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외전 4화 – 전통 입신체비사 >
본래 춘천 명동이었을 생소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배가 고파왔다. 어제야 길거리에서 왜면(倭麪)으로 불리는 기름도 없으며 고명으로 닭가슴살이 올라간 라면과 돌솥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춘천에 오니 패스트푸드가 먹고 싶었다.
근처에 있는 엄마의 손길에서 가슴살버거세트를 시켰는데 석쇠에 구운 닭가슴살을 패티 대용으로 쓰고, 감자튀김도 오븐에 구운 웨지감자가 나왔으며 콜라가 아닌 그놈의 기갈수라는 이온음료 비슷한 녀석을 내놓았다.
이래놓고 가격은 2원 20전, 본래 역사에서 4,000원 정도이니 식료품 가격이 월등히 싼 것이 확실하다. 삼강평원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곡식을 생산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서 커피를 즐기며 중국의 역사서를 다시 읽었다.
현대 지도의 중국은 세 개로 나뉘어 있었지만 1700년 기준으로 남북조의 형태였다. 근대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는데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은 정말 막 나가는 국가가 되었다.
[춘천으로 피난한 명나라 조정은 조선을 천자(天子)를 대행하는 황제국의 한 단계 아래인 대군주(大君主)로 정했다. 조선은 준 황제국으로 동아시아 질서에서 벗어나 세계로 뻗어 나갈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15세기 중엽, 몽골 내전에서 패배한 오이라트는 머나먼 서쪽으로 도주하였고. 다시 세력을 불려 18세기 말 투르키스탄(현 신장 자치구) 일대를 점령하기고 세력을 넓혔다.]
“에센이 머나먼 서쪽으로 도망쳤다 하는데 결국 돌아왔군. 준가르라면 청나라도 쉽사리 상대하기 힘든 놈들인데 초반의 확장을 어떻게 견제했지?”
유목국가는 초반 기세가 오르면 감당하기 힘들지만, 안정적인 구도에 돌입하면 내분이 시작되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한 준가르의 상대인 순과 제는 바보들만 모인 나라가 아니었다.
[순은 화친을 제안하였다. 만에 하나 준가르의 기세를 막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 조선에게 공격당할 일을 염려한 것이다. 준가르를 카간(대칸)이 통치하는 대준(大準)으로 칭하며 제국의 자리에 올라 동맹을 맺길 권하였다.]
[준가르 또한 15세기부터 쌓인 원한을 갚으려 하였다. 하지만 세 개의 제국이 연합해도 조선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으며 몇 번의 무력 도발은 처절한 응징으로 돌아왔다.]
“통일된 중원의 개념이 진나라 시절부터 이뤄졌는데 단지 조선의 공격이 두려워서 이백 년 가까이 전쟁을 참다니. 그렇다면 중화사상이 박살 나버리고도 남을 시간 아니야?”
중화사상, 실상은 진나라부터 오랫동안 이어지고 현대까지 이어진 끈질긴 사상이자 지독히 배타적인 민족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변한 역사에서 중화사상의 맥이 끊어져 버렸다.
200년 이상 한족 국가가 남북조를 이루었지만 통일은 뒷전이었다. 옛 번국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자신들을 쥐 잡듯 두들겨 패며 중화사상의 굴레 밖인 세계로 뻗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명백한 이민족인 준가르를 복속시키거나 흡수시키지 않고 제국으로 칭하기에 이르렀으니 중화사상은 옛 이론에 불과하겠지.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근찰 단속반은 또 누구야. 번호가 저장되어 있으면 아는 사람인데?”
저장된 번호에는 근찰 단속반이라는 경찰에게 어울릴 것 같은 삼엄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근찰은 근육경찰 같은데 단속반은 또 뭐란 말인가. 잔뜩 긴장해서 전화를 받았다.
“입신체비사 최영직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 체장님, 체육부 산하 입신체비청 입신체비사 관리국의 이수연이라 합니다.
입신체비‘청’은 무엇이고 입신체비사 관리국은 또 뭐란 말인가. 분명 부 – 청 – 국 순서로 하위조직이 구성되는데 입신체비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부서인가?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을 듣고 할 말이 없었다.
- 체장님은 전통 입신체비사로 등록하신 분이니 시행령에 따라 전통 입신체비사 약물 오남용 검사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지금 거주지에 계십니까?
약물 오남용 검사는 뭐고 전통 입신체비사? 갑자기 쏟아지는 정보로 혼란이 왔지만 번호를 저장한 사람이니 믿어도 되겠지. 익숙하지 않은 지명이라 헷갈렸지만 대답할 수 있었다.
“춘천에 내려와 있습니다. 성세전에 있는 카페에서 잠시 책을 읽는 중이지요.”
- 30분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춘천 보건소에서 공무원을 파견할 예정입니다. 평소와 같이 간단한 혈액채취가 있는데 급한 일이 있으신가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혹시 검사에서 도망치면 근찰들이 저를 잡아갈 예정입니까?”
- 근찰이라니요! 입신체비청 소속 공무원입니다!
근찰 단속반이 입신체비청 소속 공무원이란다. 전화가 끊기고 웹브라우저에 검색어를 입력했다. 난데없이 쏟아진 정보를 당장 알아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근찰 : 근육경찰의 축약어. 체육부 산하 입신체비청 소속 공무원에 대한 속어이며 이들 가운데 현장 근무자는 휴식월에 들어간 입신체비사 대행과 전통 입신체비사의 약물 사용에 대한 검사를 보조하며 속어로 외근 근찰이라 부른다.]
“진짜 근육을 위해 일하는 경찰이라고? 그럼 전통 입신체비사는? 차이점이 뭔데?”
[전통 입신체비사 : 입신체비사 가운데 성장 호르몬 혹은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을 사용하지 않기로 서약한 이들. 전통 입신체비사는 부정기적으로 연간 6회 약물 검사를 받는다.]
[입신체비사의 약물 허용 : 전통 입신체비사는 질병을 제외한 사유로 보조약물 사용 적발 시 일반 입신체비사로 전환. 일반 입신체비사는 지정된 종합병원에서 진단서를 첨부한 처방을 통해 의료 전문가의 입회하에 입신체비 보조약물의 사용이 가능하다.]
[약물 남용 징계 : 종합병원의 처방이 없이 무단으로 개인이 입신체비 보조약물을 남용할 경우 2년 이상의 징역 및 입신체비 관련 기관 종사자의 경우 남용 기간 동안 지급된 급여의 세 배에 해당되는 과징금을 부과한다.]
2년 이상의 징역? 일단 2년부터 박고 그 이상 마음대로 늘리겠다는 소리인데 내 기억으로는 위조지폐 제작과 동일한 범죄행위다. 또한 검사도 가혹한데 연 6회 무작위 검사면 전통 입신체비사는 검사로 인한 근손실을 걱정하리라.
“입신체비사가 전국에 몇 명이나 되는데 부도 아니고 청(廳)이 도핑 검사를 주도하냐고! 아니다? 가능한가? 몇몇 프로경기는 이런 대접을 받긴 하니 가능은 하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코리안 특급이라 불린 투수의 경우도 전수 및 불시조사 원칙을 철저히 지켜 해외 휴가 도중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보낸 직원이 도핑 검사용 혈액 샘플을 채취했으니까.
입신체비는 연봉 수십억이 기본이요, 조 단위의 돈이 오가는 메이저리그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으며, 대한 공화국의 국기(國技)나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카페 밖에서 잠시 기다리니 삼대 500은 치고도 남을 건장한 남성이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반갑게 맞이하였다.
“최 체장님, 춘천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으시는 것은 처음이지요? 여기서 검사용 시료를 채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으시겠습니까?”
“휴식월이니 직접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검사결과를 알려면 몇 시간이나 걸립니까?”
“춘천부 보건소가 약식검사만 가능하지만 서울과 마찬가지로 한 시간이면 약식 결과가 나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의료 기술도 원래 역사보다 발달한 것이 분명하다. 올림픽 선수단 도핑 검사가 48시간이 걸리는데 여기서는 한 시간이면 약식 검사가 끝나다니. 원래 역사에서 결벽증에 가까운 내추럴 보디빌더였는데 변한 역사의 나도 마찬가지이니 당당하게 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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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떨어진 보건소에 도착하니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직원들이 달려 나왔으며 무언가 집어 던지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보건소 입구로 다가가니 나와 같이 상투를 틀어도 될 꽁지머리를 한 50대 정도의 남성이 주차장에서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한 덩치 하는 사람 여럿이 사방으로 휘둘리는데, 이어지는 대화가 가관이었다.
“나는 약물 안 했다고! 젊을 적부터 입신체비에 맛 들여서 이십 년 동안 전통을 지켰는데 내가 약물을 사용했다고? 피 다시 뽑아가!”
“윤 체장님 잠시 진정하세요! 수도권에서 스테로이드 테러가 발생했는데 춘천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만간 역학 조사와 입신체비장 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니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스테로이드 테러는 뭐고!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이지만 충분히 알려진 일이었는지 중년의 입신체비사는 몸의 힘을 풀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나치게 흥분해서 행패를 부렸는데 상황을 알게 되니 부끄러움이 몰려왔나 보다.
“그럴······ 수도 있겠어. 행패를 부린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되었는데 자네들은 괜찮나?”
“저희야 전통 입신체비사가 아니고 허가 하에 약물을 투여하는 일반 입신체비사여서요. 다들 진양근(삼대운동 640㎏)은 할 줄 아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역시 약물의 힘은 대단하다니까. 혹여나 아메리카에 있는 멍청이들처럼 처방전도 없이 약물을 쓸 생각은 하지도 말게. 여하튼 미안하게 되었어.”
방금 전까지 괴력을 발휘하며 거구의 근찰을 휘둘러대던 입신체비사는 한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다른 곳으로 인솔되었다. 수도권에서 테러가 발생했다고? 생각해 보니 테러 맞네?
내추럴, 아니, 전통 입신체비사에게 몰래 스테로이드를 먹이고,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 검사를 받으면 운이 좋아도 2년의 징역과 최소 두 달 분량의 월급이 날아간다. 떨리는 마음으로 검사실에 들어가니 남직원이 창백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윤 체장님도 마음씨가 좋은 분인데 갑자기 봉변을 당하시는 바람에요.”
“이런 일이 춘천에서 일어난 것은 처음입니까?”
“간혹 전통 입신체비사 분들이 약물에 손대는 일은 있었지만 형을 감면받기 위해 순순히 자백하셨죠. 하지만 이번 사건이 스테로이드 테러라면 아마 강원도 최초가 될 것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회원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몰래 먹이는 일이 있었다. 변한 역사에서는 전통 입신체비사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금지 약물인 스테로이드를 몰래 먹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팔을 내밀고 피를 채취하게 힘을 풀고 있는데 직원도 부담감을 느꼈는지 손을 덜덜 떨면서 주사로 피를 잔뜩 뽑아 네 개로 나누고 시료 중 하나를 기계로 가져갔다.
“한 시간 뒤에 결과가 나오니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본래 입신체비장을 사용하셔도 좋지만 휴식일이니 보행기를 포함한 유산소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패도(플랭크) 자세로 책을 읽어도 입신체비는 아니지요? 기분이 울적해서 근손실이 일어날 것 같은데 휴식월에는 근력운동 중단이지 심부근육(코어 머슬)은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직원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내 얼굴을 쳐다보다 고민에 빠지더니. 잠시 뒤 근찰을 데려다 심각한 대화가 오가고 결론이 나왔다. 해도 된다 하니 칼 같은 패도 자세를 유지하며 책장을 넘겼다.
무신천명대전(戊申天命大戰)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웃음이 나왔지만 실로 거대한 전쟁이었다. 중국 대륙의 3개 국가에 맞서 대한제국과 근대화를 완수한 일본 제국 그리고 대한제국의 연방이 참전한 전쟁이다.
[무신천명대전은 1909년 순이 중심인 중화연맹과 대한제국이 중심인 태평양 연맹이 벌인 최초이자 최후의 전쟁이었다. 이는 당시 세계 인구 19억 가운데 8억이 참전한 전무후무한 대전이며 전쟁은 대한제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대한제국과 태평양 연맹은 어엿한 승전국이었지만 4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기에 이르렀으며. 막대한 배상금과 항구의 할양 가운데 지켜진 일은 3개 항구의 할양이 전부였다.]
“4년 동안 소모전을 치르면서 승전국도 엉망이 되었겠지. 하지만 배상금이 대한제국 금화인 문(文) 기준으로 2천억 문? 순금 7만 톤이네? 이걸 중국이 지불할 방법이 있어? 기껏해야 일 할이나 지불했을까?”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하여 전 세계 열강이 모조리 참여한 협약이지만 반항할 방법도 없었다. 4년간의 항쟁 끝에 해안 일대와 각지의 주요 도시가 초토화 당했으며 중화연맹의 핵심부인 개봉까지 함락당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산업기반이 대부분 붕괴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한 중화연맹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의 임시 대총통인 쑨원이 과로사 당할 지경이었으면 말 다 했다.
[비교적 적은 채무를 부담한 준(準)은 자신의 채무의 2할을 변제하고 채무 이행 불능 선언을 하였으며 대한제국도 이를 수락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2개국은 변제는커녕 국가 파산을 선언할 방법조차 없었다.]
[양국의 황실은 몰락하여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으나 난립한 군벌 가운데 급진파가 두각을 드러냈다. 1928년 군벌 풍옥상(馮玉祥 - 펑위샹)에 의해 개봉(현 하남성 개봉) 인근에 은거하던 순나라 황실이 몰살당하였다.]
봉천군벌도 없고 장개석도 남부에 있으니 이놈이 중국 북부의 정권을 거머쥐었겠지. 반면 남부의 상황은 더욱 개판이었다. 이념 대립의 시기답게 이념 차이로 제나라가 두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제나라의 왕족들은 프랑스에 단체 망명을 신청하여 이주하였고. 군벌만이 남은 제의 호남성(湖南省)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했다. 이에 맞서 동쪽 절강성에서 국민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장개석(장제스)은 중화민국 총리로. 모택동(마오쩌둥)은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주석으로 자리를 찾았는데 주은래(저우언라이)는 왜 따로 놀아? 뭐? 중화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통령? 군사독재국가가 무슨 대통령이야!”
중국은 세 갈래도 아니며 원래 역사 기준 일곱 갈래로 갈라져 버렸다. 내몽골 자치구는 몽골에 흡수.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투르키스탄으로, 티베트 자치구는 티베트로 유지되었으며 요동과 만주는 대한 공화국의 차지가 되었다.
현재 남은 국가도 북부의 군사 독재국가인 중화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서부의 공산주의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마지막으로 남동부의 중화민국이니 정말 일곱 갈래가 맞다.
내가 만든 효과가 이렇게 돌아오다니. 현재의 중국보다 백배 나은 것 같으니 아쉬운 마음은 없고 인류의 해악을 줄인 것 같다. 기쁜 마음으로 플랭크를 풀고 스트레칭을 하는데 검사결과가 나왔다.
“모두 음성입니다. 자세한 일은 서울에 있는 본원에서 검사해야겠지만 검사결과가 뒤집힐 확률은 거의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저도 몸 좀 닦고 돌아가 보겠으니 계속 수고하십시오.”
새 입신체비장이건 과거의 입신체비장이건 스테로이드 테러를 저지르는 놈도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 몸을 가볍게 씻고 멀리 보이는 봉의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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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길을 찾느라 오랜 시간을 보냈다. 도시 구조가 변하고 지표로 삼는 것은 휴대전화의 지도 어플과 봉의산이라니. 가까스로 강에 닿았는데 여기가 공지천인가? 공지천은 맞네.
“공지천 흐름도 변했네. 의암댐 수위가 조금 더 내려간 것 같은데 내 고향이라 할 수 있나. 그나저나 주소가 여기 맞아? 오히려 정비가 잘 되니 찾기 힘들어졌어.”
본래 역사에서 외가는 낡은 연립주택이며 외할머니 혼자 생활하고 계셨다. 외할아버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암으로 환갑을 조금 넘기고 돌아가셨으며 외할머니는 몸이 쇠약해지셔서 많이 고생하고 계셨다.
하지만 역사가 변하며 외가도 많이 변했다. 주소를 찾아가니 연립주택은 아니고 최소한 백오십 평은 되는 넓은 부지가 있는 이 층 단독주택이었다.
문패에 적힌 이수길 석자는 외할아버지의 성함이다. 역사가 변하며 돌아가신 분도 살아났으니 그리운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벨을 눌렀다.
“계십니까? 손자 영직이 왔습니다!”
- 할머니, 외삼촌 왔어! 삼촌 들어와!
본래 당숙과 종숙을 칼같이 나누어 불러야 하는데 유교 문화가 소실되었는지 현대와 비슷하게 그냥 삼촌과 이모로 통일한 것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문 앞에서 낑낑거리는데 어린아이가 문을 열어줬다.
나이는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아마 작은이모네 큰아들이겠지. 녀석은 방금 전까지 뭘 했는지 몰라도 흥분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어줬다.
“삼촌. 비번 잊어먹었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 많아서 그래. 할아버지는 계시니?”
“낚시 가셔서 오늘 돌아오신대. 할머니랑 게임하고 있는데 빨리 들어와!”
연세가 일흔아홉이나 되시는 분이 게임은 무슨 게임이야. 본래 역사에서는 허리도 심하게 휘시고 기력도 쇠하신 분이었는데? 하지만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은 상상을 넘어섰다.
- 볶음 가드! 다음은 만세 공좌!(스쿼트) 입신체비의 규칙대로 몸을 잘 움직여줘!
외할머니가 하는 게임은 서클 피트다. 어느 정도 헬스를 해 본 사람은 심심풀이로 적당한 운동이고 나도 해 봤었다. 어디까지나 운동 중간에 몸을 식히지 않는 용도로 해 봤다.
하지만 여든에 가까운 외할머니가 즐긴다고? 한참 동안 동작을 따라 하시던 외할머니는 고개를 돌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전용 패드를 떨어트리고 달려오셨다.
“세상에 영직이 왔니? 이 할미가 서클 피트에 너무 빠져있어서 손자 오는 줄도 몰랐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할머니 이······ 이 게임을 자주 하셨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난이도를 아주 낮게 했지만 하루에 삼십 분 정도는 즐길 수 있단다. 그런데 뭔가 많이 변했구나. 나이가 많이 먹은 것 같네? 내 생일은 내일인데 하루 일찍 웬일이니.”
“어제부로 휴식월에 들어가서 할머니를 뵙고 싶었습니다. 작년 생신에 오지 않았으니 입신체비를 하는 사람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어서요.”
할머니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어미가 ‘요’로 바뀌네. 어린 시절부터 키워주신 분이라 편한 것도 있지만 할머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이 역사에서도 이렇게 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내 모습을 보더니 손뼉을 치면서 몸을 돌리셨다.
“내 정신 좀 봐라. 너와 같이 서클 피트를 하고 싶어서 준비한 물건이 있단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는데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단다.”
입신체비사와 함께 서클 피트라? 한 시간이던 두 시간이던 휴식이나 마찬가지인데 의미가 있나? 하지만 외할머니는 지옥과 같이 검붉은 색의 전용 패드를 들고 오셨다.
“연천당(蓮天堂 - 렌텐도)에서 대한 공화국을 위해 특별 제작한 서클 피트 기구를 사두었단다. 이 할미는 네 훌륭한 모습을 보고 싶구나.”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런데 이거! 어이고 제법!”
“튼튼하지? 서클 피트가 너무 쉬운 운동이라 적합한 수준으로 난이도를 올렸다 하더구나.”
세상이 변하고 건강해지셨어도 외할머니는 외할머니였다. 언제나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모습에 특제 패드를 구부려 보았지만 내 힘으로도 저항이 강했다. 게임을 켜고 ‘대한 공화국 전용’이라는 항목을 눌렀는데 경고문이 나왔다.
<3대 400 이상이십니까?>
400 정도는 근지구력과 데피니션 향상을 위해 30회 돌리는 무게다! 당연히 예를 눌렀는데 경고문이 다시 나왔다.
<대한 공화국 난이도를 위해 자주 사용하는 대역기봉 양단에 별도의 센서를 연결하십시오.>
너무나 완벽하다! 나와 같은 입신체비사를 위해 제대로 된 운동으로 변신한 것이다! 감동받아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는데 할머니의 말이 들렸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대역기도 필요한데 깜빡했구나. 마당에 가서 가져오지 않으련?”
넓은 마당에 대역기가 있어? 한겨울에 대체 누가 입신체비를 한다고 대역기를 두고 있어! 할아버지가 하시나? 아니면 매형이? 혹시 이모부가?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