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외전 15화 – 친구가 범인이다 >
닷새를 황실 박물관에 머무르면서 배우니 수양대군의 후손들, 정확히는 예진원의 마지막 대제학인 본래 역사의 고종이자 이 역사에서 종친 이형이라 불리는 자의 후계자들도 기업을 설립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가에 있던 완화(完和)라는 상표의 역기봉은 이형의 장남인 완화군, 본래 역사에서 젊은 나이에 병을 앓다 사망한 장남이 변한 역사로 인해 환갑까지 살았고, 이후 입신체비의 일부를 물려받으면서 만든 회사가 완화 공업사였다.
다른 후손들 모두 입신체비와 관련된 물건을 만들거나 기술을 뽐내니 각자 기업사의 사장 정도는 꿰찰 수 있었다.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세계적인 대기업이 분명하였다.
마침 박물관 인근에서 완화 공업사의 시연회장이 열렸기에 입신체비 협회의 표준 성능을 통과한 녀석이라 광고하여 궁금했다. 100㎏을 올리고 가볍게 전체승압(파워클린)으로 들어보니 놀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손에 착착 감기는데? 인체공학적 역기봉이라 해서 약 판다 생각했지만 이건 정말 대단해. 본래 역사에서 이런 거 사려면 십만 원은 줘야 했는데.”
탄성이 죽여준다. 아니 죽여주는 수준도 아니고 중량과 탄성 그리고 밸런스 모두가 입신체비사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나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가격도 정말 저렴하다!
“지금 새 역기봉을 구매하시면 저렴한 가격 29원 99전(약 5만4천 원)에 조이개 세 개까지 드립니다. 한계 중량은 240㎏으로 이론상 진양근이 가능한 무게에요.”
무언가 백만 장이 넘게 팔린 면바지 팔 듯 역기봉을 팔아 대서 생소했지만 이 또한 시대의 흐름이리라. 성원이에게 쌀톡이 왔는데 녀석은 이제 한명회를 욕하고 있었다.
- 망할 놈의 칠삭둥이 자식 때문에 이게 뭔 짓이야! 사흘 뒤에 돌아가니까 돌아가면 한번 만나자. 만날 장소는 네가 정해. 통가 특산 격수(檄樹 - 노니)라도 사다 올까?
- 그냥 몸만 와라. 너 여행가방 미어터지겠다.
- 그나저나 같이 만날 장소나 정해. 어디가 좋을까?
사흘 뒤에? 사흘 뒤라면 어디가 좋을지 고민해 봤는데 딱히 만날 장소도 생각나지 않는다. 동생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휴대전화를 들려다가 말았다.
- 네가 와서 정하는 것이 좋겠지 고생한 사람이 정하는 것이 상식 아니겠어?
어차피 어디가 좋은지 알게 뭐람. 이 역사에서 살아온 녀석에게 맡기는 것이 훨씬 속이 편하지. 어차피 볼 것은 다 봤으니 다음으로 갈 장소는 조선시대의 나의 집이자 수양대군의 사택이며 입신체비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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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역사의 남산초등학교와 세종호텔이 있었던 충무로 일대. 조선시대에는 진고개라 불렸고 개화기 무렵 남산골이라 불린 남산 북쪽의 언덕길은 수양대군의 자택이자 나름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부촌이었다.
일제 강점기 무렵 총독부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한양을 개발하여 인구 과밀을 해소하고 도시를 정비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종로 일대의 기존 상권을 일본 상권으로 갈아치우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 역사에도 진고개는 개발되었다.
“본래는 진고개, 일제강점기에는 혼마치(本町) 그리고 해방된 이후에는 중구와 충무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동네이지만 지금은 진고개동이라니.”
한양특별시 남산북구 진고개동이란 명칭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적응하면 될 일이라서 개의치 않기로 했다. 표지판을 따라가니 나의 집이자 수양대군의 자택도 다른 장소로 이전해 있었다.
<옛 수양대군 자택의 자리, 1747년 한양 정비 계획에 의거하여 장충동 남산골로 이전하였음>
산세를 찾아갈 필요도 없이 내가 살고 있던 집의 안채를 표시하는 초석이 길가에 놓여 있었다. 아마 집을 모조리 분해해서 그대로 옮겨갔으리라. 기초가 깊은 철골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진고개가 아닌 남산골로 이전하였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조선시대에도 살면서 불편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당시 일하던 하인들 고생이 많았으니까.
“땅 자체가 진흙이라서 비만 오면 질척거렸고. 남산 그늘 때문에 겨울이 되면 땅이 얼고 녹기를 반복했지. 하지만 이전한 장소가 본래 역사의 남산골 한옥마을이라니.”
안내를 위해 설치된 지도를 보니 본래 역사에서 수도방위사령부 본부였고 훗날 남산골 한옥마을이 위치한 곳에 수양대군 자택이 옮겨간 모양이다. 그런데 자택이 옮겨간 자리를 돌아보니 근대 무렵 세워진 건물부터 빌딩까지 각종 건물들이 즐비하였다.
심지어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건물은 체육관인가? 체육관 수준도 아니고 각종 경기장으로 보이는 시설들이 즐비하였다. 규모는 내가 견학만 다녀왔던 태릉선수촌과 비슷한데?
“이래도 되나? 태릉선수촌이 도심 한복판에 있어? 아니다, 입신체비의 핵심이니 대한체육회의 모체이며 체육과학연구원의 기능도 수행했을 것이고 사람들이 모여들 이유가 충분히 있었겠는데.”
진고개 입신체비장은 단순한 입신체비시설이 아니었다. 입신체비의 핵심이자 원류가 있으니 이를 위한 각종 시설들이 들어섰으며, 본래 역사의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장충체육관까지의 모든 공간이 체육 관련 시설이 되었다!
안내에 따라 걸어가니 나의 사택이었으며 이후 예진원 대제학이 줄줄이 거주하였던 집은 명칭도 장충원(奬忠院)이 되어 있었으며 자체가 문화유산이자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이 또한 얄궂은 일이었다.
장충동은 장충단에서 온 이름이다. 본래 역사에서 장충단은 을미사변에서 순국한 충신, 열사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이었으나 이 역사에서 순국한 충신, 열사들은 종묘 인근의 충현묘(忠賢廟)에서 제사를 대행하였다.
아예 생겨날 이유가 없었던 장충이라는 명칭은 나의 6대손이었던 이연, 본래 역사의 선조쯤 되었을 후손이 집을 개수하면서 지은 것이다. 덕분에 장충동의 이름은 여전히 장충동으로 남아 있었다.
“충성을 장려하는 집이라 해서 장충원이라, 하긴 종친으로 대접받고 예조 휘하 기관을 대대로 물려받는 후손들이 충성을 장려할 마음을 품는 것이 당연하지. 본래 역사의 선조 수준은 아니더라도 눈치는 있는 후손이었군.”
덕분에 장충동이 되었으니 편한 일이다. 이 거대한 입신체비, 아니 체육 복합 시설의 입구에 있는 장충원의 입구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니 오백 년의 세월을 건너뛴 나의 집이······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같은 집이지만 외형은 확실히 달랐다.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이라 이건가. 하긴 내가 살던 시절에도 많이 뜯어고쳤잖아.”
[장충원은 대대로 예진원 대제학이 거주하던 사택이었으며. 이로 인해 각종 설비가 개수되어 옛 모습을 남겨둔 건물은 가묘(家廟 - 집안 어른의 위패를 모신 사당)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본래 한옥은 테세우스의 배와 같다. 목재는 세월의 흐름에 약해지며 썩어 들어가고 이를 끊임없이 갈아 끼우면서 건물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목재를 사용한 물건의 공통점이지만.
조선시대에 살 때에도 칠 년마다 서까래를 뜯어고쳤고, 십오 년마다 기둥을 잘라내고 동바리(훼손부위를 잘라내고 새로 이음) 수리를 하였지. 내가 나이를 먹었을 무렵에는 아예 초석을 제외하고 건물을 새로 세우다시피 하였다.
심지어 지붕마저도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 황동 기와를 올렸다. 하긴 일반 기와는 쉽게 깨지고 흙이 흘러내려 삼 년에 한 번꼴로 기와를 정비해야 했으니까. 생각해 보면 근정전도 황동 기와를 올렸으니 당대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황동기와를 올리고 벽은 모조리 벽돌벽(두께를 보아 단열재도 시공한 것 같다)으로 변한 장충원을 돌아봤는데 마당에 전시된 거대한 기계가 보였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하이브리드 엔진을 사용한 보행기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혼합(하이브리드) 기관 4형 보행기 시험작, 1924년 페르디난트 포르쉐 교수 제작>
[독일에서 초빙된 한양 국립 대학교 교수인 포르쉐 박사는 자신이 창안한 혼합기관을 이용하여 다양한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개중 네 번째로 창안한 4형 보행기는 대한 공화국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종래의 휘발유를 사용한 3형 보행기와 달리 4형 보행기는 디젤 엔진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연료의 제약이 줄어든 보행기는 공화국 전체로 입신체비를 전파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보행기는 수양대군의 직계 후손인 이척이 시험하였습니다.]
본래 내 손길이 닿은 곳은 유물이 전부였다. 내가 글을 쓰다 남산을 바라보았던 사랑채 마루도 다 새로운 목재를 사용했겠지. 하지만 유물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철제 편곤, 16세기 후반 유물, 본래 수양대군이 남긴 대역기봉을 잘라 편곤으로 사용하였음>
<입신체비서 초본 복제품, 원본은 국가기록보관소에 보존 처리 중>
철물은 몰라도 서적은 보존을 위해 대부분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세계문화유산에 속한다는 설명이 있으니 당연한 조치였지만 내 손때가 묻은 서적을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천천히 유물들을 살펴보니 덩치가 튼실한 노인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익숙한 사람이었다. 입신체비 관련으로 유명한 인물인지 TV를 많이 보지 않은 내 기억에도 남아 있었으니까.
“어르신을 뵙습니다.”
“자네 최영직 아닌가? 두 달 전에 전통 입신체비사가 되었다 하였는데 여기에는 무슨 일인가? 무언가 찾는 물건이 있는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났다. 얼마 전에 은퇴한 대한입신체비협회 전임회장. 수양대군의 21대손 이정준 회장이다! 회장직을 은퇴하면 장충원 관리직을 하나? 여하튼 첫인상은 좋으니 찾고 싶은 서적을 말해보자. 아마 한 권은 있을 것 같다.
“실은 영직서가 있다 해서 찾아왔습니다.”
“영직서 말인가? 여기서 영직서만큼은 원본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네. 그런데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 서책인데 이걸 알고 있다니 대단한 일이로군.”
“수양자의 손길이 닿은 서적을 제 눈으로 직접 만지고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쓴웃음이 나왔지만 영직서는 틀린 이론서이다. 엄밀히 말하면 현대 지식과 상반되도록 일부러 운동생리학적 이론을 틀리게 저술해 놓았으며 이는 연막작전에 가까웠다.
혹시나 내 업적을 질시한 이들이 수양대군이라는 존재를 과거로 건너온 현대인으로 몰아갈 수 있을지 몰라 영직서를 저술했다. 이정준 회장은 한숨을 쉬더니 기념관 구석의 서재로 나를 안내하였다.
“영직서는 대한 공화국에서 정보가 극히 드문 서적이네. 이유는 알고 있나?”
“15세기의 빈약한 이론으로 20세기에서 검증할 수 있는 이론을 저술하였기에 오점이 많다 들었습니다.”
“정확히 알고 있군. 이론서라 하지만 3할만 옳고 7할은 그른데 이는 서구의 4액체설이나 용불용설이나 마찬가지의 수준이야. 아마 말년에 급히 저술을 남기시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오점이겠지.”
후손들의 많은 연구가 있었는지 종이가 덧발라져 있는 영직서를 보자 감동이 밀려왔지만 내용을 확인할 차례이다. 한 장씩 넘기면서 서적을 읽어나가니 이정준 회장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조선시대의 선비처럼 한문을 능숙하게 읽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군. 조부님이 이 정도로 능숙하게 읽으셨는데 젊은 나이에 참 대단하군.”
“어르신 앞에서 부족한 재주를 뽐내는 것 같아 낯을 들 겨를이 없군요. 궁금한 것이 있는데 혹여나 후대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라는 설도 있지 않습니까?”
“그나마 맞는 이론인 인체 수복(修復)이론이 적혀서 위서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지. 더군다나 수양자께서도 이를 증명하라 하셨으니 덕분에 오류를 확실히 알아낼 수 있었네.”
오답만 잔뜩 적어둔 책이니 반대로 정답을 찾을 수 있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영직서에 얽매여서 틀린 이론을 신봉할 줄 알았는데 천만다행으로 후손들은 내 생각보다 머리가 좋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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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한 마음으로 장충동 일대를 돌아보았다. 각종 체육시설은 물론이고 장충동의 핵심은 우현규가 창안하고 훗날 입신체비로 편입된 재활(再活) 의술과 체력 검정이었다. 이미 각 종목의 전지훈련장이 대한 공화국의 영토 곳곳에 퍼져 있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저 선수 클리튼 거스 아니야? 유리로 만든 야구선수가 여기에 웬일이래?”
한 서양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휘두르는 모습도 보였는데 얼굴을 보니 가을에는 불을 싸지르는 유리몸 야구선수가 분명해 보인다. 휴대전화로 검색하니 서양인이 아니고 미국의 택주(澤州 - 텍사스) 출신 야구선수로 나와 있다.
각종 체력검정과 신체평가도 어느 정도 개방되어 있었다. 특히 나와 같은 입신체비사는 체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혜택도 잔뜩 있었고. 각지의 운동시설에 대한 안내코스가 있어서 신청하고 시설을 확인하였다.
삼 일 동안 각종 시설을 봤는데 가장 궁금한 것은 내수린이다. 내가 창안한 운동 가운데 하나인 내수린이 어떻게 발전하였을까. 놀랍게도 내수린은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다. 안내원은 시설을 안내하며 활기차게 말했다.
“여기는 내수린 선수들이 머무는 장소입니다. 공화국 사람들이면 아시다시피 내수린은 세 종목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분류를 아시는 분이 계시나요?”
“저요! 내수린은 고전 내수린, 연무(演武 - 무예를 연마함) 내수린 그리고 일반 내수린으로 나뉩니다.”
“정답이에요. 고전 내수린은 수양대군이 창안한 역사상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사극(史劇)을 재현하는 내수린이며. 연무 내수린은 서양의 판크라티온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지요. 그리고 일반 내수린은 고전 내수린을 연극으로 발전시킨 겁니다.”
안내원은 자랑스럽게 수양대군을 시작으로 한 고전 내수린의 계보를 나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각지의 내수린꾼이라 하여 각지의 민담이나 야사를 기반으로 한 내수린꾼이 존재하였다던가.
“유생들은 내수린꾼이 자신의 용력을 앞세워 눈먼 이들의 돈을 갈취한다 하였지만 실제로는 내수린을 즐겨하였습니다. 특히 조선 중기의 내수린꾼 중 역사에 남은 이가 여기 있습니다. 태량붕탁(큰 보를 무너트린다) 송시열입니다”
송시열이라고 말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다. 우암 송시열도 아니고 태량붕탁이라니 이 기괴한 별호는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본래 역사에서 힘이 장사라 하였으니 가능은 하나?
여하튼 내수린의 발전 역사를 살펴보니 서양인들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19세기에 들어 서양에도 레슬링이 유행하였고 서양인들은 동양의 내수린을 체험하기 위해 대한제국으로 건너왔다.
그들을 맞이한 이들은 몸을 기르고 어떠한 충격도 버텨낼 수 있는 괴력의 근육덩어리들이자 수많은 세월 동안 내수린 기술을 연마한 이들이었고, 상대적으로 여린 체형의 서양인들은 대부분 정신적 충격을 겪고 도망쳤다 하던가.
안내가 끝났는데 가장 특이한 시설이 있었다. 가로세로 10m쯤 되는 방음시설에 내부는 푹신푹신해 보이는 안감을 대놓은 방이 줄지어 있었는데 안에서 땀에 절어버린 청년들이 허우적거리면서 기어 나오다 직원의 부축을 받았다.
“여기는······ 뭔 투기장인가?”
입구로 돌아와 표지를 보니 <개인 내수린장>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개인 내수린이라 하니 살벌해 보였지만 설명을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인 내수린장은 개인의 원활한 내수린 연습을 위하여 철저한 방음과 충격방지 설비가 내장된 최첨단 시설입니다. 외부 창문을 통해 전문 내수린꾼이 대기하여 사고를 방지하며······.]
전 세계적으로 사문화된 결투 의식이 대한 공화국에는 남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수린이라는 형태로 친구끼리 즐기거나 다툼을 해결하라는 말이지만 소름 돋는 일이 아니겠는가. 당연하지만 경고문에는 고전 내수린의 규칙을 지키라는 말이 있었다.
“고전 내수린의 규칙을 지키면 부상을 입을 염려가 적지. 설마 친구에게 파일 드라이버를 날리는 미치광이가 있을 이유도 없고. 그런데 쌀톡이 또 왜 와?”
- 야 미안해, 날짜 변경선 잊어먹어서 어제 공항에 도착해서 내일까지 휴가다. 지금 어디냐?
- 장충동에 있는데 지금 내수린장이야.
- 내수린장이면 잘됐네. 내가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한 시간 정도 기다리자 성원이가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 걸어온 성원이의 얼굴은 본래 역사와 같았지만 체형이 다르다. 아예 완벽히 다른 체형이라서 소름이 돋아 오른다! 일에 찌든 중년 남성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오래간만에 보니까 이상해? 살이 좀 쪘나 보지?”
“그렇게 살찐 것 같지는 않은데. 미국 다녀와서 입맛에 문제라도 생겼어?”
“네 눈으로 보니까 틀린 말은 아니겠네. 해외 출장 나가서 근손실 오면 어쩌나 했는데.”
본래 역사의 성원이는 181㎝의 신장과 128㎏의 체중을 자랑하는 BMI지수 39의 초고도비만 환자였으니까. 디스크와 각종 성인병 징후에 시달리던 살아 있는 시한폭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녀석의 몸은 대충 본래 역사에서의 체중과 동일해 보였다. 하지만 절육(커팅)을 하지 않은 거대한 근육덩어리이니 체지방률은 25%를 넘지 않으리라. 성원이는 한겨울의 날씨에도 팔뚝을 드러내더니 한숨을 쉬었다.
“수양팔근도를 보니 내가 관리를 덜 해서 커팅과 데피니션이 부족한 것 같아. 너네 피트니스 센터에 다닐 거니까 조금 싸게 해줘라. 많이 필요한 건 아니고 네 편의는 내가 봐줄게.”
참 반가운 소리다. 친한 친구라면 기회를 봐서 사정을 털어놓기도 좋았는데 이렇게 나서주다니. 커팅과 데피니션이라는 용어는 여기서도 통하나 보네.
“친구 좋은 게 이런 경우에 필요한 일이지. 가급적이면 사람 적을 때에 찾아와라.”
“아주 좋은 소리네. 지금 내수린이라도 한번 해보면 어떨까? 예전에도 자주 했잖아?”
내가 성원이와 내수린을 했었나? 하지만 녀석의 체형을 보니 운동을 헛한 건 아니다. 나보다 노력이 부족했겠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저런 체형을 만들려면 보통 고생해서 될 일이 아니다.
개인 내수린장에 비어 있는 방이 하나 있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된 내수린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닫으니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녀석도 내수린을 많이 해봤는지 준비운동을 하고 내 앞에 나와 몸을 씰룩거렸다.
“선공은 누가?”
“야, 내가 입신체비사인데 먼저 선공하면 쓰겠냐? 네가 먼저 해라.”
몸을 풀면서 기다리니 녀석은 자세를 낮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도 자세를 낮췄는데 녀석의 입이 열리고 원한과 분노가 섞인 말이 들려와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반갑습니다! 수양대군 나리! 조선을 헬창국가로 만든 분이시니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지금 뭐라 했지? 수양대군 나리? 성원이가 대체 뭔 소리를 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데 녀석은 어마어마한 근육덩어리를 앞세워 바로 태클을 걸었고, 물 흐르듯이 내 허리를 잡더니 바로 폭락(파워 밤)을 날렸다.
“너! 너 지금 뭐라 한 거야! 내가 무슨 수양대군이야!”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의심했는지 알아? 친한 친구가 미주 출장 다녀오게 생겼는데 출장 나가고 하루 만에 까먹는 놈이 붕어지 사람이겠냐!”
등골에서 식은땀이 솟아올랐다. 몇 번이나 의심했다는 말은 녀석도 조선시대에 다녀왔다는 것이고 나와 같이? 나와 같이 고생한 것이 아니고 아무리 봐도 내 후대에 빙의한 것 같은데?
“닥치고 이거나 먹어라! 내가 몇 번이나 전신투(바디프레스) 당해온 줄 알아!”
130㎏에 달하는 거구가 몸을 찍어버리니 폐에서 공기가 새어 나오면서 고통이 밀려왔다. 내수린의 규칙대로 자세를 잡고 일어서니 녀석은 분노로 시뻘겋게 물든 얼굴을 숨기지 않고 계속 공세에 나섰다.
“내가 까먹을 수도 있지!”
“한번 의심하니 계속 의심하더라고! 내 사진기록 확인하니 변한 역사에서 작년에 나와 네가 만천서원 다녀왔는데 까먹었잖아! 그리고 사모아가 아니고 양상도겠지!”
녀석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 왔는지 몰라도 자신의 체격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근력은 거의 비슷하고 체중 차이가 20㎏이 넘으니 단순한 완력으로 될 일도 아니다. 두골헌(헤드락)을 억지로 푼 다음 녀석의 허리를 잡고 배신락(백 바디 드랍)으로 뒤로 넘겼다.
“성난 멧돼지처럼 덤벼드는 짓거리 하지 마라! 그리고 사모아는 옛 이름이니까 내가 알아들은 거 아니야!”
“거기 사람들 죄다 한글 쓰는데 통하지도 않는 소리는 하지도 마라! 그리고 방금 전에 말한 거 입신체비사로 절대 하면 안 되는 소리인 거 몰라? 영어 섞어 쓰면 양놈의 새끼라고 욕을 먹어! 그리고 입신체비사는 절대 비용을 깎지 못하게 되어 있어!”
왜 이러지? 조선시대에 누구로 태어나거나 빙의했는지 몰라도 본래 역사의 조선과 비교할 수 없는 좋은 환경이다. 먼저 주부투(엘보 드롭)로 타격을 가하고 녀석이 일어설 시간을 주었다. 배를 감싸 쥔 녀석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게! 그렇게 원한이 깊을 일이냐!”
“깊다! 아주 깊다 못해 뼈에 사무칠 지경이다! 좋은 환경에 좋은 자리에 태어났는데 조선이 아니고 근육괴물이 사는 근육덩어리 조선이 되어버렸어! 그리고 영직서 뭐야!”
“너 영직서를 봤냐?”
영직서를 아는 이도 극히 드물고 학계에서도 찾지 않는 버려진 서적, 일종의 이론과 섞은 말장난을 적은 놈인데 녀석은 조선시대에 이걸 찾아낸 것이다. 그 말을 하자마자 녀석은 경기를 일으키며 다리를 잡고 집어 던졌다.
“하성군이 영직서를 보여주더라고! 거기 있는 완벽하게 틀린 이론 보니까 현대인의 소행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네 녀석이 범인이었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성군은 또 어떻게 만났고!”
“내가 유성룡이다 이 헬창 놈아!”
“그럼 너 혼자 있었으면 임진왜란 일어났는데 그거 막을 수나 있어?”
흥분한 성원이의 표정이 창백해지니 제대로 걸렸다. 본래 역사의 유성룡이라면 임진왜란을 겪으며 극한 환경에 봉착했겠지만 내가 조선을 키운 덕분에 왜변(倭變)만 있는 역사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다시 격노했다.
“닥쳐! 임진왜란 따위가 중요하겠어? 네놈이 한명회 시켜서 전 세계에 속령을 싸지른 덕분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생각해 보니 한명회와 휘하의 세 간신배 예정자들이 속령을 많이 만들기는 했었다. 생각해 보니 19세기 말까지 속령이 영향권 안에 들어간 사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했단 말인가.
불타는 우정의 내수린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점차 손이 어지러워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내 몸에는 지방이 적어 충격이 계속 쌓이며, 지방이 없으니 체력이 생각보다 빠르게 고갈된다. 삼십 분 가까이 흐르니 입에서 단내가 나고 머리가 어지럽다.
“야 나 당 떨어졌으니 이제 그만하자.”
“당 떨어졌다는 소리 대신 곡분 부족하다는 소리를 해야지 이 멍청아.”
손을 잡아 일으켜줘서 고맙지만 녀석의 눈에는 아직도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들이켜며 과자를 쑤셔 넣으니 녀석은 한숨을 쉬며 인삼차를 홀짝거리고 말했다.
“죽도록 고생했지. 나이 먹고 바로 입신체비 시작하고 입신체비가 일상화가 되어서 개고생하고. 그놈의 영토는 오라지게 넓어서 능력 좀 발휘하니 죽어라 굴리고 또 굴리고.”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이지만 내가 전혀 미안하지 않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래 평생 미안하지 마라! 생각해보니 소름이 다 돋네. 어휴! 이 망할 헬창아!”
생각해 보니 열 받는다. 본래 역사에서 유성룡 수준의 재능을 이 녀석이 뽐낼 수 있었을까? 나야 세종대왕님이 이십 년 더 살게 만든 것만 해도 충분한 업적이었는데. 망할 헬창이라는 소리에 반격을 시작했다.
“나 없이 너 혼자 유성룡으로 빙의했으면 뭐가 되겠냐? 인성파탄자의 상징인 선조 앞에서 뭐가 가능하겠어? 뛰어난 건축가로 동래성이라도 쌓게? 나라 덩치라도 불려놓은 게 어디냐고.”
성원이도 찔리는 것이 있는지 내 눈치를 보면서 말없이 과자를 욱여넣었다. 녀석은 한참 동안 말없이 차를 마시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고 말했다.
“네가 바꾼 조선이 백 년 뒤에 어떻게 변했는지 알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녀석도 그리움이 몰려오는지 고개를 들면서 이야기했다. 휴식월이 끝나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는데 녀석과 변한 역사를 배우고 조선 중기의 이야기를 들으면 될 거다.
“내가 너 때문에 개고생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알아? 유성룡으로 빙의한 건 어린 시절이기에 천만다행이었어.”
< 현대 외전 15화 – 친구가 범인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