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1장 6화 – 풍속이 변했네(1) >
내 학식이 부족해서 책을 더 읽을 방법이 없다. 입신체비에 대한 해석은 훗날로 미루면 될 것이니 궁금한 책을 찾아봐야겠지. 입신체비서를 고이 접어서 돌려주니 유생도 슬쩍 웃었다.
“입신체비서를 온전히 읽지 못하여도 아쉬울 일은 없다. 오히려 드문드문 읽는 일만 하여도 대단하구나. 언해본도 있지만 본질을 이해하려면 원서를 읽는 것이 제일이다.”
역사가 변하며 출세하려면 입신체비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무과로 나서려 해도 사서삼경을 읽는 일은 필수라 하였으니 피할 수 없겠지. 이들을 따라가려면 입신체비서를 읽을 지식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결국 이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가 답이다.
다음에는 무슨 책을 읽어볼까 고민하는데 젊은 선비가 읽는 책이 궁금해서 들여다보았다. 내가 배웠던 것과 같은 사서삼경의 상서(尙書)인데 오른편은 한문으로, 왼편은 한글 아니 이 시대의 한글인 정음으로 해석이 달려 있다!
젊은 선비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얼굴을 슬쩍 붉히며 한 손으로 정음으로 적힌 쪽을 가리면서 외워댔지만 아무리 봐도 언해(諺解 - 한글로 풀이함)를 보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선비의 입이 열렸다.
“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홍문관에 있는 수많은 학자들이 언해한 뜻이 나의 지식보다 못할 성싶더냐.”
“다른 일이 궁금한 것이 아닙니다. 외조부님께서 저희를 가르칠 적에는 언해본을 사용하지 않으시기에 궁금했던 것입니다.”
“송은 선생님은 옛 습속(習俗)을 고스란히 따르는 분이기에 옛 방식대로 너희를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기 쉬운 정음으로 글을 깨우치지.”
조선 후기가 되면 ‘요즘 유생이라는 자들은 언해로 배우는 법만 알아 제대로 된 글을 모르고 언해본만 찾는다’라며 한탄하는 말이 많았다 한다. 알기 쉬운 한글이 한자를 서서히 대체한 것이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스스로 한물가 버렸다 생각할 정도의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옛 방식을 지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고리타분한 거지. 하지만 한글이 한자를 밀어내고 있으니 조만간 대부분 언해본을 보고 조정에 발을 붙여야 한문만 사용한 문서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면 이 향교에도 언해본이 많지 않을까? 변명 아닌 변명을 한 선비에게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제가 세상 만국의 풍속을 알려면 어느 서적이 가장 좋겠습니까?”
“세상 만국의 풍속이라······ 내가 알기로 청해군(靑海君 - 한명회의 군호)이 저술한 대양유람기가 있으며. 범옹(泛翁 - 신숙주의 자)이 저술한 서역제국기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서적이 없지.”
청해군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범옹도 누구인지 모르겠다. 현대에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이 시대에는 군호나 자(字)로 부르니까 더더욱 모르겠네. 잠시 동재에 들어갔다 나온 선비는 다른 책을 가져왔다.
“하지만 내가 예전에 즐겨 보았던 안평대군의 서책이 있구나. 원본이 아니어서 회화를 동판으로 인쇄한 덕분에 많이 부족하다만 서역의 이야기를 듣고 풍속을 알기에는 좋은 서적이다.”
“라마(羅馬 - 신성로마제국)국 연행기라니. 라마국이 대체 어느 나라입니까?”
“천오백 년의 역사를 가졌다 말하는 이도 있으며 오사만국이 적통을 이었다 말하는 이도 있는 나라이다. 수양대군께서 오사만국에 머물 동안 안평대군께서는 라마국에 머물며 사람을 데려오시고 이들과 함께 저술한 서적이다.”
천오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고 멸망했다면 로마 외에는 없지. 수양대군이 오스만에 다녀온 동안 안평대군은 로마에 다녀왔다는 말인가? 기껏해야 일부 지방이나 돌아보고 왔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평면도는 뭐지?
<백다록(伯多祿 - 베드로의 음차) 대성당>
안평대군이 작성한 도면을 바탕으로 어설프게 인쇄된 회화가, 정확히는 현대에는 소멸된 베드로 대성당의 평면도가 있었다. 조선시대 회화와 서예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 남긴 작품이 무엇일까. 다음 장으로 넘어가니 안평대군의 저술이 있었다.
[라마국에서 한 달을 머무는 동안 법황(法皇 - 교황) 비오의 조언으로 각지의 법당을 돌아보았으며 훗날 조선에서 수학(受學)한 피렌체 출신 미술가들의 도움을 얻어 기록을 세밀하게 남길 수 있었다.]
안평대군이 로마에 다녀온 것도 모자라 로마 출신 미술가들을 데려왔다고? 더군다나 건축과 토목에 대한 지식도 배웠는지 로마에 있는 유적과 건물들의 회화가 인쇄본임을 감안하여도 설명과 함께 제법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내가 라마국연행기를 처음 읽었을 적에는 이국의 풍속은 물론이요 수많은 지명과 인명으로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오히려 입신체비서보다 어려운 서책이거늘 정말 술술 읽어나가는구나.”
얼마나 책에 몰두하였는지 젊은 선비가 다가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나야 기반 지식이 있으니 술술 읽을 수 있었지만 어차피 책을 읽고 싶었으니 부끄러운 표정을 억지로 지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안평대군께서 거닐던 라마국의 풍모를 상상하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제가 살아생전에 라마국에 다녀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말해도 나는 이미 로마에 다녀온 적 있다. 귀신의 집이라 적힌 거대한 원형 돔이 올라탄 건물은 판테온이 분명하고 옛 성벽이라 칭한 것은 아우렐리아누스 방벽이겠지. 젊은 선비는 내가 책에 푹 빠져 있다 여기고 아예 한 질을 모조리 건네주었다.
“라마국연행기에 이렇게 재미를 붙이다니. 호조 휘하 관청인 수례사(修例司 - 선공감이 분할되어 신생된 건축 업무 전담 기관)에서 일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너는 조만간 한양으로 올라갈 것이니 한동안 읽으며 지내어라.”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서책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정갈히 읽겠습니다.”
열일곱 권이나 되는 서적을 받아드니 팔이 휘청거렸지만 적어도 읽을 책이 생겨서 좋았다. 형님에게 돌아가 무얼 읽는지 확인해보니 의외로 양계 관련 서적이었다. 형님이 닭을 기르는 일에 취미를 두셨나?
“형님은 닭에 관련된 서적을 보시는군요.”
“그렇다. 네가 어릴 적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다섯 살 무렵 부친께서는 머물던 집에서 여러 종류의 닭을 기르며 교접시켜 새로운 닭을 만들어내고자 하셨지.”
그럼 내가, 정확히는 빙의 이전 유성룡의 두 살 무렵이니까 정말 어린 아이 시절이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겠지. 형님은 책을 가리키며 말하셨다.
“당시 부친께서는 천축계와 여송 일대의 투계(鬪鷄)를 데려다 후대를 낳게 하였는데 참으로 거대한 닭이었지만 성미가 급하여 어머니의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
삼대 운동 300은 할 것 같은 여인의 정강이에 상처를 입혔다면 보통 괴물 닭이 아니겠네. 형님은 내 마음을 돌리려는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지만 세상의 닭은 수십 종류나 되고 부친께서 시험하신 닭은 기껏해야 두 종류일 뿐이다. 서적으로 지식을 쌓고 수십 종류의 닭을 접붙이면 언젠가는 성과가 드러나지 않겠느냐.”
“참으로 아득한 일입니다. 그런데 유생들의 취미가 닭을 기르는 것도 있습니까? 본래 백성들이 양계를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습니까?”
“백성들이 기르는 닭은 예부터 전해진 작은 닭이라 하였다. 천축계만 하여도 성미가 급하여 기르기 힘들고 울타리를 부수고 달아나는 일이 잦다 하였다. 그런데 그 서적은 무엇이더냐?”
“라마국연행기입니다. 안평대군께서 저술하신 서적인데 마음에 파고드는 것이 좋았습니다.”
형님도 나도 책을 한 질 얻어서 돌아왔다. 서로 책을 한 질이나 얻어오니 외할아버지도 기뻐하셨고 자기 전에 책을 조금 읽고 일기를 쓰는 척 현대의 정보를 조금씩 기입해 나갔다. 이윽고 음력 12월이 되었다.
눈이 조금 내렸지만 아직 날이 따스하기에 눈을 치우면 금방 햇볕에 녹아내렸다. 오히려 땅이 적당히 얼어 단단하니 아이들의 놀이종목도 바뀌었다. 형과 나는 둘이 조를 이뤄 맞은편 집에 사는 아이들과 경기를 시작했다.
“성룡아! 낙구! 낙구다!”
“제가 갑니다!”
눈에 힘을 집중하고 발을 놀려 급격히 떨어지는 셔틀콕, 아니, 깃털 공을 받아 쳐냈다. 허공으로 솟구친 깃털공은 형님이 달려들어 다시 반대편으로 내리찍어 버리니 상대도 받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이렇게 낮게! 오면!”
“그렇지!”
느리게 날아온 깃털 공을 슬쩍 밀어 쳐내 점수를 땄다. 15점을 따내면 승리이니 이번 판도 우리의 승리이다. 겨울이어서 땀이 많이 올라오지 않았지만 형님은 이겨서 기분이 좋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성룡이구나. 지난가을에 마부놀이를 할 적에는 실수를 연발하더니 언제 이렇게 몸이 날래졌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형인지 네가 형인지 알 길이 없구나. 나는 동무들의 집에 가서 새참 거리를 가져오겠으니 잠시 기다리어라.”
오늘도 즐겁게 배드민턴, 아니, 이 시대 어린이들이 하는 놀이인 우모구(羽毛球)를 했다. 코르크 대신 유사 코르크인 굴참나무 껍질을 사용하고 라켓도 등나무 줄기로 만들어 부족해도 즐길 수준은 되었다.
“현대의 몸이었다면 첫 세트도 버티지 못하고 무릎 관절이 박살 났겠지. 그나저나 수양대군에 빙의한 사람은 참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야. 영직이었으면 케틀벨로 저글링 하라고 권장해서 선비들의 발등을 다 날려먹었겠지.”
알고 보니 수양대군은 생활체육을 보급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어른들은 정구라 하는 테니스와 유사한 운동과 당나귀를 탄 채 공을 후려치는 마상폴로 비슷한 운동을 즐겼고 아이와 여성들은 배드민턴과 유사한 정구를 즐긴다.
동네 양반들도 아이들을 오전에는 학업에 몰두하지만 오후에는 자유롭게 놀고 새참 거리를 걸고 내기까지 해도 아무 말 없이 넘어간다. 솔직하게 말해 어른들의 속셈이 보인다.
“어린 시절에 입신체비를 시키지는 못하고. 대신 생활 체육을 하며 몸을 단련해 입신체비에 빨리 적응하라는 뜻이 분명해.”
양반가 아이들도 이렇게 몸을 단련하면 향교에 득시글거리는 유생처럼 삼대 운동 400 정도는 바라볼 체격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할 일 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니 외가에 속한 소작농이 눈 덮인 논 귀퉁이에서 어떤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희 집에 이거 없지?”
저 누나는 마름인 정씨 아저씨네 큰딸인 거 같은데? 간혹 집에 와서 허드렛일을 돕고 이런저런 음식 (대부분 닭의 부산물이다) 재료를 얻어가서 낯이 익은데 소작농의 큰아들이랑 뭘 하는 걸까?
“묵힌 감자가 맛있단다. 어서 먹어봐라. 새참도 없이 일하니 허기지지 않디?”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이 시대에 감자가 있다고? 유성룡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감자는 사람이 잘 먹지 않아 경험해 본 적 없는 채소라는 정보가 떠올랐다. 본래 19세기에 전래되는 감자가 벌써 들어오다니.
마름 큰딸은 눈을 치우던 소작농 아들에게 보자기에 곱게 감싼 덩어리를 주려는데 소작농 아들은 짜증을 억지로 숨기는 표정으로 보자기를 받지 않으려고 사방을 뛰어다니며 말했다.
“감자 같은 걸 누가 먹는다고 나에게 주려는 거니? 그런 물건은······.”
“야! 내가 애써서 삶아왔는데 누가 먹는다고 타박을 놓니!”
보기 좋은 풋풋한 광경이지만 둘 사이에서 오가는 보자기에 감자가 담겨 있다니. 먹기 싫어하는 물건은 대신 먹어도 별 탈은 없겠지. 그리고 따스한 감자 맛을 상상하자 군침이 돈다.
“자고로 감자는 갓 삶아 따듯한 녀석을 소금에 팍 찍어 먹어야지.”
영직이 같은 보디빌더라면 감자를 보고 당지수가 높아서 운동에 좋지 않다고 고구마를 먹겠지. 하지만 내가 어디 식단을 가리는 몸인가? 은근슬쩍 걸어가니 마름 큰딸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작은 도련님 아니세요? 한창 우모구를 하시던데 여긴 어인 일이신지요?”
“다른 것이 아니고 감자라는 말이 들려서 왔습니다. 누나가 감자를 삶아왔다 했는데.”
“아! 아아아아아니에요! 광에 있던 감자이긴 한데 제가 삶아오긴 했어도!”
실력이 부족해서 자랑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겠지. 나는 슬쩍 웃으면서 보따리로 손을 내밀었다.
“감자를 먹어본 기억이 없는데 한번 줘보세요.”
“아니에요! 작은 도련님이 감자를 드시다니요!”
“맛이 있건 없건 제 입이 까다로운 것이라 여기겠습니다. 어서 주세요.”
“아유! 작은 도련님도! 감자는 양반들이 먹는 음식이 아니에요! 그거 잘못하면!”
양반이고 뭐고 간에 감자 맛이 궁금하다. 보따리에 있는 감자 같은 둥글둥글한 녀석이 보였는데 왜 보라색이야? 보라색 감자가 있었나? 하지만 이상한 음식이면 뱉어내면 그만이다. 싹도 없으니 안전하고 보라색인 것만 제외하면 내가 아는 감자와 비슷하다.
감자를 껍질째로 먹어서 그런지 아린 맛이 올라오는데 맛은 현대의 감자보다 좋은 것 같다. 본래 먹던 감자보다 훨씬 작은 감자라 순식간에 하나가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린 맛이 조금 있지만 아주 맛있으니 하나 더 먹어야겠네요.”
“성룡아! 새참으로 옥수수팥죽을 대접해 주신다 하셨다! 어서 돌아오너라!”
감자를 하나 더 먹으려는데 형님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친구 집에 들러 팥죽도 먹었다.
조금 더 놀고 해가 기울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릿하게 배가 아파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지고 헛구역질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