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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259화 (259/573)

< 2부 1장 16화 – 이미 근육화된 조선(2) >

양반가라면 역사를 가르치니 살수대첩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었고 관객으로 찾아온 평민들도 알음알음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젊은 유생이 나서서 손을 들고 물어보았다.

“순흥군 대감께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네 명이서 살수를 재현할 수 있습니까? 당시 옛 고려군이 육만 명에 수나라 병사가 삼십만 명에 달한다 하였습니다.”

“좋은 질문이군. 네 명이 재현하면 삼 대 일의 싸움이 될 것이며 이는 계백전과 흡사한 구도가 되겠지. 하지만 숙부님께서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시어 살수의 틀을 새로 창안하였다네.”

틀을 새로 만든다 했으니 규칙 변경인데 레슬링에서 규칙? 순흥군은 상상도 못 한 이야기를 했다.

“본디 내수린은 수를 정해놓고 대결을 벌이지만 살수만큼은 내수린을 익힌 평범한 유생도 참가할 수 있다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저희가 참가한단 말입니까?”

“숙부님께서는 내수린을 즐기는 이가 늘어난 덕분에 관객과 함께하는 내수린을 원하셨지. 관객들 가운데 내수린에 능한 자 열여섯이 참가하여 도합 스무 명이 내수린을 행할 것이네.”

유생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수를 헤아렸다. 빈객이니 나이가 지나치게 많거나 어린 사람이 없었고 대부분 스물에서 마흔 사이니 사람은 충분한 것 같았다.

설명이 시작되었는데 요약하면 살수를 재현하려고 강 위에 내수린장을 만들 수 없으니 수나라 병사 배역은 내수린장의 밧줄 가장 아래로 기어들어 와서 공격한다.

어마어마한 물량을 표현할 의도이니 몸이 성하다면 언제라도 돌아와 덤빌 수 있었다. 다만 기술에 걸려 밧줄의 위로 날아간 경우에는 크게 당했다 여기니 탈락이다.

안전장치로 두꺼운 짚단이 경기장 주변에 차곡차곡 쌓였으니 머리가 먼저 떨어져도 큰 부상은 입지 않으리라. 순흥군은 마지막 설명을 이어가며 당부했다.

“부디 사지가 상할 일이 없기를 비니 유념하게. 다시 말하지만 밧줄의 맨 위를 지나쳐 떨어지면 즉시 탈락이며 몸에 큰 충격이 올 수 있다네.”

시범을 보이려는지 순흥군과 함께 찾아온 레슬러 아니 내수린꾼이 훌쩍 밧줄 위를 뛰어넘어 짚단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이 규칙이 현대의 프로레슬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벤트 경기인 로얄럼블이다! 피아 구분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지 골자는 다수의 대결이다. 설명을 들은 유생들 가운데 건장한 이들은 옷을 갈아입으려 사랑채로 들어갔다.

어느덧 관객들만 남자 순흥군은 할 말이 있었는지 내수린장 가장자리로 걸어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푸근한 미소가 엄숙하게 변하니 위압감이 엄청났지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는 듯이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몇 번이고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아니한 말이 있습니다. 내수린꾼은 철저히 단련된 입신체비사들이 배움을 거듭하여 행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내수린꾼도 불구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니 프로레슬링 경기 시작 전에 나오는 경고문이 순흥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는데 순흥군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함 그 자체였다.

“부디 내수린꾼이 아니며 내수린장도 아닌 곳에서 함부로 내수린을 따라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은 더욱 유념하여야 한다. 작년에 도성에서 내수린을 행하다 죽은 아이가 여섯이요, 불구가 된 아이가 스물이 넘으니 절대 하지 말거라.”

얼마나 사고가 빗발치는지 어른들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혀를 차며 바라보았고 회령군도 앞으로 나와서 한마디를 보탰다.

“순흥군의 말이 옳다네. 아무것도 모르고 내수린을 행하면 사지가 부서지는 일이 흔하니 먼저 입신체비를 행하게. 자네는 어서 복식을 갖추도록 하게나.”

잠시 뒤 복장을 갈아입은 이들이 내수린장에 도열하였다. 순흥군을 포함한 고구려군 담당 세 명의 복장은 하의가 반바지에 상의가 두정갑이다. 수나라는 우중문을 제외하고 모두 입신체비복이고.

입신체비로 다져진 덩치들이 도열해 있으니 장관이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링 위의 세 명이 더 강한 것 같다. 순흥군과 가장 유사한 현대인? 천하장사 이윤기의 전성기 모습이다.

종아리 근육은 울룩불룩하게 솟아 있으며 두툼한 목근육은 철판을 구긴 듯이 경직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다른 두 명도 체격이 조금 부족할 뿐 삼대운동 600㎏ 정도는 가뿐하리라. 준비가 끝나자 순흥군은 개막을 알리는 유명한 시구를 읊었다.

“귀신같은 책략은 천문을 깨달았고. 신묘한 셈은 지리를 다하였도다.”

정중한 목소리로 여수장우중문시를 읽은 순흥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우문술을 담당한 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투구를 집어 던지고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의 말을 내가 모를 것 같더냐! 평양성으로 진격하라! 옛 고려를 멸망시켜라!”

정사가 아닌 야사(野史)인 궁예의 기록도 떳떳하게 재현하는 내수린이니 특성 상 역사를 적당히 왜곡 아니 능멸(凌蔑)하였다 생각하자. 순흥군 또한 분노한 얼굴로 일갈(一喝)하였다.

“퇴각을 권하였는데도 듣지 않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자로다! 내 근육으로 친히 네놈들을 몰살시키겠다! 그아아아앗!”

순흥군이 갑옷을 양손으로 잡고 힘을 주자 소가죽으로 만들었을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고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윽고 두 장수들도 갑옷을 훌렁 벗어 던지며 대본을 읊었다.

“살수를 건널 무렵에 뒤를 쳤어야 하는데 아쉬울 뿐이오.”

“하지만 우문술의 병력은 배고프고 지친 상태이니 승산이 있소. 나는 장군을 믿겠소.”

나란히 서 있던 어느새 세 장수는 품(品) 자로 등을 맞대 서로를 보호하였다. 이윽고 한 유생이 무대 위로 기어올라 기세등등하게 순흥군에게 달려들었다.

“을지문덕! 네놈의 목을 받겠다악!”

가장 먼저 달려든 이는 이지함이었다. 순흥군에게 달려든 이지함은 허벅지를 걷어차이더니 목을 잡힌 채로 끌려갔다. 이지함이 놀란 척 팔을 풀려 애썼지만 순흥군의 두꺼운 팔뚝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림없는 소리를! 냉암쇄(冷巖碎 - 찬 바위로 깨트리다, 스톤콜드 스터너)나 받아라!”

대학생 시절 밤샘을 할 때 틀어놓은 TV로 보았던 그 기술이다. 팔을 휘어 감아 어깨로 이지함의 목을 고정한 순흥군은 털썩 주저앉았고. 쾅 소리가 울리며 이지함의 몸이 튀어 오르고 사지를 경련하며 쓰러졌다.

이지함이 몸부림을 치며 무대 밖으로 굴러떨어지자 우중문의 배역을 담당한 이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지금 무엇 하느냐! 을지문덕의 목을 베어야 한다! 을지문덕이 가장 앞에 나와 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거라! 어서 쳐라!”

바닥을 뒹구는 이지함을 제외한 유생들은 눈치를 보더니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내수린장이 흔들리자 유생들도 적당히 수를 줄이며 기어올라 3:3의 구도가 이어졌다.

을지문덕 배역은 주인공이지만 무적은 아니었다. 한 유생이 순흥군의 사타구니를 잡고 어깨에 손을 얹으며 힘을 쓰자 순흥군은 스스로 슬쩍 뛰어오르며 기술을 완성시켰다. 상대 하나를 내던지면 다음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모습이었다.

“을지문덕에게 체투(體投 - 바디슬램)를 적중시켰다! 어서 덮쳐 아악!”

을지문덕에게 추가 공격을 날리려는 유생의 가슴에 두터운 팔뚝이 날아든다. 팔뚝에 맞는 순간 뒤로 훌쩍 뛰어오른 유생은 등으로 떨어지며 굉음을 내었다. 물론 관객들은 한 명이 당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른다.

“우와! 사람이 뒤로 훌쩍 날아갔어!”

“역시 수양근을 달성하신 분이라 힘이 대단하시구나!”

아이들은 흥분하다 못해 경기를 일으킬 지경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예의범절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이었는지 다들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형님도 내 어깨를 흔들어대며 외쳤다.

“성룡아! 처음 보는 내수린이지만 참으로 훌륭하지 않으냐! 입신체비에 어서 능숙해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구나.”

“저는 마음이 약하여 내수린을 행하지 못할 것 같지만 참으로 즐거워 보입니다.”

나는 조금 흥분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살벌한 격투이지만 현대의 프로레슬링에서 ‘접수’라 칭하는 낙법과 과장된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연기력이 성숙하지 않았는지 현대의 경기를 봤던 내 기준에서는 미숙한 접수였다.

레슬링을 보급하던 수양대군이 생각 없이 기술만 전수하지 않고 접수를 가르쳤으니 다행이다. 호되게 당하고 돌아온 이지함은 턱을 부여잡으며 내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냉암쇄는 몇 번을 당하여도 험난한 기술이라 어금니가 부러질 뻔하였다. 그런데 성룡이 너의 눈빛은 왜 이러느냐. 혹여나 내 접수(接收)가 어색하였느냐?”

이지함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더니 내 태도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을 알아차렸나 보다. 억지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접수가 무엇입니까?”

“지나친 겸손함은 예의가 아니니 그러한 말은 하지 말거라. 분명 내 동작이 이상함을 간파하였으니 대단한 일이 아니겠느냐. 본디 내수린은 접수라 하여 몸을 상하지 않고 서로를 돋보이게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다.

나야 현대에서 프로레슬링을 봤으니 당연히 알고 있는 건데? 하지만 이지함은 내가 알려주기 전에 접수 개념을 터득했다 생각했는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어린 나이에 내수린에 처음 본 자리에서 깨우쳤으니 네 오성(悟性 - 지성)이 대단하구나. 나도 몇 번을 보아야 알아차렸으니 내수린의 자질이 참으로 빼어나구나.”

“제가 내수린에 자질이 있다 하셨습니까?”

“물론이지. 내수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접수이며. 접수는 눈으로 보아 이해하고 몇 번이고 연습하여 익히는 것이다. 이해가 빠를수록 익힐 때에도 고생하지 않고 능숙해지는 법이다.”

이지함은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유중영의 차남 유성룡이 눈으로 보고 접수를 깨우쳤으니 장성하여 내수린에 달인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분명하다.

그래도 빠져나갈 구석은 있으니 이놈의 내수린인지 레슬링인지를 하자고 제안하면 적당히 변명하고 피하면 될 것이다.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사이 내수린은 종반을 향해 달려갔다.

“지다니! 또 졌어! 별동대가 아예 전멸을 하였다고!”

“이제 우중문 네놈만 남았구나! 다들 지쳤으니 뒤로 물러나시오!”

아무리 접수해도 몸에 상처가 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는지 순흥군의 복근에는 멍이 들었고 정강이는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이윽고 을지문덕 대 우중문의 최후의 일전이 시작되었다.

서로를 메치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니 관객들 모두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 적막한 가운데 을지문덕 아니 순흥군이 최후의 힘을 발휘하였다.

상대의 팔뚝을 잡은 순흥군이 온 힘을 다해 밧줄로 집어 던지자 스프링도 아닌 일반 밧줄에 튕긴 우중문이 쏜살같이 무대 중앙으로 날아들었다. 순흥군은 거대한 근육에 걸맞지 않은 동작으로 온 몸을 던지며 날렵하게 발차기를 날렸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며 우중문이 대자로 무대 위에 쓰러졌고 바로 다음 기술이 시작되었다. 관객들은 기둥을 부여잡고 올라탄 순흥군을 보며 기절할 정도로 흥분하였다.

“저기 보아라! 회축(回蹴 - 스피닝 힐 킥)으로 상대를 쓰러트리고 기둥으로 올라가신다!”

“설마 삭월락(朔月落 - 문설트)인가!”

기둥에 올라선 순흥군은 그 거대한 몸으로 한 바퀴를 돌아 복근으로 상대를 찍어 눌렀다. 적게 잡아도 100㎏을 달성한 거구에게 짓눌린 순간 결판이 났다.

“을지문덕! 을지문덕! 을지문덕!”

거대한 양반가가 떠나갈 것 같은 함성이 울리며 내수린의 막이 내렸다. 연출된 내용임을 다시 강조하려는지 순흥군은 다른 이들과 모인 채 회령군에게 인사를 올렸다.

“회령군 어르신께 번잡한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네, 사지에 타박상이 빗발치듯 일어나니 어서 들어가 몸을 관리하게. 내 친척이자 벗이었던 해양군(海陽君 - 수양대군의 손자)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군.”

순흥군 일행이 돌아가고 내수린장도 철거되며 잔치의 막이 내렸다. 빈객과 아이들이 남아서 잔치가 끝났음에도 북적거리는 무계정사에서 회령군의 우울한 말이 들려왔다.

“결국 주상의 손에 놀아난 격이구나. 지함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았으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이놈의 나라에서 관직에서 물러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몇 살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죽기 직전까지 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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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계정사에서 여러 학문을 배운지도 여섯 달이 지났다. 한겨울이지만 배움의 열정은 어디 가지 않았는지 아이들은 오히려 열일곱으로 늘어났고 빈객들도 늘어났다.

이번 강의는 현대로 따지면 세계지리인데 이지함의 지인인 유생이 우리에게 세상을 알려준다며 강의를 시작하였다. 칠판 위에 어설픈 필리핀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여송은 개성에서 배를 타고 스무날을 내리 남쪽으로 내려가야 닿는 고장이다. 삼월만 되어도 아국의 칠월과 같은 더위가 몰아치며 비가 내렸다 하면 무릎 높이까지 잠길 지경이다.”

지도 위에 특산물을 설명하는데 역시나 변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근육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여송은 지독하게 습하고 더운 고장이라 입신체비를 행하기 힘든 고장이다. 비가 내리는 시기에는 습기가 들어차 숨이 막힐 지경이지.”

“퇴계 대감께서 여송도 관찰사로 임명되셨는데 근손실을 겪으면 큰일이 아닙니까.”

“쉰이 넘으셨으니 이미 근손실이 시작될 연세이시다. 다만 외방에서 일하시며 근육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셨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거라.”

그놈의 근손실과 근육. 저 말을 언제쯤 듣지 않게 될까? 나중에 율곡 이이와 학파를 만들어 몰아내면 듣지 않을까? 수업이 끝나고 자유주제로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다.

연필과 도면을 작성할 자와 평판(平版)을 꺼내 도면의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넉 달 전부터 회령군에게 허락을 받고 작성하여 거의 완성된 녀석인데 형님은 닭과 관련된 서적을 챙기다가 도면을 보고 감탄하였다.

“네가 재주가 많음은 알았지만 도본(圖本 - 도면)에 능숙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제가 오 년은 수행해야 도본에 준하는 녀석이 나올 것이며. 십 년은 수행해야 제대로 된 도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십 년이라 하였느냐. 네 재주로 공조에 들어가면 대성할 것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형님은 만족한 것 같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영 아니었다. 어린 손이니 몇 년은 연습해야 내가 만족할 도면이 나올 것이며 도구의 품질도 부족했다. 형님이 멀어지자 절로 푸념이 나왔다.

“어쩌겠어. 연필도 엉망이고 평판도 엉망이고 마스킹 테이프 같은 보조 도구도 없는데. 그리고 이놈의 아마지는 잉크에 최적화된 종이라서 불편하네.”

도면 작성용 종이라는 아마지를 사용해보니 천에 가까운 질감이었다. 덕분에 현대에 실컷 사용한 켄트지(영국 켄트에서 만든 종이, 도면작성용으로 쓰인다)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유성룡의 기억력 덕분에 대학교 1학년 때 발표주제였던 켄트지 제조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닥나무 섬유와 목화솜을 사용해야 하니 성인이 되어서 주문해야 하리라. 억지로 완성한 도면을 보면서 회령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런 재주를 가졌다면 이현전에서 일하는 율곡 이이와 친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겠지.”

이현전이 무슨 관청인지 알아봤는데 시작은 천문과 화학이었지만 점점 발전하여 이공계적 지식을 요구하는 관청이 되었다 한다. 물론 가르쳐준 사람도 없는 공학 지식을 늘어놓을 수 없으니 머리를 굴렸다.

유생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를 들으니 김지라는 사람이 포가(砲架 - 화포의 아래에 두는 틀)를 어린 시절 개량했다가 대과에 합격한 직후 이현전에 발탁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덕분에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첫 작품은 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도구이면서 의외로 근대에나 개발된 도구이다. 마침 회령군이 돌아왔는지 행랑아범이 크게 소리를 냈다.

“대감님이 들어오신다!”

“선생님! 다녀오셨습니까!”

아이들 모두가 인사를 올리자 나도 인사를 올렸다. 회령군은 둘둘 말아놓은 아마지를 보더니 내가 도면을 완성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혹여나 도본을 완성하였느냐.”

“제 솜씨가 부족하지만 필요한 도본은 갖춘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도면? 평면도, 단면도 그리고 묘사한 회화 세 가지로 끝난다. 하지만 내가 그린 도면은 현대의 형식대로 평면도, 입면도 4개, 단면도 2개로 이루어졌다. 회령군은 한참 동안 도면을 살피더니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상세하니 솜씨가 부족하여도 알아차릴 수 있어 좋구나. 하지만 이 도구는 마차(馬車)도 아니고 우거(牛車 - 소달구지)도 아니며 가마도 아니구나.”

“가마와 우거를 합친 도구를 창안하여 보았습니다. 소 대신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도구이며. 번잡한 도성에서 가마 대신 활용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완성한 도면은 인력거(人力車)였다. 본래 서양에서 만들어졌지만 일본을 통해 유입되자 가마를 순식간에 몰아낸 그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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