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외전 11화 – 변한 역사의 빨간맛 >
일본 전도에 표시된 이름은 가관이었다. 동일본이라 쓰여진 국가는 괄호로 일본(日本)이라 적혀 있었고. 서일본이라 쓰인 국가의 공식 명칭은 일본 볼셰비키 공화국이었다.
더군다나 전시 주제는 <사회주의의 물결>이었다. 일본 전도가 나와 있는 이유는 사회주의로 인해 가장 극심한 혼란을 겪은 주변국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사회주의의 시작인 러시아 제국은 여기서도 사회주의로 인하여 몸살을 앓았다. 전시 주제는 차분하게 러시아 제국과 대한제국의 관계를 설명하며 시작되었다.
[대한제국과 삼엄한 관계를 지속하던 러시아 제국은 1860년 경원 – 캄차카 조약을 맺은 이후 부동항인 경원항의 사용권과 캄차카 일대의 개발권을 교환하며 우호적인 관계로 변화하였다.]
본래 역사에서 러시아가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를 노렸을 것이다. 대한제국은 지나치게 강했고 시베리아를 통한 공격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명군인 알렉산드르 2세는 변한 역사에서도 혜안을 발휘하였다.
대한제국은 캄차카를 개발하며 산림, 어업 자원을 획득하였고. 러시아제국은 부동항의 사용권을 획득하고 극동 지역의 무역을 활성화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대한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상호 교류와 협력으로 나날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경원 – 캄차카 조약 이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사업이 1887년 시작되었으며. 1901년 전 구간이 개통되기에 이르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덕분에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대한제국의 풍부한 식량자원을 수입하고 경공업 제품을 수출하였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러시아 제국 멸망의 서막이었다.]
“효과 좋았는데 왜 망해! 도표 보니까 곡물 수출도 잘 되어서 농노들이 굶어 죽을 일도 없는데 망할 이유가 있어? 러일전쟁도 없었는데 민중의 불만이 폭발할 이유가 대체 뭔데?”
본래 역사에서 러시아 제국의 멸망은 여러 요인이 있었다. 기존의 강제적인 공업화와 과도한 수출장려 정책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굶주림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불만이 쌓여 있었는데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승전도 아닌 초창기 전투의 패전으로 불만이 거세어지며 민중 시위가 일어났고. 이러한 민중을 군대가 진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며 러일전쟁의 악제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패전하며 황실의 권위가 추락하였다.
여기에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붕괴와 연이은 패전이 겹치면서 민중 시위가 일어났고. 블라디미르 레닌이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부를 만들어내며 러시아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이끈 것이다.
하지만 변한 역사에서는 매년 150만 톤이 넘는 곡물을 수입했으니 악재가 사라진 러시아 제국 몰락의 원인을 도저히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면 원래 역사보다 훨씬 좋은 환경인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원인이라니.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나의 상상보다 멍청했다. 러일전쟁으로 인한 손실보다 더욱 거대한 손실이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다.
[러시아 제국 붕괴의 일차적인 원인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자존심이 가장 큰 영향을 차지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부설할 때 대한제국이 전체 자금의 50%를 투자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각 국가의 구간만큼 투자를 할 것이라 말하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총 길이는 9,288km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거대한 철도를 러시아가 6,200km를 대한제국이 3,100km를 부설한 것이다. 인구는 2배이며 경제규모는 4배 가까이 나는 대한제국이 더욱 많은 자본을 투자함은 당연한 일이다.
얻을 수 있는 이득? 러시아 제국은 사용 허가가 떨어진 경원에 자신이 원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것 하나이지만 대한제국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북방철도(본래 역사의 만주 횡단철도)를 직결하여 막대한 파급효과를 거둘 수 있다.
“바이칼까지 연장하고 나머지는 대한제국에게 넘겨도 감사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텐데 대흥안령 산맥까지 뚫어줘? 철도로 이득을 보는 쪽이 대한제국이냐 러시아냐?”
니콜라이 2세는 본래 역사처럼 지키지 않아도 될 쓸모없는 자존심과 지나치게 유약한 성격이 결합한 최악의 군주였다. 본래 역사보다 더욱 빠르게 부설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불러올 파급은 끔찍하였다.
수십만 단위의 노동자를 동원해서 만든 노선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이다. 이래놓고 제대로 개통 된 시기는 1916년이고 실제로는 1920년 경 보수가 완료되어 제대로 된 열차가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사에서는 1901년 급박하게 완공되었고, 바로 무역을 시작하였으니 러시아 제국은 무역 수익은커녕 끝없는 적자에 허우적거렸으리라. 자존심 하나 때문에 러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아니다! 멸망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한 2월 혁명과 뒤이어 벌어진 10월 혁명은 역사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노프 왕가는 적백내전의 와중에 대한제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로마노프 왕가의 타티아나 세자비(친왕의 적장자 아내의 호칭)로 혈연관계를 맺은 대한제국은 소극적으로 참전하였으니 전세를 뒤엎을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 제국은 대한제국의 중재로 바이칼 호 인근을 경계로 삼아 제국의 변방에 몰리게 되었다.]
소극적이라는 참전 내용을 읽고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내가 무기의 상세한 제원은 몰라도 20세기 초 기관총이 사람이 운반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알고 있었다.
- 땅이 녹으며 진흙탕이 생겨 중기관총을 운반하던 군마들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무렵 대한제국군 병사 여섯 명이 움직였다. 넷은 통나무를 깔고 둘은 기관총을 앞뒤로 잡고 운반하였다.
- 백군 지휘관은 방어를 준비하라는 요청을 전투 6시간 전에 전달하였다. 백군 병사들 대다수가 참호를 만들지 못해 포격과 적의 돌격으로 궤멸하였으나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4시간 만에 참호를 완성하고 시체를 집어 던지며 굳건히 거점을 사수하였다.
- 병사들은 백군의 부족한 지휘능력으로 인해 제대로 된 보급을 달성할 수 없어 육질(단백질)이 부족하다 하였고. 몸이 축나는 일을 막기 위해 역한 수유(酥油 - 버터)를 숟가락으로 퍼 먹는 신세에 눈물을 흘렸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아마 대한제국이 소수 정예로 파견한 병사들은 특수부대에 준하는······. 은 아니고 역승(駅丞 - 현 흑룡강성 도시) 주둔 육군 56 보병사단 병사의 수기란다. 생각을 하지 말자.
로마노프 왕조는 비참하게 몰락했다. 대한 공화국에서 열리는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이유도 인구의 상당수를 캄차카 반도의 초기 개발에 나선 대한제국 사람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리라.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할 말이 없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로마노프 왕가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황실이 해산한 이후에도 러시아 제국을 비호하는 대한 공화국을 프롤레타리아의 주적이자 원수로 천명하였으며. 대 대한 공화국 포위망을 형성하려 하였다.]
“대 대한 공화국 포위망? 레닌이 정신이 나갔나? 그리고 스탈린은 그걸 넙죽 받아먹었어? 참 잘 하는 짓거리다 아주 잘 하는 짓거리야. 아예 발을 들일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대한 제국시절부터 노동자의 여가 시간 보장과(입신체비 하라고) 노동자의 식생활 보장(근손실 오지 말라고)을 하니 사회주의가 파고들 틈이 없을 만 했다. 하지만 애초에 포위망이 형성될 조건이 아니다.
대한 공화국은 제국시절의 경제블록을 고스란히 소유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대 대한제국 포위망에 중화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북부를 차지한 거대 국가는 군사독재국가이니 포위에 구멍이 뻥 뚫린 상황이다. 그러나 하나는 제대로 성공했다.
[일본은 새로 총리에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가 극단적인 중공업 자립 정책을 취하며 극심한 빈부격차와 노동자 착취가 이어졌고. 대한 공화국에 남아있던 소수의 사회주의 세력인 고려 공산당은 노동자 권익과 사회 개선을 요구하였다.]
고려 공산당 일동의 단체사진을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본래 역사에서는 상해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이 타국의 노동자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활동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한 공화국은 엄연한 사회주의 혁명의 주적이니 법적으로 활동을 허가하여도 온갖 견제가 뒤따랐을 것이 분명하니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도 온갖 견제가 이어졌다.
[1923년 82세의 나이로 타계한 이토 히로부미 내각총리대신의 마지막 명령은 관동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사회 전복을 꾀하는 사회주의자의 처단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1,7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사회주의의 명맥이 끊어지리라 여겼다.]
현대 한국에서는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에 묻혔지만 일본인들도 많이 희생당했다. 경찰들이 주목하고 있던 사회주의자, 인권운동가가 가메이도 사건이라 불리는 학살극에 희생당한 것이다.
형태가 어떻게 변하여도 일본은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었다. 대한 공화국 사람들은 강제 출국당한 것으로 끝났지만 이토 히로부미에게 밉보인 이들은 모조리 살해당했으리라. 씁쓸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니 아직 일본의 사회주의의 씨앗은 남아 있었다.
[1926년 재결집한 일본 볼셰비키 혁명당의 당수는 노동운동가였던 아라하타 간손이었다. 가메이도 사건에 휘말리지 않은 그는 열렬한 마르크스주의 지지자였으나 노선을 변경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사상을 정립하였다.]
“독재정치의 배격, 평등한 대동사회 건립, 노동자 권익 보장 그리고······. 덴노 옹립을 통한 노동 계급의 정치적 독립성 추구?”
빨간맛도 아니다. 미친 빨간맛이다! 대한제국이 남긴 성리학과 트로츠키주의 특유의 자립성 추구 그리고 신토 문화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가치체계 수립이라니!
본래 역사에서 전제주의에 맞게 변형되어 숭배의 대상이자 살아있는 신이 된 덴노는 변한 역사에선 걸리적거리는 구시대의 유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를 이용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먹힐 수 있는 요소를 첨가한 것이다.
[일본 볼셰비키 혁명당은 덴노가 권력을 부정한 자에게 강탈당해 착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되돌리기 위하여 덴노가 진정한 일본의 주인 노동자의 대표에게 권력을 위임함이 바람직하다 여겼다.]
“어찌 보면 압제자를 몰아내고 고통 받는 인민을 해방시키는 본질을 추구한 것은 맞는데 여기까지 오는 내용물이 끔찍한 혼종이네.”
일본의 근본 종교였던 신토는 근대화가 되며 철저히 무시당했을 것이 분명하니 이들도 주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가담했을 것이다. 이들 대다수는 지역 유지와 끈이 닿아 있으니 강력한 첩보망을 구축한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다.
또한 젊은이들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는 일본의 경제구조에 절망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당연히 참여했을 것이고. 노인들 가운데 대한제국에서 건너온 유학자들의 제자들도 여기에 포섭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창당 과정도 독특했다.
[1927년 1월 21일, 구마모토에서 이름 없는 명사의 제사가 열렸다. 실제로는 사회주의의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레닌의 제사였으며 일본 볼셰비키 혁명당의 창당 행사를 겸했다.]
[일본 볼셰비키 혁명당은 각지의 신사를 통한 연락망을 구축하고 과도한 중공업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민중을 포섭하였다. 이윽고 큐슈를 시작으로 들불이 번지듯 사회주의의 물결이 일본을 휩쓸었다.]
[당시 일본은 무리한 중공업 추구로 금융 위기에 놓여 있었다. 새로 총리가 된 다나카 기이치는 사회주의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였으나 이는 역으로 사회주의를 촉발하게 되었다. 이는 연좌제를 기반으로 한 안보법이 쟁점 사항이었다.]
핵심은 그놈의 연좌제였다. 지역 유지의 손자가 군인이면? 처벌 대상이니 사회주의를 택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진다. 노인들이 참여한 사회주의 운동이니 연좌제의 대상자가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단 1년 만에 나고야 – 쓰루가를 중심으로 동일본과 서일본이 갈라졌다. 전투? 몇 번 있었는데 큐슈는 해군 기지가 있으니 함부로 전쟁을 벌였다가는 도쿄가 자국 해군에게 공격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으리라.
[덴노를 다시 옹립하고 정권을 위임받은 일본 볼셰비키 혁명당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력 투쟁을 시작하였다. 대한 공화국의 총리 민영환은 이러한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소련과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의 힘을 소진시킬 기회로 삼았다.]
“민영환 이 양반은 여흥 민씨 가운데 몇 안 되는 정상인이라 생각했는데 국익에는 아주 철저하네. 대놓고 공격하면 국제사회의 반발이 있으니 최대한 우려먹어 버렸군.”
본래 역사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막지 못하여 자결한 민영환은 총리 생활을 하면서 일본 열도를 쥐락펴락 하였다. 동일본을 엄연한 정통 일본으로 대우하였지만 대한제국 시절부터 빌려준 차관 또한 유지한 것이다.
서일본은 소련과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고.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 또한 내전에 돌입했다.
“1939년에 내전, 다시 1951년에 내전 그리고 1963년에 동일본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흡수통일이라니. 통일이 빨랐던 것도 대한 공화국의 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
이념분단의 시기는 끝났고 일본도 정상적인 국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정상적인 국가로 돌아갔다고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는데 이걸 칭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후로 일주일 동안 근대 박물관을 돌아다녔다. 아침 일찍 박물관에 들어와서 저녁 늦게 돌아가니 몸이 축나는 것 같았지만 덕분에 수없이 많은 근대 인물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제 군사 박물관도 가 봐야지. 입신체비 박물관은 군사 박물관 돌아보고 나서 가야겠다.”
근대 박물관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은 대한 공화국의 군사력이었다. 독일을 깨부수고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능력을 제대로 알고 싶었지만 근대 박물관이니 군사 관련 이야기는 지도와 주요 인물 전시가 전부였다.
군사 박물관은 용산 전쟁기념관과 흡사한 형태였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팸플릿에 적혀 있는 주의사항을 보니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전쟁 무기 가운데 상당수는 논산에 있는 육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양 시내에 쿠빈카 전차 박물관처럼 전차를 도열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쉬울 뿐이다. 전쟁 박물관 앞에서 들어가려는데 외국인들이 몰려 있었다.
하나같이 대걸레 자루를 들고 맨홀 구멍에 꽂아서 전력으로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는데 이 시대에 유행하는 행동인 것 같다. 해맑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데 익숙한 모습이다. 길거리에서 맨홀 점검할 때 흔히 보이는 모습이지.
“빠루 꽂아서 맨홀 뚜껑 뒤집는 모습이잖아? 저게 뭐가 특이하다고 호들갑을 떠나.”
박물관 안에 들어가니 왜 저러는지 알 수 있었다. 박물관 광장에 전시 된 녀석은 나치독일의 전차 티거였고. 전차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근육질의 남성이 지렛대를 해치 관측창에 쑤셔박고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 뜯어내고 있었다.
<김일옥 소대장, 나치 독일의 전차를 쇠지레 하나와 수류탄 하나로 물리치다.>
대체 2차 세계대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