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54화 (254/573)

< 2부 1장 11화 – 청계천이 변했어요 >

아버지의 뒤를 쫓아 청계천으로 가며 의문이 들었다. 본래 도성의 상점가라 하면 운종가(雲從街)이며 여기에 있는 육의전(六矣廛)이 한양의 으뜸 상점가이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독점적 상업 권한과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받고 다른 상인들은 단속하는 독점적 위치에 있었으니까. 대체 어떤 방식으로 청계천 상가를 만들었는지 궁금했지만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청계천은 번잡한 곳이니 나와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청계천으로 향하니 상가로 보이는 빼곡한 한옥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 층 건물의 비율이 점점 늘어났다. 아직 경신대기근을 비롯한 소빙하기 이전이라 이층 건물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초가집조차 거의 없었다.

주요 길목의 건물들은 향교에서 보았던 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방화 구획이 분명했다. 만들어진 이유가 궁금해서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도성의 사람들은 초가집이 없이 모두 기와집을 지으며 벽돌로 벽을 쌓습니까? 모든 이들이 이렇게 부유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대문 안에 건물을 지을 적에는 기와를 사용하고 각 길의 바깥 건물은 벽(甓 - 벽돌)을 사용함이 법으로 정해졌다. 덕분에 화재를 막을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일이지.”

“하오나 기와와 벽은 값진 물산이 아닙니까? 의성이 좁다 하여도 향교에 벽을 사용한 일 외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환종대왕(문종의 손자)께서 법을 정하시고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히시자 내수사의 자금을 사용하여 한강의 건너 노량진에 도요(陶窯 - 가마)를 만들고 값싸게 벽돌을 만드셨다. 이후 오십 년이 지나자 모든 건물이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하더구나.”

유성룡의 지식에 의하면 환종은 지금 임금의 조부이자 이십오 년 전에 죽었다 한다. 그저 지나가는 임금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현실적이고 경제논리를 온전히 파악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기와를 따로 제작하지 않는다. 대규모 공장이 아니고 건물을 짓는 터 옆에 간이 가마를 만들고 건물에 필요한 기와를 계속 구워낸다. 당연히 대량 생산이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노동력과 자금이 많이 소모된다.

하지만 기와와 벽돌의 대량공급 시설을 완성해 버린 것이다. 한옥은 10년이 지나면 서까래와 같은 작은 부재를 교체하며 30년이 지나면 건물 대다수를 교체하니 자연스럽게 한양의 모습이 변한 것이다. 점차 건물도 높아지고 사람이 늘어나니 상가에 도달했으리라.

“역시 청계천의 상점가는 번잡한 법이구나. 너무 번잡하여 서로를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니 위로 올라 편안히 가자꾸나.”

“여기가 청계천입니까? 천(川)이 아니고 석축이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청계천이라고 말했지만 눈앞에는 3미터 높이의 석축과 계단 그리고 위에 심어진 버드나무만 보였다. 형님이 황당하다는 듯이 강이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보는 곳은 아마 높게 쌓인 제방의 육지 쪽이리라.

아버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는데 여름철 하천의 퀴퀴한 냄새가 느껴졌다. 현대 하천처럼 소독제를 뿌리고 고압호스로 바닥을 청소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계단 위의 풍경은 내 상상보다 웅장했다. 아버지는 가슴을 펴고 형과 나에게 말했다.

“이것이 청계천이다. 문종대왕께서 구풍으로 피해를 입은 개천(開川 - 청계천의 옛 이름)을 라마국에서 이주한 기술자들의 방식으로 보수하였는데 참으로 보기 좋아 훗날 청계천(淸溪川)이라 이름을 고쳤지.”

구한말에 몇 번이고 개수된 청계천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기껏해야 사람 신장보다 작은 어설픈 석축과 다닥다닥 달라붙은 초가집은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현대의 청계천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하천 폭은 본래보다 늘어 거의 30미터에 육박하였고 제방의 높이는 하천 기준으로 스무 자, 외부 기준으로 열 자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대홍수가 일어나도 감당할 수 있으리라. 형님도 도심 한복판에서 튀어나온 광경에 놀랐는지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어찌하여 이렇게 거대한 석벽을 만들었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물길이 작은데 석축이 너무 높습니다.”

“라마국의 기술자들이 개천이 범람한 높이를 감안하여 만들었지만 내가 어릴 적에 크게 범람하여 석축이 위태로웠다. 당시 공조 참의로 일하시던 회령군(會寧君) 대감께서 더욱 높이 쌓으셨지.”

두 번에 걸친 증축 덕분에 이렇게 거대해지다니. 심지어 다리들도 변경된 크기에 맞게 개수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다리는 절대로 조선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형님이 손가락을 들어 다리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저 기묘한 교량은 무엇입니까?”

“운룡이가 잘 보았구나, 저것은 라마국 석공들이 재주를 부려 홍예(아치) 하나로 다리를 만들었는데 문종대왕께서 일륜교(一輪 - 한 바퀴) 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청계천의 명물이 되었구나.”

유럽을 여행했을 때 피렌체에서 베키오 교량을 본 적이 있다. 90m가 넘는 길이를 단 3개의 아치로 버티고 위에 2층 상가를 건설할 정도로 튼튼한 교량인데 같은 형태로 길이만 짧은 교량이 청계천에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피렌체의 기술과 조선 특유의 버드나무 식재 기술이 결합된 청계천 석축을 걸어가는 데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이번 기회의 도성 구경을 시켜주려고 우리를 데려왔음이 분명하리라.

“본래 도성의 상점은 운종가가 제일이었고 이외에는 사대문 밖의 난전이 있었다. 서행사가 오가며 각지의 물산을 들이니 운종가가 감당할 수 없는 품목이 많아지게 되었지. 그리하여 부유한 이들이 주상전하께 상소문을 올렸다.”

“어찌하여 부유한 이들이 상소문을 올렸다는 말씀이십니까?”

“각지의 난전에는 서행사가 들여온 물건을 판매할 자금이 없었으며. 도성에 간혹 들어오는 물산을 직접 구하고자 벽란도와 동래에 사람을 보내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국 새로운 상점을 만들어달라는 청이 받아들여졌지.”

청계천의 형성 원인은 알았지만 부자들이 길거리를 만들었다면 이런 형태가 될 수 없다. 각자 자금이 허용하는 대로 상가를 만들어 복잡한 길거리가 형성되었으리라.

반면 청계천 상가는 하나같이 동일한 형태의 이 층 한옥, 한옥도 아니고 목조 주택이라 불릴 물건과 반듯한 길거리가 석축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이걸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건물이 모두 똑같은 모습이니 기이한 일입니다. 부유한 이들이 상소를 올렸다면 자기 멋대로 건물을 지었을 것인데 혹여나 한 사람이 모든 건물을 지었습니까?”

“이 또한 법으로 정해진 일이다. 석축을 정비한 회령군 대감은 덩굴같이 얽힌 건물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품으셨고. 주상전하께 상소를 올려 주변을 정돈하셨다. 그리하여 이러한 번듯한 길거리가 되었구나.”

회령군이 누구인지 몰라도 도시계획으로 따지면 조선시대에 태어날 수 없는 인재이리라. 대충 살펴보니 청계천 상가의 건물은 동일한 형태의 서양 목조주택. 팀버프레임(Timber Frame)을 택하여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하였다.

중세 유럽의 길거리와 한옥이 결합한 생소한 모습이라니. 청계천 일대의 상가는 정말 이질적이면서 한양 어느 길거리보다 발달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을 돌리시다가 마침내 목적지를 찾았다.

“육의전에서 문방사우를 구하려면 지전(紙廛 - 지물포)에 속한 큰 상점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하지만 청계천에서는 원하는 물산만 다루는 상점이 대다수이니 편한 일이 아니겠느냐.”

정돈된 길거리 덕분에 시야가 트이고, 시야가 트이니 건물 입구에 붙인 현판이 멀리서도 뚜렷이 보인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상점에 들어갔는데 조선시대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껏해야 여섯 칸(54제곱미터, 약 18평)이 될법한 가게 안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붓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상인은 아버지를 보면서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자제분들과 함께 오시다니 문방사우를 갖추러 오신 것이 분명하군요.”

“바로 보았군. 담비털과 같은 사치스러운 붓은 되었다네. 처음 사용하여 몇 년은 두고 쓸 수 있는 녀석을 준비하여 주게나.”

“그러하면 그리 크지 않은 녀석이고 다람쥐 꼬리털로 만든 붓이나 망아지 꼬리털로 만든 붓이 좋겠군요. 일단 써보면 알 것이니 몇 개를 만져보시지요.”

상인은 형님이 붓을 시험하게 만들 생각이었는지 몇 개의 시험용 붓과 물잔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칠판과 같은 도구를 꺼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몇 년 동안 사용할 붓을 마련하는 일이니 손에 맞는 녀석을 찾으려나 보다.

현대에서 붓을 많이 써보지 않았으니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대나무를 쪼개 만든 붓도 있었고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붓도 있었는데 익숙한 물건이 있었다. 대놓고 아는 척할 수는 없으니 모르는 척 만져보았다.

“이건 먹은 아닌 것 같고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

“아이고 작은 아이가 보는 눈이 있네. 그건 석묵(石墨 - 흑연)을 잘라 만든 석묵필용 심이다. 보통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네 식견이 대단하구나.”

“석묵필이 무엇입니까? 이걸 갈아서 먹 대신에 쓰려면 너무 길어 힘들지 않겠습니까.”

태연하게 말했지만 이 감촉은 흑연이다. 심지어 한번 구워서 어느 정도 단단한 흑연이고. 서양에서 지금 막 납연필(서양은 16세기까지 정말로 납을 필기도구로 사용했다) 대신 필기도구로 사용했을 흑연이 버젓이 상점에 팔리고 있었다.

형님이 붓을 바꿔가며 시험하는 사이 상인은 잽싸게 달려와 나뭇가지를 다듬은 녀석에 흑연 심을 끼웠다. 내가 알고 있는 연필과 비슷한 형태의 물건이 완성되었는데, 상인은 호들갑을 떨며 설명을 이어갔다.

“석묵필은 비해당(匪懈堂) 어른이 즐겨 사용하시던 도구였고 후예인 회령군 대감도 석묵필 하나로 빼어난 회화를 남기셨다. 또한 소매에 넣어도 먹이 스미지 않으니 군관들도 석묵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단다.”

비해당은 내가 읽었던 라마국유람기의 저자이며 본래 역사에서 일찍 사망한 안평대군임은 당연하게 알고 있었다. 역사가 변한 덕분에 새로운 인재가 태어날 줄은 몰랐는데.

“비해당이라 하시면 안평대군 어른이 아닙니까? 시서화 모두에 능한 분이라 알고 있습니다.”

“작금에 이르러 공조(工曹)에 있는 이들 대다수가 비해당 어른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공무 회화를 남길 적에 석묵필과 기름먹을 쓰는 우모필(羽毛笔 - 깃펜)을 사용하지. 어디 한번 손을 놀려보려무나.”

기름먹이라 하면 외할아버지가 아마 씨앗을 태워 만든다는 잉크인가? 생각해 보면 세필(細筆)로 회화를 남기느니 몸을 놀리며 글을 적어야 하는 일에는 연필이 주로 쓰이리라. 상인이 내민 나무판 위에 연필로 글을 써 봤는데 삐뚤빼뚤 엉망인 글자가 튀어나왔다.

“어린아이니 아직 손이 둔하구나. 하지만 몇 년이고 연습하면 대성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지금 떠올랐지만 내가 이 시대에 적응하려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다. 나는 제도(製圖), 즉 도면을 손으로 그리는 작업을 1학년 1학기 까지만 했었다! 당연하지만 이후부터 도면 작업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했으니 기본 규칙만 아는 수준이다.

당연히 취직한 이후에도 실력이 늘어날 길이 없다. 야장(野帳 - 야외 작업을 할 때 만드는 실측장)과 같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힘든 어설픈 스케치가 내 실력의 전부이다.

결국 전공을 살리려면 개인적인 훈련은 필수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비싼 종이를 어떻게 연습용으로 쓴단 말인가. 아버지도 내 필적을 보았는지 나무판의 글씨를 보며 혀를 차며 말했다.

“아직도 십여 년은 붓을 놀려야 할 아이에게 함부로 석묵필을 쓰게 하면 붓과 쓰는 방식이 달라 어느 쪽으로도 대성하지 못할 것이네. 또한 연필을 쓸 적엔 한지가 아닌 아마(亞麻)지를 따로 사들여야 하지 않던가.”

호들갑을 떨던 상인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났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연필, 아니, 석묵필을 들고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보시다 내게 다시 돌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어차피 석묵필 스무 자루가 적당한 붓 하나보다 값이 싸니 몇 개 정도는 사들여도 좋겠구나. 네 마음에 드는 물건이니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아직 잡기(雜技)에 불과할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말거라.”

참으로 냉정한 평가였지만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결국 다람쥐털로 만든 붓 두 자루와 연필 세 자루를 사들였지만 지금 내 솜씨로는 제대로 된 건물 평면도 하나를 그리지도 못하리라.

문방사우를 모두 갖추고 점심을 먹자는 아버지의 계획대로 벼루를 포함한 모든 물건을 사들여 봇짐으로 매고 지나갔다. 지나치는 다리의 형태를 보니 현대에는 변형된 청계천 때문에 복원하지 못한 수표교(水標橋)가 분명하다.

근처에는 식사할 수 있는 상점과 술집 모두가 다양하게 있었는데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덩치 큰 남성 셋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사지를 휘청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혀를 차시며 말씀하시다 화들짝 놀라셨다.

“저런 막돼먹은 이들을 보았나. 길거리에 유생 셋이 술에 취해 다니니 내가 도저히 얼굴을 들 없······ 자네는 토정(土亭 - 이지함의 호) 아닌가! 토정! 자네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잠깐 이 목소리는 입암(유중영의 호)인데. 입암 자네가 여기 왜 있나? 지금쯤 경기도에서 허우적거리며 애들을 돌봐야 할 사람이 아닌가.”

토정 이지함? 토정이라는 호를 사용하는 이 시대 사람은 이지함 외에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성이 술에 취한 채 딸꾹거리며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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