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1장 4화 – 지나치게 뒤틀린 역사 >
피트니스 센터, 아니, 향교를 뒤로하고 다음으로 향할 장소는 의성현의 관아이다. 형이 향교에서 책을 읽는 사이 외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관아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키는 나졸은 특이하게도 쑥색 철릭 위에 웃옷을 입었으며 허리에 찬 커다란 환도와 등에 둘러찬 원패(圓牌)를 보니 아직도 팽배수의 전통이 유지되는 것 같았다.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두 나졸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송은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여긴 어인 일로 당도하셨는지요?”
“내 둘째 외손자의 호패를 만들고 호적에 등록하고자 한다네.”
“알겠습니다. 가서 현감님께 알리게.”
“정사(政事)에 바쁠 사람을 어찌하여 헛되이 부른단 말인가! 정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니 그동안 외손이 관아 구경을 하면 좋을 것이 아니겠는가.”
머쓱해진 나졸이 외할아버지를 관아 안으로 들여보내고 돌아왔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했는지 우리 앞에 나선 나졸은 여전히 머쓱한 얼굴이었다. 가만히 보니 같은 나졸이라도 소속이 다른 것 같았다.
백색 철릭을 입은 나졸은 평범한 병사 같았지만 쑥색 철릭을 입은 나졸은 체격도 담대했으며 패용한 무장도 육모방망이가 아닌 환도이다. 관아의 구조야 현대에서 지겹도록 익혔으니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자. 나졸의 환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졸님은 다른 이와 비견하여도 체격이 다부지고 패용한 무장도 다릅니다. 혹여나 어떠한 연유가 있으십니까?”
“어린 나이에도 세상 만물을 보는 눈이 다르구나. 다른 이들은 지방군으로 초모(招募)된 이들이고. 나는 훈련원 휘하 삼군에 속하여 관아의 방패수(팽배수의 옛 이름)로 근무하고 있다.”
“훈련원 휘하 삼군이라 하셨습니까?”
훈련원이면 세조가 개편했던 훈련관의 후신 기관이다. 전략전술을 훈련하고 선발 시험을 관장하는 기관에서 아예 인원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시킨다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졸은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훈련원은 세종대왕께서 세우신 훈련도감과 화기도감을 합쳐 만들어진 기관이다. 휘하에 훈련도감, 화기도감 그리고 임해도감을 두고 있으며 한 해에 초모하는 인원이 삼천 삼백 명에 달한단다.”
“아국에서 초모한 삼천삼백 명 가운데 한 명이라 하시면 무용이 대단하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의성에 훈련원을 나오신 분이 몇 분이나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훈련도감 세 명에 화기도감 한 명이다. 또한 나는 사 년 차에 불과하며 앞으로 육 년은 더 있어야 만기를 채우니 그리 빼어난 사람은 아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중앙군은 5교대로 근무하며 생업과 군역을 병행하는 이들이어서 실질적으로 2만 명을 굴리는 것이 전부이며, 지방군은 대다수가 수군에 속하며 5만 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훈련원 휘하 삼군만 삼만 이상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조선군의 총원은 얼마나 될까? 칭찬이라 여겼는지 표정이 풀린 나졸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그러하면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아국의 병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 방법이 있습니까?”
“참으로 골치 아픈 질문을 하는구나. 내가 무과를 준비하여 병서를 읽고 정세를 알았다면 확실히 답해줄 수 있겠지만······.”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면서 군관도 손을 꼽아가며 계산을 했다. 아마 자신이 근무했던 장소나 훈련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계산 중이겠지. 결국 고개를 저은 나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헛된 말을 하였다가는 경을 칠 수도 있으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하겠다. 경군(중앙군)이 적어도 팔만 명 이상, 지방군은 칠만 명 이상이다.”
“도합 십오만 명 이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모두 정군(正軍 - 무기를 들고 싸우는 실질 병력)입니까? 아니면 보인을 포함한 인원입니까?”
“정군과 보인(保人 - 군대에 징집되어 노동력을 제공하는 병력)에 대하여 알고 있으니 네 학식이 어지간한 유생보다 깊을 지경이구나. 모두 정군이니 보인을 합하면 그 두 배가 넘어설 것이다.”
임진왜란 때 침략했던 일본군이 20만 명에 달하지만 실질적인 병력은 10만 명이고 나머지는 짐꾼이나 병사들의 수발을 들어주는 보인이었다. 전근대에는 보인이 없으면 군대를 유지할 수 없다. 즉 임진왜란 침략군보다 조선군이 많다!
내 앞에 있는 나졸 수준의 병사들이 부사관직을 겸하면 지방군의 훈련수준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거다. 아마 임진왜란이 일어나도 막아낼 수 있겠지. 나졸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떠냐. 주상전하 아래에서 수만의 장졸을 호령하는 장수가 될 생각도 들지 않더냐? 너는 집안도 출중하고 송은 선생님의 지도편달로 착실히 따르고 있으니 무과에 나서는 일이 바람직하겠지. 관아를 안내할 것이니 나를 따라오너라.”
관아를 돌아봤지만 내 눈에는 전혀 다른 것들만 보였다. 훈련용인지 환도로 내리찍은 흔적이 역력한 통나무들. 한창 훈련을 마쳤는지 갓을 벗고 머리를 식히는 다른 병사들이 있었다.
이건 조선이 아니다, 단순히 상비군을 먹이는 비용만 따져도 원래 조선의 중앙 예산을 뛰어넘으니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가. 설명이 끝나자 현감도 업무가 끝났는지 마당에서 외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충! 성! 최 여수(旅帥 - 5개의 조를 인솔하는 종8품 관직) 현감님께 보고 드립니다!”
“아이 하나에게 세상 물정을 알려준 일인데 무얼 보고까지 하겠는가. 들어가 보게.”
내 앞에서는 허술하게 굴던 나졸이 상관을 보자마자 각 잡고 경례를 하며 우렁찬 목소리를 내니 현대에서 기강 잡힌 병사가 연상되어 소름이 돋았다. 현감은 내 얼굴을 보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눈빛만 보아도 이 아이의 총기를 알겠습니다. 송은 선생님의 외손이라 하였으니 학식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재가 되겠군요.”
“아직 아이에 불과한데 세상 물정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나. 세상 물정을 알아야 관직에 올라서도 실책을 범하지 않는 것이네. 다른 일은 아니고 올해 아홉 살이 되었으니 호패를 만들어도 될 나이라서 찾아왔지.”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내년에 호적 갱신이 있는데 일손을 덜 수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 조사에서 사십 호가 누락되어 호조 관원들이 눈에 불을 켤 것이 아니겠습니까.”
호적 갱신?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대충 훑어보고 대충 보고한 다음 대충 사람 뽑는 짓이었는데 이걸 주기적으로? 호조에서 재검토를 할 정도의 행정력을 발휘한다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현실이니 방법이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현감 앞에 고개를 굽실거리는 아전이 와서는 호패를 보여주었다. 윤기가 반질반질하니 대추나무로 만든 호패였다. 양반들은 나름 고급스러운 제료를 쓴다 했는데 의외로 소박하다.
“이름이 유성룡(柳成龍)이라 하여 제가 미리 작성해 두었습니다.”
“어허! 필적에 힘이 없으며 깎아내면 움푹 파여 불민하게 보일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내가 직접 붓을 놀릴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외할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 하급관리들이 일하는 공수청(公須廳)으로 들어가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현감은 종6품 관리인데 외할아버지에게 깍듯하게 존대를 하니 이상한 일이다. 외할아버지가 대단하신 분이었나? 유성룡의 기억에는 이런 내용이 없는데?
“송은 선생님이 관직에 계속 임하셨으면 판서는 몰라도 당상관에 발을 들이고도 남을 분이셨는데. 가만히 보자, 무언가 궁금한 것이라도 있느냐?”
현감도 정신이 없는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외할아버지에게 하대를 하는 이를 유성룡의 기억을 포함해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어보았다.
“현감님께서는 조만간 참상관(參上官 - 궁궐의 조회에 나설 수 있는 정 6품 이상 관료)의 자리에 오르실 분이신데 외조부님이 당상관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으셨다 하여 궁금하였습니다.”
“송은 선생님은 서른 무렵에 과거에 급제하시고 관직에 출사하시어 승진을 거듭하시다 용원도(龍元道 - 현대의 중국 길림성과 러시아 프로모르스키 일대)의 현령(縣令 - 종5품 지방관)으로 부임하셨다.”
용원도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외할아버지는 은퇴 관료이면서 현감이 깍듯이 예의를 보인다고? 서로 존대를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닌가? 하지만 현감은 한숨을 내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송은 선생님께서 중대한 송사(訟事 - 백성들이 관아에 탄원하는 것)를 처리하는 와중에 부족함을 느끼고 인근 상인의 지혜를 얻었다. 덕분에 송사를 온전히 처리하시고 공을 인정받으시어 종4품으로 품계가 오르셨지.”
“당시 외조부님의 연세가 서른 무렵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종4품이면 지방관으로 따지면 군수요, 군관으로 따지면 만호이며 서른 무렵에 여기에 올랐다면 당상관을 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을 듣고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때 야인이다 조선으로 귀부한 이의 지혜를 얻어 송사를 처리하셨기에 자신의 학문이 부족하다 여기셨지. 경종(景宗)대왕께 몇 번이고 상소를 올려 낙향하셨고 산림(山林)의 일원이 되셨다.”
“외조부님께서 종4품의 관직에 오르셨다는 말은 현감님께 처음 들었습니다.”
“산림으로 계시며 학문을 수양하시고 서적을 집필하신 분이니 대접받는 일은 당연하지 않느냐. 기껏해야 현령인 내가 송은 선생님에게 존대를 받으면 불민한 일이다.”
예정된 당상관의 자리를 내치고 낙향한 사람에다가 고향에 와서 학문을 더욱 갈고닦았다면 존경받을 수 있겠지. 그래도 산림(山林)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산림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사림파(士林派)의 정신적 지주이며 근본이다. 외할아버지가 산림에 속하면 외삼촌도 산림이 아닐까. 현감은 나에게 못할 말을 했는지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어느새 외할아버지가 눈을 부라리고 계셨다.
“입이 가벼운 이들에 의해 알려질 것이라 여겼지만 자네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소······! 송은 선생님!”
“되었네. 어차피 세상을 살면서 알게 될 일이었는데 차라리 자네에게 들었으니 나은 일이라네. 네 호패를 만들어 왔으니 패용하여 보거라.”
본래 전체 인구의 20%도 보급되지 않았던 호패를 받아드니 묵직한 대추나무의 감촉과 갓 새겨 다시 먹물을 먹인 내 이름 석 자와 훈민정음으로 쓰인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이름 아래에는 내가 태어난 연도와 본관, 내가 유음자제(有蔭子弟 - 양반가 자손을 뜻함)라 명시되어 있었으며 뒷면은 비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밋밋한 뒷면을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네가 어릴 적에 호패를 만들었으니 차후 성년이 되면 너의 외형과 호를 비롯한 내용을 추가로 기입할 것이다. 열여섯 이후에는 호패를 다시 새겨 늘 패용해야 하느니라.”
지금 받은 호패는 호적 등록 겸 신분증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호패를 새긴다면 각종 비리가 발생하지 않을까? 의문을 품으며 호패의 아랫면을 만져보자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음각(陰刻)된 글자가 있어서 살펴보니 아라비아 숫자와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글자가 열두 자리나 새겨져 있었다. 이거 설마 주민등록번호 같은 용도인가? 내가 아랫면을 뚫어져라 보자 외할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호패의 하부는 방(方 - 평평하다)한 면이 있는데 여기에 숫자를 기입하여 공문서에 사용하는 인장을 대신한다. 이는 환종(桓宗)대왕께서 정하신 법도이며 네 성명과 결합하여 인장(印章)으로 쓰이는 것이다.”
“하오면 인장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호패에 있는 수인장(數印章 - 숫자 도장)은 문권(文券 - 각종 권리증명서)이나 네가 훗날 관직에 나서서 녹봉을 받을 적에 필요한 것이다. 공첩(公牒 - 공문서)에 두루 쓰이나 그 이상의 효력은 없다.”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호패를 만들었는데. 호패를 만들어서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니 호패가 없으면 말 그대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호패가 도장처럼 쓰이니 위조도 쉽지 않겠지. 현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덕분에 제 성명이 호적에 기입되었습니다. 현감님께서 항시 백성을 위해 고난을 겪으시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히려 내가 잘된 일이다. 추수가 끝나면 사람이 몰려들어 호패를 만들어 달라 아우성을 치는데. 오히려 내년에 행해도 될 일을 바쁘지 않은 시기에 하시니 다행이 아니겠느냐.”
관아 사람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집에 돌아가며 외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무엇도 아닌 사림파 때문이다. 사림파는 정치인이 아닌 철학자이며 부족한 실무 능력이 기본이어서 성종 시기 이후 조선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아왔다.
그럼 지금 조선에도 사림파는 존재하고 있을까? 사림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산림이라고 물어봐야겠다. 외할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소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외조부님께서 산림의 일원이라 하셨는데 산림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산림지사의 줄임말이다. 다른 이들은 산림지사라 하며 받들어 주지만 실상은 세상만사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학문에 파고들어 정체된 이들이지.”
학문에 파고들어 정체되었다 말씀하셔서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외할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독히 우울한 표정을 짓고 계시겠지. 내가 가만히 있자 형님이 나서서 항변했다.
“외조부님이 정체되었다 하시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외조부님의 학식을 담은 서적인 경심잠(警心箴)이 널리 알려져 홍문관에 들어갔는데 이는 외조부님의 학식을 알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경심장은 유생으로서 행할 일과 서로 간의 예절을 정리한 서적이다. 하지만 내 학문은 유학자로서 평시 품어야 할 마음을 담은 것이 전부이며 세상을 알지 못한다.”
홍문관이면 궁궐에 부속된 도서관인데 여기에 외할아버지의 책이 올라갔다고? 이런 사람이 말하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는 소리는 조선의 중추인 사림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나 마찬가지였다. 외할아버지는 당나귀를 돌려 우리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서책에 적힌 내용은 세상을 사는 법도를 나타내지만 세상은 다르다. 재능이 남다르고 학문이 깊다 하여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러한 법도를 모르고 실책을 범하였지만 천운이 따라 일이 좋게 흘러간 것이다.”
대체 무슨 실수였는지 궁금하지만 알아내려면 내가 관직에 올라 외할아버지가 근무하였던 지역까지 가야 알 수 있겠지. 외할아버지는 한참을 침묵하시다 말을 이어갔다.
“옛적 세종대왕께서는 백성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무던히 애를 쓰셨다. 하지만 산야에 파묻혀 학문에 몰두하는 이들이 아는 일은 서책에 적힌 죽은 지식이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니 작금에 이르러서 산림에 속하는 이는 오백 명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사림파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관료집단인 관학파와 왕권을 숭상하는 훈구파의 양당체제가 이어진다는 말이 분명하다. 좋은 일이지만 외할아버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지금의 조선에서 본래 역사처럼 유교적 이상향을 추구하는 성리학자는 정계에 진출할 길이 막혀 있는 것이며, 외할아버지는 나름 노력을 하였지만 실무 능력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지방으로 낙향한 것과 마찬가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