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25화 (225/573)

< 3장 39화 - 종언(終焉) >

머리가 아파지건 말건 홍윤성이 정신적으로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궁궐로 돌아와 오랜 간만에 의정부 관원과 나를 포함하여 논의가 열렸다. 가장 먼저 발언한 이는 역시나 신숙주였다.

“군기시에 속한 홍 대감이 옛 구주의 땅에서 황명을 받아 왜구를 토벌하기를 거리낌 없이 행하였습니다. 바라는 일이 있으니 그의 고난을 염두에 두시어 한직에 두시옵소서.”

“이미 아는 일이었으나 황상의 명을 수행하느라 고생이 많았나 보구려. 홍윤성의 관직을 사복시의 제조(提調 - 정1품 관직, 한직이라 보통 겸직한다)로 옮겨 두겠소. 근래에 들어 사복시의 업무는 많은 편이지만 겸직하지 않으면 충분할 것이오.”

신숙주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소식을 전해들은 의정부 관료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듯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새벽 별을 보며 출근하고 해가 진 다음에 퇴청하는 신숙주의 발언이니 홍위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본디 명국 황상의 명을 수행하였던 자이니 이러한 일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지 않소. 본디 홍윤성에게 새로 편재될 오군영(五軍營)의 총관으로 임명하려 하였지만 도리가 없소.”

형님이 전달한 통치 기구 개편안의 첫 적용이니 가장 믿을만한 신하를 두려던 것이리라. 그런데 형님의 개편안은 육조를 분할하여 열 개로 나누는 것이 처음 아니었나?

“주상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본디 육조 직계제를 십조로 개편하는 일이 우선이었는데 업무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본디 뜻한 양보다 국고가 적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오위를 오군영으로 개편하는 일이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어서 먼저 행하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갑사들과 일반 병력들을 분리하고 체계를 갖추면 예산 집행을 일괄적으로 할 수 있고 체제 변화로 효율도 급증할 것이니까. 그런데 세수가 늘어나지 않았나?

“국고가 부족하다 하셨사옵니까? 본디 아국의 세수가 계속 늘어나지 않사옵니까.”

“대동통보를 도입한 이후 이에 맞추어 국고를 축적하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라마국(신성로마제국)으로 돌아간 이들이 조언하였는데 구주에서는 거상들이 전횡을 일삼았다 하여 이를 염두에 둔 일이지요.”

홍위가 귀가 얇은 것이 아니고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의 투기는 전설적인 사례이다. 내가 경제 쪽에는 약하지만 화폐의 순도가 박살나고 화폐 체계가 뒤엎어질 정도로 혼란이 있었다 하니까.

듣자하니 조선의 정부 한 해 예산이 지방세를 포함해서 은으로 210만 냥인데 많아 보이지만 쓸 장소가 많다. 홍위도 내 생각을 짐작하였는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가장 골치 아픈 일은 북방입니다. 북방에 위치한 부여(夫餘)도, 용원(龍原)도, 연해 좌우도 가운데 제대로 된 세금을 거둬들이는 고장은 없습니다.”

“없다 하셨사옵니까? 하지만 이미 관원을 파견하여 호적을 파악하고 토지를 측량하니······.”

“그리 하여도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 십 년의 기한을 두지 않았습니까. 결국 북방의 소출은 사금을 제외하면 모피류가 전부입니다. 초기에 개척한 농토의 세금은 모두 관원들의 녹봉으로 환원되고 있습니다. 이는 대양도도 마찬가지지요.”

조선이 거대한 영토를 획득하였으니 인구도 증가추세고 전체적인 소득도 증가하였지만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홍위는 심각한 표정을 뒤로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하지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오 년이 지나면 부여도는 힘들다 하여도 용원도 일대의 토지 삼십만 결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으며. 십 년이 지나면 대동통보의 유통이 정상화 되어 국고도 풍족해 질 것입니다.”

“주상께서 십 년이라 하시니 마음이 홀가분해지옵니다.”

십 년이면 서력으로 1489년, 내 나이가 73세이니 살 만큼 살았다. 지겹도록 살아왔으니 상원사에서 겪었던 기묘한 체험대로 현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본래 역사도 좋고 변한 역사도 좋지만 어느 쪽이라 하여도 나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홍위의 치적이 문제네. 선왕이 확장한 영토를 다스리고 조선의 치세를 굳건히 하는 일에 멈춰 있는 것이다. 류큐나 필리핀은 조선의 보호국으로 들어온 것이지 영토를 확장한 것에 속하지 않는다.

본래 역사에서 수양대군이 질서를 바로잡았다는 이유로 세조(世祖)라는 묘호를 받았다. 하지만 홍위는 시대를 개편하였으니 세조라는 묘호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홍위의 묘호를 위한 업적이자 십 년이 걸릴 과업이 하나가 있다.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둔 일이 있었사옵니다. 남경에서 서적을 탐독하였는데 명국에서 아국을 평가한 서적이 있었고. 그 서적에는 국초에 윤가와 이가(윤이와 이초, 반이성계 피난민이며 명나라로 망명하였다)가 남긴 삿된 말이 적혀 있었사옵니다.”

종계변무(宗系辨誣)라 칭하는 일이다. 조선 왕실의 족보를 허위 보고로 인하여 잘못 기입하였지만 영락제의 시절이니 이를 정당하다 여기고 조선을 외교적으로 옭아 맨 것이다.

본래는 30년 뒤에야 터질 일이지만 조금 일찍 터트려 버렸다. 영덕제는 조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니 약간의 힘만 들이면 나라가 만들어질 당시부터 조선을 옭아매던 외교적 수단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홍위는 불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헌릉에 계신 분께서 고쳤다 하였지만 숙부님의 말은 처음 듣는 일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알아보아야 할 일이지요.”

“혹여나 삿된 말을 담은 서적이 우연히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하오나 명국이 새 영토인 육주(큐슈의 남부)를 획득하였으니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재편할 것이고. 이를 확인하면 충분한 일이옵니다.”

홍위를 위해 커다란 과제를 하나 던져 주었다. 본래 역사에서는 중종부터 선조까지 4대에 걸친 험난한 과정이었지만 외교적으로 조선의 입김이 더욱 강해진 지금이면 홍위의 능력으로 쉽게 극복할 수 있겠지.

남에게 일을 떠넘기니 두통이 조금 가신다. 궐문을 나서며 서양의 트러스 방식으로 재구성한 창고를 바라보니 피렌체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간 부인과 자식들도.

생각해보니 각자 홍삼을 열 근 이상 사들고 돌아갔으니 편안히 살고 있을 것이다. 잘만 하면 미켈란젤로나 다 빈치의 회화가 조금 더 근육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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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9년 4월, 피렌체의 미술가들이 머나먼 아프리카 항로를 통하여 귀환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엿한 가족의 가장이 되어 있었으며. 장성하지는 않더라도 항해를 견딜 정도의 자식들이 있었다.

아무리 귀족이나 상인의 내놓은 자식이라 하여도 자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친척들이 모조리 모여서 성대히 환영하였지만 그들의 시선은 오랜 간만에 보는 친척의 변한 모습보다 그들이 가져온 물건에 머물러 있었다.

“홍삼은 있는가? 포르투갈 놈들이 금의 다섯 배나 되는 가격을 받으니 도저히 사들일 수가 없군! 요즘은 이슬람 악마 놈들도 인삼을 보내오지 않아서 포르투갈을 통해 구하는 것이 전부였어.”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른 누구도 아니며 저의 친척이시니 금의 두 배의 가격만 받겠습니다!”

새로운 자식들과 정착하는 일은 쉬웠다. 조선에서는 은의 가격보다 조금 비싼 홍삼을 선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사비를 털어 몇 근이나 들여왔으니 아예 저택을 사들일 수 있었다. 향신료와 비교할 수 없는 귀중품이 홍삼이었다.

부인들과 자식들도 충분히 적응하였다. 조선에서는 차별을 받지 않더라도 조금 적은 급료(조선의 급료는 적은편이다)를 받으면서 적당한 삶을 누려왔지만 여기서는 귀부인으로 대접 받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 1480년 5월이 되었지만 미술가들은 눈가에 그늘이 질 정도로 고민하고 있었다. 집안은 풍족할지 몰라도 자신의 회화가 팔려나가지 않고 제자들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애초에 조선에 대한 평판이 상당히 좋지 않았으며. 조선에서는 그들의 종교인 가톨릭을 드러낼 수 없었으니 회화라 하여도 조선의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이해할 수 없는 이국의 풍경을 그렸다 하여 사들이려는 자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미술가들보다 조금 아래 연배이자 피렌체의 거장 중 한명인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명작 하나를 완성한 뒤에 환영회가 열렸던 것이다. 공방 근처에 있는 저택에는 어느 새 미술가들이 들어찼다.

두각을 드러내지 않던 젊은 미술가들이 조선 사람과 혼인하여 장년의 나이로 피렌체로 귀환하였으니 물어볼 것도 많았다. 머나먼 이국의 이야기는 언제나 술자리의 주제가 되는 법이었다.

“듣자하니 조선이라는 나라는 머리 위에 철로 만든 투구를 쓰고 다니며. 사람들이 헤라클레스와 같은 힘을 가지고 오디세우스만큼 활을 잘 쏜다 하였는데.”

“소문이 여러 개가 섞인 모양이네. 철로 만든 투구를 쓰는 자들은 훈련원이라는 군대에 소속된 이들이며. 헤라클레스와 같은 힘을 가진 자는 귀족에 속하는 유생들이지. 활을 쏘는 이는 수 없이 많으니 하나는 정답이야.”

“그렇다면 양반들이 곧 기사들이란 말인가?”

“몸을 단련할 뿐이지만 그들의 학식은 어지간한 학자보다 뛰어나네. 유학이라는 종교를 거부하는 학문을 받아들여서 문제일 뿐이지. 그러고 보니 그들의 풍습이 무언지 아는가? 놀라지 말게! 그들은 은화를 자신의 힘으로 찍어낸다네!”

“거짓말 하지 말게! 스파르타도 철로 만든 돈을 사용했다는 헛소문이 있던데! 귀족이라는 자들이 맨손으로 돈을 찍어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조선에서 가져온 은화가 굴러 나왔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맨손으로 틀을 내리 찍어 완성한다면 이렇게 형태가 올바를 리 없다. 그렇게 취기가 오르고 음식이 끝없이 들어가면서 미술가답게 본론에 들어갔다.

“그래서 조선에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

“이십 년 동안 인체에 대해 배운 것이 전부이지만 아직 부족하다 여겨지네. 가장 놀라운 것은 바르디(도나텔로)님이 근육의 덩어리라 비하하셨던 사람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이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 예전의 조선의 왕족보다 근육이 훨씬 많으니 이 분은 대체 누구인가? 조선의 대장군이라도 되는 자인가?”

“예전에 피렌체에 방문하였던 왕족의 둘째 형이지. 태어날 적과 스물이 될 때까지 체격이 조금 큰 정도였지만 스스로 근육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여 이러한 몸이 되었다네.”

수양대군의 몸을 묘사한 스케치. 그리고 상상 속의 수양대군을 묘사한 스케치가 펄럭거리며 넘어가자 미술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들은 비록 전성기의 수양대군을 그리지 못하였지만 삼대 운동 1,200근 시절의 수양대군은 회화로 남겨놓았던 것이다.

“수양대군, 우리 식으로 풀어 쓰자면 프린시프(principe – 대공) 수양이라는 자이지. 왕의 동생이자 스물이 될 무렵에 입신체비라는 학문을 창안해 퍼트린 자이네.”

“스물? 농담하지 말게나. 토마스 아퀴나스(신학자, 머리가 좋기로 유명한 성인이다) 조차도 스물에 이룬 업적은 성서를 외운 것이 전부가 아닌가.”

“물론 내가 입신체비를 온전히 배운 적은 없네. 하지만 입신체비라는 학문을 모두 배울 경우에는 온 몸의 근육을 자유자재로 단련하여 완벽한 몸을 만들 수 있다 하더군.”

본보기 삼아 몸을 걷어 올리자 여느 사람들과 다른 어느 정도 단련된 몸이 보였다. 심층적인 입신체비가 아닌 꾸준한 달리기와 삼대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었으며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복부가 불룩하지 않고 얇군. 다른 이들과 다르게 군살이 없지 않은가.”

“기사들이 몸을 단련할 때에 체중을 키우고 몸을 튼튼히 만드는 방법을 택하지. 입신체비는 가장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방법이니 차이가 있다네.”

입신체비에 대한 이야기도 허풍이라 여겨졌다. 세상에 어느 귀족이 음식이 쌓여 있는데 거칠고 맛없는 것을 먹으며 한 달이나 고난을 겪는단 말인가. 하지만 회화를 넘겨보던 베로키오의 눈이 흔들리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자네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회화가 있네. 발롬브로산(Vallombrosa) 수도원에 방문하여 선물을 전하고 보관하는 회화를 좀 보면 좋을 것이네.”

수도원은 귀족이나 상인 자제들의 계승 분쟁을 피하기 위해 늦게 태어난 아이들을 거둬들이는 공간이었으니 들려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수도원의 회랑에는 성화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세례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옆에 있는 꼬마 천사와 장엄한 화풍은 베로키오의 실력을 증명하였다. 조선에서 돌아온 화가들은 회화를 살펴보며 감탄을 늘어놓았다.

“이걸 베로키오 자네가 그렸다고? 이십 년 사이에 실력이 늘어나다 못해 껑충 뛰었군.”

“실은 말일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내 제자가 그렸지. 이후로 녀석의 솜씨를 이길 수 없어서 나는 조각가로 전업하였고 녀석이 우리 공방의 회화를 담당한다네.”

“자네가 절필을 결심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당시에는 몇 살이고 지금 몇 살인가?”

“스물여섯이고 이걸 그릴 당시에는 열아홉이었지. 훌쩍 떠난 보티첼리(산드로 보티첼리 – 시스티나 대성당 벽화를 그린 화가) 녀석과 다르게 꾸준히 성장하는 녀석일세.”

미술가들의 침이 넘어갔다. 회화에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정녕 베로키오의 실력을 뛰어넘었다 할 수 있으며 훗날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되었으리라. 밖으로 나온 베로키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도 몇 년 뒤에 독립하겠지. 밀라노의 대공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녀석의 그림 솜씨를 알아차렸으니 나를 넘어선 제자를 억지로 키우는 일도 끝이야.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네가 할 말을 알겠네. 인체를 제대로 그리는 방법을 우리가 가르쳐 달라는 말인가? 마침 잘 된 일이네! 다들 그렇지 않나?”

“아무렴! 몇 년 뒤에 밀라노 대공에게 고용될 몸을 가르치면 명성이 퍼질 것이고. 새로운 제자를 거느릴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녀석의 이름이 무언가?”

“빈치 출신의 피에로의 아들 레오나르도일세.”

공방 구석에 있는 제자들의 작업실에서는 한 화가가 스케치를 보고 감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수양팔근도. 훗날 보디빌딩 7대 자세에 수양대군이 창안한 흑룡세가 포함된 스케치가 뚫어져라 노려보며 자신의 손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니. 놀라워! 동방에 사는 사람이 머리가 크고 팔다리가 짧은 편이지만 그 짧은 곳을 모조리 근육으로 채워 넣었다니!”

“레오나르도! 거기 있느냐?”

“네 스승님!”

청년이 밖으로 나서자 난데없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스승과 비슷한 연배이지만 철저히 단련된 몸. 스케치와 마찬가지로 전신의 근육을 단련한 이들이니 눈이 황홀할 지경이었다. 베로키오는 제자의 등을 두드리며 호탕하게 말 했다.

“지금부터 공방에 손님들이 찾아올 것이다. 나의 친구들이며 너의 회화 모델이 될 사람들이지! 체격도 다르고 자세도 다른 이들 열 명이 번갈아 가면서 너를 가르칠 것이다!”

“스승님. 제가 담당한 작품이 여럿인데 그렇게 되면 완성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네 성품을 알고 있다. 당장 시체를 해부하는 이들을 수차례나 만나 완벽한 몸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이들의 몸을 보고 배우면 되겠지.”

청년의 목에서 침이 넘어갔다. 근육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골격의 위치를 알아내고자 사체 해부에 참관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생동감이 죽은 시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 생동감 넘치는 이들이며 수없이 많은 인체를 스케치와 회화로 남긴 이들이었다. 한 미술가가 이두박근을 부풀리며 말했다.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우리는 머나먼 이국에 이십 년 동안 있던 지라 기반을 만들 수 없는 몸이니 자네를 가르쳤다는 말로 다른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싶군.”

“기꺼이 환영할 일입니다. 부디 저에게 많은 지식을 가르쳐 주십시오.”

청년은 본래 역사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였던 한 미술가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훗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불리게 될 천재가 입신체비로 다져진 몸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예술은 조금 더 올바른 인체비례와 구도를, 조금 더 온전한 인체의 형태와 질감을 그리고 조금 많은 근육을 포함하게 되었지만 이를 알아차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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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년 6월, 조선이 석성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현대에서 이스터 섬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라파누이에서 유자광의 선발대가 미주로 출발한지 사십 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한명회는 오늘도 군막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다 밖으로 나와 눈살을 찌푸렸다.

“망할 놈의 섬. 나무를 합쳐서 일천 그루도 존재하지 않는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래 놓고도 석상을 하나 더 만든다고?”

“풍속이 과도하여도 이런 문제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돌하르방보다 몇 배는 거대한 석상을 수십 개나 세워 놓으려고 나무를 몽땅 베어 버리다니! 덕분에 식량이 소출되지 않으니 어디 쓸모가 있겠나!”

한명회에게 보고를 올리던 관원이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을 보며 호투 마투아(초대 이스터 섬의 추장)의 화신이니 뭐니 하면서 떠받들고 있지만 참으로 한심한 섬이었다.

나무가 부족하여 지천에 널린 물고기를 잡지 못하니 굶주리는 이들이 있었으니 쪽배를 주고 그물마저 주었고. 배를 보수한 재목을 불태워 퇴비로 만들어 주었으니 그나마 섬이 제 모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섬의 암반지대에서는 돌을 쪼아 석상을 만들었으나 이를 끝으로 석상을 만드는 일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은혜를 내려준 조선을 위한 석상 하나만큼은 만들라 청하였고 이만큼은 허가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농사를 지으며 천천히 석상을 만드니 몇 년이 걸리는 대공사이리라. 한명회가 다시 서류에 눈을 돌리는데 해변을 경계하던 선원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아국의 함대입니다! 일전에 출발하였던 함대가 섬의 북쪽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 달 하고도 보름 만에 돌아오다니. 너무 애매한 시기인데 실패하였나 보군.”

풍역선에 적재할 수 있는 식량은 넘쳐나도 물은 30일이 지나면 상하고 40일이 지나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바꿔 말해서 45일은 아슬아슬하게 항해 기한을 넘긴 시점이었다.

쪽배가 먼저 도착하였다.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 온 쪽배에는 선발대를 통솔하는 직책의 유자광이 있었으며 그는 뭍으로 내린 직후 한명회 앞에서 물을 한 됫박이 넘게 들이켜고 숨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경험해본 일이 없는 바다입니다. 스무 날을 떠돌고 소득이 없어서 돌아왔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자네도 항해 경험이 제법 있지 않나.”

“풍향과 해류 모두 배를 북서쪽으로 밀어내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해류를 뚫고 나아갈 실력도 없었으며 설령 뚫고 나간다 하여도 돌아올 길이 막막하였습니다.”

유자광을 선발대로 보내 미주의 위치라도 알려 하였지만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한명회는 항해 일지를 훑어보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자네의 말이 옳군. 오히려 해류를 뚫지 않고 돌아온 일은 잘 한 판단이네. 잘못하다가 물귀신이 되거나 기갈(飢渴)에 시달려 줄줄이 죽어 나갔을 것이네.”

이스터 섬에서 남미 지역을 오가는 항로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북서방향으로 몰아치는 훔볼트 해류와 남동무역풍의 영향권에 있으니 범선으로 극복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돌아오는 길이 없었다.

훔볼트 해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항로를 남쪽으로 돌릴 수 있으니 적도 인근까지 항해한 다음 항로를 변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챈 한명회는 생각을 거듭하다가 말했다.

“단 하나의 방법이 남아 있는데 이론이 맞아 떨어지면 가능한 방법이지. 투이도(통가 제국)로 돌아가도록 하지. 이현전의 학자들의 말이 옳다면 의외로 빠른 항로가 남아 있을 것이네.”

이론이라 하여도 어디까지나 이현전의 학자들과 폴리네시아인의 구전 설화에 대한 이론이었다. 분명 지도상의 적도. 태양이 수직으로 머무는 점의 해류가 끝없이 동쪽을 향해 나아간다 하였으니 떠오른 발상이었다.

“분명 들은 적이 있네. 투이도(퉁가 제국)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키리바시라는 섬에서 끝없이 동쪽과 서쪽으로 흐르는 해류가 있었다 하였지.”

“가능한 일입니까? 저도 일전에 듣기는 하였지만 망망대해를 어떠한 지표도 없이 오로지 동쪽으로 항해하는 일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하니 승선 인원을 최대한 줄이고 가장 튼튼한 배와 가장 온전한 식량을 모아 떠나야 한다네. 가는 일도 문제고 오는 일도 문제지.”

적도해류를 타고 동쪽으로 나아가면 키리바시에서 한 달 정도의 거리에 미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건 항해니 한명회의 손이 파르르 떨렸지만 알아차리는 이가 없었다.

항로를 정한 조선의 함대가 일호천도(타히티)를 지나치고 이틀이 지날 무렵. 먼 바다에서 기괴한 파도가 보였다. 시퍼런 대양의 바닥을 긁어내리는 듯이 거대한 탁류가 머나먼 남쪽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돛을 내리지 말고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배를 돌려라!”

한명회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면서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왜인 가운데 항해사가 된 이가 말하기를 지진이 일어나고 거대한 파도가 몰아칠 때에 먼 바다가 들썩거린다는 말이 있었지만 체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선의 함대가 도착한 투이도는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거대한 지진해일이 대양을 가로질러 해변을 덮친 것이다. 다행히도 섬의 남쪽은 언덕이 있었기에 피해가 크지 않았지만 숲 속까지 카누가 밀려오는 거대한 해일이었다. 한명회는 혀를 차면서 해안을 돌아보았다.

“허어 세상에. 정녕 왜국 출신 선원이 말하였던 것이 옳았다네! 땅이 요동친 다음 파도가 몰아친다 하였는데 해안이 말 그대로 뒤집혀 버렸군.”

“그래도 피해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기껏 해야 해변으로부터 일백여 보(180m)만 휩쓸렸으니 밭이 조금 손상을 입은 것이 전부이군요.”

“선원들을 하선시켜 투이도의 사람들을 돕도록 하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닌가? 분명 지진이 크면 바다가 요동친다 하였는데 대체 어디서 지진이 일어났단 말인가.”

투이도를 비롯한 신농도의 분파, 현대의 폴리네시아인들은 조선에게 복속하지 않았으며 동맹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머나먼 고장이자 좋은 물건을 가져왔지만 어디까지나 거래 상대라 여긴 것이다.

최근에 연락이 끊기고 기억에서 잊히던 섬인 라파누이를 되살린 일로 조선의 동맹을 넘어서서 귀부하려는 이가 늘어났지만 아직까지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조선 분들은 이렇게 친절하신 분들이시니 따를 용기가 생깁니다.”

“그러하면 언제라도 열산도로 오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아국에서 관직에 오른 이가 벌써 여섯 명에 달하니 자네들에게도 관직의 문이 열려 있다네.”

해안 일대는 한명회의 지시에 의해 말끔히 정리되었지만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닷새가 지나자 남쪽 저 너머에서 카누 여러 척이 나타났으며. 그들은 한명회가 접촉하였던 마오리족이었다.

대부분 장정들이었으나 기나긴 항해를 떠나면서도 식량을 챙겨오지 않았는지 거의 다 굶주려 죽어가고 있었다. 한명회는 지시를 내려 건면포(건빵)를 끓여 죽을 만들라 하였고 건면포 죽을 마신 이들은 점차 기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자네들은 하양도(遐壤島 - 먼 곳에 있는 흙이라는 뜻,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마오리에 속하는 이들이 아닌가? 대체 이 머나먼 고장까지 어찌하여 왔으며 왜 이리 기근에 시달리는가.”

“섬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틀 동안 땅이 요동치고 바다가 뒤집어 졌으며 농작물이 모두 바닷물에 휩쓸리고 집이 무너졌습니다. 서로 사이가 좋던 부족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겪은 해일의 정체는 머나먼 남쪽의 뉴질랜드에서 일어난 대지진의 여파였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듣자 한명회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속뜻은 숨겼지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극이 벌어진다는 뜻이리라. 본래 분쟁이 있지 전쟁이 없는 마오리이지만 끔찍한 기근은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충분하였다. 한명회는 입술을 질끈 씹으며 유자광을 돌아보았다.

“일대의 식량을 모조리 긁어모으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함대가 여섯 달은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쭤 보시는지요.”

“식량을 모아와 하양도에 보낼 준비를 하세나. 하양도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떠돌며 식량을 찾아 사방을 습격할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일을 막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나.”

유자광도 머리가 부족하지 않기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미 사람을 잡아먹어 거리낄 것이 없어진 이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과 식인을 저지를 것이니 왜구와 비교할 수 없는 흉측한 일이 벌어지리라.

한명회의 결정으로 본래 역사에서 서로 상잔하며 전쟁 풍습과 식인 풍습이 생겨난 마오리족에게 구원의 손길이 닿았다. 명령이 떨어지고 사방에서 집결된 물자가 풍역선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였다.

사실은 변명이자 수작이었다. 한명회가 아무리 대범한 이라 하여도 예순이 넘은 목숨을 바다 위에서 허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이번 항해를 자살과 같은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마오리에 속하는 이들이 해적으로 돌변하여 훗날까지 아국을 괴롭히는 화근이 될 까 염려하여 어명을 거슬렀다. 이러한 실책을 범했으니 탐검사의 일은 유자광과 임사홍 그리고 이극돈에게 일임하고 후계자를 육성하는 일에 전념할 것이다. 이런 변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예순이 넘은 몸이며 정승이니 벌을 내려도 면직 정도가 끝이리라. 홀가분한 마음으로 명령을 하달하는 한명회를 투이도의 추장인 탈라카파이키가 뚫어지게 노려보다 말을 걸었다.

“키리바시에서 머나먼 동쪽의 새로운 땅을 찾는 대업을 이루러 오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하여도 새로운 땅을 찾는 일은 나의 제자가 할 일로 미뤄 둘 것입니다. 지금은 당신들이 아오테아로아라 칭한 땅을 구원하는 일이 먼저요. 사람이 살고 봐야 할 일이 아닙니까.”

명분이 생기니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잡다한 짐을 모조리 털어버리는 듯이 자신의 항해 생활도 여기에서 끝을 맺으리라. 하지만 조선과 동맹인 탈라카파이키는 한명회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조선은 참으로 대단한 나라입니다. 아무리 동맹이라 하여도 머나먼 고장의 일을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처럼 행동하다니요.”

“동맹의 사람이라 하여도 같은 사람이 아닙니까. 머나먼 훗날에 우리들을 도울 수도 있지요.”

“그러한 나라라면 우리의 명운을 걸 수 있겠군요. 아오테아로아에 식량을 보낸 다음 조선으로 가실 적에 저의 아들을 데려 가십시오. 저희 통가 제국은 조선에게 복속할 것입니다.”

난데없는 복속의사에 한명회는 멍한 눈으로 탈라카파이키를 쳐다보았다. 기근을 구휼하여 복속의 뜻을 청하니 자신의 덕(德)에 감동받은 일이라 여겼지만 실상은 달랐다.

통가 제국이 분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니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조선의 신하가 되면 설령 일이 잘못 되어도 자신의 후손들은 조선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까.

별다른 소득이 없이 돌아온 한명회였지만 홍위는 그의 과실을 책망하고 공을 치하하면서 꿈에도 원하던 사직을 허가하였다. 다만 그는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의 영토 가장 남쪽. 열산도에 머물 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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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7년 2월, 서행사가 돌아오며 제자들이 보낸 편지를 가져왔다. 삼 년 전에 돌아간 제자들이 매번 편지를 보내왔지만 이번에는 선물이 들어 있었다. 사파이어처럼 생긴 푸른색 보석을 옆에 놓고 편지를 들고 읽어 내려갔다.

- 불초 제자 내모아 스승님께 안부 인사를 올립니다. 흑질과 이주학질을 막아내기 위하여 방충망을 만들고 삼 년이 지났습니다. 계피에 적신 삼베로 엮은 실은 쓸모없다 여겼지만 놀랍게도 마을에서도 흑질과 이주학질에 시달리는 이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고무된 사람들은 질병을 막아내기 위해 모기들이 날뛰는 구덩이를 메워 장구벌레를 죽이니 스승님의 식견에 감탄하였고 점차 조선의 풍속이 전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철은 찾으면서 놀랍게도 산에서 진귀한 보석을 발견하였으니 이에 조선의 옛 이름을 따온 삼한(三韓)석이라 하겠습니다. 탐광자가 말하길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보석이라 하였으며 열을 가하면 푸른색으로 변하니 값을 매기기 힘든 지경입니다.

이를 팔면 천축의 초석을 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숯은 나무를 태우면 될 일이며 유황은 누가에 누가이(킬리만자로)의 중턱에서 캐낼 수 있었습니다. 시일이 지나면 화포를 만들어 이주를 호령하는 나라로 발돋움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보석을 보냈단 말인가. 녀석들이 정말 신의 가호를 받았나.”

삼한석은 사파이어나 다이아몬드는 아니다. 이현전의 학자들도 분석을 포기한 새로운 보석이니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게 팔리리라. 좋은 일이지만 내 머리가 너무나 아프니 답장을 쓰는 일도 힘에 겨울 지경이다.

작년까지 쉴 틈이 없긴 했다. 종계변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으니 이를 고변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두 번이나 다녀오니 두통이 악화되었다. 처음에는 뇌졸중의 전조 증상이라 생각하였지만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았고 결국 사고가 터졌다.

작년부터 두통과 겹친 어지럼증, 하반신 경련이 일어나며 더 이상의 행동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반신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리는 잘 돌아가니 신기한 일이다. 형님은 내가 서한을 읽으며 웃는 모습을 보면서 억지웃음을 짓고 말을 걸었다.

“몸이 좋지 않으면서도 서한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다니. 그렇게나 좋은 일이더냐?”

“형님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제가 웃음이 나오지 않게 생겼습니까?”

요즘은 형님이 더 정정하시다. 일흔이 넘은 몸이지만 삼대 운동 오백 근은 꾸준히 하시니 나라의 모범이나 다름이 없지. 반면 나의 몸은 점점 수척해지니 이제는 형님이 자주 찾아올 지경이었다. 형님은 서한을 모조리 읽고 접어서 돌려주시고 말했다.

“네가 나라의 복이나 다름이 없다. 입신체비를 가르친 일도 부족하여 네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북경을 두 차례나 오가니 몸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조만간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꿈만 같은 이야기입니다.”

“잠시 소피를 보러 다녀오겠다. 허튼 짓을 하지 말고 푹 쉬고 있도록 하라.”

아마 나의 병은 뇌종양이겠지. 현대라고 해도 생사를 헤맬 질병이며 이 시대에는 답이 없는 불치병이니 더 이상 살기는 글러먹은 것 같다. 그렇게 병상에 누워 있자니 형님이 자리를 피하시고 나는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형님도 나와 같이 있으니 유서를 남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고 서안(붓글씨를 쓰는 책상)을 가져와 붓을 들었다.

“그나마 손이 움직이니 다행이지. 반신 마비였으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형님을 위한 유서라. 그냥 예전에 즐거웠던 일을 잔뜩 적어 두었다. 형님이 우울해 하면 나라 전체가 우울해 지는 일이며 형님 또한 나의 뜻을 알고 있으니 억지로라도 버티시겠지.

안평대군을 비롯한 동생들에게는 당부의 말을 남겨 두었다. 형님은 상왕의 몸이니 종친을 통솔하기 힘든 몸이니 효령대군을 보필하라는 말이었다. 녀석들도 노인이 다 되었으니 멍청한 짓을 하지 않겠지.

효령대군은 아마 백 살까지 정정할지도 모르는데 이건 조금 부럽다. 본래 역사에서도 90까지 살았던 사람이니 잘 하면 백 살을 뚫을 지도 모르지.

현동이를 위한 유서를 길게 작성하느니 녀석이 남긴 서적을 올바로 퇴고하는 일이 좋을 것이다. 덕분에 재산 분배에 대한 뜻을 남겨두고 삼년상을 행하더라도 고기를 거르지 말라 하였다. 이미 금석학을 완성하였으니 내 손을 벗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홍위를 위한 유서도 남겨두었다. 홍위는 내가 병상에 눕자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지만 두통이 몇 년 전부터 있었으니 숨긴 나의 잘못이라 하였고. 부디 형님이 설계해둔 관직 개편을 완수하라 하였다.

홍위의 뒤를 이을 세자에게는 일본을 경계하라 하였다. 역사를 보아서라도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조선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을 지도 모르니. 이건 잠깐?

“임진왜란이 일어나도 큐슈가 함락되고 동래나 좀 두들기다가 역으로 시원하게 밀리겠는걸.”

조선이 현재 수준에서 인구에 비례하여 병사 숫자만 증가하고. 온전하지 못한 일본이 전국시대의 힘을 어떻게든 만들어 낸 비정상적인 상황을 가정해도 경상도 일대가 공격당하는 것이 전부이리라. 유서의 내용을 수정하였다.

“부디 요동을 경계하시며 오우치와 우에스기라는 패를 활용하시여 왜국을 견제하시옵소서. 특히 우에스기 인근의 가이(甲斐) 일대에 좋은 금광이 잠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한명회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남길 유서는 없었지만 조만간 미주를 개척하기 위해 톤도(필리핀)에서 출항할 임사홍을 위한 서한은 하나 작성했다. 이 녀석은 내가 천거한 인재였지.

“자네는 직언을 즐겨 하며 이문을 탐하니 그릇됨과 올바름을 모두 가지고 있네. 삿된 욕심을 버리고 충실히 행동하면 훗날 권세를 누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부관참시를 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라네. 훌륭해.”

이번 원정에는 칠 년이나 휴식했던 홍윤성이 동승한다던데 아즈텍과 접촉해도 금방 돌아올 것이다. 설마 코르테스처럼 오백 명에 불과한 훈련원 병사들로 아즈텍을 무너트리겠어? 조선으로 돌아와 대 함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박살내겠지.

다시 두통이 심해지니 탕약을 들이켰다. 멍 한 기분이 드는 것이 강한 약재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지만 방법이 있나. 유서를 하나하나 비단으로 만든 봉투에 넣고 서안 위에 올려 두었다. 형님이 돌아와서 내 손 끝에 묻은 먹물을 보시더니 한숨을 쉬신다.

“네 녀석은 어릴 적부터 학업을 거르는 일이 잦았다. 나이가 들어서 철이 드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저도 아바마마의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탕약을 마시니 졸음이 올라오는 것이 잠시 쉬고 싶군요. 안사람을 불러와 주시겠습니까.”

“몇 달이 지나면 고희가 다가오거늘 이래서야 고희를 지낼 수 있겠느냐. 나이를 먹었다고 상왕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이 참으로 얄궂은 일이로다.”

거짓말이다. 졸음은 오지 않고 눈이 어두워지고 사지의 기력이 빠져나간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리니 형님이 혀를 차시면서 장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할 일은 다 한 것 같다. 내가 조금만 더 학식이 깊었거나 조금만 더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더욱 훌륭한 일을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후대에 내 행적이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현대로 돌아간다 하였는데 원래 있었던 몸이 사라져서 빙의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대에 살고 있던 또 다른 나에게 덧씌워지는 것일까.

아내의 발소리가 들리며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듯이. 점점 멀어지듯이 작아지고 있다. 누군가 나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누구인지 알아차릴 방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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