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외전 8화 – 근대인데 근대가 아님(1) >
조선 전기 박물관에서 받은 충격을 감내할 새도 없이 근대의 상징인 대한제국 박물관의 표를 끊었다. 나름 전통의 모습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전기 박물관과 달리 대한제국 박물관은 초월적이고 추상적이었다.
“동대문 근처에 있던 하얀색 행주 같은 건물이 연상되는군.”
용을 형상화한 것인지 하얀색의 거대한 부정형 건물이라 감회가 새롭다. 추상적이며 야성적인 조각상이 즐비한 입구 공간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반지하의 광활한 홀이 나왔다. 홀에는 흉상들이 늘어서 있는데 대부분은 모르겠지만 한 명은 익숙한 사람이다.
“최익현? 이 양반이 대한 공화국 임시 총리였다고?”
흑백사진의 노쇠한 모습과 달리 예순에 가까운 연령으로 보이지만 담대한 체격이 돋보였다. 유림의 상징인 최익현이 변한 역사에서는 급작스럽게 공화국으로 변한 대한 공화국의 임시 총리직을 담당하고 있었다.
“인물들에 대한 편견부터 버려야지 별수가 있겠나. 아예 대한 공화국 통사 강의라도 신청해서 모조리 다 배워야 하려나.”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홀을 지나 가장 먼저 있는 ‘칭제건원관’으로 들어갔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있었는데 여기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근대화였다.
조선, 청, 일본이 결사적으로 달려들었고 운과 기반 모두가 따라주었던 일본이 불완전하게 이루었던 근대화는 대한제국의 입장에서 체질개선 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근대화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냥 체질개선이네. 국가 단위의 체질개선.”
[조선은 제국으로 거듭나며 서양의 제도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천자국과 번국으로 이루어진 동양 질서가 조선이 거느린 속령에는 적당하지 않다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이 만들었던 기존 속령들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였고. 이를 통제하기 위한 행정 및 자금 소모가 날이 갈수록 커져가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서구권의 식민지 통치체제 도입은 실패에 가까웠다.]
[서구와 동일하게 속령의 자치체제를 본국에서 파견한 관료가 대신하고. 속령의 군대를 거의 해산하여 본국 군대의 휘하에 두었으니 더욱 많은 자금이 소모되었다.]
조선은 더욱 발달한 체제를 너무 일찍 도입해 버린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서구의 체제를 도입하면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했고, 필연적으로 부작용에 신음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자금 소모는 더욱 커졌으며, 졸지에 일자리를 빼앗긴 속령은 대규모 실업으로 인한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졸지에 실업자가 된 속령의 군인과 관료들은 본국으로 건너와 항의를 하며 청원을 거듭하였다.]
“서구 식민지는 무역 거점과 자원 수급만 효과적이지 영토를 넓히려고 무턱대고 들이대면 손해만 보는 일이 잦았지. 결국 괜한 일을 했지만 도움은 되었군.”
조선이 속령을 만드는 방식은 복잡하면서 효율적이었다. 기반 시설을 만들고 기존 원주민들을 행정 및 교육으로 포섭하고 중간 과정은 무역 수익으로 손실액을 보충한다.
서구권이 식민지를 만드는 방식은? 필요한 것만 뜯어먹다 영토를 늘리겠다고 군대를 파병해서 무력을 쓰고, 병력 파병비용과 관료 유지비용 여기에 군수품 보급까지 병행해야 한다. 결국 더 많은 돈을 쓰니 비효율적이고 당시의 관료들도 이를 인정하고 수정하였다.
[이를 수정하고 의견을 반영하여 1830년 기축(己丑) 개혁이라 칭하는 수정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속령의 관료와 군대가 제자리를 찾기에 이르렀으며. 행정과 자금소모는 속령을 관리하는 데 있어 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최종적으로 대한제국은 행정 체계의 개편, 과거제의 국가고시(國家考試) 변화, 양전(量田) 개혁을 비롯하여 서구 체제를 받아들여 새로운 틀을 만들며 온전한 제국의 토대를 만들었고 이는 대한 공화국의 체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지고 있는 힘이 남아도니 싹 뜯어고치고도 여력이 남은 거지. 보통 행정 개편 후유증이 십 년은 이어지고 국가고시 도입도 기득권층의 알력이 어마어마하니까. 단위계도 개편했네?”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막대한 자금을 비축해서 제도를 도입하는 와중에 일어나는 손실을 모조리 메워 버리면 그만이다. 여기서 엉겁결에 시작된 단위체계 개편은 가장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흉측한 야드파운드법 도입은 안 하길 잘했지. 미터법이야말로 최고의 단위체계라니까.”
[영국은 잉글랜드 단위계를 재정비하여 대한제국을 자신들의 단위계인 야드파운드법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세계를 양분하는 자부심을 가졌기에 이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프랑스 혁명정부가 만든 미터법, 현대의 표준 단위계인 SI 단위체계였다. 이미 17세기 초에 자오선(子午線)을 기준으로 지척(地尺)을 정립한 덕분에 빠른 도입이 가능하였다.]
그러니까 17세기에 지구 자오선을 나누어서 척관법의 척(尺)을 개편했다는 말인가? 이현전과 이슬람 천문학자의 도입이 얼마나 많은 나비효과를 불러왔단 말인가. 하지만 이른 시기에 도입한 나머지 오차가 심한 부작용이 있었다.
“그래서 팔 미리 팔 미리 하는구먼.”
설명을 보니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지척은 곡식의 평균 길이가 아닌 자오선의 1억2천만분의 1을 계산하여 만들어진 척관법의 표준이다.
하지만 지척 셋을 합치면 1미터가 되어야 하지만 오차가 있어 100.8㎝가 되는 것이다. 결국 남아도는 길이가 생겨 팔 미리라는 단어가 만들어져 버렸다. 지식이 늘었다!
가장 궁금한 것이 해소되었으니 칭제건원관에서 나와서 다음 관으로 들어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교육과 행정이 개선되면 상류계층의 전유물이 일반 시민에게 보급될 일만 남았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계층이나 부유한 양민 혹은 재능이 뛰어난 이들에게 국한된 입신체비가 모든 사람들에게 퍼질 조건이 달성된 것이다. 부푼 마음으로 이름도 당당한 ‘체육관’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동상은······.
“베이브 루스가 왜 여기 있어! 그리고 왜 뚱뚱하지 않고 근육질에 날렵해! 여기에 옆에 손을 맞잡은 사람은 또 누구야! 설마 군밤이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동상이었다. 살이 빠져도 여전히 거구인 베이브 루스와 손을 맞잡은 이는 잘해야 155㎝는 될 법한 노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동상 아래에 있는 글귀를 보고 눈을 의심하였다.
[성림왕 이형과 그의 마지막 제자, 조지 허먼 루스 주니어]
베이브 루스는 기나긴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기록은 갱신할 수 있지만 시대의 장벽을 감안하면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괴물이지만 약점도 있었다. 자신의 몸 하나만 믿고 마음대로 날뛴 덕분에 그의 말년은 흠집으로 얼룩졌다.
여섯 살부터 흡연과 음주를 일삼던 사람이 내가 창안했던 입신체비의 정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유니폼 위로 보이는 체격이 아름다울 정도이니 얼마나 고된 훈련을 했단 말인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시청각실로 들어갔다.
나를 인식했는지 화면에 불이 켜지고 <성림왕, 아메리카에서 제자를 만들다.>라는 단편 영화가 상영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이겠지만 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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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는 번잡하다 못해 사람으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십여 층이 넘는 고층 빌딩이 즐비하며 자동차는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려대며 다녔다. 그런 와중에 두 남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둘의 정체는 대한제국의 종친이자 예진청(예진원의 변경된 이름)의 도제조로 일하였던 성림왕(聖臨王 - 고종의 자) 이형과 그의 다섯째 아들이자 마지막 친왕의 자리에 있던 영친왕(英親王) 이은이었다.
공화국이 된 뒤로 종친의 자리에서 벗어나 오로지 입신체비를 하던 이들 둘은 국빈 대우도 마다하고 평범한 사람처럼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자를 다시 눌러쓴 이형에게 아들인 이은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제 종친의 신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혹여나 아는 사람과 마주칠 연유가 있겠습니까.”
“그렇다 하여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구나. 미주에 도달한 것이 11월, 그놈의 법적 문제 때문에 아메리카에 당도한 것이 3월이라니 벌써 다섯 달이 지나지 않았느냐.”
“큰형님이 지난달에 돌아오셨을 것이니 입신체비에 관련된 일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형님은 하나의 길만 파고든 저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입니다.”
한때 군방왕(君邦王)이라 불렸던 친왕 이척(본래 역사 순종)이 입신체비장에서 제자들의 훈련을 도맡아 하고 있으리라. 이형의 풀려가던 표정은 구두끈을 확인하려고 바닥을 내려다본 순간 뒤틀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신문 1면에는 ‘금주법을 피하기 위해 메탄올을 마신 9명 사망’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지금 아메리카는 금주법이 적용된 직후의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본래 음주 문화를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금주법의 부작용이 하나둘씩 번져 나오고 있으니 신문에는 금주법에 관한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은은 기사를 훑어보면서 혀를 차고 말했다.
“아메리카 정부는 참으로 멍청하기 짝이 없습니다. 법을 제정할 적에 사람의 욕심을 염두에 두어야지. 무턱대고 술을 금하면 반발이 거세어지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 술을 팔고 있겠지. 남동부 완구회사가 술집의 이름이라니.”
이형은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서 지그시 쳐다보았다. 본래 쉽게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미래의 제자는 금주법의 영향으로 자택도, 술집도 아닌 이상한 장소에서 머무르는 일이 잦다 하였다.
명함에 쓰인 길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니 오후 아홉 시가 넘어갔고. 어두운 골목 사이에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다. 이형이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고 손으로 철문을 세 번 두드리니 어벙한 얼굴의 청년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둘의 외모를 살폈다.
“동양인이쇼?”
“그렇다네. 안에서 찾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문제라도 있는가?”
“미국 출신 근육 덩어리 짭새인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기름이 조금 필요한데.”
이형이 잠자코 주머니에서 금화를 건네주자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마 전까지 영국에서 통용되던 소브린 금화이니 삼 일 동안 먹고 살 수준의 가치였다. 청년은 앞장서서 어두운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전구 몇 개로 밝혀진 지하도에는 열린 문과 닫힌 문이 있었다. 닫힌 문을 두드리고 삼 분가량이 지나자 첫 문이 열렸고. 이형과 이은은 두 개의 문을 더 통과하고 나서야 술집에 들어설 수 있었다. 마피아인 것이 분명한 경비는 이형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서 오십······ 잠깐, 당신들 설마 대한 공화국 사람이십니까?”
“대한 공화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라도 있는가? 공화국 사람은 여기서 목을 축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금주법에 가장 불만이 많은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 공화국과 그 문화권에 속한 이들이었다. 이민을 온 사람이건 일하러 온 노동자이건 금주법이 시행될 무렵 극단적인 반발을 시작했다.
‘조상님께 올리는 제사상에 올릴 술도 금주라니! 네놈들의 피에는 뭐가 흐르고 있느냐!’
결국 예외조항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대한 공화국과 이전 연맹 소속 국가 출신들의 ‘제사’라는 의식을 종교로 분류하여 제한적 음주를 허가한 것이다.
대한 공화국의 눈치를 본 조항이지만 이로 인해 동양인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았다. 이들의 태도를 짐작한 이형이 금화를 내밀자 덩치 큰 사내들은 꾸벅 숙이며 금화를 받아들었다.
금주법이 제정된 이후 한 달 하고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술을 원하는 이들은 넘치고 넘쳤다. 풍족한 세상에서 술을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갑부들이 모인 장소였는지 시퍼런 시가 연기가 사방을 메웠고, 게슴츠레한 빛을 내뿜는 전구가 천장에 속속들이 박혀서 빛을 내뿜었다. 이형은 너 나 할 것 없이 술을 들이켜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앉은 동양인을 본 바텐더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물을 한 잔 내어줬다. 금주령이 생긴 이후 술값은 천정부지로 올랐으니 파는 사람 마음대로 값을 매길 수 있었다. 간단히 팁을 주자 바텐더의 입이 열렸다.
“술쟁이 베이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친구는 지금 야구 선수도 아니고 주정뱅이이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저쪽 안쪽 방에서 술을 퍼마시고 있겠지요.”
술을 퍼마신다는 말에 이형과 이은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자고로 입신체비건 다른 운동이건 몸을 놀리는데 과도한 음주는 몸을 망가뜨리는 지름길이다.
“마음의 상처가 큰 것이야. 세상이 다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있다가 끔찍한 패배를 당했으니······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구나.”
베이브 루스의 인생은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는 사업 실패로 인한 채무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결국 1919년 뉴욕 양키스 구단에 막대한 현금을 받고 베이브 루스를 이적시켰다.
여기에 겹친 불운이 대한제국에 속했던 미국과의 국가 대항 친선경기였다. 야구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이 넘치던 아메리카는 총력을 기울여 선수들을 엄선했고 맹훈련을 거듭했다. 하지만 대한 공화국은 모든 운동의 종주국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아메리카 대륙의 진정한 국기(國技)인 야구의 종주를 판가름합시다.’
이를 북미주도 아닌 아메리카 대륙이라 하였으니 대한제국의 각지에서 인재들이 몰려왔고. 이 인재들은 모두 미국에 이민 신청을 하고 대한제국의 수도 한양에서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했다. 그들을 훈련시킨 이는 입신체비의 종주인 수양대군의 후손이었다.
결과는 아메리카의 참패였다. 체계화된 훈련과 몇 년에 걸친 국가 대항전으로 다져진 선수들은 아메리카 선수들을 어린아이 가지고 놀 듯이 박살 냈던 것이며 유일하게 대등하게 나섰던 선수가 이형의 눈에 들어왔다.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입신체비를 기반으로 하여 다진 몸과 비견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재능을 가진 자이니 이형은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새로운 제자를 만나려고 했던 이형은 방문을 열고 코를 감싸 쥐었다.
진한 술 냄새와 매캐한 시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술에 잔뜩 취해 게슴츠레한 눈을 굴리던 조지 허먼 루스, 베이브 루스라 불리는 야구선수는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내가 미쳤나. 이 동양 놈들이 술 마시고 있는데 술맛 떨어지게 왜 들어와?”
“동양 놈들이라. 살다 살다 별의별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지만 백범의 독사꺾기(코브라 트위스트)만큼 아픈 말이로군. 자네가 야구선수 조지 허먼 루스가 맞는가?”
“하!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네. 내가 야구선수면 영감은 대한제국 총리라도 되겠소.”
본래 뉴욕 양키즈 선수로 활동해야 하는 베이브 루스는 지독한 패배를 겪고 선수 생활을 접을 기세로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술주정을 시작했지만 아직 정신은 온전했는지 푸념을 늘어놓았다.
“괴물들이었어. 모조리 다 괴물새끼들이었는데 뭘 어쩌라고. 그놈의 양상도(사모아) 출신 누구? 그 괴물딱지는 내가 던진 공을 가볍게 쳐서 장외로 날려 보내는데.”
“자네도 할 수 있다네. 이렇게 몸을 망치지 말고 내 아래에서 눈 딱 감고 오 년만 훈련을 하게나. 자네 재능이면 오 년도 아니고 삼 년보다 더욱 빨라질 수 있다네.”
테이블 위에는 여러 병의 위스키와 수십 병의 맥주가 뒹굴고 있으며. 안주랍시고 나온 녀석은 모조리 튀긴 음식이었다. 아직 서른조차 되지 않은 베이브 루스의 뱃살을 본 이형은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지만 상대는 듣지 않았다.
“술맛 떨어졌으니 술을 더 먹고 싶다고! 가서 술 가져오고 이 사람들 물이나 한잔하고 내일 다시 오라 해줘. 카폰 씨! 거기 있어?”
“우리 루스 씨가 필요한 게 있습니까? 이 동양 신사분들이 귀찮게 했나 봅니다.”
문이 열리자 스물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목을 꺾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악스러운 손을 뻗어 이형의 옷깃을 잡아채려는 순간 다른 손길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소. 몇 마디만 더 하게 해주시오.”
“머나먼 동양에서 오신 신사분이 힘이 제법 세십니다. 그러니 저도······.”
미스터 카폰, 그는 뉴욕의 파이브 포인츠 갱단에서 싸움꾼이자 조직원으로 일하는 마피아였고 그의 특기는 일대일 싸움이었다. 번개같이 몸을 돌려 이은의 턱을 주먹으로 두들기고 발로 걷어차 벽으로 메다꽂았으니 천부적인 싸움꾼의 모습이었다.
“유길(酉吉 - 영친왕의 아명)아!”
“손이 거친 분이기에 조금 재워드렸습니다. 거기! 이분들 조용히 밖으로 모셔놔.”
마피아 여럿이 손을 풀며 두 부자에게 다가섰지만 이형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안색이 창백해진 이형은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자네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무례를 용서하겠네! 어서 동료들을 데리고 도망가게나.”
“도망? 치료비는 제가 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일어나면 때려눕히면 그만이지요.”
“자네들이 죽을지도 모르니 도망가라 한 것이네!”
이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던 조직원 둘이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바닥에 쑤셔 박혀버렸다. 한 손으로 장정을 메치는 모습이 사백여 년 전 수양대군의 완력을 보는 것과 같았다.
“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대한제국의 종친인 나의 몸을! 황제폐하께서 아름답다 칭하신 몸을 아버지 앞에서 해하려 하다니! 그아아아아아앗!”
두꺼운 연미복과 조끼, 그리고 안에 입은 드레스 셔츠와 속옷까지. 네 겹의 옷이 단번에 갈기갈기 찢어지며 거대한 근육이 튀어나왔다. 이은의 몸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와 같이 고고(高古)한 자태를 뽐내며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지금부터 너를 근육하겠다!”
“서둘러 달아나게! 지금이라면 자네의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