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외전 6화 – 박물관(1) >
올해 스물아홉인 사촌여동생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크게 놀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외할머니가 손가락을 꼽아보시더니만 말했다.
“친왕(親王)이라고? 친왕이라 하면 태자를 제외하고 익(瀷)왕과 조(趙)왕 둘이잖니?”
“네 맞아요. 명나라 황제 주영잔의 막내아들인 조왕 주상진. 지난 가을 농어촌 봉사에서 우연히 만나서 사귀게 되었어요.”
“좋은 나이에 좋은 사람과 사귀어서 혼인하니 잘 되었구나. 태자라면 몰라도 다른 친왕이야 연애결혼을 하는 일이 태반이니 별 문제는 없겠구나.”
“사실 결혼일자를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것이 힘들지 결혼 이후에는 별 문제가 없잖아요.”
나와 다른 사람 모두가 놀랐지만 놀라는 이유가 달랐다. 나는 명나라 왕족과 결혼한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친척과 주변 사람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결혼 일정을 잡으려면 고생이 많겠구나. 아무리 막내아들이고 태자를 제외하면 연애결혼이 태반이라 해도 엄연히 따지면 명나라 황실의 일이니 번잡할거다.”
“어머니도? 태자야 나름 가문 가려 받는다고 전주 이씨니 장동 김씨니 하면서 나름 가문을 따지지만 친왕은 그런 점에서는 자유로운 편이지요. 그렇지 않니? 영직아?”
“아······. 서로 좋아서 결혼한다는데 그런 일에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 다소 불편해도 참고 서로 이해하며 하는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죠.”
어머니가 갑자기 나에게 물어봐서 적당하게 대답했는데 다들 아무 말을 안 하고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갔다. 단순한 대화로도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막내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관심을 끊었고. 친척들은 손가락을 꼽아보고 휴대전화로 신상명세를 검색해보면서 단순한 결혼으로 받아들인 눈치였다. 명나라 황실 가운데 대접을 받는 사람은 황제와 태자가 전부겠지.
주상진이라는 인물의 대접은 인기 없는 연예인과 비슷하다. 어느 정도 공인(公人)에 속하지만 빈도와 영향력 모두 지극히 낮은 사람들. 결혼 했는지도 모르고 지방 신문기사에 작게 올라가는 그런 연예인들 말이다. 그런데 장동 김씨나 전주 이씨?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몰라서 조선시대의 명문가에 대해 검색해봤다. 이들이 대한제국이 공화국으로 변하고 나서 권력과 부를 손에 쥐고 정치에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라도 부정 축재한 재산을 원래 역사 친일파처럼 소유하면? 아니면 일본처럼 정치를 세습하며 이어가면? 이런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한다.
[장동 김씨 기업 검색 결과 – 집성촌 7개소, 경원 제철소, 연해도 산림원 외······.]
[여흥 민씨 기업 검색 결과 – 집성촌 3개소, 동문제약, 단천 탄광 외······.]
“이건 강하다고 할 수도 없고, 약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냥 가문의 형태만 유지해놓고 있네.”
잠시 검색해봤지만 조선시대의 명문가는 가문의 재산을 이어받아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일본처럼 정치를 독점해 지역구 세습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이라는 단어보다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사업에 신경을 쓰면서 정치에서 멀어졌겠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니 사촌여동생이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른다.
“오빠는 왜 이렇게 가만히 있어? 평소의 오빠 같으면 막 뭐라 하면서.”
“왜 이리 삐쩍 말랐냐. 이 친구 진양근은 들어야 결혼생활 잘 하겠다 그런 소리 안하냐고? 네 표정을 보고 아무 말 안했다.”
“내가 할 말을 먼저 하네! 오빠 사람 많이 변했다? 예전이면 진양근 어쩌고 하면서 다른 형부들처럼 대역기 들고 확인해 본다고 달려들었을 것이 분명한데?”
나란 인간은 대체 얼마나 막되 먹은 인간이란 말인가. 입신체비가 보편화 된 이 시대 기준으로도 여간 깐깐한 사람이었는지 매제들이 내 변한 모습을 보더니만 실실 웃고 있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삼아서 정상적이고 자제력 있는 모범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끼어 드셨다.
“듣자하니 네가 결혼할 사람이 대명국 박물관의 관장 자리에 있다는데 직접 만나보고 싶구나. 지금 바쁜 것은 아니지?”
“바쁘긴요. 박물관 관장이자 공무원 부 3급(종 3품에서 이어진 직급. 현대의 2급 공무원)이긴 하지만 실권은 행사 진행과 해외 인사들 접견이 전부인데요. 참 입신체비 기구도 있으니까 오빠가 한번 만나 보는 건 어때?”
“나 휴식월이라 중량운동은 금지야. 그러니 새 매제나 소개시켜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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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국 박물관은 제법 먼 곳인 본래 역사의 춘천 실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며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본래 역사의 국립박물관 규모의 거대한 공간 안에는 명나라에서 건너온 것이 분명한 유물이 빼곡했다.
유물을 보는 것은 나중에도 족하다. 로비에서 사촌여동생이 뭐라 조잘거리자 직원이 바로 우리 가족을 4층의 방으로 안내했고. 비어있는 방에 잠시 앉아 있으니 훤칠한 30살 정도 되어보이는 청년이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대명국의 황제폐하께서 친왕으로 임명한 조왕 주상진이라 합니다. 비록 대한 공화국의 도움으로 박물관의 관장을 역임중이지만 빼어난 대명국 황족 이전에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모범을 보이겠습니다.”
“오빠! 오빠 명나라 말로 해줘!”
[대명국의 황제폐하께서 ······.]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내 귀는 못 속인다. 완벽한 명나라 초창기 중국어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55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서 당시의 중국어가 주상진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이다. 반사적으로 답이 나왔다.
[대명국의 친왕을 뵙게 되니 입신체비사 최영직 몸 둘 곳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황족이 이렇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니 한낱 체장인 제 얼굴이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두 번을 다녀왔으며. 수양대군 시절부터 죽어라 중국 사신을 접견하는 예법을 반복했더니 반사적으로 답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데 외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너도 명나라 말 할 줄 아니? 억양이 완전히 같은데?”
할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춘천에 살고 계셨고. 젊은 시절에는 과일가게를 하셨으니 중국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겠지. 하지만 가장 당황한 사람은 주상진이다.
“세상에! 입신체비사이신데 사학과를 나왔을 때부터 짐작이 갔습니다. 설마 세종대왕 시절의 고어(古語)를 익히신 겁니까? 입신체비를 하시며 시간을 쪼개 독학을 하셨군요?”
“알음알음 익혀보았는데 제 발음이 정확했나보군요. 부족한 솜씨로 무례한 일을 했습니다.”
“아무리 옛 발음을 익힐 수 있는 길이 남아있다 해도 스스로 익혀서 이렇게 배웠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옛 방식대로 만든 천목차(天目茶)를 한 잔 가져오지요.”
새로 매제가 될 사람이 스스로 치를 우리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외할머니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으셨고 사촌여동생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55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언어는 변했지만 세종대왕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업적인 훈민정음 – 불가타 라틴어 사전을 통해 과거의 언어를 되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전에는 라틴어 발음도 적어두었다. 권력이라는 단어를 라틴어 imperium으로 번역하고. 발음으로 [임퍼이리움]이라고 적혀 있으며, 간단한 문장부호를 통해 성조(聲調 - 목소리의 높낮이)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를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만 들었다.
“세종대왕님 정말 감사합니다.”
“세종대왕님이 뭐가 감사하니? 네가 익힌 일이 대단하구나.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인데.”
“오빠 완전 대박! 중문학과 애들도 익히기 힘들어하는 명나라 독음을 자습했어? 오빠 뇌까지 근육 아니었어? 아니면 근육이 밀려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나?”
여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은 다음 내 말년에 일어난 일을 되새겼다. 홍위가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홍문관을 건립하고. 신료들을 쥐어 짜내며 각종 고서를 닥치는 대로 언해(諺解)하라 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서적이 언해되었겠지.
이 서적 가운데 훈민정음을 위해 들여왔던 서적인 중국어 발음 관련 서적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중간에 참여하여 지분이 거의 없는 안평대군이나 정의공주는 몰라도 세종대왕님과 형님과 나를 괴롭힌 녀석이 이 중국어 발음 서적이었다.
처음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변하지 않는 불가타 라틴어로 – 변한다 해도 라틴어는 읽는 방식의 차이이므로 언제라도 옛 발음을 추적할 수 있다 – 기록되어 있으며. 이 훈민정음이 다시 당나라 시절부터 이어진 중국어 발음을 번역해두었다.
훈민정음의 발음을 복원하면 자연스럽게 당, 송 그리고 명 시절의 중국어의 발음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피렌체의 미술가들을 데려온 일이 이렇게 돌아오다니 안평대군의 묘에 인사라도 올리고 와야 하나. 문이 열리고 주상진이 들어왔다.
“천목차입니다. 이제는 중화민국에서 생산되는 물량을 소량 들여오는 것이 전부지요. 다들 한 잔 하시고 최 체장님은 잠시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관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배울 것이 많겠군요.”
심각한 표정을 짓고 밖으로 나선 주상진은 박물관 뒤쪽 산에 있는 출입금지 펜스를 가지고 있던 자물쇠로 열었다.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이 형태가 무덤을 뜻하는 것은 알겠다.
춘천 변두리에 있는 대명국 박물관은 사실상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이장한 산 인근 벌판에 세워진 것이다. 개중 하나의 묘에는 석물도 별로 없었고 명나라 가정제 이후의 풍속인 무자비(無字碑)가 있었지만 누구인지 뻔히 알 수 있었다.
“이 묘소가 어느 조상님이 묻힌 묘소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양식까지 명확히 알 정도의 지식은 없지만 신종(神宗 - 만력제의 묘호)의 묘소인 것 같군요.”
다른 묘소는 얹혀 사는 처지에 봉분 크기만 무지막지하게 키워 버리고 석물을 대충 세웠으나 이 녀석만 봉분의 크기가 다른 묘소는커녕 일반 무덤 수준이다. 이런 형편없는 대접을 받을 존재는 만력제가 분명할 것이다. 주상진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입신체비가 조선에서 명나라로 퍼져나간 것이 신종의 치세 말기입니다. 이미 조선 전체가 입신체비로 들끓고 입신체비의 힘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동안 우리의 고려천자께서는 철저히 방임하셨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가 알 방법이 있나! 역사를 잘 알면서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 주상진은 알아서 말을 술술 하고 있었다.
“훗날이 되어 명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으로 돌아왔을 당시. 춘천에 갇혀 지내던 조상들은 하나같이 몸이 재산이라 여기고 입신체비를 행하려다 하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이미 나라가 멸하였는데 효행(孝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마음이었지요.”
하긴 나라 말아먹고 번국이었던 나라에 얹혀 살면서 조상을 볼 면목이나 있었을까. 그런데 주상진은 몸 관리 잘 하는데? 하지만 주상진은 묘비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처남께서 이렇게 훌륭한 모습을 보이니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역사를 알기 위해 별달리 쓸모도 없는. 명나라 황실이 옛 전통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익히는 명나라 시대의 언어를 익히지 않았습니까.”
“제가 익히려고 노력한... 것은 맞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익혔다고 거짓말은 못 하겠다! 여하튼 쓸모없고 굉장히 배우기 힘든 지식을 익힌 내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은 주상진은 철문을 닫아걸고 돌아서더니 자랑스럽게 말 했다.
“이런 뛰어난 처남이 있으니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박물관 관장으로 일하며 더욱 많은 지식을 쌓고 몸을 기르겠습니다.”
“혹여나 무리하시면 안 한 것만 못하니 조심하십시오.”
앞으로의 나는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언제나 남을 배려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번에야 조금 실수했지만 내가 지식이 많다고 자랑해봤자 역사를 모르는데 어디서 크게 곤욕을 치를지 모르는 일이다.
생각해 보니 역사가 변했는데 박물관도 가보지 않았네. 서울로 올라가서 할 일도 없으니 박물관이나 돌아볼까?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어디부터 가는게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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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와 박물관을 찾았는데 큰 박물관은 오로지 한 군데에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 강북의 부촌으로 손꼽힌 이촌동 일대가 모조리 박물관이었다.
정확히는 서빙고부터 용산 공업고등학교 사이의 구간은 변한 역사에서 모조리 박물관이 되었다. 산기슭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은 그대로지만 나머지 모든 곳에는 박물관이 들어섰다. 본래 서빙고가 있던 자리에 가니 비석이 하나 놓여 있었다.
[1924년, 옛 황실의 토지를 대한 공화국 정부 소유로 이전함. 또한 황실이 제공한 유물과 빼어난 자료를 보존할 공간이 필요하므로 일대에 박물관을 건립하기로 정함, 국무총리 민영환]
“민영환 이 양반은 원래 역사에서는 여흥 민씨에서 몇 안 되는 정상인이었는데 변한 역사에서는 국무총리 자리에 올라갔네. 본래 백사장이었던 곳인데 탁월한 선택을 했네. 보통 결단력이 아니면 이런 일은 못 하지.”
본래 이촌동 일대는 조선시대 기준으로 백사장이었다. 드넓은 백사장에서 병사 훈련도 하고 훈련도감 사열식도 열고 접영을 비롯한 4대 영법도 가르쳤지. 하지만 안내판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군사 박물관] [삼한 박물관] [고려 박물관] [북방 박물관] [조선 전기 박물관] [조선 중기 박물관] [대한제국 박물관] [황실 박물관] ······.
말 그대로 박물관 천국이다. 별개로 구성된 조선 왕실 박물관을 제외하면 각 시대별로 박물관이 있으니 외국인들과 내국인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으니 나도 갈피를 잡기 힘들 지경이었다.
“조선 역사박물관이라. 조선 전기 박물관만 해도 한 개 관을 만들고 남을 지경인데 이를 어찌 하면 좋을까. 일단 나와 같이 부대꼈던 사람들이 궁금하니 전기 박물관부터 가자.”
본래 역사의 서빙고역 인근에 있는 조선 전기 박물관이 가장 가까우니 박물관 입구로 들어섰다.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외삼문(外三門)형태의 문을 통과하자 등장한 인물은 예상대로 한명회였다.
도포자락을 흩날리는 동상으로 돌변한 한명회는 오른쪽에 다리보다 거대한 천체관측용 천리경을 잡고 왼손에는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한명회의 동상 앞에 유리 케이스에 들어간 비석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한명회는 청해공(靑海公)이라는 호칭도 받았다.
[위대한 탐험가 한명회, 그는 장성하여 관직에 올라 조선의 영향력을 전 세계로 넓혔다. 그가 항해한 거리는 지구를 열 번 도는 30만km이니 이후에도 이전에도 그를 능가할 항해사는 없으리라.]
생각해 보니 한명회는 아프리카 항로도 개척하고. 이스터 섬도 개척하고 별에 별 일을 다 했으니 청해공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지. 오른편에서 셔터 소리가 계속 들려서 돌아보니 한명회의 기함이 복원되어 있었다.
[1465년 대호군 방길주에 의해 설계된 풍역선은 다양한 개수와 대형화를 거쳐 15세기 바다를 주름잡는 함선이 되었다. 이 함선의 설계는 훗날 서방의 함선의 발전을 불러왔으며 이와 같은 복제품은 전 세계 12개 국가에 있다.]
런던 어딘가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사용했던 골든 하인드호가 복제되어 있다 하는데 그 역할을 한명회의 풍역선이 대신 한 것이다. 본래 역사보다 조금 날렵해진 것 같지만 뭐 어때?
박물관 로비에서 군필자 혜택으로 표를 5원(현대 화폐로 약 9,000원)에 끊었는데 비싼 값을 확실히 하는 박물관이다. 나를 포함한 종친들은 황실 박물관에 전시되었는지 많은 자료가 없지만 위인도 악인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임사홍 이 머저리 놈은 아예 천거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한명회의 양 옆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유자광과 임사홍의 회화가 있었지만 임사홍은 한쪽 구석에서 봉두난발을 한 채 누더기를 입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임사홍이 저지른 행적을 보니 이런 대접을 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임사홍은 아즈텍을 무너트린 이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유자광의 뒤를 이어 1489년 중미(中迷)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아즈텍의 귀금속을 조선으로 보내 공훈을 쌓았던 자이지만. 훗날이 되어 크나큰 실책을 저질렀다.]
[중미 일대의 풍속인 인신공양과 식인을 한 번이라도 저지른 자를 철저히 차별하였으며. 이들의 죗값을 씻는다는 명목으로 금은보화를 요구하였다. 가혹한 착취는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이러한 실책으로 콜롬버스의 아들 디에고 콜론 제독이 주선한 원정대가 나섰고. 개중 젊은 귀족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을 또 다른 압제자라 칭하며 원주민들을 규합하였다.]
“코르테스는 변한 역사에서도 코르테스구만. 그나저나 임사홍이 얼마나 쥐어 짜댔으면 해방자에서 원수로 돌아서나. 내가 부끄러워서 할 말이 없네.”
[임사홍이 물러선 직후 그는 명목상으로 금은보화를 횡령한 죄로 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홍윤성이 노환으로 자리를 비웠으니 민심의 이반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애써 개척한 식민지의 절반을 스페인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결과다. 병력 일천 명도 파병하기 힘든 머나먼 고장에서 멕시코시티 기준 북쪽의 영향력을 확보하였으니. 오히려 맥시코를 틀어막았다가 빠져나올 공간을 찾지 못한 스페인이 대규모 원정을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자 동시기 북방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북방 개척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김시습이었다. 김시습은 멋들어진 갖옷(가죽옷)과 이엄을 착용한 밀랍인형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매월당 김시습은 배재당 출신의 위인이며 조선 전기 최고의 위인 청해공 한명회와 의형제라 불릴 정도로 친한 이였다. 바다를 오간 한명회와 달리 김시습은 혹한의 북방을 누비며 조선의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김시습은 1504년 상왕의 자리에 오른 세조 이홍위의 명을 받아 산간지대의 금석문(金石文)을 연구하라는 명을 받았고. 가장 먼저 나이가 들기 전에 백두산에 오를 것이라 청하고 실종되었다. 설화에 따르면 산신령이 되어 백두산 천지에 머물고 있다 한다.]
“김시습이 실종? 홍위가 말년에 당했구나? 70 먹고도 일 하라 하니까 삐진 게 분명하지.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평소에 친하던 여진족 부락에 가서 은거했겠지.”
물론 내 추측이지 정사는 아니다. 하지만 김시습의 업적 또한 비견할 수 없는 위업이었는지 칭찬 일색이었다. 오죽하면 ‘나머지는 북방 박물관에서’ 라는 말이 가득할까. 결론은 이거다.
[김시습의 업적 또한 한명회와 비견할 수 있다. 말년의 김시습은 북방을 오가며 몽골의 침입 이후 붕괴한 북방 일대의 풍습과 설화를 훈민정음으로 옮겼으며. 이는 현 러시아 왕국 일대에 거주하였던 시베리아 원주민도 포함되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을 빙자한 대규모 학살로 인해 문화와 전통이 파괴되었으나 김시습의 노력으로 이들의 구심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 왕국이 이주한 이후에도 이 전통은 이어졌기에 러시아 왕국은 대한 공화국의 우방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어쩐지, 러시아 왕국이 왜 대한 공화국 체육대회에 매번 끼어드나 했다. 문화와 전통을 복원해 주면서 입신체비도 전파했겠고. 지독한 기후 때문에 인구도 적으니 자체 리그는 열지도 못해서 편입했구먼.”
아마 로마노프 왕가가 적백내전에서 어떠한 변수로 도주에 성공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들이 짓밟았던 시베리아 원주민을 다스리니 대한 제국의 힘이 아니라면 분노한 원주민들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대충 훑어보니 왕족을 제외하면 조선 전기 위인 순위는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1위는 누가 뭐라 해도 한명회. 2위는 김시습과 홍윤성의 공동 수상. 다만 홍윤성은 군사 박물관에 있어서 위업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