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외전 5화 – 친척이 변했어요 >
마당에 나가 주변을 둘러보니 플라스틱으로 만든 지붕 아래에 최소한의 입신체비기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4㎏부터 12㎏ 정도의 소역기(덤벨) 세트와 오래되어 삭아 있는 벤치. 그리고 대역기봉과 공령(플레이트)까지.
“와. 진짜 있었네? 그러고 보니 이 역기봉 내 어린 시절 사진에도 있었던 거 아닌가?”
전문성은 없어도 어느 정도 운동을 하는 집이면 이만큼은 갖추고 있나 보다. 대역기봉에 쌓인 먼지를 걸레로 닦아내니 완화(完和)라는 상표가 보였다. 어디서 들어본 한자어이긴 한데 모르겠지만 삼십 년이나 쓸 수 있는 역기봉이라니.
처음에는 공령을 더 끼워 근육에 자극을 주려 했지만 포기했다. 기왕 전통 입신체비사라 불린다면 휴식월은 충분히 챙겨야지. 그렇다면 봉만 있으면 충분하겠지.
“휴식월이면 근력 운동을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20㎏ 정도면 근력 운동도 아니지 않나.”
“영직이냐. 하루빨리 오다니 네가 웬일인지 모르겠구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외할아버지가 계셨다. 본래 역사에서 암에 걸리시기 전까지 취미로 낚시를 하시던 분인데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낚시에 몰두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셨다.
“다녀오셨습니까. 방금 전에 도착해서 할머니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잘했구나. 힘이 남아돌 것이니 네 이모부를 도와주거라.”
밖에 나서니 작은 이모부가 트렁크를 열고 짐 정리를 하는데 비릿한 냄새가 잔뜩 풍겨온다. 본래 역사에서 운동을 하지 않아 고도비만이었던 이모부는 어느 정도 몸을 관리했는지 제법 날렵한 몸매였다.
“네 할아버지는 낚시의 도사가 다 되셨단다. 요즘 들어 입신체비도 하지 않으니 낚시만 줄곧 하시더라.”
“그래도 기력이 넘치시니 좋네요.”
“좋긴. 오늘도 가게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뒷바라지하러 나왔는데 좋기만 하겠니.”
입신체비 유무를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손에 생겨난 굳은살이다. 짐을 정리하는 이모부의 손바닥에 대역기 특유의 굳은살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입신체비를 최소 오 년은 하지 않았겠지.
집에 돌아오니 붕어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간에 말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싱크대에 붕어를 놓고 손질하는 할아버지가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비켜주시자 할머니가 끼어들어 사이좋게 붕어를 손질하신다.
어릴 적에 몇 번이고 보아온 광경이라 웃음이 나왔는데 할아버지의 오금에 수술 자국이 보인다. 사고라도 크게 당하셨나? 짐을 정리하고 몸을 씻고 나온 이모부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무릎이 많이 편찮으신가요?”
“십오 년 전에 누가에누가이(킬리만자로) 산에 오르다가 상한 무릎이 점점 더 움직이지 않으시니 입신체비도 그만두셨잖니. 인공관절 시술은 무료나 다름없는데 한사코 거부하시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공관절 시술을 거부하신다구요?”
“국가에서 몸이 안 좋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면 무얼 하겠니. 오늘도 이야기를 꺼냈는데 자신이 잘못한 일로 나라의 세금을 갉아먹으면 안 된다고 호통을 치시더구나.”
그러니 68세에 킬리만자로에 오르시다가 무리해서 관절에 손상이 오셨고. 사고 원인이 어떻든 간에 국가에서 인공관절 시술을 무료나 다름없이 해준다는 말인가?
입신체비의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관절염이며 간혹 과도한 운동으로 불구가 되는 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이렇게 쌓인 풍조가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부상 후유증에 대한 책임감으로 돌아오게 된 것일까.
생각해 보면 한양과 춘천의 장애인 설비는 완벽하였고 한국에서는 한참 찾아야 나오는 도우미마저 로비에 대기하고 있었다. 근육의 미친 나라라 해도 불편한 사람에 대한 대우는 완벽한 것이다. 어느새 붕어 손질이 끝났는지 할머니가 돌아오셨다.
“영직아! 오래 기다렸는데 네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으니 서클 피트를 해보지 않으련?”
“네! 염려하지 마세요!”
다시 전용 패드를 잡고 대역기봉도 준비를 마쳤다. 난이도 설정이 없고 삼대운동 수치로 정했는데 이 이유를 순식간에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서클피트는 맨몸운동과 약간의 근력운동이 전부이니 부하 증가를 반복횟수 하나로 통일해 버렸다. 그래서 같은 운동을 10회 하면 쉬운 난이도이고 60회 하면 어려운 난이도이지.
반면 대한 공화국 난이도는 대역기를 전제로 구성된 난이도이다. 대역기봉에 달아놓은 센서가 조금만 틀어져도 경고가 나오며 더군다나 특제 패드의 강도가 월등한 덕분에 정밀한 운동 강도 조절이 가능하다.
[좌우 균형이 틀어졌다! 집중해!]
“내가 할 적에는 사근사근하던 사람이 영직이가 하니 아주 칼같이 말하는구나. 목소리에서 분노가 묻어나오는 것 같은데 녹음하며 고생을 많이 했나 본데?”
“차라리 나은 겁니다. 입신체비장에서 어설프게 하면 저렇게 말하는 체장들도 꽤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센서 감도가 진짜 예민하네요. 힘을 조금만 빼거나 다른 수작을 부려도 바로 알아채요.”
이래야 대한 공화국 난이도라 할만하다. 입신체비장보다 못해도 욕구 충족이 가능할 정도의 운동 강도를 챙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단 말인가. 가볍게 한 시간 정도를 해보니 작은이모와 사촌 동생이 돌아왔다.
“아이고 영직이 왔구나? 하루 일찍 오다니 웬일이니.”
“휴식월이라서 할머니를 뵙고 싶었거든요.”
작은이모와 사촌 동생의 말이 조금 이상했지만 오래간만에 보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 역사의 ‘나’는 생각보다 심각한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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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되고 아침부터 친척들이 찾아왔는데 반응이 요상하다. 날 보면 하나같이 이렇게 물어보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걱정될 지경이다.
“영직이? 오늘 점심에 식사하기로 했는데 어제부터 있었다고? 혹시 병이라도 생겼니?”
“형? 나는 형이 이럴 줄은 몰랐는데? 형이 근육보다 중요한 게 있었어?”
“우리 영직이가 나이가 많아서 철이 들었구나.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이제 결혼만 남은 것 같구나.”
친척들 반응이 한결같다. 오늘은 운동을 안 하냐? 혹시나 근손실이라고 뛰쳐나가면 절대 안 된다. 휴식월이라고 운동을 빼먹다니 참 대단하다. 이 역사의 ‘나’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단 말인가.
과격할 정도로 입신체비에 미쳐있는 사람. 원래 역사에서 속칭 ‘헬창’이라 불리는 자들을 보는 시선이다. 교통체증으로 막히는 우리 가족을 제외하면 둘째 외삼촌이 오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전화를 거는 작은이모를 말리며 말했다.
“하르빈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하더구나. 요즘 시기가 시기이니 어쩔 수 없어서 오지 말라 했다. 대신 내년에는 꼭 오겠다고 했으니 염려 말거라.”
공장을 운영하시던 둘째 외삼촌이 하르빈(현 하얼빈) 사람이 되다니. 역사가 변하면서 친척들도 제법 먼 고장까지 나가서 일하는 것 같다. 친척들이 거의 다 모이자 확실히 역사가 달라지고 살기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는 증거로 새로운 조카들이 많이 생겨났다.
예전에 내 아래 항렬 조카들은 세 명에 불과했다. 결혼한 사촌들이 있어도 아이 낳기를 꺼려 했고. 덕분에 내 나이가 서른여덟인데도 결혼하지 않아서 타박받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삼촌! 삼촌 이두박근 보여줘!”
“오냐! 자 여기 이두박근!”
“삼촌! 나 높이높이 해줘!”
높이높이가 뭔지도 모르겠고 어린 애들이 왜 내 이두박근에 관심을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 일곱이나 되는 조카들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데 반가운 지원군이 왔다. 우리 가족이 도착한 것이다.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여동생이다. 여동생은 평소부터 기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애완돼지를 품에 안고 들어왔는데 놀랍게도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이다. 까맣고 약간 주름살이 있는 품종인데 익숙하다?
“안녕하세요! 오빠도 있었네? 입신체비 하느라 만사 다 제치던 사람이 웬일이야?”
“내가 그동안 너무 입신체비만 하면서 살아온 것 같아서 사람답게 살려 한다. 그런데 그거 애완돼지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조선시대의 돼지니?”
“와. 사학과라고 자랑하는 거 봐? 이거 무슨 돼지인지 알아? 조선 혈통을 그대로 보존한 갑산(甲山) 돼지야. 삼수갑산에서 발견되고 이십 년 만에 애완용으로 출시했다고.”
조카들의 주목을 받게 된 돼지는 겁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 다녔고. 조카들은 너무 작고 귀여운 –원래 역사의 애완돼지보다 작다– 조선 혈통을 보전한 녀석을 쫓아다녔다. 잠시 소란이 벌어졌는데 부모님도 들어오셨다.
“영직이가 먼저 왔었구나. 그래 몸은 좀 어떠니?”
“부모님이 잘 낳아주신 덕분에 언제나 튼튼합니다.”
부모님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체격이 조금 더 좋아지고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더 밝아진 것이 전부이지만 동생은 제법 변했다. 원래 안여멸 –안경 여드름 멸치– 의 표본이었는데 지금은 정어리쯤 되겠네.
아직 점심시간이 안 되었으니 친척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경제와 결혼인데 사람이 북적거리니 이래야 좀 친척 같지. 완전히 모인 친척들을 둘러보니 체격이 좋은 사람도 있고 평범한 사람도 있다.
현대에 들어서며 입신체비가 강제가 아니고 권고가 되면서 알아서 취사선택을 한 것이 분명하다. 삼대운동 평균 300이 붕괴되었다고 하는데 내 친척들 중에 나를 제외하면 평균이 260 정도 나올 것이다.
체중 75㎏을 기준으로 입신체비 입문자의 3대 운동은 170 정도이고. 일 년 이상 꾸준히 하면 300, 삼 년 이상 하면 360 정도는 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성인 남자의 절반은 입신체비의 기본만 아는 수준이다. 물론 입신체비를 아예 모른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번에 용원(龍原)도 정호열 상원의원 말인데. 얼마 전에 과로로 병원에 입원했어. 그 양반이 밀어준 덕분에 사업 좀 펴나 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러니까 삼대운동 삼백 이하는 의원으로 뽑지 말았어야 한다니까. 하루 12시간 근무가 기본이라 사백 찍는 양반들도 피골이 상접해서 죽어나가는 자리가 상원의원인데.”
“정치하는 사람은 삼대운동 사백 아래는 죽은 사람으로 봐라. 역시 장인어른 말씀을 새겨둘걸. 정치는 몸부터 만들어야 할 수 있다니까.”
뭔가 기묘한 기준이지만 하루 12시간 근무라 하니 조선시대에 줄줄이 갈려 나가던 신료들을 보는 것 같다. 세종대왕님과 형님에게 혹사당한 대신들의 수명을 보장한 것이 입신체비였으니 대한 공화국까지 이어지는 기묘한 풍습이 남았나 보다.
TV 앞에는 사촌 여동생들이 모여 앉아 영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본래 역사에서 야성미 넘치는 배우였던 마철석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꽃다발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번 영화 [근육학개론] 봤어? 로맨스 근육물의 새 지표를 열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진짜야? 연기파 배우 마철석이 순수 로맨스가 아닌 로맨스 근육을 시도했다고?”
“그렇다니까? 근육물인 척 근육물이 아니고 로맨스 요소를 살린 영화야. 밸런스가 아주 잘 맞아.”
근육물은 무엇이고 로맨스 근육은 무엇이고 순수 로맨스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상한 분류체계였지만 슬슬 배가 고파오는지 친척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결국 외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셔서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 영직이가 새사람이 된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너를 길렀지만 갑자기 사람이 여유가 생기고 더욱 어른스러워졌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니?”
“아 별······ 것은 없고 그냥 자신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자신이라? 자신이라 하면 혹시 삼대운동이 늘어난 것이니.”
“이틀 전에 수양근(삼대운동 768㎏)을 돌파했습니다.”
친척들 사이에서 탄성이 들리고 시선이 집중되었다. 내 체격으로 수양근을 돌파하려면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데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하지만 아버지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했다.
“입신체비가 일상인 사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입신체비사의 길에 들어서서 모병제인 이 나라에서 2년 6개월간 군대에 다니고, 거기서도 부족함을 느껴서 식이영양부 대학원도 나오고. 이제 수양근에 성공하다니!”
“원하는 것을 다 이뤘으니 이제 결혼만 하면 되겠구나!”
“여보! 그렇게 말하시면 어떻게 해요!”
무안해진 외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하고 정적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은 정말 입신체비에 미친 입신체비를 위한 인생이 되어버렸다.
원래 역사에서는 바쁘지만 가능할 것 같았던 인생이 변한 역사에서는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인생으로 변했다. 원래 역사 기준이라면 법대 졸업하고 의대 졸업한 수준인가? 할머니는 내 손을 매만지시더니만 나긋나긋하게 말하셨다.
“이 할머니 생일선물을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했구나. 그러니 점심을 뭘 먹을지 네가 정해보거라.”
“닭갈비요. 오래간만에 닭갈비를 먹고 싶습니다.”
무심코 말했는데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닭갈비가 춘천의 토속음식이 된 이유는 춘천에 있던 미군 부대에 다리와 가슴살을 납품하고 남은 부위를 모아 구워 먹은 것이 시초이다.
미군 부대도 없고 역사도 바뀐 춘천이니 닭갈비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친척들은 손뼉을 치며 내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아니, 오히려 환영하는 눈치이고 할머니도 활짝 웃으면서 역으로 물어보셨다.
“아무렴, 그렇다면 겸암(謙唵)식이니? 아니면 교산(蛟山)식이니?”
“사소한 일은 할머니가 정하셔야죠.”
“그렇다면 닭갈비의 원조 중의 원조인 겸암 닭갈비를 잘하는 곳으로 가자꾸나. 기왕 배 속에 기름칠을 하는 날이니 두꺼운 철판에 볶은 닭갈비가 좋겠지.”
한숨을 돌렸는데 교산(蛟山)이라는 호를 가진 역사적 인물은 허균 한 명만 알고 있는데 다들 아는 눈치다. 겸암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의 뒤를 이어 미식가로 이름난 허균이 닭갈비의 다른 방식을 창안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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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중심부가 아니고 외곽에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은 역사가 1592년, 원래 역사에서 임진왜란이 한창일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400년 전통의 닭갈비라 하였는데 뭔가 이상하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
인도산 닭을 들여온 이후 양반들이 먹은 닭가슴살과 닭다리를 제외한 부위가 남아서 새로운 방법을 창안해야 했으며. 강렬한 향과 매운맛의 고추를 이용하여 요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불판 위에 닭갈비가 볶아지고 큰삼촌이 할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 한 말씀 하시죠!”
“이제 내년이면 여든인데 더 지내보았자 무얼 하겠느냐. 그저 효령대군처럼 백팔 년을 사는 일이 아니고 모자라게 아흔아홉까지 살면 좋겠구나.”
효령대군이 백팔 년을 살았다고? 구십 좀 넘게 살았는데 야사로 수명이 늘어난 것 아니야? 하지만 사람들이 껄껄 웃으며 소주잔을 돌렸기에 분위기에 취해 한 잔을 들이켰다.
희석식 소주의 알코올 맛을 즐기며 고기를 먹고, 사리를 빨아들이다 보니 주변 테이블 사람들이 다른 음식을 시켰다. 저건 치즈인가? 메뉴판을 보니 신기한 녀석이 있어서 하나 시켜보았다.
“여기 유락감자 불판마다 하나씩 주세요.”
“어릴 적에 네가 즐기던 음식인데 나도 먹고 싶었단다. 이 할미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유락감자의 정체는 현대에서 말하는 치즈감자다. 감자를 으깨고 치즈와 버터를 잔뜩 넣어 만든 요리인데 이걸 닭갈비에 곁들어 먹고 있었다. 아마 닭갈비와 같은 시기에 생긴 요리이리라. 그런데 동생이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형 평소에 닭갈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러니 이상하네.”
“이 형이 깨달음을 얻었다. 진양근에서 허덕이다가 갑자기 수양근으로 올린 다음 삶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아. 까짓것 유산소를 더 하면 충분하지.”
가장 부족한 입신체비를 완성했는데 더 이상 문제가 있단 말인가? 변한 역사를 즐기며 살면 충분한 일이니까. 멍하니 내 눈치를 보는 동생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요즘 재미있는 일 있었냐? 일은 어떻게 되어가?”
“일본 회사랑 일하니까 죽을 맛이지. 여기서 할 이야기도 아니니까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죽을 맛이라. 그러고 보니 너 요즘 몸이 비쩍 마른 것 같다?”
농담 삼아 한 소리인데 진담으로 알아들었는지 동생의 표정이 굉장히 심각하게 변한다. 원래 역사를 생각하면 동생은 충분히 건강하고 튼튼한 몸이니까 돌아가서 적당히 칭찬해줘야지.
다들 배가 불러서 조용히 차나 커피를 마시며 속을 꺼트리고 있는데 올해 스물아홉인 사촌 여동생이 우물쭈물하다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에게는 미리 말해뒀지만 할머니에게도 말씀드릴게요. 저 사귀는 사람이 있고 곧 결혼할 예정이에요.”
“이미 알고 있다. 내년 중순에 결혼한다 했는데 대체 누구기에 이렇게 숨기고 있니?”
“대명국 친왕이요.”
사촌 여동생의 폭탄 같은 선언에 친척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조용해졌다. 대명국 친왕? 명나라 황실이 유명무실하다 해도 일반인과 황족이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