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외전 14화 – 입헌군주제의 끝 >
본래 역사에서 남동생은 공부를 못 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 사학과에 들어간 나, 화공과 공순이인 여동생과 달리 녀석은 가까스로 대학에 들어갈 성적을 거둘 뿐이었다.
동생의 재능은 의외의 장소에서 발휘되었다. 평소부터 오타쿠 기질이 있었던 놈이었는데 만화 동아리에 들어가더니만 갑자기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으니까. 슬쩍 보니 몸매 자체는 그럭저럭 볼만하다.
“좋은 입신체비사에게 배운다는 전제로 여성이 십 년은 해야 가까스로 완성하는 몸매네.”
“자고로 장수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니야?”
이건 내 아내보다 더 뛰어난 몸매다. 현대로 돌아와 아예 없는 아내 말고 삼한국대부인의 몸매가 이거보다 조금 더 군살이 있었으니까. 운을 띄워주니 동생은 신나서 말을 늘어놓았다.
“진양옥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무예를 닦았어. 18살에 전쟁에 처음으로 참가해 일흔 살이 될 때까지 전쟁터를 오간 당대에서 손꼽히는 여성 무인이었지.”
나도 몰랐던 설명이 계속되었는데 딱 봐도 일본어를 직역한 번역기 말투의 쌀톡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 일러스트 구도 수정이 아니고 체형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돼요! 잘해오시던 분이 실력에 값하지 못하게 장군의 딸은 왜 만들지 못하십니까!
이해할 수 있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기도 한 애매한 말이었지만 동생은 글을 읽더니 창백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헤라클레스나 백정 고란 같은 남성 장수들을 잘 그렸는데 여성 장수를 담당하겠다고 덜컥 나서서 이 꼴이 되었지. 이래서야 1차 시안 검수도 통과 못 하고 계약파기 당할지도 몰라.”
백정 고란이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헤라클레스를 들으니 알겠다. 본래 역사에서 동생이 즐기던 모바일 게임이자 동생의 말로는 문학작품의 외전인 운명 – 위대한 명령이던가. 그런데 이 녀석 이런 작품에 참가하면서 친한 사람도 없나?
“다른 사람들과 연락은 해봤어? 친한 사람 몇 명은 있을 것 아니야.”
“애초에 우리나라에 나 같은 사람이 서른 명이나 될까 모르겠고 물어봤지만 별문제는 없대. 그렇다고 일본 애들처럼 고증을 어길 수 없잖아? 무인의 몸이 이래야 하지 않을까?”
별 문제가 없다 하니 동생의 방식은 대한 공화국에서 인기 있는 그림체인 것이 분명하다. 말로는 일본 애들 취미에 맞췄다지만 배운 것은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동생같이 독학했으면 배움의 폭도 좁으니까.
대한 공화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생활체육 기반을 갖추고 있으며 문화적 자부심도 넘쳐난다. 취미를 가지려면 밖에 나가서 운동하면 되고 세상천지에 즐길 여유가 넘쳐난다.
더군다나 입신체비를 즐기니 흔히 말하는 ‘뼈 삭는다 그만해라’ 같은 소리가 아니고 ‘근손실이다! 육질(단백질) 낭비하지 마라!’라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결국 동생과 같은 사람은 천연기념물 수준이겠지
아마 동생은 남자 하나는 근육질로 기똥차게 잘 그리는 덕분에 채용되었지만 한계에 봉착했으리라. 기왕 동생을 잘 대해주기로 했으니 침울한 녀석을 위해 차근차근 따져가면서 말했다.
“네가 아는 사람들 모두가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네. 동생아, 잘 봐둬라. 진양옥은 17세기의 사람이지? 그리고 당시에 입신체비는 명나라에 퍼지지도 않았어.”
“그거야 알고 있지.”
“알고 있는데 왜 십 년 넘게 입신체비를 꾸준히 해온 몸을 하고 있지? 자고로 전쟁터에서 근손실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냐? 매번 움직이고 굴러봤자 장수가 최전선에서 창 휘두르겠어? 설령 휘두른다 해도 훈영제식법 몰라?”
놀란 동생의 얼굴을 빤히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전쟁터에서 쇠질 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철령도 하르빈도 내가 참전한 기간에 비례해서 근손실이 일어났는데. 배움이 부족한 동생을 위해 쐐기를 박아줬다.
“전략 계획하며 머리를 굴리고 기껏해야 평시에는 유산소만 하는데 근육이 자라날 틈이 있겠어? 더군다나 옛 방식대로 근지구력 위주의 훈영제식법과 유사하게 몸을 단련했겠지.”
“그렇다면 몸이 비쩍 말라서······.”
“몸에 지방질이 뒤덮여야 충격을 완화할 수 있고 비상시에 한 끼를 걸러도 몸을 움직이게 만들지.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대로 선 수정해 봐.”
대한 공화국의 미적 감각에 맞춘 여성 보디빌더 수준의 윤곽이 팔다리에 약간의 근육만 도드라져 보이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식스팩은 사라지고 얇은 복근 윤곽선만 남겨놓으니 동생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이 보기에는 이게 맞아? 형 이런 것 굉장히 싫어하지 않았어?”
“그럼 이게 고증에 맞는 몸매인데 어쩌겠냐. 여기서 조금 더 지방을 늘려야 장수로서 바람직한 체형이 되겠는데 차마 체지방을 늘리지는 못하겠다.”
내가 지시한 대로 변경한 진양옥의 체형은 그럭저럭 늘씬한 몸매에 팔과 종아리에 약간의 근육이 도드라진 체형이 되어버렸다. 역사가 변했으니 생겨난 아이러니이지만 동생은 수정 작업을 마치고 초안을 바로 쌀톡으로 보냈다.
- 이렇게 할 수 있으시면서 왜 못 했는지 의문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능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에 다름 아닙니다. 어서 선 다듬으시고 채색하셔서 초안 올려주세요.
동생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다시 자신이 이전에 그렸던 그림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이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그림체가 먹힌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상해? 이거 국내에 하는 사람 별로 없지? 다 일본 애들이 하고 있지? 그럼 일본 애들 취향에 맞춰야지.”
“일본은 인구수가 적으니까 유저의 20% 정도고 중화민국이 50%야, 국내는 한 0.1% 될까? 생각해 보니 형의 말이 맞네. 앞으로 배운 대로 체형을 잡고 몸을 다듬는 게 나아 보여.”
장개석 총통이 하늘에서 한탄하겠네. 오타쿠 문화가 중화민국에서 성공했습니다! 보고 계십니까 총통님? 나의 한숨을 뒤로하듯이 동생은 선을 다듬고 채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며칠 정도 동생들과 어울려주고 부모님에게 선물도 드리면서 전쟁 박물관을 돌아봤다. 볼 놈은 다 봤으니 다음 차례로 황실 박물관을 택했다. 입신체비 박물관 이전에 궁금한 것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하니까.
----------
황실 박물관은 현재의 국립 중앙 박물관 위치에 있었다. 산 중턱에 거대한 성벽과 같이 자리 잡은 모습에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꼭 가 봐야 하는 박물관이고 사람도 넘쳐났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보이는 물건은 역대 왕의 어진을 바탕으로 만든 전신 입상이었다. 익숙한 얼굴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도 있었지만 조선 왕실 18명, 대한제국 황실 5명의 군주의 입상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같이 체격이 건장해. 태조와 태종은 당연하고 세종대왕님도 후덕한 인상이 아니라니.”
간혹 체격이 비쩍 마른 입상도 있었지만 설명을 훑어보니 암군과 폭군이라 평가받는 목(穆)종과 혜(惠)종이니까 넘어가자. 고의로 비쩍 마르게 만들었는지 초라한 외모까지 겹쳐져서 영 아니라는 생각 외에는 들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실이 소유했던 유물은 차고 넘쳤다. 이들은 본래 국가 자체인 황실의 소유였지만 황실이 해산한 이후 황실이었던 일반인의 사유물이 된 것이다. 유물 가운데 청자가 보여서 다가갔더니 의외의 연대가 튀어나왔다.
“청자는 또 언제 복원했대? 1611년 작품이라고?”
청자를 복원했다면 화학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유물은 현동이의 후손인 예진원(禮進院 - 왕실 제사를 대행하는 수양대군의 후손)의 대제학의 자식 아무개가 발굴하여 바쳤다고 적혀 있었다.
삼국시대의 유물은 물론이고 간혹 비파형 동검이나 동경(銅鏡)도 있었으니 대체 현동이의 후손들이 뭘 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또한 이 박물관의 특징이 있었으니 황실로 대접하는 자는 대군(大君) 이후에는 일원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현동이의 후손들은 죄다 군(君)에서 끝났으니 입신체비와 분리하기 위한 방법인가. 아니면 너무 많은 인원이 있으면 집중할 수 없어서 제한을 빡세게 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전시장을 돌아다니니 본래 역사에서 소실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부터 역대 국왕의 어진이 순서대로 전시되어 있었고 업적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왕 다음에 대군들이 전시된 것이다.
대군을 살펴보니 양녕대군도 있긴 했다. 본래 역사처럼 미화도 없고 ‘당대에는 미화되었으나 실질적으로 망나니였다’라는 적나라한 표현이었고 효령대군도 있는데 공식적으로 108세를 살았다 기록되어 있었다.
<효령대군 이보, 1396~1504년>
[효령대군은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이며 조선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는 수양대군의 후원자이자 왕실 웃어른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북방 불교라 불리는 티베트 불교를 도입하여······.]
“108세가 야사가 아니었다고? 14세기에 태어난 사람이 16세기까지 살았으면 현손을 보고도 남았겠는데?”
역대 황실 일원을 보니 대군답게 파란만장하게 산 사람이 많았다. 서애 유성룡의 제자로 건축을 배워 근정전을 증축한 대군도 있었고. 나를 따라 하겠다며 전쟁터에 나섰다가 비명횡사한 대군조차 있었다.
첫날이니 가장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현대 박물관에서 다루지 않고 적당히 넘어간 근대사의 사건이 황실의 자체 해산이었고 대체 어떠한 이유로 황실이 해산되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꾸준히 걸어 박물관의 삼 층에 도달하니 황실이 해산할 시점의 흑백사진이 다수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종묘에 제사를 올리는 건양제와 황실 종친들의 사진, 경복궁을 개방하는 사진과 내수린은 또 뭐야?
[한양 국립 대학교의 사학과 교수 백범 김구는 황실 해산에 반대하여 경복궁에 난입하였다. 이후 상소를 올렸으나 건양제의 뜻을 돌릴 수 없었고 종친인 이희(고종의 휘)에게 내수린을 도전하여 처참히 패하였다.]
백범 김구와 고종의 내수린이라. 그리고 어떻게 일흔에 가까운 고종이 이겼지? 사소한 문제는 넘기고 차근차근 읽어보니 황실 해산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유물과 함께 상세히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훗날이 되어 전해진 건양제의 유언장과 황실 일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권한을 내려놔도 사라지지 않은 과도한 업무를 견디다 못하고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해산한 것이다.
해산 이전에 전제군주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변환하는 과정에 수많은 진통이 있었으리라. 이는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본래 역사의 국가들 가운데 몇 곳이 실제로 전제군주정과 다름없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입헌군주제는 전제군주제에서 군주의 권리를 모조리 삭제하지 않고 헌법 아래에 제한을 둔 형태지. 더군다나 대한제국 황실은 조선 시대부터 평균 이상은 해왔으니까 어중간한 업무량이 아니었겠는데.”
조선이 1392년 세워지고 1821년 제국으로 거듭날 때까지 430년 동안 18명의 임금이 있었고 이들에게는 세종대왕 이후 공통점이 있었다. 간혹 암군이나 폭군이 등장한 경우는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평균 이상은 한 것이다.
“서른 살 정도에 왕위에 오르는데 그동안 입신체비와 학업 그리고 실무로 꾸준히 굴리니까 못난 놈들은 세자 자리에서 내쳐졌겠지. 어중간한 재능이 있으면 경험이 쌓인 덕분에 현상유지는 가능했겠고.”
임금의 과도한 업무편중을 줄인 덕분에 입신체비를 할 시간이 생겼고. 입신체비를 한 덕분에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 결국 양위 받은 왕이 절반에 가까운 9명이었다. 세자가 30세 임금이 50세 정도에 양위하는 것이 상식이 된 것이다.
덕분에 조선 왕실은 평범한 군주 다수, 명군(명군의 최소 조건이 세종-문종-세조 덕분에 높아졌다) 약간 그리고 혼군 약간으로 최소한 국가 유지가 가능한 왕을 배출했다. 더군다나 이 역사에는 죽어라 달려드는 사림파가 없었다.
“본래 역사의 사림파가 되어야 할 인물들이 입신체비가 도입된 이후 지방에서 호족을 통솔하고 백성들과 함께하면서 업무 경력을 쌓게 되었지. 입신체비의 지방 전파가 생각지도 않게 왕권을 강화시킨 꼴이 되었군.”
본래 역사에서 사림파가 가진 이상은 높고 능력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이 역사에서는 사림파같이 실무에 부족한 자가 먹고살 여유가 없었다. 물론 사림파가 완전히 소멸한 것은 17세기의 일이다.
세계 각지에 속령을 관리하는 시대인 17세기가 된 조선은 인재난에 허덕였다. 획득한 영토를 다스리는데 인재를 닥치는 대로 모집하였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평균 이상의 임금만 즉위하지 않았다.
[목종은 외척을 지나치게 신임한 나머지 너무나 많은 권력을 넘겨주었다. 1680년경 아유타야 왕국이 쇠퇴를 거듭하고 있을 때 조선의 영향권에 집어삼킬 좋은 기회가 생겼지만 이 기회를 헛되이 허비한 것이다.]
“물론 외척에 휘둘린 사례가 없는 경우는 아니지만 된통 당하면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지. 이래서 동아시아에 틀어박혀 있지 않았던 것이 신의 한 수였어.”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목종에게 돌아온 것은 이천에 달하는 유생(이자 입신체비사)들의 지부상소(持斧上疏)와 상왕의 자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목종과 같은 사례는 지극히 예외였다.
칭제(稱帝)한 대한제국의 황권은 강력하다 못해 전제군주의 표본과 같았다. 당장 증거자료로 있는 신문 삽화가 눈에 들어왔다.
<1842년 르 프레스(La Presse)의 삽화, 조선 황태자의 빈 회의 도착을 나타내고 있다>
19세기 중엽 신문의 투박한 삽화였지만 표현하는 바는 극명하였다. 왕이 아닌 왕세자가 당도하였음에도 시커먼 색의 거대한 기범선(증기기관과 돛을 동시에 사용하는 함선) 위에 광채와 함께 상의를 탈의한 젊은 동양인 남성이 있었다.
시커먼 함선이라서 위압감을 주기 위해 검은 페인트를 칠한 줄 알았다. 하지만 옆에 전시된 유물을 확인하고 할 말이 없었다. 이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보존된 기범선의 정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1839년 진수, 대한제국 황실 소유 기범선 청해(靑海)호, 외장재 흑단나무>
어지간해서는 험한 말을 사용하기 싫었지만 저 기범선의 남은 부품을 보자마자 돈지랄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외장이 흑단나무라니! 함선의 목재는 소모품인데 말 그대로 은을 표면에 바른 격이다.
“저 배 건조비용이 어지간한 함대 하나 건조비용과 대등하겠는데.”
설명을 보니 조선시대부터 왕실 사유지였던 흑단나무 섬 하나를 탈탈 털어서 외장재를 만들었고 이후 후속 함선 4척을 추가로 건조할 수 있었다 하였다. 사유지로 흑단나무 섬 하나를 가진 상상을 초월한 규모를 보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울 듯이 황실에도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 시작되었다. 이는 연착륙을 택하지 않고 단기에 모든 일을 끝내려는 의지와. 모든 일을 황제의 뜻대로 할 수 있는 황권이 만들어낸 비극 아닌 비극이었다.
[1862년 민족자치를 천명한 대한제국은 광무제의 명령 하에 헌법을 규정하며 의회를 도입하고 입헌군주제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세상일은 광무제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입헌군주제 전환 이후 삼권분립(三權分立 - 입법, 행정, 사법을 분리함)의 원칙을 준수하였지만 이는 황제의 재가(裁可 - 안건을 결재함)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나치게 강력한 황권을 한 번에 내려놓을 방법이 있나. 없으니까 이런 꼴이 벌어졌지.”
다른 국가와 달리 대한제국의 황실이 가진 권력이 지나치게 큰 덕분에 권력을 단번에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의원 대다수가 왕당파였고 이들은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황제의 결정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황실은 입법과 사법에 대한 가부(可否) 권한을 고스란히 소유하였다. 대다수의 업무가 황제에게 집중된 기형적인 형태가 되어버린 반쪽의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것이다. 이 가운데 개전과 종전에 관한 권리도 있었다.
덕분에 대한제국 황실의 업무량은 폭증하였다. 기존에는 자기 마음대로 검증된 신료들을 동원하여 정책을 진행할 수 있으니 이를 검토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동원에 대한 권한은 사라졌다.
[입헌군주제 완전 도입 이후 황제의 권한은 줄어들었지만 업무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광무제의 평균 업무시간은 열 시간 이상에 달했으며 이는 대한제국의 성장과 함께 증가하였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은 입신체비를 하면서 살고 싶다는 말과 같으리라. 한때 황제였던 건양제의 빈약한 체격이 황실 해산 십 년 이후 두툼하게 변한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설명을 보고 할 말이 없었다.
[단순한 가부라 하여도 하루 평균 육십 건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종친과 휘하 문관들의 업무가 과도하게 집중되었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황제의 결정은 크나큰 신뢰를 가져왔고 이는 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졌다.]
“애초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잘한 선택이라니까.”
외교적 압박으로 큐슈를 반환하게 되면서 황실이 물러날 명분이 생겼다. 대한제국 입장에서도 큐슈의 반환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지 이미 유입되는 인구로 관리도 힘들고 수익을 얻어내기도 힘들 지경에 이르렀으니 씹던 껌 뱉듯이 뱉어버렸으리라.
[해산을 결정한 대한제국 황실에게 남은 재산은 막대한 목장과 부설 농지였다. 이를 통해 기업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현대 대한 공화국에도 전해져 입신체비의 튼튼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 박물관에서 본 바로는 20세기 초까지도 낙농업은 대한제국의 국책사업이었다. 당장 생물학자나 화학자가 있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들여와서 발달시켰고 이는 급속한 기술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결국 황실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현대에도 유제품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대한 공화국의 낙농업 절반을 소유했으니 실제로는 어중간한 대기업도 아닌 재벌이나 다름이 없다.
내가 먹었던 배양육을 만든 연구기관도 옛 황실 종친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으며 목장에 필요한 부설 농지도 당연히 황실 종친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건양그룹 2018년 기준 시가총액이 1,750억 원? 한 315조 원이니 대충 세계 30위권 기업체네.”
이쯤 되면 입신체비의 근본인 식(食)의 핵심을 거머쥔 것이 옛 황실이리라. 하지만 대한 공화국에서도 딱히 말하지 않는 것을 보니 최소한 세금은 똑바로 내는 기업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