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37화 (237/573)

< 현대 외전 10화 – 근육하지 못한 나라 >

다시 휴대전화를 들어 검색해 보니 큐슈는 1919년까지 엄연히 조선의 영토였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도 아니고 1602년 개정된 지도에도 조선의 영토였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전쟁 이후 영토를 할양받을 당시에 많은 우려가 있었다. 다른 지역에 기근이 발생하면 유민이 몰려올지도 모르고, 왜구들의 약탈 가능성도 있으며 밀수가 횡행할 것이라고. 하지만 홍위는 다음과 같이 묵살하였다.

‘유민이 몰려오면 이는 인구가 늘어나는 일이니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왜구들이 준동하여도 명국의 위세가 미치는 지역이니 토벌하면 될 일이다, 밀수는 제대로 된 제도를 마련하면 사라질 것이다.’

큐슈에 사람을 보내서 글을 가르치고 체제를 정비하고 기존 영주들을 흡수한 이유? 유민을 흡수하려면 명확한 제도로 이주한 자와 기존에 살던 자를 구분해야 해서 벌인 일이며 상업을 부흥시켜 밀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홍윤성이 미친 듯이 날뛴 이유? 이거야 명나라의 바보짓과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허가하지 않겠다는 조선의 의지가 결합된 일이지. 덕분에 수십 년은 잠잠하겠지만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인구가 늘면 통제가 힘들어지는 일은 당연하다.

일본의 인구는 날이 갈수록 증가할 것이며 이주에 대한 욕망은 늘어날 것이다. 현대야 지뢰와 철책이 동원되어 국경을 차단할 수 있지만 전근대에는 오로지 인력을 동원하는 것이 답이다.

“하지만 인력을 아무리 동원해도 세토 내해를 막을 방법이 없어. 시모노세키 해협을 차단해도 20㎞ 내외의 거리니 나룻배를 타고 오갈 수 있는 데다 물살도 잔잔해서 배를 처음 모는 사람도 항해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야.”

큐슈는 섬이지만 세토 내해로 일본 열도와 이어져 있다. 수류도 안정적이며 현대에도 일본 물동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내해이다. 이런 내해가 있으면 벌어질 일은 불 보듯 뻔하다.

범죄를 저지르든, 지나친 세금에 힘겨워하든, 법적 분쟁에 휘말리든. 어촌에 있는 나룻배에 올라타 방향을 대충 서쪽으로 잡고 열심히 노를 움직이면 세 시간 만에 큐슈에 도착할 수 있다.

이걸 찾으려면 일본사를 파야 하나? 여러 생각을 하면서 눈을 흘기니 각종 유물들이 보인다. [프랑스 과학한림원 일동이 가져온 표준 원기]나 [왕립학회, 과학한림원, 이현전 학사의 토론 회화] 같은 녀석들이.

내용을 대충 훑어보니 미터법 도입은 프랑스의 자부심을 철저히 이용한 계략에 가까웠다. 공화주의를 압박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던 부르봉 왕조는 대한제국이 전해온 소식을 듣고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본래 각종 원기(原器)를 도입하고 이를 반포하며 민간 수준의 도량형을 변경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역사에서 프랑스 과학한림원은 대한제국의 모든 영토를 돌아다니며 작업을 대행하였다.

“그래 놓고 원래 역사대로 왕정 교체가 1830년이라.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는데 자신들이 만든 미터법을 사용한다고 현대에도 유럽의 우방이라 칭할 지경이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시대가 변하고 역사가 변해도 명분과 속칭 ‘뽕’을 중요시하는 프랑스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이 나라는 원래 이런 나라다. 그런데 내가 있는 회랑이 어디지? 당장 옆에 있는 항목이 <대한제국의 관료제 변화>이다.

1895년 갑오개혁을 하며 폐지되었던 과거는 변한 역사에서도 1821년 칭제건원을 하며 십 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폐지되었다. 하지만 폐지되기 이전에도 과거제도는 본래 역사와 달리 많이 변형되었다.

[16세기 말엽 전파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비롯한 각종 학문은 성리학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칭제건원 이전에도 성리학은 소과를 통과하기 위한 기초 과목에 불과하였다.]

[다른 국시인 입신체비학의 후계자는 성리학이 아닌 훈고학의 후계인 역사학이 되었다. 이는 입신체비와 국가 제사를 담당하는 예진원 도제조를 세습하는 수양대군의 직계가 즐기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현동이를 성리학자로 만들어 책만 파게 만들면 아까워서 금석문을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아줬더니 결국 역사학이 입신체비의 직계가 되었군. 생각해 보니 나도 성리학자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었지.”

조선시대 당시에는 대안이 없으니 성리학과 보디빌딩을 결합했었다. 국시(國是)이자 가장 번성한 학문에 기생하려는 방법이었고 어느 정도 부합되는 면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성리학이 현대까지 국가 기본 학문이 되어버리면 곤란한 일이다. 그러니 변한 역사의 사람들은 내 생각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았다. 이미 많은 학문을 경험하며 국가 기조를 천천히 바꿔 나갔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게 옳지. 지나치게 형식에 집착하고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은 어디까지 고서 해석을 통한 언어 능력 강화와 도덕, 윤리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준에서 끝나야 했었지.”

나와 같은 생각을 왕과 신료들도 품었음이 분명하였다. 과거 제도의 변질에 대한 설명을 보니 세계 곳곳에 뿌려진 속령을 다스리기 위한 실무진에 목말라 하던 것이 조선이고 대한제국이었다.

[17세기 이후 실질적인 등용의 길은 소과 합격 이후 개방되는 부(簿 - 회계)시, 이공(理工 - 이학 및 공학)시 등으로 전환되었으며. 기존의 대과 전시는 정치의 뜻을 보인 이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종목을 따지면 회계사, 기술자, 각종 실무 연구원을 모집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잡과(雜科)에 속하는 시험이다. 이러한 시험의 비중이 늘어났다면 최전선에서 일하는 관료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성리학이 자연스럽게 몰락하였으리라.

내가 죽은 이후 조선의 영토가 지속적으로 확장하며 과거제도도 여러 차례 변질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지막 과거를 남긴 회화가 있었다. 놀랍게도 회화를 그린 인물은 나도 아는 위인이었다.

[경인년 과거 – 추사 김정희 작]

[958년 고려 광종이 도입한 과거제도는 1821년 칭제건원 이후 10년이 지난 1831년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후 국가고시(國家考試) 제도가 도입되며 성리학 서적은 오로지 문과 고시의 언어능력 검증을 위한 교재가 되었다.]

[1831년은 과거시험이 열린 마지막 해로서, 이 시험을 이후 과거 제도는 국가고시 문과로 대체되었다. 당시 복시 정원 480명을 채우지도 못한 60여 명의 모습을 회화로 남긴 이는 추사 김정희 외에는 없었다.]

본래 역사에서 대체할 수 있는 학문을 찾아내지 못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성리학은 없다. 실학? 실학도 엄연히 따지면 성리학인데 실학이라는 용어는 대한제국에서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렇지만 성리학자들은 남아 있었고 이들은 다른 고장에 성리학을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지는 회화는 일본 항구에서 벌어진 축제를 나타낸 일본 특유의 풍속화였는데 주인공은 놀랍게도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은 이후 대한제국에서 철학(哲學)이라는 거대한 학문의 틀에 묶여 문과(文科)의 한 갈래로만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성리학자들은 남아 있었으며 이들은 다른 고장으로 눈을 돌렸다.]

[대한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현상유지에 급급하였던 일본은 성리학자들의 새 이주지로 적합하다 여겼다. 발전한 대한제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계기를 마련하려 한 일본은 유학자들을 높이 대접하였다.]

어중간하게 많은 인구와 고갈되어가는 지하자원, 스스로 붕괴하여 내전을 벌일 위기에 처한 일본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성리학자들이었다. 김조순으로 대표하는 성리학자는······ 잠깐?

“일본의 국학은 성리학 아니었나? 에도 막부 성립 이후 막부의 권위를 치켜올리기 위해 주자학을 도입하고. 일부 성취에 있어서는 조선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는데?”

에도막부는 엄연히 유학, 정확히는 지독하게 뒤틀린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는 국가였다. 본래 사상인 신토와 덴노를 학문과 결합하여 국수주의와 자국찬양에 몰두한 기괴한 학문이지. 하지만 이 역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리학이 국학이 아니었다.

“그래! 임진왜란이 없었으니 일본 성리학의 시조나 마찬가지인 유학자 강항이 납치될 일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일본의 학문은 여전히 신토와 당학(唐學)이라 불리는 옛 유학이 전부였겠군.”

임진왜란을 통해 수많은 기술자들과 학자 심지어 간장까지(일본에는 에도시대 이후 간장이 생겨났다) 가져간 일본은 임진왜란이 없으니 발전할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였다. 이어진 설명을 보자 일본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본에 흑선내항 사건 같은 것은 없었다. 조선 이후 대한제국이 들어서도 거대한 태평양을 내해로 삼는 대한제국에 포위당한 신세이니 가끔 남아메리카 일대에서 들어오는 서양의 선박을 제외하면 오로지 대한제국이 주는 정보가 전부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고갈되어 가는 지하자원과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세금은 갈수록 늘어났으며. 1830년 기준으로 큐슈 일대에는 한 해 만 명이 넘는 유민들이 대한제국으로 귀부하기에 이르렀다.]

가까스로 안정화 상태의 큐슈가 미어터지는 인구로 혼란에 빠졌음은 당연한 일이리라. 한 해 만 명이면 인구 대비로 따지면 현대 기준으로 매년 4만 명의 인구가 들어오는 수준이다.

아마 지나치게 늘어난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마비키(일본 특유의 영아 살해)가 빈번하게 일어나서 벌어진 참극이리라. 대한제국은 1837년 이러한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일본 정벌의 논의를 시작할 지경이었다.

[대한제국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며 통제 불능에 빠진 일본에 대한 정벌과 속령화를 시도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토의가 있었지만 당시의 황제인 건양제는 이를 묵살하였다.]

[미주는 독립한 아메리카와 분쟁을 거듭하며, 호주는 영길리의 함대가 위협을 가하는 형국이다. 여기에 노서아(러시아)와 순이 아국의 북방을 위협하는데 일본을 침탈하여 무엇을 하겠느냐. 이러한 의견에 관료들은 어쩔 수 없이 유민을 받아들였다.]

“쉽게 말해 먹어도 큰 이득이 안 되고 헛심만 쓰니 내버려 두겠다는 이야기네.”

이런 역사, 문화, 학문의 공백지인 일본에 이주한 성리학자들은 수많은 저서와 제자를 양산하였으나 세상일이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성리학자들은 수명을 다하고 자신들의 제자들이 충효사상에 눈을 뜨는 모습에 감탄하였지만 일본 내전의 씨앗을 뿌렸음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개혁하고자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이거 실화냐? 제자들은 성리학의 후신이라 하며 실학을 제창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 - 일왕의 이름을 높이고 외세를 배격하자)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그리고 근대화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고?”

옛 학문이자 본래 역사의 폐습으로 불리는 성리학이 근대화와 존왕양이의 터전을 만들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성리학자들의 체격만 보아도 답이 나오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일개 학자도 저렇게 풍성한 몸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왜 쫄쫄 굶으며 살고 있을까’ 혹은 ‘대한제국의 영토가 된 큐슈의 번창함을 보아라,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표상이며 스승으로 삼아야 할 국가이다’ 같은 의견이 나왔을 것이다.

[입신체비학으로 다져진 조슈 번(현 일본 야마구치현)과 도사 번(현 일본 고치 현)의 실학자들은 많은 일본인들이 이주한 큐슈의 지원을 등에 업고 1868년 내전을 시작하였다. 타루히토 친왕과 사이고 다카모리는 훗날 총리가 될 사카모토 료마의······.]

“료마가 왜 살아 있어!”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 일본 역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놀라운 반전이었다. 본래 흑선내항의 충격으로 변모한 료마는 공식적인 성리학자이며 실학자로 등장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암살? 이어진 회화를 보니 오미야 사건의 회화가 남아 있었다. 입신체비사로 손색이 없는 체격의 료마가 한쪽 팔을 내어주고 남은 팔로 상대의 얼굴을 후려갈기는 역동적인 장면이었다.

“삼대 일천 근은 가뿐히 하겠네. 뭐? 누나가 일본 여인 최초로 삼대 운동 일천 근을 달성해?”

사소한 근육 내용은 잠시 뇌 속에 묻어두자. 여하튼 대한제국은 성리학자의 후계자이자 대한제국의 후원을 받은 일본 왕국의 등장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며 특히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근대화를 축하하며 중공업을 적극 육성하기를 권장하였다. 이는 선의로 여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을 대한제국의 통제하에 두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공업의 뿌리는 경공업이지, 경공업으로 차근차근 발판을 쌓고 자본을 만든 다음 원료를 수입해서 중공업으로 발돋움해야지. 결국 대한제국도 혐성은 적당히 부리는군.”

큐슈 일대의 후원? 실제로는 대한제국의 군사적 공작이 분명하다. 내전에 개입하여 삼천만이 넘는 인구를 통제하고 대한제국의 입맛에 맞게 산업 구조를 개편하여 속령 아닌 속령으로 만들려는 모습이 보인다.

거대한 산업단지의 흑백사진이 여러 장 전시되어 있었다. <웅본(구마모토) 중공업 단지>라 적힌 사진에는 쉴 새 없이 찍혀져 나오는 증기기관차와 철강 자재를 감탄하는 표정으로 지켜보는 일본의 관료들이 있었다.

<1871년 일본 최초의 철도 건립. 도쿄 – 시즈오카 노선>

<1882년 일본 해군 제1함대 완성, 기함 우마야도급 8,000톤 전함>

<1887년 일본 전역의 시(市)급 도시 관청 개수 완료>

박물관에서는 무덤덤하게 사실만 적고 있었지만 속속들이 일본의 내부가 대한제국에게 갉아 먹히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돈은 어디서 났겠는가? 모두 국채와 인력 유출을 볼모로 삼아 일어났겠지.

[대한제국과 일본의 교류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으며 이로 인해 한해 이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대한제국으로의 이주를 청했다. 대한제국은 새로운 중공업단지를 하르빈에 건립하기 위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공장의 하청 노동자는 모두 무적(無籍 - 호적에 없는)자인 본토 출신 이주민들이 담당하니 먹고 살길이 막막할 것이고, 언어도 배웠으며 풍속이 익숙한 대한제국으로 이주의 길을 택했을 것이 분명하다.

대한제국이 제공하는 철광석과 유연탄이 없으면 순식간에 가동이 정지될 중공업 단지와 지나치게 수출에 최적화된 산업 구조. 하지만 상대도 바보는 아니었다. 어느새 총리가 된 사카모토 료마는 안간힘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이윽고 군사적 자립,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며 대한제국에서 독립한 미주이자 미국과 협정을 맺으려 하였다. 이러한 필사적인 노력은 가까스로 1909년 무진천명대전이 발발하며 결실을 맺게 되었다.]

[무진천명대전에 참전하기를 원한 일본은 결사적으로 전쟁에 나섰다. 각지의 중공업 단지는 군수품을 생산하기에 이르렀으며, 대한제국의 도움으로 편성된 함대는 제(齊)의 부수도인 남경을 요격하였다.]

“도움이 아니고 강요겠지. 함대 유지비용과 지속적인 소모를 일으키려고 만들어낸 함대지만 이럴 때에는 도움이 되었군. 그렇다고 큐슈를 되찾을 명분은 없었을 텐데?”

어디까지나 군사 협약을 발효하여 참전하였으니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해도 대한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 것이 전부이다. 전쟁의 주역은 대한제국이니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사카모토 료마를 비롯한 일본 정부는 도박을 시작하였다. 억지로 중공업 단지를 개수한 충격, 전쟁 이후 배당금도 받지 못한 충격을 무릅쓰고 다시 한번 참전한 것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의 손실에 참전하지 않은 대한제국과 달리 일본은 제국을 천명하며 물심양면으로 영국을 지원하였으며. 유럽 일대에 오만 명의 병사를 파병하고 함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참호 안에 쑤셔 박혀 철모를 감싸 쥔 일본 병사의 흑백사진을 보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속칭 말하는 따갚되, 따서 갚으면 된다는 심정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가까스로 이득을 거둔 것이다.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대한제국은 큐슈를 내어줬지만 타격은 크지 않았다. 이미 만들어진 지 40년이 지나 중공업단지는 대규모 개수가 필요한 곳이며. 조선시대부터 문화적으로 동질화 되었던 사람들은 하르빈에 세워진 새 도시로 이주했던 것이다.

심지어 1924년까지 오 년의 유예기간 동안 큐슈에서 하르빈으로 이주한 일본인이 32만에 달한다. 결국 빈 깡통과 다름없는 큐슈를 먹은 일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 사진을 보니 답이 나왔다.

“본래 역사에서는 대한민국이 반으로 갈라졌는데 여기서는 일본이 반으로 갈라졌네?”

일본 전도는 절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교토를 중심으로 나눠진 모습에서 남쪽이 빨간색이라니 아무리 봐도 빨간 맛이 새 정권을 세워서 갈라진 것이 분명하다. 소비에트의 빨간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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