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1장 13화 – 선생님을 찾아보자(1) >
사람이 죽어나간 이야기를 하니 답답했는지 이지함은 냉수를 한 대접 들이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옆을 보니 술을 퍼마시는 아버지와 친구들은 술잔이 아닌 대접을 들어 술을 마셔댔다.
이지함은 나를 따라 아버지를 보더니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미주 개척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미주인들이 두 번째로 앓은 질병은 두창이 아닌 마진(痲疹 - 홍역)이었다. 마진은 석감을 사용하여 몸을 씻어도 번져나가니 아직도 수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더냐.”
“저도 형님도 마진을 앓아 크게 고생하였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요.”
내가 빙의하기 이전의 유성룡과 유운룡 형제도 홍역을 앓은 기억이 있었다. 다섯 살 무렵인데 아직도 내 목덜미에 희미하게 남은 홍역 흉터가 남아있다.
현대에도 예방접종이 없으면 수천 단위가 감염되는 질병이니 이 시대에는 해답이 없을 것이다. 이지함도 홍역을 앓았는지 팔뚝을 슬쩍 걷어 희미하게 남은 홍역 흉터를 보여주고는 말했다.
“새로운 질병에 시달린 미주인들은 물러나 화의를 맺었고. 아국에서는 사력을 다해 이들을 도왔다. 덕분에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지만 관찰사인 한보(韓堡) 대감이 유명을 달리하였다.”
“관찰사께서 마진을 앓으셨습니까?”
“아니다. 명신으로 이름난 압구(狎鷗) 한명회 대감의 아들인 한보 대감답게. 노령에도 사력을 다하여 일하다 귀국하시는 길에 졸(卒 - 죽다)하고 마셨지.”
입술을 짓씹는 이지함의 표정을 보니 한보의 죽음이 조선 사회에 어떤 충격을 가져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나도 배운 바가 있는데 이 역사의 한명회는 의의로 충신이었으며 뛰어난 항해사로 관료들의 귀감이 된 사람이었다.
한명회의 아들이라면 가문의 권세를 믿고 후임자에게 업무를 떠넘겨도 충분하겠지만 과로를 거듭하다 명을 달리한 것이다. 이지함은 덧붙이듯이 말했다.
“덕분에 두창과 마진이 들불처럼 퍼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으나. 이후 미주인들은 아국의 백성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훗날 법도를 정하였으니 아국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미주인이 이십 리 물러나는 것으로 정하였다.”
일종의 사회적 거리두기? 사회적은 아니고 민족적 거리두기지만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 범죄를 저지른 윤원형은 변한 역사에서도 대책 없는 악당이 분명하고. 그런데 이십 리? 내가 잘못 들었는지 다시 물어보았다.
“이십 리라 하셨습니까? 그러하면 아국 사람이 새로운 마을을 만들면 기존에 살던 미주인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새로운 터전을 닦을 수 있게 일 년의 시일을 주고 개간 도구와 각종 선물을 전해주어 이주하기를 촉구한다. 덕분에 새 고장을 개척하는 일이 힘들지만 미주는 풍부한 고장이어서 시일이 더딜 뿐 효험은 충분하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활권이 조선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멀어지면 개척지를 만들 때마다 고된 작업이 반복될 것이다. 개척지 주변 8㎞의 미주인을 이주시켜야 하니까. 이지함은 미주에서 일했던 때를 떠올렸는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덕분에 미주를 개척한 지 오십 년이 되어가지만 개척이 지지부진하다. 그래도 미주로 향하는 이들이 있으니 아국 사람이 도합 삼만 명 정도 살며 정착한 고장이······.”
이지함은 기존에 그려놓은 지도 대신 새로운 지도를 그려 나갔다. 북미대륙의 해안가로 보이는 지형인데 조선의 식민지는 전부 해안에 밀집해 있었으며 세 곳이나 되었다.
“가장 북쪽의 고장은 거대한 만이 있어 회주(回州 - 밴쿠버 일대)라 칭하고, 가운데는 좀 전에 말했듯이 금주(今州 - 샌프란시스코)이다. 가장 남쪽은 강주(康州 - 샌디애고)라 하느니라. 더 물어볼 것이 있더냐?”
“혹여나 미주인들이 입신체비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까? 험난한 미주에서 산다면 입신체비로 다스린 몸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내가 따로 물어볼 말이 없어 가만히 있자 형님이 나섰다. 나는 상상도 못 한 질문이지만 형님은 당연하다 여기고 이 시대 사람들은 당연하다 여긴 것 같았다. 이지함은 크게 웃으면서 답했다.
“처음에는 유생들의 몸을 괴이하다 여겨 무서워하였지만 용력을 보여주니 관심을 보이더구나. 다만 역병이 두려워 아국과 접촉하지 못하는 형국이라 이를 가르칠 방도를 찾을 수 없구나.”
그놈의 천연두가 문제다. 홍역은 수습 가능하며 사망률도 높지 않지만 천연두는 이지함의 말대로 마을 하나가 쑥대밭이 되는 끔찍한 질병이다.
혹시나 내가 이 시대를 살아가며 우두와 유사한 증상을 만나면 꼭 확인하고 종두법의 창시자가 되리라. 이지함은 생각에 몰두하는 나를 보며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일전에 입암이 나에게 서신을 보낸 적이 있지. 둘 다 재능이 뛰어나고 어린아이인 것 같지 않아 아버지로서 모범을 보여야겠다고. 직접 만나보니 그 말이 옳구나.”
이지함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고 침묵하는 우리 두 형제의 귀에는 술을 먹이려는 이들과 술을 한사코 거부하려는 아버지의 절규가 들려왔다. 이지함은 생각을 마치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운룡이의 나이가 올해 열두 살이고 성룡이의 나이는 열 살이라 하였지. 의성에 있을 적에는 학식이 빼어나신 송은 선생님께서 너희를 가르치셨지. 이제 너희가 어디서 배울지는 알고 있느냐?”
형님이 지나가는 말로 들었는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일전에 외조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성에 있는 사부학당(四部學堂 - 조선시대 한양에 설치된 교육기관)에서 동년배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걸로 만족할 수 있겠더냐? 사부학당이 아무리 예조에서 엄선한 이들을 보내도 너희를 가르치기엔 부족할 것이다.”
사부학당은 중등 교육기관이며 임진왜란 이후 지방의 사림파가 만든 사학(私學 - 사립학교)에 밀려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역사가 변했으니 관학파(官學派 - 한양을 기반으로 하여 학문을 이어가는 학파)가 온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좋아도 결국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사제(師弟)관계를 중심으로 한 맞춤형 학습이 기본이며 훗날 변질된 서원의 본래 목적이 이런 교육 및 연구 기관이었다. 이지함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비록 정5품에 불과하여도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 자부하였다. 얼마 전에 만난 율곡이라는 청년은 분명 대성할 이여서 많은 도움을 주려 하였지. 그러니 너희를 가르치면 좋을 분은······.”
배움을 얻을 스승을 추천한다는 뜻인가? 이지함은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고 인맥도 대단하니 누구를 추천해줄지 모르겠다. 기대하는 나와 달리 형님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라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됩니다. 토정 어르신께서 저희를 스승께 천거하셔도 열다섯이 지난 다음에 배울 수 있지 않습니까. 국법을 어기는 일은 아니 됩니다.”
“잘 알고 있구나. 하지만 스승을 모시며 매일 나아가 학문을 수양하는 일을 금하였을 뿐이다. 법을 너무 엄하게 적용하면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더냐.”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열다섯이 지난 이후에야 스승 아래에서 배울 수 있다고? 그럼 본래 역사에서 어린 시절부터 스승의 집에서 머물며 배운 인물들은 뭐란 말인가. 너무 많은 것이 변해서 이지함에게 물어보았다.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옛말(경전)에 이르기를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여 어린 시절부터 스승의 집에 머물며 배우는 일이 좋다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스승의 집에 어린 시절부터 나아가 배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종대왕께서 상왕으로 계실 적에 열다섯 아래의 아이들은 사학(私學 - 사립 교육기관)에 다니는 일을 금하였지.”
“스승을 두는 일을 금하였다 하셨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여러 스승에게 많은 가르침을 배우라는 명을 내리시며 금하셨지.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입신체비를 배운 아이들의 몸이 망가지는 일이 생겨 금한 것이다.”
과도한 교육은 아이의 인성을 망가뜨리지만 이 시대의 교육은 입신체비를 겸하니 몸까지 망가뜨리는 부작용이 있으니까 법적 조치를 취했으리라. 이지함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내가 비록 파직당한 몸이지만 각지의 명사를 잘 알고 있구나. 한때 내 스승이셨던 회령군 대감께 너희를 소개해 보마. 직접 배움을 청할 수 없어도 닷새마다 하루 정도 다녀오면 너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회령군? 청계천을 설계한 사람이 아닌가? 아버지가 어린 시절이면 30년 전이고 당시 참의라 했으니 정3품 당상관이다. 적게 잡아도 지금 나이는 70대가 아닐까. 이지함은 염려하지 말라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분은 문종대왕 시절 왕제(王弟)이자 명신이었던 안평대군 어른의 증손이며 얼마 전에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신 분이시지. 식견이 뛰어나시며 학문 또한 대단하신 분이다.”
뭔가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질문을 할 시간은 끝나 버렸다. 어느새 술에 취해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아버지가 우리 옆에 서 계셨다.
“벌써 취기가 올라오니 너희를 집으로 보내두고 다시 술자리에 나아가는 게 좋겠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사발로 폭탄주를 마셨는데 또 마신다고? 지금도 술이 올라와 다리가 휘청거리는데 또?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을 작정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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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술을 마시고 오겠다고 하신 아버지는 저녁은 물론이요, 해가 지고 나서도 돌아오시지 않으셨다. 저 멀리서 북소리가 들리고 포졸들이 길거리에서 고함을 치며 통금을 알렸다.
“이경(二更 - 오후 9시, 조선시대의 통행금지시간)이오! 어서 집으로 들어가시오!”
어머니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대청마루에 앉아 계셨는데 저 멀리서 가마꾼의 변명이 들려오고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휘청거리며 들어오셨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목소리에서도 술 냄새가 느껴졌다.
“나······ 왔소. 잠시 벗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조금 술을 마셨! 소.”
“조금 마셨다 하셨습니까.”
“그······ 렇······ 우웁!”
어머니의 등만 보아도 무서울 지경인데 표정은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멀쩡한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사지를 비틀거리다 마당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이마에 힘줄을 곤두세우며 아버지를 부축해 안채로 향하셨다. 형은 잘 몰라서 아버지를 걱정했지만 나는 아버지가 앞으로 당할 일이 더욱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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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근육에 미친 시대상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응징을 가했다. 오늘도 어머니는 새벽 동이 트기가 무섭게 부엌에 나아가 하녀와 함께 정성을 다해 아버지의 밥상을 만들었다.
보디빌더들이 하는 커팅, 근육을 기르는 벌크업 과정에서 쌓인 지방을 제거하는 과정은 조선시대에 절육이라는 용어로 정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세 끼 아니 네 끼 식사는 모조리 커팅을 위한 식단, 절육식단으로 변했다.
아버지가 애원하듯 어머니를 바라보아도 어머니는 생글생글 웃으시며 밥상을 손수 차려주셨다. 현미와 귀리를 섞은 밥은 보기만 해도 목구멍을 긁어버릴 것 같았으며 채소는 소금기 하나 없이 나물을 무친 것에 고기도 오로지 바짝 구운 닭가슴살이었다.
벌써 나흘 동안 같은 밥상을 받은 아버지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밥을 한술 뜨면서 한탄하셨다.
“내가 절육을 할 시기가 아닌데······.”
“송포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덕분에 몸에 기름이 끼고 근육이 줄었다 푸념하시니 제가 조금 노력을 해 보았습니다. 수양자께서 처음으로 절육을 하실 적의 식단을 고스란히 내놓아 보았습니다.”
“본디 절육은 몸에 군살이 넘쳐날 적에 하는 일이 아니오. 지나친 절육은 몸을 상하게 할 수 있으니 그만두시구려.”
“아닙니다. 낭군(郞君 - 남편을 사랑스럽게 부르는 말)께서 오랜만에 만난 벗들과 술을 자주 드시니 몸에 군살이 생겨날 것이 아닙니까. 이러하니 수양자를 본받아 보름 정도는 절육을 행하셔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가시가 돋은 말이라 아버지도 묵묵히 밥을 먹어치웠다. 어머니는 아직도 할 말이 있는지 입을 우물거렸지만 구원의 손길이 닿았다.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나리, 나리의 벗이라 하신 토정이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나중에 하겠소. 토정과 함께 회령군 대감을 찾아뵐 일이 있어서 말이오.”
“혹여나 또 압구정에 다녀오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이번에는 어디로 술을 마시러 가냐는 추궁에 잔뜩 긴장한 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을 쳤고, 결국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당분간 아니 마시겠소! 절육을 하려면 내 행동이 변해야 하는 법이 아니오! 토정! 잠시만 기다리게나. 의관을 정제하고 나서겠네!”
아버지는 도망치듯 우리와 집 밖에 나와서 말 여러 마리와 함께 기다리던 이지함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둘 다 파리하게 질려 있으니 강제 절육 중이리라.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아내를 화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집에서 멀어지자 크게 한숨을 쉬고 이지함과 대화를 시작했다.
“자네도 고생이 많았나 보군. 회령군 대감을 만나 뵈었는가?”
“처음에는 화를 내시더니 생각을 거듭하시다 일단 얼굴은 익혀 보자고 하셨네.”
“치사하시고 이 년 동안 두문불출하신 분이 사람을 만난다 하시니 그나마 다행이로군. 다녀오려면 한나절이 걸리니 어서 움직이도록 함세.”
다녀오면 한나절이 걸린다? 종친은 보통 사대문 안에 살지만 회령군은 은퇴한 사람이자 안평대군의 후손이니 거처를 옮겼을 가능성도 있었다.
번질번질한 자갈이 깔린 한양의 대로를 따라 북서쪽으로 움직여 창의문(彰義門)을 통과하고. 다시 인왕산 산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난 길을 올라갔다. 마침내 내가 알고 있는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말에서 내리며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셨다.
“이곳은 문종대왕의 왕제인 안평대군께서 머물며 학문을 수양하고 명사들과 토론하던 장소였다. 회령군께서는 치사하신 이후 심신을 수양하고 계시니 큰 소리를 내지 말거라.”
안평대군의 별장이자 무계정사(武溪精舍)라 불리던 곳인데 현대에는 터만 남아 있다. 이미 사라진 문화재를 볼 수 있어서 가슴이 뿌듯했지만 아버지와 이지함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회령군 어르신! 제자 지함이가 찾아왔습니다!”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 시대의 입신체비는 생활이며 철학이어서 권세가에서는 사재를 털어서 입신체비에 몰두하며 집안에는 빈객(賓客)과 젊은 제자가 있어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하지만 무계정사에는 활력이 없고 정말 조용히 글을 읽는 장소와 같이 활기가 적었다. 이 시대로 건너와 처음 느껴본 고택의 중후한 분위기라니. 이 위화감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