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43화 (243/573)

< 2부 프롤로그 >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과 발목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뱃살이 출렁거린다. 이미 오 년은 살이 빠지지 않고 정체된 몸과 허리도 굽히지 못하는 망가진 척추.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란 인간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집에 돌아왔지만 열한 시 반이 넘었으니 다들 자고 있나 보다. 현관에서 외투를 벗어들고 발을 움직이니 체중 때문에 쿵 소리가 났다. 이놈의 육중한 몸은 사뿐사뿐 움직인다 생각해도 언제나 굉음을 동반한다.

“여보? 들어왔어요?”

“응, 술 조금만 마시고 왔으니까 어서 자. 나도 뒷정리만 하고 들어가 잘게.”

아니나 다를까 안방에서 아내가 내 발걸음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피로가 올라와 당장 자고 싶었지만 아직 약간의 잔업이 남았다. 다음 주 출장을 준비하려면 주말 동안 집에서 일해야 할 것이 아닌가.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오늘 회사로 배달된 건강검진 통보서를 펼쳐 보았다. 예상했던 결과가 그대로 나와 머리가 아찔해지고 숨이 막혀왔지만 이건 명백히 내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알려주었다.

초고도 비만, 고지혈증, 경미한 당뇨, 고혈압 그리고 지방간까지. 모든 신호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성인병이라는 폭탄이 터질 것이라 냉정한 경고를 보내왔다.

지난 십오 년을 혹사시킨 몸이. 술과 폭식 그리고 야근으로 짓뭉개진 몸에서 심각한 성인병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천운이나 마찬가지이라. 혹여나 아내가 찾아볼까 봐 진단서를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욱여넣었다.

“아내가 이걸 봤다면 당장 일을 그만두라고 한소리를 하겠지.”

내가 홀몸이라면 회사에 통보하고 조용히 퇴사한 다음 퇴직금을 까먹으며 일 년 정도 휴식하고 운동하며 몸을 다스리겠지만 나는 가장이다. 당장 나 김성원이 일을 그만두면? 내 아들과 아내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일을 그만두면 가정이 무너진다. 일을 이대로 계속하면? 내 몸이 무너지겠지. 나는 몇 번이고 말했었지만 정작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말을 되풀이하며 컴퓨터의 전원을 넣었다.

“이번 사업만 끝내면 소장에게 말해서 편한 업무만 하며 월급을 적게 받던 해야지. 아니면 아예 다른 사무실로 옮기거나.”

130㎏에 달하는 체중을 견디지 못한 회전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짜증이 솟구쳤다. 의자를 매년 새로 사느니 살을 조금만 빼자는 아내의 잔소리가 떠올라 책상 위에 있던 비스킷을 거친 손길로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다.

부사수가 보내온 기존 도면자료와 다른 회사가 수행한 실측 보고서를 비롯한 자료들이 회사 전용 웹하드에 가득 쌓여 있었다. 자료 목록을 확인하고 업무 내용을 확인하니 숨이 턱턱 막혀왔다.

업무 기한 180일, 병산서원의 정밀실측보고서 작성 및 인쇄. 쉽게 말하면 거대한 서원의 기와 한 장부터 주춧돌 하나까지 사진을 찍고 자로 재며 철저히 조사하여 완전히 유실되어도 원본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고 해본 정밀실측은 역시 첫 계획부터 어긋나 있었다. 당장 출장 일정이 3일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이런 규모면 3일로 제대로 된 조사조차 불가능하다.

“부속시설은 정밀실측 대상이 아니고. 강학건물만 다섯 채에 제향건물 세 채. 사무실 인원 다섯 명이 나간다 치면 내가 건물 세 개는 실측해야겠네. 그럼 출장이 어떻게 삼 일이야 오 일은 다녀와야지.”

24세부터 38세까지 15년 동안 일한 사람이니 실무 영역의 일은 소장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계획을 전면 수정하자는 쌀톡을 보내며 자료를 정리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3D 스캐닝 업체는 보름 뒤에 온다면 일은 편하겠네. 다음 주 월요일 출장 시작해서 금요일 돌아오고. 2차 출장으로 스캐닝 업체에 지시 내리도록 다음다음 주 목요일과 금요일 출장. 이래도 또 3차 출장 가서 실측해야겠네.”

기존 자료를 정렬하니 벌써 열두 시 반이 넘었다. 평소처럼 새벽 세 시까지 일하려 했지만 건강검진 통보서와 아내가 몸을 생각하라며 사들인 건강식품을 보자 일할 마음이 사라졌다.

적당히 정리한 자료를 저장하고 컴퓨터를 끄니 아직 샤워도 하지 않은 사실을 알아차렸다. 옷을 벗어 던지고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다시 푸념이 새어 나왔다.

“젊은 시절에 멍청한 짓을 한 대가가 이런 몸이라니.”

내 인생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다. 집안은 잘 살아서 어린 시절부터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으니까. 아쉬운 것은 공부를 별로 안 하고 잔머리만 굴린 것이지.

수능은 본래 실력보다 잘 봤지만 기본이 없으니 어중간한 대학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신 지원으로 문과 주제에 원서를 넣어본 건축학부 교차지원에 덜컥 합격했고 나머지 대학은 모조리 탈락했다.

그래놓고 신나게 친구들과 놀다 교통사고를 당했고. 별다른 증상이 없었지만 MRI를 찍어보니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당시에는 병역 비리가 수면으로 불거지기 이전이라 디스크로 군대를 면제받았고 2년이라는 시간을 벌었다.

당시에는 정말 운이 좋다 생각했다. 2년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디스크라 해봤자 가끔 다리가 저리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 디스크는 내 인생을 완벽히 좀먹어 버렸다.

머리에 묻은 샴푸를 씻어내자 수챗구멍에 내 탈모를 여실히 증명하는 머리카락이 걸려 있었다. 탈모는 피할 수 없다지만 나머지는 피할 수 있었겠지. 한 번 푸념을 늘어놓으니 계속 푸념이 새어 나왔다.

“그때 취직하지 말고 디스크 치료를 하고 공무원준비 할걸. 돈은 몰라도 건강은 챙겼고 야근하는 버릇도 생기지 않았겠지.”

24살의 젊은 나이에, 심지어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교수의 소개를 받아 지방에 있는 건축사사무소에 취직했다. 전통건축 사무소라 하여 산과 들을 오가며 일할 수 있다 하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한창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니 일이 많아 야근은 일상이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저녁 9시에 퇴근하면 평범한 퇴근이었다. 군대 면제라는 이득을 안겨준 척추 디스크는 나의 야근을 양분 삼아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끔찍한 통증과 하반신 마비로 답해주었다.

당시의 행태도 문제였다. 돈에 눈이 먼 의사들이 실비보험을 들먹이며 증세가 심각하지 않은 내 디스크에 과도한 수술이 필요하다 권고했고, 내 척추에는 흔히 말하는 철심이 박혔다.

척추에 박힌 여섯 개의 나사못과 3년간 모인 약간의 퇴직금이 내 첫 직장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첫 직장에서 들인 버릇이 사라지지 않은 데다 성과급도 들어오니 밥 먹듯이 야근을 반복했고, 불규칙한 생활과 운동 부족으로 인해 체중은 점점 불어났다.

열심히 하는 김 대리, 정말 열심히 일하는 김 과장, 일감 잘 물어오는 김 실장으로 이름이 알려진 나는 몸을 망가트린 멍청이가 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다시 다짐했다. 아마 지켜지지 않겠지만 말이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겠다.

“영직이 녀석이 군대 다녀와서 보디빌더 시작할 때 같이 운동했으면 이런 꼴은 나지 않았겠지. 후회해서 뭘 하냐. 정말 이번 일만 하고 소장이랑 면담해서 쉬운 일만 받······.”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 되며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일어나려고 애써 보았지만 이제 시야마저도 일렁거린다.

혹시 뇌출혈? 심근경색? 어디가 문제인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겠다. 쓰러지기 전에 구급차라도 불러야 하니 휴대전화를 집으려 방바닥을 기어갔지만 내 손조차 이상하게 보였다.

살집이 투실투실하게 오르고 굳은살은 손목에만 박인 사무직의 손이 아니다. 영직이와 같이 철저히 발달된 보디빌더의 손이 보였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

“이게 내 몸······.”

갑자기 눈꺼풀이 감기며 졸음이 밀려온다. 이런 졸음은 이틀 이상 철야를 했을 때에나 경험할 수 있었기에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나는 파자마를 입다 만 몸으로 엎드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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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에 빠졌다 일어난 듯이 몸에 감각이 없고. 주변은 적막하여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나는 누워 있었다. 설령 잠이 들었다 해도 엎드린 채로 잠든 130㎏의 거구를 아내 혼자서 침대로 옮겨놓을 수 없었으리라.

아마 여기는 병원이거나 잠에 빠진 나를 친구인 영직이가 찾아와 침대 위로 올려놨겠지. 녀석은 나만 한 무게로 벤치프레스를 할 수 있는 보디빌더니까.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모두 정상으로 움직이지만 깊은 잠에 빠진 덕분인지 감각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아직도 깊은 피로가 느껴지지만 다행히도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허벅지가 간지러워 손으로 긁으려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뱃살이 없지?”

소스라치게 놀라 온몸을 더듬었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고 누운 상태로 허벅지를 긁으면 당연히 뱃살에 팔이 막혀야 하는데 막히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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