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1장 9화 – 한양으로 >
의성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본래의 조선보다 육로 교통이 편하다 해도 어디까지나 조선시대이다. 주요 대로를 제외하면 산길은 우마차 한 대가 가까스로 지나갈 정도의 비포장도로이다.
그나마 어머니는 편하시겠지만 엉덩이가 아프기는 매한가지일 거다. 길이 완전히 평탄하지 않고 우마차에는 완충장치가 없어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는 우리의 지친 얼굴을 보며 말씀하셨다.
“운룡아, 성룡아. 한양까지 길이 고단하더라도 참도록 하여라. 아국이 세워질 적만 하여도 제대로 된 도로가 없었으나 문종대왕께서 남기신 근본을 세조대왕께서 일으켜 세우셨으나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외가의 인근에 있던 영귀교가 당시에 세워진 교량이라 들었습니다. 그 또한 주상전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동안 넘어야 하는 하천이 쉰 개다. 옛일이었다면 실개천만 건너도 하초(下焦 - 하체)가 모조리 젖는 고난을 견뎠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구나.”
상상해보니 끔찍했다. 조금만 길을 가면 개천이 나오고 징검다리로 건널 수 없으면 어설픈 목재 교량을 건너거나 아예 포기하고 몸을 적셔야 하다니. 본래 조선에서 괜히 보부상이 유행한 것이 아니다.
의성에서 길을 떠나고 한나절이 흐를 무렵에 저 멀리 거대한 강이 보였다. 북쪽으로 계속 올라왔으니 아마 현대의 문경시 인근의 낙동강에 도착한 것이 분명하였다. 당연히 다리를 놓을 수 없으니 커다란 나룻배에 올라 반대편 포구에 내렸다.
“조만간 쉴 곳이 나오니 조금만 참거라. 당신도 조금만 참아주시구려.”
나름 사람이 사는 촌락을 지나치고 조금 더 움직이나 저 멀리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길 양쪽에 있는 커다란 건물 두 채가 보였다. 아버지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시더니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역참(驛站)인 덕통역(德通驛)이 있으니 말을 교환하고 잠시 쉬어가도록 하자꾸나.”
역참? 조선시대의 역참이 저기란 말인가?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구대로(조선의 주요 도로인 아홉 도로)에 속하는 영남대로(嶺南大路)란 말인가? 형님은 의문이 들었는지 당나귀에서 내려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물어보았다.
“본디 역참은 주상전하의 명을 받은 관료만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닙니까?”
“운룡이가 옳은 말을 하였구나. 사참은 역참과 유사한 용도로 쓰이는 곳이다. 개개인이 사사로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사참이지.”
일종의 민영 우체국인가? 내가 알기로 민영 우체국은 서양에서 16세기에 도입되었으니 도입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유사시에는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운송 수단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우리를 보았는지 사참에서 사람 여러 명이 나오더니만 인사를 올렸다.
“입암(立巖 - 류중영의 호) 어르신께서 당도하시니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하루를 푹 쉬시며 여독을 푸시고 마소(馬牛)를 새것으로 바꾸시지요.”
“내 말은 역참에서 빌려온 것이니 역참에 돌려주도록 하겠네. 그럼 내가 역참에 다녀오는 동안 아이들에게 사참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게나.”
사참에 들어서니 다른 여행객들이 쭈뼛거리며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고. 굴뚝에서는 저녁을 한창 짓고 있는지 밥 짓는 연기가 올라왔다. 한창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지 몸에 먼지가 묻은 두툼한 인상의 사내가 우리 앞에서 설명을 시작하였다.
“작금의 세상에서 사참 없이는 나라가 돌아가지 않는다 할 지경이니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 사참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느냐?”
“어린 시절에 들은 풍문이 있습니다. 다른 고을에 다녀올 적에 고을과 고을 사이에 길로 다니기 편하도록 말이나 소를 빌려주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어린 유성룡의 기억에는 없지만 나이가 있던 형님의 기억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털보수염의 사내는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그렇지. 본디 어명을 받드는 이들은 역참에서 말을 빌려 움직이고 역참에서 쉬지 않더냐. 사참은 어명을 받지 않은 이들을 위해 돈을 받고 같은 일을 행하는 장소이다. 하지만 본디 어명에 의하여 세워진 장소이기도 하지.”
“어명이라 하셨습니까?”
“그러하다. 사참이 세워진 계기는 오십오 년 전에 일어난 비극 덕분이니 이는 모두 김시습, 아니, 매월당 선생님께서 실종되신 일이 계기이지.”
오십여 년 전에 김시습이? 김시습은 대략 1430년 출생이니 나이가 일흔이 다 되었을 시기일 것이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괜히 하늘을 훑어본 다음 말했다.
“매월당 선생님은 우리를, 지금은 북인으로 불리지만 옛적에 야인(野人)이라 천대받았던 이들을 위하여 한평생을 다하신 분이었다. 그분 덕분에 우리가 옛 고려(고구려)의 일원임을 알 수 있었고 조선의 사람으로 살아갈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지.”
조선시대의 야인은 여진족에 대한 통칭이고, 이 사람들은 조선의 북방정책 덕분에 충분히 동화된 여진족의 후예가 분명했다. 하지만 김시습이 실종되었다고? 일흔의 나이면 정말 무덤 들어갈 때를 기다릴 노인인데? 사내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매월당 선생님은 일흔 무렵에 상왕의 자리에 계신 세조대왕께서 내리신 명을 받들어 장백산(長白山 - 백두산) 너머 북방의 금석문을 파악하여 옛 고려의 근원을 알아내려 하시다 변고를 당하셨다.”
김시습이 백두산을 올라가다 실종당해? 본래 역사에서는 야인으로 생활했다고 도교(道敎)의 주요 인물이었는데 이제는 산신령 취급을 당하겠군. 형님은 들은 풍문이 있었는지 바로 대답하였다.
“익히 알려진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 장백산 너머는 북인들이 사는 고장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매월당 선생님의 실종과 사참간의 관계가 무엇입니까?”
“북방에는 아직 역참이 들어서기 이전이어서 소식이 늦었으며, 아직도 부족으로 뭉쳐 있던 우리는 뒤늦게야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결국 여섯 달 동안 장백산 일대를 수색하였지만 그분이 남기신 도포 자락 하나를 건진 것이 전부였지.”
무언가 이상한데? 김시습이 보통 사람도 아니고 그는 역사상에 이름이 남은 천재이다. 그런 사람이 일흔의 나이에 백두산에 가면서 호위병도 없이 갔을까? 하지만 의문은 뒤로한 채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나의 조부님도 매월당 선생님을 찾으시는 일에 동참하시고 크게 상심하셨다. 결국 스승을 잃은 수많은 북인들이 상심하여 한양으로 나아가 주상전하께 고변하였다. 결국 뜻이 통하여 북방에 역참이 생겨나고 사람 간의 소통을 위해 두라 명하신 것이 사참이다.”
“그러하면 사참을 만든 이들은 북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북인들은 본래 가축을 치고 말을 다루기 좋아하며 사방을 주유하기를 즐긴다. 옛 풍속은 많이 사라져도 말을 타고 떠도는 일을 좋아하니 원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것이지.”
형님의 표정은 ‘그냥 말타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임금님이 배려하셨구나’ 하며 감동하는 표정이지만 나는 제법 놀라운 변화라 생각하였다. 여진족이 조선에 동화되면서 일어날 수 있는 효과를 제대로 계산했던 것이 분명하다.
북방에 역참을 설립하려면 비용 문제도 있으며, 의성과 같이 역참이 없는 지방 사족들의 불만이 촉발될 것이다. 그러니 사참 제도를 도입하며 여진족을 초기 투자자로 만든 격이다. 결국 급한 일이 생긴 사람들이 이런저런 혜택을 볼 수 있었겠지.
이후의 여행은 대부분 역참과 붙어 있는 사참을 통해 진행되었다. 하루 종일 당나귀 등 위에서 시달리다 잠을 청하기를 반복한 것이 여드레가 될 무렵. 가까스로 한양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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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땅값은 비싸다. 이 시대에 철저한 부동산 개념은 없지만 도시로 갈수록 집값이 비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육조(六曹) 거리, 아니, 십조(十曹) 거리 인근의 주택은 구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의 집은 한양 사대문 내부에서 노른자위를 약간 벗어난, 남부 11방에 속하는 낙선방(樂善坊)의 먹절골이며 현대의 서애로 인근이다. 쉽게 말해 남산 북쪽이다. 아버지는 말을 마구간에 매어두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우리가 머물 집이오. 팔 년 전에 새로 지어진 집인지라 기왓골을 약간만 손보면 사용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아쉬운 일은 집주인이 작년 말에 이사한 집인지라 정리할 것이 많아서 문제이지. 그리고 이 집에 묶인 머슴인 최 서방일세.”
“주인 나리들을 뵙습니다. 저는 이 집에서 사 년째 일하고 있었습니다.”
꾀죄죄한 행색의 머슴이 인사를 꾸벅 올렸다. 시골의 머슴은 양인이며 집안의 노동력이기에 어느 정도 대접받았지만 여기는 한양이고 농사를 지을 땅도 없다. 어머니의 눈길이 오가자 머슴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실은 저 혼자서 이 집을 여섯 달 동안 다뤄온지라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마당이 넓은지라 풀은 뽑아도 계속 올라오고 물골을 파는 일이 전부였지요. 그나마 청소는 해두었습니다.”
“겨울 동안 고생이 많았소. 앞으로 분주한 일이 많을 것이나 품삯은 넉넉히 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겨울 동안에는 예전부터 일하던 머슴이 눈을 치우고 대략적인 청소를 했지만 봄철부터 풀이 자라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나 보다. 어머니는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해 보았는지 주변을 둘러보시더니 답하셨다.
“겨울철에 해가 부족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는 길목이니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안채로 들어가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힘써주시구려. 나는 사랑채와 마당을 정리하겠소.”
어머니는 안주인답게 각종 가구의 위치를 정하고 곳간에 필요한 물자를 사들이라 말씀하셨고 아버지는 인부들이 힘써서 옮겨야 할 것들을 지시했다. 개중에 아버지가 신줏단지처럼 다루는 물건은 누가 뭐래도 입신체비용 대역기와 소역기였다.
대역기와 소역기를 어디서 가져왔냐고? 한양에 들르기 전에 사참 사람을 불러다 서신 하나를 넣었는데 그게 미리 주문한 역기를 가져와 달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대문에 쌓인 역기를 나르던 아버지는 머슴에게 말했다.
“공령(플레이트)틀은 튼튼한 바닥에 두게. 가급적이면 습기가 올라오지 않게 판석을 묻고 그 위에 올리는 일이 나을 것이네.”
“판석은 모르겠고 다 닳아버린 맷돌 여러 개를 두면 될 일입니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맷돌을 좀 얻어오겠습니다.”
현대처럼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니 다 합치면 수백 ㎏이나 될 공령은 언제나 문제였다. 집안에 두면 방바닥이 서서히 꺼질 것이며. 마당에 항상 천막을 치면 보기에 좋지 않다. 결국 입신체비기구는 창고 바닥에 돌을 깔고 올려놔야 한다.
마당은 몰라도 뒤뜰은 제법 넓은 건물이었다. 예전 집주인이 닭을 길렀는지 어느 정도 형태를 유지한 나무 우리가 있었는데 형님이 눈을 빛내며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소자 외조부님과 함께 외가에 머물면서 닭을 사육하는 일에 대해 배운 것이 있어 실천에 옮기고 싶습니다.”
“옳은 일이지만 닭장을 크게 만들면 분변의 냄새가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다. 그러하니 닭을 조금만 기르면 좋은 일이지.”
지금 생각해 보니 유생들이 닭 사육에 취미를 가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입신체비를 하려면 가급적 닭가슴살, 아니면 최소한의 단백질 섭취를 위해 계란이나 두부를 먹어야 하는데 맛이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리가 끝나니 건물 자체는 특이할 게 없었다. 하지만 기단(基壇 - 한옥의 기초 단)의 섬세함이 굉장했다. 수직 수평으로 칼같이 각을 맞춘 화강암은 보통 석공이 남긴 솜씨가 아니다. 아버지는 집을 둘러보시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잉가국 출신 석수들이 힘을 쓴 집이로구나. 석물을 다루는 일에는 잉가국 사람이 으뜸이지.”
잉카? 잉카인들이 왜 조선에 와 있지? 생각해 보면 잉카제국 유적의 석조 유물들은 수백 년이 지나도 상하지 않고 온전할 정도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왜 조선에 왔단 말인가? 형님이 집 주변을 살피는 동안 아버지에게 여쭈어보았다.
“잉가국은 일전에 외조부님께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하온데 그들이 어찌 도성까지 발을 들였습니까? 배를 타고 한 달 보름이 넘는 곳이 미주라 하였는데 미주보다 더 먼 고장이 아닙니까.”
“잉가국은 서반아(西班牙 - 스페인)의 장수인 불랑서사과(弗朗西斯科 -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하여 침략 당했다. 결국 십여 년 전에 잉가국은 사실상 멸망하였으며 사방으로 도주한 백성 중 일부가 중미국까지 도주하여 아국 사람에게 귀부(歸附)하였지.”
아버지가 잉카제국의 멸망을 이야기하신 것 같은데 중미국에 조선 사람이 거주한다고? 아버지는 내 의문을 뒤로한 채 똑바로 각이 잡힌 기단을 손으로 쓸어내며 말씀하셨다.
“잉가국 사람들은 홍역과 같은 질병에 취약하였고 체격도 작아 아국에 적응하지 못할 줄 알았다. 대신 이들은 화강암을 두부 다루듯 재단하는 재주가 있으니 아국의 석공이 그 기술을 배우려 애쓴다 하더구나.”
“세상 사람 모두가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실로 그러하구나. 아국에 귀부하고 싶은 마음을 품은 자는 아국의 말을 배우고 풍속을 따르면 아국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 환종대왕께서 정하신 방침이시다. 너도 외방에 나서게 되면 이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두어라.”
아버지의 말은 조선의 외국인 정책을 알 수 있는 본보기였다. 역사가 변해도 조선 사람들은 벨테브레처럼 귀화인(歸化人)에 대하여 조선 사람과 동등한 대우를 하고 있으니까. 바꿔 말하면 윤원형은 정말 미친놈이라는 뜻이다.
정리가 끝나고 가족 모두가 인근 가게에서 배달한 국수로 점심을 먹고 숭늉으로 입을 가시는데 호탕한 목소리가 대문에서 들려왔다. 아버지는 벌써 손님이 찾아온 것이 의외였는지 화들짝 놀라 일어서 대문으로 향했다.
“입암(立巖 - 유중영의 호) 자네가 드디어 경관으로 돌아오게 되어 기쁘다네. 암행어사 출두가 아닌 방문이요!”
대문에서 들어온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임이 분명하지만 암행어사라고? 나도 놀라서 벌떡 일어나 상대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몸은 내가 보아온 어떤 사람보다도 튼튼해 보였다.
나무뿌리같이 두꺼운 목, 도포 자락 사이로 보이는 대흉근은 물론이요, 손바닥에 거칠게 박힌 보디빌더 특유의 굳은살까지. 이런 사람이 암행어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