가 답을 내렸다.
“네가 경험이 있는 것은 선대인께서 취미 삼아 닭을 기른 적이 있어서겠지? 그러니 나를 도와서 닭을 기르는 데 힘을 보태줘. 그럼 지금까지의 일은 없던 걸로 하지.”
“그걸로 충분해?”
“계란의 맛이랑 닭의 육질을 평가할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적합하겠네. 앞으로 닭을 길러서 나온 부산물은 모두 너와 나눠 먹으면 되니 앞으로 서리는 하지 말고.”
임차손과 형님이 손을 맞잡았으니 서로 친구가 되었다. 임꺽정의 아들이라는 보증수표를 거머쥐었으니 훗날 이순신 말고도 쓸 만한 무관이 생긴 것이다. 훈훈한 분위기가 감도는데 이순신이 쥐죽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그러면······ 내가 서리한 일도 없던 일이 되는 거야?”
“순신이는 그대로 말할 것이다. 차손이는 필요하여 닭을 서리했으며 서로 화해하였지만 너는 장난삼아 닭을 훔친 것이 아니더냐! 이를 용납할 성싶더냐!”
어떻게든 발뺌하려는 이순신의 정수리 위로 큰형 이희신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이순신도 오늘 이후에는 이상한 장난을 줄이면서 착실한 장수로 성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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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되어 서리가 내리자 적은 수만 생존한 고추를 수확하고 감자도 캐냈다. 당연하지만 총천연색으로 물든 감자가 대다수에 내가 본래 역사에서 먹던 회색 감자는 수확되지 않았다.
그나마 색이 약한 감자를 내년 종자용으로 비축해 두고 나머지 감자를 쪄서 아이들과 나눠 먹으니 먹을 만하였다. 형님의 닭? 임차손의 경험이 보태지자 알을 쉴 새 없이 낳더라고.
겨울 동안 내가 하는 일은 다음 기구를 만드는 작업이다. 도면을 베껴 그리는 것도 질렸으니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서 실력을 가늠해야지. 회령군은 팔짱을 끼며 내가 설계한 기구의 작동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네가 만든 두 번째 기물의 이름이 무어라 하였느냐. 풍구(風甌)라고?”
“그렇습니다. 농촌에서 지내보니 곡식의 쭉정이를 털어낼 적에 한 되를 골라내 키질을 하니 한나절이 걸려도 한 섬의 곡식만 털어내는 일이 전부가 아닙니까.”
“내가 너희에게 농사를 알려주려 하였는데 성과를 거두었으니 다행일 뿐이지.”
본래 만들려 했던 물건은 족답식탈곡기, 현대에도 농촌에 가면 가끔 사용하는 그 녀석이었다. 하지만 누가 개발했는지 몰라도 전남 일대의 간척지에서 쑥 하고 튀어나와 널리 퍼져나갔다.
소규모 농가에서는 도리깨질을 하지만 농토가 넓은 집은 족답식탈곡기를 하나씩 들여놓아 알차게 사용한다더라. 덕분에 다음 단계인 풍구를 개발할 수 있었다.
“손잡이 돌립니다!”
“이게 정말 효험이 있을지는 모르겠어. 일단 한 되만 부어보마!”
풍구의 손잡이를 돌리니 행랑아범이 반신반의하며 위에 열린 입구에 곡식을 천천히 부어 넣었다. 그러자 풍구 안의 날개가 돌아가며 생긴 바람에 쭉정이가 튀어나왔다. 행랑아범은 하늘로 흩날리는 쭉정이를 보면서 혀를 찼다.
“장정 두 명이 달라붙으면 한나절에 스무 섬에서 쭉정이를 골라낼 수 있겠구나. 풀무와 닮은 녀석인데 왜 나는 이런 기물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모래와 돌이 골라져 나오지 않으니 키질로 골라내야 하지 않습니까.”
“안으로 쏠린 모래와 돌을 빼내는 일은 쉽지만 쭉정이만 날리고 알곡을 골라내려면 심혈을 기울여서 키질해야 한다. 손에 힘이 조금만 들어가면 알곡을 바닥에 흩뿌리지 않더냐.”
사용해 보았더니 개선점이 명확하게 존재했다. 바람의 길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쭉정이가 모두 날아가지 않고 알곡과 섞여서 재차 풍구질을 하게 만들었다. 임시로 만든 도면에 수정표시를 하니 어느새 이지함이 돌아와 풍구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풍구는 손잡이를 돌려 안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이 위의 입구에 곡식을 붓는다. 그러면 바람에 의해 쭉정이가 날아가 알맹이만 남는 방식이다. 이지함도 사용법을 이해했는지 풍구의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