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외전 3화 – 대명국 강원성 춘천부 >
지도 어플을 켜고 확인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강원도 홍천군은 여전히 강원도 홍천군이 아니고 홍천‘시’로 승격하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춘천시 외곽에 좌표를 옮기니 더욱 충격적인 내용이 나왔다.
[대한 공화국 강원도 춘성군]
“춘성(春城)군은 통폐합되었잖아! 그런데 왜 춘천시 알맹이에 해당되는 영역만 대명국 강원성 춘천부냐고. 아니 진정하자 일단 명나라의 역사! 역사를 보자! 내 전완근도 궁금해하더라고!”
팔 근육이 전완근이니 당연히 전완근이 궁금해해야지! 들어오는 길에 바로 중국 역사책을 사서 잠들기 전까지 명나라의 멸망 항목을 읽었다. 그리고 본래 역사와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몰락한 명나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명나라의 국운을 무너뜨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이 만들어 낸 요동의 혼란상에서 시작된다. 15세기 후반부터 명나라 정부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요동 일대는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주변 국가로의 침략을 결행하였다.]
[삼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이들이 눈을 돌린 것은 상대하기 힘든 조선도 아니고, 약탈하기 힘든 북원도 아니었다. 나라의 이름을 대연(大燕)이라 칭하였으며 명을 향한 침략을 시작하였다.]
형님과 홍위가 예상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이들이 어떻게 국가를 형성하였는지는 미지수이지만 이 책에서 그렇게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여송이 살해당한 일은 기록되었는데 이놈은 죽어도 싸다.
[이미 명나라의 위소제와 이갑제는 붕괴하였으며. 당대의 황제는 고려천자라 불리는 만력제였다. 고려천자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조선 출신의 호위병을 신뢰하였지만 국정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호위병들의 진언도 듣지 않았다.]
조선 출신 호위병이면 훈영제식과 전쟁경험으로 다져진 인간흉기들이겠지. 당연히 만력제에게 살 빼고 운동하라고 진언하였을 것이 분명하지만 만력제는 조언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무한한 신뢰를 보낸 것 같다.
[전쟁이 시작되고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산해관이 붕괴되었으며. 명나라의 방어체계는 파죽지세로 무너지고 북경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국 조선은 원병을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였지만 명나라는 붕괴의 서막을 올렸다.]
“대연이라, 오호 십육국 시대의 전연(燕)과 후연이 요동과 북경 일대에서 발흥한 것을 계승했다는 말이겠군. 그래 봤자 요동의 도적 떼가 결집한 세력에 불과한데 산해관을 뚫어?”
본래 역사의 산해관은 후금의 정예병과 누르하치의 맹공을 몇 년이고 버텨낸 관문이다. 어중간한 화력으로는 이빨도 박히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뚫었단 말인가?
하지만 미시적이고 상세한 전쟁에 대해서 600페이지에 불과한 서적이 담아낼 물건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이 책에서는 언급하기를 꺼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건 넘어가자.
[대연의 패잔병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다음 사방을 떠돌며 명나라 일대의 도적에 합류하여 세를 불려 나갔다. 이후 30년이 지나자 명나라에서 제대로 된 체계가 갖춰진 고장은 남경 일대에 불과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새 황제인 천계제는 이러한 난국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황제였던 그는 다른 일을 넘어서서 조선의 발달한 건축 기술을 능가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그에게는 군사적 책무와 변란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조선의 탁월한 건축 기술을 뛰어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으며, 서애 유성룡이 설계한 만천서원(滿天書院)을 능가하는 건물을 만들고자 하였다.]
유성룡이 건축에도 조예가 있었나? 역사가 변했으니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능력이 부족하지 않은 위인이니 세계로 뻗어 나간 조선이 경험하고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빼어난 건물을 세웠을지도 모르지.
역사서에 기록될 건물이면 성원이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녀석도 나처럼 예전과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까. 지금 막 아침을 맞이했을 성원이에게 문자 하나를 남겼다.
- 지금 일어났냐? 만천서원이 뭐인지 전문가답게 상세히 이야기해 줘라. 갑자기 궁금하네.
문자를 다 보내놓고 책을 돌아봤는데 역사에서도 등장한 인물이 나왔다. 명나라 말기의 민란 지도자 두 명이 나란히 등장하였지만 이들의 행적은 본래 역사와 비슷하였지만 결과가 완전히 달랐다.
[1637년 섬서성(陝西省) 일대의 민란 주도자인 이자성은 서안을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국호를 순(順)이라 칭하였으며 중국 북부 일대를 휩쓸며 1642년 숭정제를 살해하고 북경을 함락하기에 이른다.]
[사천성(泗川省) 또 다른 국가가 생겨 명의 숨통을 조여 왔다. 장헌충은 사천성 일대에서 민란을 주도하여 낙양과 숙주(宿州 - 쑤저우)를 함락시키며 서(西)국이라 칭하였고, 훗날의 제(齊)나라가 건국되기에 이른다.]
본래 역사에서 이자성과 장헌충은 오삼계와 연합한 청나라에 의해 박살 나 버린다. 하지만 이 역사에서 청나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은 대륙이 세 조각으로 나뉘게 되었고 친절하게 지도까지 있었다.
[북경을 빼앗기고 남경조차 함락당한 명은 궁지에 몰렸다. 북경 함락 이후 새 황제로 즉위한 홍광제는 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조선은 요동을 자신의 영토로 흡수하고 순나라에 대한 공세와 남명에 대한 지원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북경 공방전으로 자금성이 함락당할 위기에 놓이자 이자성은 개봉(開封)으로 천도하며 북경을 불태워 버렸다. 원래 역사에서는 개봉을 수공으로 쓸어버렸던 놈이 북경을 불로 태워버리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따로 없군.”
남명이 붕괴되어 중국이 통일될 경우 조선 건국 직후와 같은 압박에 시달릴 것을 염려한 조선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내 순의 후방을 노리고 제의 공세를 막아냈다.
병력을 보내면서 조공이랍시고 각종 물산을 보내 남명의 골수까지 빨아먹는 갑질을 했지만 조선이 지원을 끊으면 삼 년도 버티기 힘든 남명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현명한 선택이지. 싸우려면 남의 땅에 가서 싸워야지 조선의 땅이 된 요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피해가 더욱 커지겠지. 파병 비용이야 명나라가 골수를 뽑아서 내어주고. 나중에 가니 그냥 박물관 하나를 들어다 바쳤네?”
처음에는 은으로 파병과 조공의 대가를 지불하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귀중한 유물과 서적을 비롯하여 자원이란 자원을 모조리 내어주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이 참전하자 전쟁의 축이 남명에게 기울 지경이었다.
1645년 첫 전쟁에서 북경을 함락시키고 퇴각. 이후 약 7년 주기로 10만 단위의 원정군과 3만 단위의 원병을 파견한다. 점차 남명이 힘을 되찾았지만 이후 벌어질 일은 역사와 같았다. 원래 역사에서 벌어진 천재지변이 이 역사에서 시작되었다.
[남명은 힘을 얻어 1668년 남경을 탈환하기에 이르렀지만 1670년 기록적인 한파와 가뭄이 조선을 덮쳤다. 이를 경신대기근이라 하며 이상기후로 인한 기근에 시달린 조선은 남명에 대한 지원을 일시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1695년 을병대기근은 4년간 지속되었고 조선은 전무후무한 자연재해로 4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회를 노린 순과 제는 남명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하였고. 1699년 8월 19일 남명의 수도 항주(杭州)가 함락되었다.]
“4년간 이어진 을병대기근에서 40만 명만 굶어 죽었다고? 이게 말이야 뭐야? 대체 조선이 가지고 있는 상업용 선박이 얼마나 많았기에 기근을 이 정도 희생자로 극복해 냈지? 당시 인구가 3,200만이면 원래 역사의 3배잖아?”
을병대기근은 전근대 국가로는 버틸 수 없는 끔찍한 대재앙이다. 현대에 집계해 본 결과 수확량의 40% 감소라면 선방한 수준이라 하던가. 원래 역사에서 141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참극이지만 이 역사의 조선은 피해를 극도로 감소시켰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420만 명이 죽어나갈 대참사를 40만 명의 사망으로 막아내다니.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물동량을 알아보려면 공부가 더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명의 황제 민종(愍宗) 주자벌(朱慈䇅)은 조선에서 보낸 피난선을 타고 한양에 도착한 직후 조선이 천자의 자리를 물려받으며 중원에 나서 부덕한 이를 벌하고 중원을 차지하라 청하였지만 조선의 왕인 원종(元宗)은 이를 거절하였다.]
아주 훌륭한 태도이다. 명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고 고스란히 내어주는 일은 미친 짓이다. 만약 중국을 속국으로 두려 해도 인구가 다섯 배 이상 많은 고장을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직접 지배하면 흡수당하는 운명 외에는 없다.
이런 상황이니 원종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였다. 주자벌을 비롯한 남명의 중신들을 극진히 대접한 다음 여러 이유를 들며 명나라의 조정을 조선에 만들어달라 청한 것이다. 당시 원종이 주장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춘천은 산세가 사방을 메우니 첩자를 막고 통치하기가 편안한 고장입니다. 또한 한강이 흘러내려 한양으로 향하니 상국(上國)의 사람들이 머물기 좋은 곳입니다. 또한 지세에 비하여 사람이 머물지 않으니 명국의 유민(遺民)들이 모이기에도 좋습니다.]
[민종은 옥새 여섯 개 가운데 행새(行璽 - 논공행상용 옥새)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을 돌에 내리쳐 부수고 춘천으로 향하였다. 이후 남명의 신하라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조선으로 이주한 이가 식솔을 포함하여 이만 명에 달한다.]
“진짜 명나라의 골수를 빼먹고 뼛가루마저 오독오독 씹어 먹었네.”
명나라의 몰락으로 조선이 얻은 것을 정리해보자. 요동을 얻었고 이를 확고한 영토로 삼았다. 또한 향후 순의 통일 여력마저도 처참하게 갉아먹어 버렸으니 중국을 통일되지 않은 남북조로 만들었다.
제와 싸울 때에는 공세에 나서지 않고 지형지물을 이용한 방어전을 위주로 하였지만 강한 순과의 전쟁은 적의 피해를 극대화하는 방식을 택해서 외압에 의한 남북조의 형성을 완성하였다. 더군다나 조선으로 이주한 자들도 충분한 이득이다.
이들이 왜 이주하였겠는가? 한때 조정에서 일하거나 관리로 일하던 자들이니 명나라 조정이 조선으로 이주하면서 잠재적 첩자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전근대에서 양성하기 힘든 실무진이 가족을 포함해 이만 명이나 조선으로 이주한 것이다.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을 성공리에 막아내고 중국을 남북조로 분열시키고 명나라의 골수까지 빨아먹은 왕에게 원(元)이라는 시호는 너무 아쉬워. 본래 역사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무조건 고(高)라 치켜올렸을 것인데.”
이후 명나라는 조선의 도움으로 나라의 이름만 유지하게 되었으며. 논공행상용 옥새의 용도는 조선의 군주를 책봉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실권도 없는 황제이니 할 일은 도장 찍는 일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중원을 되찾자던 관료들도 하나씩 조선에 포섭되었다. 이후 조선이 칭제하여도 명나라는 여전히 명나라였으며, 공화국이 되어도 명나라였다.
다만 공화정으로 전환할 시대의 흐름에 명나라가 폐지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생각 외의 효율을 보이면서 명나라는 현대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당시 외국인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았다.
[언더우드 부인이 평가하기를 ‘대명국의 영토가 남아 있다기에 찾아간 춘천은 너무나 매력적인 도시이다. 순과 제에는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중국이 살아 있는 고장이다’라고 평가하였다.]
[호미 헐버트가 평가하기를 ‘순과 제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기존 악습을 철폐하기를 원하였으며. 이는 복잡한 문화를 단순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결국 온전한 문화를 보전한 고장은 춘천부 외에는 없다’라 하였다.]
간단히 말해 문화를 너무 오랫동안 보존하였더니 관광 상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원 왕조가 650년이나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왔지만 삼백 년이 흐른 지금은 의미도 정신도 잃어버리고 세습직 공무원이 되어 있으리라. 하지만 한숨이 나왔다.
나는 일곱 살까지 맞벌이 부부인 부모님의 손에서 벗어나 춘천의 외가에서 살았다. 남동생이 나보다 아홉 살 어리고 여동생은 열한 살 어리니까 둘은 부모님에게서 자랐다.
가족사진을 담은 앨범을 펼쳤는데 내 어렸을 때 사진 뒤로 매번 봉의산의 정겨운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봉의산 중턱의 원래 역사의 도청 위치에 있는 거대한 궁궐도 확인했다.
“작년 제외하고 매년 외할머니 생신 때마다 찾아갔던 사람이 어린 시절 자랐던 춘천 지리도 모른다? 차라리 하루 먼저 찾아가서 지리를 익히는 것이 좋지.”
그렇다면 가급적 새벽에 올라가는 것이 좋으리라. 자려 하는데 성원이에게서 쌀톡이 왔다. 녀석이 일하다 짬이 나서 보냈나? 쌀톡을 켜니 거대한 목조건물 사진 한 장이 찍혀 있었다.
- 내가 조사하는 곳이 만천서원이다. 돌아와서 아주 화끈하게 알려줄 테니 염려하지 마.
만천서원이 북미대륙 서해안에 있었나? 어차피 휴식월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올 녀석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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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같이 용산역으로 찾아가 지하철에 올랐는데 춘천의 모습은 변하다 못해 정말 딴 세상 같았다. 비어 있는 논밭은 어디에도 없었으면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이 여느 대도시 못지않을 지경이었다.
“어디가 어느 동인지 찾아가지도 못했겠네. 하루 먼저 오기를 잘했어.”
춘천 사는 사촌들이 하나같이 욕하던 거미줄 같은 도로와 뒤엉켜진 시내는 없다. 명나라의 양식을 고스란히 남긴 시가지는 바둑판 형태로 잘 짜여 있었다. 당연히 교통도 도시 구조도 완전히 바뀌었다.
본래 역사에서는 분단과 수많은 한강수계 댐들의 영향으로 도시 기능이 절반조차 발휘하지 못한 춘천이지만. 본래 북한강 수로의 종착역으로 많은 잠재력을 가진 도시가 춘천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도심으로 향하는데 멀리서도 거대한 궁궐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자금성을 다녀왔으니 익숙한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명나라 특유의 양식이지만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한 작은 궁궐이었다.
“자금성의 형식은 살렸지만 규모는 축소했군. 아마 현대까지 오면서 계속 증축된 것 같은데?”
시내버스를 타고 본래 역사의 중앙로. 여기서는 오문(午門) 앞 사거리에 내리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규모를 축소했다 하여도 본래 역사의 자금성과 배치가 거의 같았다.
산자락을 따라 오문, 태화문, 태화전, 보화전 순서로 배치된 건물의 형태를 돌아보니 외국인들이 극찬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금군(禁軍)이 교대식을 하는데 복장이 명나라 양식 그대로다!
그래 놓고 하는 소리는 억지로 성조를 늘어뜨린 중국어라서 기분이 팍팍 상하지만, 아무리 봐도 한국 사람을 데려다 놓고 옛 중국어를 억지로 발음하게 만드는 꼴이니 만족스럽지 않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하겠어.
“애초에 여기 사람들은 삼백 년 넘게 조선부터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 공화국까지 살아왔는데 그냥 대한 공화국 사람이지. 아마 지금 황제인 주영잔이라는 사람도 중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할걸?”
문화는 보존했지만 가장 중요한 언어는 보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관광지마다 있는 기념품 판매점에서 조선시대의 기억을 되살려 중국어를 해봤는데 점원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본래 역사의 명동. 여기서는 성세전(盛世廛)이라 불리는 곳에 갔는데 겉모습만 중국과 흡사하지 알맹이는 전부 대한 공화국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모습이라도 갖춰놨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외가에 찾아가려 했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