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34화 (234/573)

< 현대 외전 7화 – 박물관(2) >

고개를 돌리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왕족과 종친을 제외하면 한명회가 조선 전기 최고의 위인인 사실은 인정한다. 인정 못하는 사람? 범선으로 지구 열 바퀴도 아니고 한 바퀴만 돌아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가겠지.

김시습도 인정할 수 있다. 가혹한 북방에 수도 없이 오가며 여진족과 시베리아 원주민의 흡수를 빠르게 만들었으니 한명회의 다음 가는 인재가 맞지. 그런데 홍윤성이 무관 가운데 최고의 위인이라고?

일본 원정 주역인 권절도 있으며 문관 출신의 김종서는 물론이고 골수 무관인 이징옥도 있다. 조금 후대이지만 남이도 있는데 이들은 어디에 빼놓고 홍윤성에 대한 칭찬이 대다수란 말인가. 하지만 홍윤성의 설명에는 당당하게 최고라 적혀 있다.

[조선 전기 최고의 무장. 박소(拍笑) 장군 홍윤성]

박소는 박장대소(拍掌大笑)의 줄인 말이겠지. 본래 역사에서 입은 웃는데 눈은 울고 있으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던 홍윤성의 모습이 아니고 대범하고 호탕한 웃음을 짓는 밀랍인형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홍윤성은······.

‘죄송해요 저는 어명을 받으면 기분과 상관없이 웃는 증상이 있어요.’

공포영화에 나오는 연쇄 살인범과 흡사한 표정을 지었지. 심지어 큐슈에서 머물다 돌아왔을 당시에는 대신 모두가 몇 년간 편히 쉬라고 권할 지경이었으니까.

어느 정도 미화가 들어가거나 홍윤성의 정신질환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라 치자. 하지만 이징옥을 쏙 빼놓고 홍윤성 단독? 이징옥과 함께 두 개의 전쟁에 참전해 보았는데 이징옥도 만만치 않은 무장이다.

“철령 전투야 내가 입안한 계략의 효과를 극대화시켜서 진내사격과 작렬신기전이라는 신병기의 최초 사용을 완벽하게 해냈고. 하르빈 전투는 이징옥이 아니면 내 목숨은 물론이고 본진이 위험한 지경이었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홍윤성의 관련 물품이 훈련도감 표준 복장인 시점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내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홍윤성은 본래 훈련도감 1기 출신으로 착실히 무훈을 쌓던 자였다. 하지만 그는 일신의 무용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지 않고 지략을 사용하였으니.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근육겁박지계’를 창안하였으며. 이는 조선의 외부 개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양도 원정 당시 대양도 원주민들의 기습 공격에 시달리던 조선의 병사들은 홍윤성이 람보복(藍輔服)을 개발하며 역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제식을 갖춘 정규군이 취한 최초의 위장복이다.]

[그가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맹장(猛將)임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몸이 부족하면 경험을 체득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지략이 부족하면 훈련원 삼군의 체계를 정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인식과 이 역사에서 인식이 완전 다르네. 생각해 보니 홍윤성은 전쟁사의 흐름을 바꾼 위인이었어. 이후의 조선군은 모두 홍윤성의 업적을 넘어서려고 노력했겠군.”

[문종은 정범수가 창안한 임해도감을 선상에서 수비를 위한 백병전 병력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를 훈련도감과 같은 다목적 군대로 발전시킨 자는 홍윤성이었다.]

홍윤성의 업적 중에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 새로운 병사인 훈련도감은 나와 이징옥이 만들었지만 특성화 훈련과 각종 경험 전수의 수단을 마련한 정비한 자는 홍윤성이다.

비대해진 훈련도감이 훈련원이 되고. 임해도감까지 추가된 거대한 집단이 되었지만 홍윤성은 이 세 개의 특성화된 군대를 결합하여 유기적인 조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건 원래 역사에 몰입해 있는 나의 편견이니 빨리 수정해야겠다.

“원래 역사에서는 인간 백정에 권력에 미친 주정뱅이가 이 역사에서는 위인이라니. 잘못 말하다가 한 대 얻어맞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나저나 정신질환 관련 내용도 있네?”

내가 죽은 뒤에 시작된 아즈텍 원정 기록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실록을 기반으로 한 홍윤성의 광증(狂症)에 대한 서술이 적혀 있었다.

[조선의 미주 상륙 이후 이어진 전쟁에서 수많은 이들이 피로 칠갑된 인신공양 의식을 듣고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공포에 휩싸였지만 홍윤성은 평소와 같이 호탕하게 웃었다 전한다.]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행동이라 여겼지만 실상은 달랐다. 미주에서 돌아온 홍윤성은 마음이 온전하지 않다 하며 칩거를 청하고 주사(朱砂)와 용골을 사용한 약을 복용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말년의 그는 흥분하면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말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격전이 일어난 전장을 돌아다닌 덕분에 홍윤성은 가벼운 외상스트레스 증후군을 앓은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뭐라 말 할 수도 없고.”

당시를 살아온 나의 시선과 미래의 평가는 다르다. 세종대왕님도 4군 6진을 개척한 이후 백성들을 전가사변 시키는 바람에 상왕으로 올라가시기 전에는 백성들의 평가가 영 좋지 않았지.

다음으로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이들을 찾아보았다. 이 박물관에서는 조선 전기를 1570년으로 설정하였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조선이 1821년에 칭제건원을 하여 대한제국으로 변모했으니 조선시대의 반을 나누어 1570년으로 정했을 가능성도 있고. 1570년 경에 국제적인 사건이 벌어지며 조선 전기와 중기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을 수도 있다.

중간의 인물들은 슬쩍슬쩍 보면서 넘어갔다. 김종서, 이징옥, 장영실 등 나와 같이 일했던 이들 중 상당수는 세종대왕을 도와 나라를 이끈 충신으로 이름이 남아 있었다.

반면 황희는 인식이 좋지 않았다. 본래 역사에서는 청백리니 재상이니 하면서 부정부패에 대한 인식은 쏙 빠져있는 인물이었지만 이 역사에서는 올바른 평가를 내렸다.

[경국대전은 세종대왕이 저술한 법전이며, 이 가운데 형전(刑典)은 뛰어난 재상이자 부정부패 관료의 상징인 황희의 범죄를 기반으로 우회 방법을 차단하였다.]

[훗날 조선의 법도는 황희와 같이 법을 악용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른 대신은 일흔이 넘도록 사직을 윤허하지 아니하였고. 여기서 ‘황희 묫자리에서 일하듯 한다.’ 라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황희는 죽기 석 달 전에 사직은 아니고 집에서 쉬라고 명령을 받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휴대전화로 검색하니 비슷한 속담으로 ‘한명회 배 타듯 한다.’ 가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차이는 있었다, 황희 묫자리에서 일하듯 한다는 죄를 저지른 놈이 용서받지 못한다는 뜻이고. 한명회 배 타듯 한다는 억지로 코가 꿰어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확인한 사람은 신숙주이다. 본래 역사보다 오래 살아서 1490년에 74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정난공신이자 변절과 배신의 상징이 아니고 묵묵히 일하는 참된 신하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관련 유물? 당연히 서역제국기라 생각했는데 없다.

[신숙주의 저서 서역제국기 원본은 특별전인 ‘서행사 전시관’에 있습니다.]

팸플릿을 보니 서행사 전시실은 ‘ㄷ’자 형태로 구성된 박물관의 정 반대편이다. 단번에 몰아보기로 하고 다음 인물을 찾았다. 현대로 돌아오면서 기억이 정리되었지만 현동이는 엄연히 내 아들이니 관심이 있었다.

현동이는 종친 가운데 군호를 받은 이들과 함께 있었다. 정확히는 혼자서 한 줄을 독차지하고 있으며 안평대군과 같이 황실 박물관에 있어야 할 회화가 현동이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었다.

[도원군 이장(李暲) - 안평대군 작품]

현동이의 전신 회화는 안평대군이 피렌체에서 돌아와 그린 녀석이었다. 세월의 흔적을 속일 수 없었는지 색이 변해 있었고 이래저래 벗겨진 부분도 있었지만 먹물을 사용하지 않은 유화(油畫)이니 방법이 없다.

현동이 옆에 있는 전시품은 녀석이 젊은 시절부터 탁본한 비석들이었다. 비록 사본이니 크기를 축소하였지만 광개토대왕릉비 탁본같이 거대한 물건을 박물관에 두려면······. 있잖아?

[광개토대왕릉비 탁본과 고구려 비석 탁본 4점. 비석은 1904년 순과의 국경 분쟁이 거세어지자 전쟁으로 인한 파손을 염려한 건양제의 특명으로 한양으로 이전됨. 본원 휴게공간에 보존되어 있음.]

본래 역사에서는 중국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도 아니고 고구려 비석 5개? 모두 만주와 요동 일대에 있었겠지? 사학도로서 쿵쾅거리는 가슴을 뒤로하고 현동이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녀석이 금석문에 관심을 보인 직후 역사학자로 만들기 위해 은근슬쩍 내가 아는 비석 위치를 알려준 일도 있었으니. 녀석의 행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내가 죽은 다음에도 왕성한 활동을 거듭했다.

[조선의 왕족이자 수양대군의 아들인 도원군 이장은 젊은 시절부터 입신체비를 익히고 금석문을 해석하기를 즐겨 하였다. 처음에는 아버지인 수양대군의 원조가 있었지만 훗날 학문으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는 조선시대에 한반도에 존재하였던 상고시대 국가인 삼한의 위치와 계통을 파악하기에 이르렀고. 현대 학자들이 한반도 역사를 연구할 때에 가장 많이 참조하는 서적으로 삼한강역고(三韓疆域考 - 삼한의 영토를 파악하다)가 있다.]

“삼한강역고라. 내가 퇴고한 서적을 돌려주면 부족하다 말하면서 다시 고쳐 쓰며 나의 속을 썩이더니 결국 성공했군. 여기에 말년에 고구려 시대의 비석 네 개를 추가로 발견했다고?”

현동이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내가 누누이 말했던 ‘기록을 교차하면 어린아이의 말도 성현의 말이 될 수 있다.’ 라는 원칙을 지켰다. 광개토대왕비를 교차 검증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여진족을 통해 다른 비석을 발견하고. 각 비석의 기록을 토대로 광개토대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또한 갑골문을 해석하여 은주(殷周)문자라 칭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내 손자인 이정(李婷), 본래 역사의 월산대군이 완성하게 되었다.

이런 업적을 쌓아나갔으니 홍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본래 역사를 아는 일은 훈고학(訓詁學)에 속하며. 옛 경전과 근본을 찾는 일이라 하였으니 특별한 벼슬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세조 이홍위는 삼년상을 치른 이장의 공을 치하하고 수양대군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를 종친을 대표하여 종묘의 제사를 올리는 예조 휘하 기관 예진원(禮進院)의 도제조를 담당하게 하였다.]

“계획대로면 예조가 분해되어 예식을 담당하는 예(禮)조와 외교를 담당하는 외(外)조로 나뉘기로 했었지. 계제사(稽制司 - 예조 휘하 기관. 의식, 경연, 제사 등을 담당한다)의 권한도 분리 되었겠군.”

홍위도 내 죽음을 슬프게 여기고 현동이의 직계에게 영구히 종친의 자리를 보장하여 내 후손들을 배려한 것이다. 결국 본래 조선왕실의 혈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역사가 변해서 직계가 꾸준히 내려왔으니 다른 인물이겠지.

[도원군의 직계 후손은 대대손손 종친으로 대접받으며 왕실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이후 1918년 대한제국 황실이 스스로 해산하였음에도 입신체비의 종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입신체비의 종주라? 설마 박물관이 내 후손 소유인가? 잠깐 검색. 입신체비 박물관은 없으니 다른 곳에 사립(私立) 박물관으로 있는 것 아니야?”

[입신체비 박물관은 한양 진고개의 옛 수양대군 자택 인근에 있습니다.]

휴대전화로 검색하니 내 옛 자택 맞은편의 입신체비장에 빌딩이 있었고 추억이 담겨있는 집은 옛 모습과 조금 달라졌지만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여기는 나중에 가 볼 박물관으로 정해야지. 지금 중요한 일은 역사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다.

현동이의 이야기도 알게 되었으니 다음으로 보고 싶은 것은 서행사 특별전이다. 비록 시작은 한명회의 과거 시험 답안으로 시작되었으나 엄연히 내가 주도한 업적이니까. 통로로 빠져나와 중앙 휴식공간으로 들어가니 온기가 느껴졌다.

휴식공간이라 해도 건물 외부가 아니고 천장을 유리로 만들고 잔디가 깔린 실내 정원과 같은 곳이었다. 그 중앙에 거대한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있었으며 좌우로 비석 네 개가 더 있었다. 각각의 색상이 다르니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비. 거의 같은 형태로 두 개가 있으니 하나는 현동이의 해석을 바탕으로 완전 복원된 복제판이겠군. 돌 세우는 것만 해도 고역이었겠다.”

루브르 박물관 중앙에 유리 피라미드가 있지만 조선 전기 박물관 중앙 휴식공간에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비가 유리 케이스에 담겨 우뚝 솟아 있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비슷한 모양이라 쓴웃음이 나왔지만 설명이 더욱 특이했다.

각자 동천왕서안평비, 증천왕릉비, 서천왕릉비, 문자명왕부여정벌비라 적힌 생소한 비석이지만 가슴이 뿌듯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노란색의 거대한 거북이들이 주변에서 한가롭게 채소를 뜯어먹으며 돌아다녔다.

<이주가시거북의 턱 힘은 아주 강합니다.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이주가시거북은 솔로몬 제국 일대의 거북이며 한명회가 대양도에서 사육하였습니다. 이 거북이들은 한명회가 수입한 거북이들의 10대손입니다.>

이게 유응부가 가져온 그 거북이라고? 등껍질 형태가 비슷하지만 적게 잡아도 80kg은 될 거대한 거북이의 모습에 할 말이 없었다. 손바닥 크기의 거북이가 다 크면 이런 괴물이 된다고? 그리고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거대한 새는 도도?

<안양조는 구성군 이준이 극락도에서 가져온 새입니다. 온순하고 사람을 따르는 성격이나 극락도의 생태계가 파괴되어 멸종하였습니다.>

헛웃음이 나오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서 억지로 참았다. 박물관이라고 역사적인 동물들을 휴식공간에 풀어놓다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조선이 전 세계로 뻗어나간 이후의 역사가 있을 대한제국 박물관에 가면 하스트수리나 스텔라 해우가 있지 않을까. 거북이와 도도를 피해 서행사 특별관에 가니 벽면 하나 가득 세계지도가 있었다.

[서행사는 조선의 시야를 동아시아에서 전 세계로 넓힌 역사적 사건입니다.]

완벽한 평가다. 서행사가 없었다면 내가 아무리 진출하려는 마음을 먹었어도 조선은 대양도 하나만 먹고 끝났을 것이고. 인삼 판매와 중계무역으로 인한 막대한 수익도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북방 영토의 귀속이나 무역 수익으로 인한 명나라의 경계 약화. 군사 체계 강화도 수십 년 이상 늦어졌겠지. 그렇지만 잘못된 해석도 있었다. 서행사는 서로서로 업무의 수렁으로 빠트리는 복마전과 같은 양상이었는데 이 시대의 평가는 달랐다.

[서행사의 시작은 천축과의 무역에서 비롯되었다. 대양도로 진출한 조선은 동남아 상단과 접촉하였고. 이를 통해 직접적인 무역이 가져올 수 있는 이득에 눈을 돌렸다.]

[문종의 뜻에 의해 효령대군이 발 벗고 나섰으며. 평상시에 효심이 깊고 웃어른을 존중하는 수양대군이 몇 년에 걸친 준비 끝에 서행사의 기본 계획을 수립하였다. 또한 한명회는 촉망받는 인재로 발탁되었다.]

“속사정을 모르고 결과만 보면 이렇지. 애초에 한명회의 전시 답안이 문제였고 효령대군이 난데없이 끼어들면서 급작스럽게 진행된 일인데 이걸 이런 식으로 해석하네. 이게 무슨 화석 복원이야?”

좀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통이 시작되고 몸이 불편해지니 사사로운 서적은 모조리 불태우고 일성록(일기)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이론을 끄적거린 영직서, 내 현대 이름을 딴 서적을 남긴 것이 전부이다.

이런 글을 남겨두면 내 정체에 대한 의혹이 불거질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시행한 조치였다. 덕분에 의혹은 없지만 이런 오해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평가는 매우 적절했다.

[서행사는 조선이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필수로 사용되는 작물과 현대에도 육계(肉鷄)의 조상으로 대접받는 천축계를 도입하여 향후 백 년 이상 지속 가능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편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은 막대한 무역수익을 보장하였으며. 서양에서 대항해시대라 불리는 개척의 시대를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스페인의 탐험가 콜럼버스가 미주 대륙의 동해안을 ‘지판그 제도’라 명명한 일은 당시 인삼에 대한 열정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기적의 수학자가 뭐?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것은 예상한 일이지만 인도의 서쪽이 아니고 조선의 동쪽에 있는 일본이라 여기고 지판그 제도라 이름을 붙였나? 그리고 다음 항목에서 말년에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보였다.

[오스만 제국은 훗날 위서 사건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이전에 교류를 지속하였다. 당시 메흐메트 2세가 보낸 학자들은 이현전에서 일하며 조선의 과학발전의 기틀을 쌓아나갔으며. 이현전은 율곡 이이를 비롯한 인재들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율곡 이이가 이현전에? 그러면 성리학의 완성은 어떻게 되고, 주리론과 주기론이니 이기일원론이니 그런 말도 사라졌나? 성리학은 어떻게 되었지?”

본래 율곡 이이는 호조로 관료 생활을 시작해서 예조와 청요직을 거쳐 사헌부까지 올라가는데 여기서는 난데없는 이현전에서 관료 생활 시작이라니.

본래 조선 중기 역사는 넘기고 근대 역사에 몰두하려 하였다. 과연 대한 공화국이 이런 거대한 제국을 만들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세계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조선 중기 역사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나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천천히 걸으며 서행사 특별전을 모조리 보고 나서 마음을 굳혔다. 조선 중기 역사는 맨 마지막으로 넘기고 계획대로 대한제국 박물관에서 삼 일은 머물러야겠다.

“근대 역사를 완벽하게 알아야 현대 역사를 알 수 있지. 다음 장소는 대한제국 박물관이다.”

내가 변한 역사에 적응하는 일이 먼저지 호기심을 챙기는 일이 먼저가 아니다. 이를 꽉 깨물고 폐관 시간이 남은 조선 전기 박물관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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