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38화 - 눈물의 문 해전 >
조선의 함선이 거대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아랍권에서 사용하는 다우(dhow)와 비견할 수 없었으며. 간혹 사용되는 바글라우(Baghlah) 보다 거대한 함선이었다.
하지만 맘루크 술탄국에 속한 이들은 조선의 함선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기껏 해야 여섯 척이 오갈 뿐이며 절반은 상선이니 설령 적으로 돌변하여도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 여겼다.
“열여섯······. 스물. 평소의 세 배가 넘는 함선이 완전 무장을 했다고?”
성지 메카와 부속항구 제다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다. 이슬람교의 성지이니 제 아무리 메흐메트라 하여도 메카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며 전쟁은 이 고장과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제다를 수비하는 병사들은 스무 척에 달하는 조선 함대에게 공격을 가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한 관리가 용기를 내어 배를 몰고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정선! 당신들 조선이잖아! 조선의 함대인데 왜 정선하라! 정선! 아아악!”
“배가 가라앉는다! 도망쳐라!”
“놈들이 미쳤나보다! 조선 놈들이 우리 배를 통째로 밀어버렸다!”
작은 다우선 하나가 조선 함대를 막아서서 정선을 요구하였지만 스무 척의 풍역선 모두 뱃머리를 돌리거나 멈추지 않았고 배를 들이받아 침몰시켜 버렸다. 거대한 함선이 만들어내는 파도가 끝나자 물 위로 떠오른 것은 나무토막 몇 개가 전부였다.
“일단 전령을 보내! 우리의 전력으로 저 함대를 공격했다가는 몰살당한다!”
메카의 부속 항구인 제다를 스쳐 지나간 조선의 함대는 다음 항구인 얀부로 향했다. 동이 틀 무렵 저 멀리서 다가오는 풍역선의 모습을 본 얀부의 관리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올 때가 아닌데 조선 녀석들이 왔군. 평소처럼 제다에 기항하지 않고 여기 까지 오다니. 무역을 중단하겠다는 말을 이 년 만에 뒤집고 몸이 달아올랐나 보군?”
“제다를 지나쳤다 하여도 수가 조금 많지 않나? 보통 제다에 배를 정박하고 우리의 배로 갈아타는데 어찌 좀 이상한걸. 지금 병사들은 뭘 하고 있지?”
“병사? 파티샤가 알 카히라(카이로)를 공격한 덕분에 여유분의 병사가 텅텅 비었지 않나. 군사 관련 업무는 파티샤가 파견한 예니체리 1개 오르타(196명)가 해결할 것이니 가만히 있게.”
항구에는 관리들의 명령을 듣지 않는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 정확히는 지방 도시에 파견되는 제마아트(Cemaat)에 속한 병사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성지 메카와 그에 속한 항구인 제다와 달리. 맘루크 제국의 확고한 영역이었던 얀부의 병사들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들을 대신한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들은 다우에 올라타 조선의 함대로 접근하였다.
“별다른 일이야 있겠나. 이 년 정도 무역을 끊으니 몸이 달아올라서 사죄의 물품까지 가져온 것이겠지. 듣자하니 조선이라는 나라는 아나톨리아보다 작고 척박한 고장이라 하던데.”
“애초에 파티샤는 조선을 아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몇 척이 들어오는지 모르겠군.”
- 쿠웅!
천둥과 같은 소리가 들리며 다우선 근처에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항구의 관리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지만 예니체리에 속한 이들은 화포를 사용하였으니 명백한 선제공격이라 판단하였다.
“조선 놈들이 미쳤다! 놈들이 화포를 쏘고 있다 지금 제정신인가!”
“우리를 맘루크 놈들로 오해하는 것이 분명하니 당장 포격을 중단하라!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누가 있나!”
“애초에 놈들이 우리의 말을 해야지! 배를 돌려라! 놈들의 함선을 상대할 방법이 없으니 어서 도망쳐!”
판단은 빨랐지만 조선의 화포는 더욱 빨랐다. 다우선이 머리를 돌리기도 전에 여섯 발의 포탄이 날아들었고 나약한 다우의 선체는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단 두 발의 포격이 명중하였지만 돛대가 박살나고 선체가 동강나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얀부의 관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난을 시작하였고 조선 함대는 거리낌 없이 항구 근처로 접근하였다.
이미 백양 왕조를 통해 들은 이야기였지만 생각보다 적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아니 적은 수준도 아니고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처음 접근한 함선의 지휘관을 죽이며 사라졌으리라. 남이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곳이 첫 목표인 얀부 항이다! 깃발을 올리고 징을 울려 일자로 정선하도록 명하라!”
아무리 적국이라지만 항구 곳곳에 명백한 민간인이 보였다. 그물에서 물고기를 털어내던 어부들과 짐을 하역하는 일꾼들이 도망치는 모습이 남이의 눈에 들어왔고 그들이 피난할 시간을 주었다. 이윽고 한 각이 지나자 남이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모두 멈춰 있는 표적이니 철저히 연습한 대로 쏘아라! 숙련병들은 가급적 적중하기 힘든 대완구(大碗口)로 비격진천뢰를 쏘고 아직 미숙한 이들은 천자총통을 쏘아라!”
절대 당해낼 수 없는 싸움이었다. 작은 무역항인 얀부에 있는 함선은 바글라우 두 척과 다우 서른 척이었으며 화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싸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병사들도 도주했던 것이다.
천자총통이 배를 노려 머리통만한 구멍을 뚫어버리고 대완구가 비격진천뢰를 쏘아대며 항구 시설과 창고들을 공격하였다. 이윽고 한 창고에서 기름이 새어나왔는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마침 잘 되었구나! 지금 비격진천뢰를 날린 병사가 공을 세웠다!”
항구였던 잔해 속에서 불길이 넘실거리며 번져나갔다. 사람이 사라진 항구가 불길에 휩싸이고 조선의 함대는 거리낌 없이 뱃머리를 돌려 북서쪽의 다음 항구를 향하였다.
보이는 항구라는 항구에 모조리 포격을 퍼부은 조선 함대는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였다. 홍해의 관문인 바브엘만데브 해협으로 다가가니 작은 선박들이 조선 함대를 염탐하기 시작했다. 배에 탑승하고 있던 백양 왕조의 관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애초에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메카와 부속 항구인 제다를 공격하지 않았으니 맘루크 놈들과 메흐메트도 몸이 달아서 잔존 병력을 집결시키라 하였겠지요.”
“당신들의 눈물의 문이라 부르는 해협에서 결전을 벌일 준비는 되었소. 애초에 스무 척의 함선을 동원한 이유가 지금과 같은 전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오.”
본래 홍위가 세운 계획은 소탕전이었다. 한 차례 사투를 벌이고 가장 거대한 항구인 제다를 초토화시켜 대응 체계를 무력화 한 다음 홍해의 항구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을 후원하는 백양왕조는 격렬히 반대하였다. 제다를 공격하려면 근방의 메카를 공격하는 일이 당연하며. 메카는 이슬람의 성지이자 근원이니 자신들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남이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배를 보며 말했다.
“오사만국의 군주도 몸이 달아 있었나 보구려. 저렇게 곧바로 오는 배는 자고로 사절(使節)이 타고 있을 것이오.”
“초록색 바탕에 검은 초승달과 별. 오스만의 사절이 분명합니다.”
보름 동안 신나게 홍해 일대를 헤집고 다녔으니 홍해 내부는 몰라도 외부에 있는 함대들이 모조리 집결하였을 것이며. 오스만 제국도 육로를 통해 사신을 파견한 것이 분명하였다. 쪽배가 접근하고 여섯 명의 사람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조선의 함대가 이렇게 강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위대한 파티샤의 하인이자 함대 지휘관인 다부드 파샤(Davud Pasha)입니다.”
“조선국의 원정 함대 도원수(都元帥) 남이요. 그런데 위대한 파티샤라 하면 오사만국의 군주가 직접 보낸 신하라는 말이 맞소?”
“그렇습니다. 조선의 분노에 대하여 파티샤께서는 절실히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시기가 적절하지 않으니 아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조선이 상대한 이들은 모두 파티샤의 병사들이었습니다.”
공손한 어휘를 사용했지만 다부드의 표정과 몸동작은 경멸과 분노를 품고 있었으니 이는 메흐메트 2세의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이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다부드의 말이 이어졌다.
“실은 처음 소식을 접한 파티샤께서 알 카히라에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격노하시어 조선의 함대를 몰살시키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어 전해진 소식에 메카와 제다를 고스란히 남겨두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적잖이 풀리셨습니다.”
“메카는 회회교의 성지라 하였소. 아국으로 따지면 종묘와 같은 곳인데 아무리 부덕한 이라도 남의 묘를 해하는 일을 하지 않소이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파티샤께서는 이를 참작하여 조선의 분노는 정당하며, 맘루크를 징벌하였으니 무역을 재개하려는 뜻을 품으셨습니다. 여기 국서가 있으니 조용히 조선으로 돌아가시면 될 일입니다.”
명분과 실리 가운데 실리를 택한 모습이니 남이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분명 항복과 죽음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 할 것이라 여겼지만 메흐메트 2세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한 것이 분명하였다.
남이에게 전달된 메흐메트 2세의 국서지만 남이는 의심이 가득 찬 표정으로 눈을 좁히며 국서를 이리 저리 돌려보고 봉인이 뜯겨진 유무를 확인하였다. 그런 모습을 본 다부드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는 진정 파티샤의 글을 담은 국서입니다.”
“그렇소? 위대하시고 잘난 분께서 아국으로 보내는 서한을 모조리 위조하고 구주(유럽)와 서역 일대의 소식을 뒤늦게 전하는 일을 알게 되었으니 의심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소!”
“그게 무슨 망발이십니까! 파티샤께서 언제 그런 일을 하였다 하십니까!”
“아국은 이미 이주(아프리카)를 넘나드는 항로를 개척하고 포도아(포르투갈)와 접촉하여 교역을 시작하였소! 포도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식과 아국에 전해진 서한의 내용이 팔 년 이상 차이가 나는데 이것이 대체 무슨 짓이오!”
모든 일은 메흐메트 2세와 소수의 신하들이 필사가 들을 시켜 벌인 행적이었다. 일개 지휘관인 다부드가 알 방법이 없었기에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남이의 말을 부정하였다.
“이럴 리가 없습니다! 대체 이프리카야를 어떻게 돌아가고. 지금 농담 하지 마십시오! 파티샤께서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니 당장 조약을 맺으시고 무역을······.”
“오사만국의 신하이면서 혀를 잘도 놀리시는구려! 애초에 서한을 위조한 이의 신하이니 당신의 모든 말을 믿을 수 없소! 여봐라!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아교를 가져오너라!”
임해도감 병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다부드와 호위에 나선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사지를 묶인 그들의 입에 재갈이 물려졌고. 대야에 가득 담긴 걸쭉한 아교가 남이에게 전달되었다. 남이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일전에 오사만국에 다녀온 경음당(鯨飮堂 - 홍윤성의 호) 대감께서 했던 말이 있소. 아교를 사용하여 눈썹의 형태가 일그러져 버렸고. 눈썹이 훼손된 자는 사내구실을 못한다 하여 손가락질을 하였다고.”
그의 눈썹 위로 걸쭉한 아교가 발라졌다. 다들 군문에 속한 자이니 아교가 무엇인지 알았으며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아교가 굳어 딱딱해지자 남이는 아교의 끝을 잡고 말했다.
“억울해 하지 마시오. 당신들의 군주는 거짓을 논하는 자이니 신하 또한 벌을 받아야 하는 법이오. 본디 눈썹은 거짓 웃음과 진실한 웃음을 가리는 척도가 아니겠소. 앞으로 거짓을 논하기 편할 것이오!”
눈썹은 아교와 함께 사라지고 모근마저도 눈썹에 달라붙어 뽑혀 나왔다. 아교 덩어리를 손으로 털어 바다에 버린 남이는 재갈과 밧줄을 풀어주고 태연하게 말했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소. 오사만국의 잘못을 벌하러 온 것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아국의 함대를 막아내 보시구려! 참 국서는 반드시 전달해 주시오. 거짓이 없는 참된 국서요.”
“네놈들을 반드시 생포하여 산 채로 말뚝에 꿰어 버리겠다! 사지를 톱으로 토막 쳐 버릴 것이다! 이 샤이탄(사탄)보다 더 한 짐승들아!”
마지막까지 사신의 의무를 다하려는 듯이 조선의 국서를 주먹으로 움켜쥐고 품속에 넣은 다부드는 괴성을 지르며 함대로 돌아갔다. 잠시 뒤 선창에 숨어있던 백양 왕조의 관원은 혀를 내두르며 남이에게 염려 섞인 시선을 보냈다.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사람이 사람에게 할 짓이 맞습니까?”
“생각 같아서는 사지의 모든 털을 아교로 뽑아버리고 싶었소. 그나저나 관계를 청산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었소?”
“다부드는 저희에게도 명성이 알려진 자입니다. 아마 십여 년 정도가 흐르면 대재상의 자리에 오를 지도 모르는 인재이지요. 그러한 인재가 평생 눈썹을 그리고 다니게 되었군요.”
남이는 크게 웃은 다음 천리경을 들어 적의 함대를 확인하였다. 풍역선과 비슷한 크기의 대형선이 열다섯 척, 일본의 세키부네보다 작은 다우가 백여 척에 달하였다. 확인이 끝난 남이는 목을 풀고 병사들에게 크게 외쳤다.
“들어라! 적들이 있는 눈물의 문이라는 해협(海峽)은 폭이 사십 리에도 미치지 못하고 흐름이 잔잔한 고장이다! 이미 적선이 백여 척 이상 도열하여 있으니 참으로 잘 된 일이 아니겠느냐!”
장병들 모두 저 머나먼 남동쪽에 도열한 함대를 보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고토열도 해전은 기동력과 급습을 통한 적의 분열을 유도한 해전이었지만 이번 해전은 달랐다.
해류도 완만하였고 풍향도 옆으로 불고 있으니 모든 면에서 공평한 조건이었다. 더군다나 이국의 함선이 어떠한 전략을 발휘하는지 알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남이는 호기롭게 말했다.
“아국의 함대와 정면으로 싸우려 들었던 이가 있더냐? 해협은 좁고 상대는 의욕이 넘치지 않느냐! 사방이 적이니 닥치는 대로 쏘아라! 산군이 양떼를 만날 적과 마찬가지로 모조리 몰아치고 분쇄하라!”
전투의 시작은 다부드의 의견이 잔뜩 들어갔을 이슬람 함대의 무차별적 돌격과 화포 사격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아닌 맘루크 제국의 군대였으니 화약병기의 수도 적고 성능도 부족하였지만 화포가 있는 것은 당연하였다.
위력보다 사정거리를 중시한 함포인지 풍역선 근처에도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한 발이 적중하였다. 두터운 목판을 뚫은 포탄은 애꿎은 병사 한 명을 휩쓸어 버렸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열다섯 척의 바글라우가 일제히 화포를 날려도 치솟은 물기둥은 사십 개에 불과하였다. 조선으로 치면 현자총통과 비교할 만한 소구경 화포의 사격이며 다급한 사격이었는지 명중률조차 형편없었다.
“일제히 발사하라!”
적의 산발적인 사격으로 거리를 측정하였으니 천자총통과 뇌력포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금속 못이나 나무못을 사용하지 않고 야자 밧줄로 엮은 아랍의 함선들은 화포의 사격을 맞고 끔찍한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갤리,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젓는 바글라우는 거대한 선박이지만 구조 자체가 취약하였다. 선원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포탄이 스치기만 하여도 야자 밧줄이 뜯겨지며 물이 들어찼다. 화포 사격이 불가하다 여긴 순간 모든 배들이 노를 저어 일제히 돌격하였다.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 접근한 맘루크 함선이지만 침묵하고 있던 근접전용 화포, 벽력포가 불을 뿜었고 병사들이 어육이 되어 짓뭉개졌다. 선박 위로 임해도감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돌격하였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날렵한 곡도를 휘두르는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와 도끼를 휘두르는 임해도감 병사들이 백병전을 시작하였지만 예전 전쟁과 다르게 공방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이 새끼들 칼이 생각보다 센데? 갑옷도 튼튼하고.”
“왜놈들과 달라, 우리보다 튼튼한 갑옷을 입었으니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크게 당한다고.”
오히려 무장이 부족한 임해도감이 서서히 피해를 입으며 백병전의 흐름이 뒤엎어지려 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최정예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들의 몸집도 컸으며 무장 또한 충실하였다. 그러나 한 예니체리가 피를 쏟으며 고꾸라졌다.
화포와 다른 작은 포성이 지속적으로 들려오며 예니체리들이 줄줄이 쓰러지며 대열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방패판 위로 삐죽 튀어나온 총열을 본 예니체리는 눈을 부라리며 손가락질을 하였다.
“저건 아르케부스다! 조선 놈들이 베네치아와 손을 잡고 아르케부스를 쓴단 말이다!”
“그게 쓸모가 있는 무기였어? 갑옷이 왜 뚫리는······.”
아르케부스. 초기 화승총은 이미 유럽에 퍼져 있었지만 사용하는 국가도 적었고 숫자도 적었다. 실효성과 가격 때문에 제식병기로 채택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조선군이 사용하는 물건은 아르케부스가 아니었다.
훗날 머스킷으로 불리는 보총은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위력과 정확도 모두가 서양에서 사용하는 아르케부스와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예니체리들이 몸을 사리는 사이 임해도감 병사들이 기세를 올렸다.
예니체리들이 몰살당한 바글라우는 하나씩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임해도감 병사들이 배를 제압하고 바닥에 척탄을 날리니 침수를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풍역선 한 척도 화공에 휩쓸려 불길을 뿜으며 돛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퇴각하는 적함을 추격하지 마라! 병사들을 구원하는 일이 먼저이다!”
한 척의 풍역선이 불길에 휩싸인 동안 열 척이 넘는 바글라우가 침몰하고 도주하거나 침몰한 다우는 수를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필사적으로 결집한 이슬람 함대가 남긴 상처는 풍역선 한 척의 완파와 병사 구십여 명의 목숨이 전부였다.
병사들을 수습한 다음에는 포로를 거둬들일 차례였다. 완파된 기함의 나무토막을 잡고 있던 다부드가 포박되어 남이 앞에 놓였고 남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싸워 보니 어떻소?”
“이 샤이탄 놈들! 어느 새 베네치아와 손을 잡고 이런 아르케부스 병사를 양성하다니! 네 놈들은 파티샤의 은혜를 저버린······. 잠깐! 지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패장이 말이 많소이다. 본디 목숨을 거둬야 하지만 국서를 가진 몸이 아니시오. 그러니 절충하여 생명과 같은 수염을 거둬들이겠소.”
잠시 뒤. 비명과 함께 다부드 파샤의 수염과 약간의 살가죽이 바다 위에 버려졌다. 쪽배에 옮겨져 제다에 버려진 다부드와 패잔병의 보고를 들은 메흐메트는 분노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삼 년 넘게 칩거하다 세상을 떠났으나 이에 대한 소문은 퍼져나가지 않았다.
후계자의 위신을 생각한 메흐메트 2세는 이번 사태를 자신의 잘못이라 수습하였고. 그의 아들 바예지드 2세는 역사보다 조금 빨리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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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9년 4월. 피렌체의 미술가들이 포르투갈을 통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나라는 평안했다. 하지만 나의 집에서 모시고 있던 수양대군의 어머니, 소헌왕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본래 역사보다 훨씬 오래 사셨으며. 사망 원인도 며칠 동안 정신을 차리시지 못하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한 것이니 노환이어서 크게 슬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국상은 국상이며 형님은 다시금 삼년상을 지낼 마음이 분명하셨다.
- 향이에게 유고를 남긴다. 네 나이도 환갑이 넘었으니 예전에 주상이 정하였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아니 되느니라. 본디 환갑이 넘은 자는 상중에 몸이 상하는 일이 당연하니 상을 치르지 못하게 하지 않았느냐.
세종대왕님처럼 종친들에게 유고를 전달하지 않으셔도 형님을 위한 뜻은 남겨두고 계셨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묘지에 봉안하였으나 형님은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나서게 되었다.
3개월이 흘러 다시 49재와 졸곡제가 끝났으며 영릉의 이름은 소헌왕후님을 합장하여 영녕(永寧)릉으로 완성되었다. 무덤 앞에 지어진 초막에서 형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말했다.
“몸이 한 번 상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삼년상을 치르신다면 저도 초막을 짓고 함께 하겠사옵니다. 본디 어마마마께서 저의 집에서 피접하셨으니 제 잘못이 크지 않사옵니까.”
“그러하면 일 년 동안 상을 치른다 하여도 아니 되겠느냐.”
“일 년 이라 하시면 신이 말릴 방도가 없사옵니다. 하지만 몸이 상하게 되면 당장 예절을 중단하시고 몸을 보하셔야 하옵니다.”
결국 절충하고 절충해서 일 년이다. 지금 상황에 형님이 돌아가시면 홍위도 상을 치러야 하는데 홍위의 자식은 딸이 셋에 아들이 하나다. 다행히도 왕비 소실의 적자이지만 세자의 나이가 열여섯 살에 불과하다.
홍위의 나이가 마흔 둘인데 홍위 나이 스물다섯에 세자가 태어난 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꽤나 빠른 것이지만 이 시대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라 문제다. 보통 십대 후반에 아이를 가지니까.
집으로 돌아와 방 안에서 현동이가 저술한 금석문 관련 서적의 퇴고를 담당하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현대에서는 상식이지만 이 시대에는 비상식적인 일이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형님이 벌컥 돌아가시면 홍위가 삼년상을 치러야하고.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잘못되면 열일곱 살의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이게 참 문제란 말이지. 그렇다고 정산대군이 허튼 생각을 품지는 않을 것이고.”
홍위의 동생인 정산대군과 서자인 노산(魯山)군은 정말 조용히 살고 있다. 홍위의 배다른 형제라 하여도 나이 터울이 제법 나는 덕분에 경쟁 상대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여하튼 문제는 문제인데 머리가 심각하게 아프다.
“이놈의 두통은 일 년 전부터 가실 날이 없어. 이 시대에 MRI가 있을 리도 없으니 대책도 서지 않고. 거기 있느냐! 차를 한 잔 우려 오너라!”
환갑이 지나서 그런지 이상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차를 마시면 나아지지만 오늘 저녁에는 국상 중이라 술을 마시지 않고 간단한 다회(茶會)를 열어 팔 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홍윤성의 복귀를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할 예정인데 차를 마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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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회라 하여도 모인 사람들은 많았다. 상왕인 형님이 삼년상이 아닌 일년상을 치른다 하여도 고관대작의 몸으로 사치를 부리기 힘들었고. 그저 모여서 얼굴이나 보자는 의도가 대부분이었다.
홍위도 너무 억눌러 두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어서 매번 밤을 지새우는 권절과 신숙주도 참가하였다. 나와 인연이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니 첫 차는 가누(드롭커피) 방식으로 우려낸 커피로 시작했다.
“그간 고생이 많았소. 국상 중이니 술은 되었고 잘 우려낸 차나 한 잔 하시구려.”
영의정은 구치관(具致寬)이지만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지나치게 노령인지라 함부로 몸을 놀릴 방법도 없었으니 국상이 끝나는 대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리라.
홍위가 의정부서사제가 아닌 육조 직계제로 전환하였으니 실질적으로 삼정승 가운데 일하는 이는 우의정 신숙주 한 명이었다. 신숙주는 내가 따라준 커피를 받아들고 멋쩍게 웃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홍윤성이다. 지난 팔 년 동안 명나라의 신하로 큐슈에서 고생하였으니 얼굴이 반쪽이 되다 시피 하였다. 홍윤성에게도 커피를 한 잔 따라주자 생글생글 웃으며 고마워하였다.
“차는 질리도록 마셨지만 가배(커피)는 드물게 마셨습니다. 그나저나 대군어른의 환갑연에도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이시오. 명나라 황상의 명을 받들어 육주(큐슈의 남쪽, 명나라 영토)의 치안을 담당하였는데 이는 나라의 일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나저나 재미는 좀 보았소?”
이미 홍윤성에 대한 소문은 들었다. 큐슈의 오니, 파란 도깨비라는 뜻의 아오오니, 파란색이었는데 붉게 물들었다 하여 아카오니 그리고 오니대장 등등.
그런 자가 큐슈에 머물며 조선군과 명나라군 모두를 통솔하였으니 선물도 많이 받았을 것이고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윤성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에 분노와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물론입니다! 아주아주 재미있어서 구주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만 있었습니다! 황상께서 내리신 은혜가 너무 많은지라 은혜를 구주 사방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뿌려 주었지요!”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오? 구주 사방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뿌려 주었다?”
“예전 북방에 있던 악적 이만주의 일을 알고 계십니까? 당시에 명나라 황상께서 각종 직위를 내려 이이제이(以夷伐夷)를 추진하셨지 않습니까.”
물론 기억한다. 명나라 도독동지 이만주와 도독동지 이고남합의 사건도 있지. 이이제이를 위해서 닥치는 대로 관직을 내려주고 혜택 따윈 없으면 서로 싸워서 상잔하는 방식이잖아. 그런데 홍윤성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니 소름이 돋았다.
“옛 구주이자 명나라의 영토가 된 지역에는 지금 첨사(명나라 정4품, 조선으로 따지면 정2품)들이 수십 명이나 있으며 칼만 차고 있어도 천호(千戶 - 명나라 정 5품, 조선으로 따지면 정 3품)라 불립니다. 이들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겠습니까?”
“분명 서로서로 관직을 가지고 있으니 소꿉놀이를 하면서 녹봉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고.”
“아닙니다! 소꿉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개나 소나 칼을 차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기 바쁘니 그럴 적마다 제가 소꿉놀이를 치우러 가야합니다! 다 죽여 버리면 놀 사람도 없으니까 정말 행복하더군요!”
한명회도 신숙주도 침을 꿀꺽 삼키며 홍윤성을 바라보았고 나도 소름이 돋아서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여진족 다루듯이 대충 마구잡이로 관직을 주어 이이제이를 노린다고?
명나라에 속한 큐슈의 인구는 칠십만 명에 달할 것이다. 인구 밀도가 극히 적은 만주의 여진족도 아닌 하극상이 일상이고 제대로 된 구심점도 없는 왜인들에게 닥치는 대로 관직을 하사한 것이다. 홍윤성은 크게 웃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냥 죽였습니다. 과거에 왜구(倭寇)였던 놈이 천호랍시고 까불면 천 갈래로 찢어버렸고! 공경인지 뭔지 하는 놈이 자신의 부하에게 능멸당하면 공경과 부하를 같이 족쳤지요! 그래서 팔 년 동안 죽인 왜인만 삼만 명이 넘어갈 겁니다!”
“진정하게. 일단 진정하고 심호흡을 하게나.”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흥분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주상전하에게 말씀을 올리면 크게 걱정하실 것인데 이 일을 어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숙주가 나와 한명회 그리고 권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셋 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홍윤성을 최소한 몇 년은 쉬게 하자는 뜻이었으니 오랜 간만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영덕제의 무성의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민족을 다스리는데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예전의 방식을 고수하니 이런 문제가 벌어졌고. 홍윤성은 아마 무장할 수 있는 모든 자들을 모조리 죽여서 해결한 것이다. 계속된 침묵을 깨트린 자는 유응부였다.
“실은 제가 포도아와 교역을 하고 피렌체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았습니까? 중간에 구풍의 징후를 감지하여 이주의 이름 없는 해안에 정박하였는데 신기한 녀석들을 발견하였습니다.”
“품속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구려. 혹여나 작표(猎豹 - 치타)요?”
“아닙니다. 뭍에 사는 거북이 새끼를 가져왔습니다. 참 특이하게 생겼더군요.”
유응부가 꺼낸 녀석은 손바닥 크기의 거북이였다. 등골이 도랑처럼 파여 있고 갈색의 줄무늬가 있는 것이 특이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유응부는 품에 들고 있던 당근을 내어주면서 말했다.
“본디 거북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물에 살아 기르기 어려운 족속입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뭍에 살며 채소를 먹는 것이 전부입니다. 스무 마리 정도를 잡아왔는데 길러보시면 어떠하십니까?”
“이주에 살던 거북들이니 대양도에서 길러야 하겠구려. 나는 관심이 없으나 좌상께서는 어떻소?”
“그렇지 않아도 둘째 녀석이 대양도에 땅을 놀리는 것이 있으니 거기서 기르면 될 일입니다. 저에게 주시지요.”
뭔가 현대에서 본 것 같은 거북이를 받아든 한명회는 눈을 굴리면서 이런 저런 이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귀갑(龜甲 - 거북이 등껍질)을 팔아치울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한명회는 근데 항해를 떠나야 하지 않나?
“좌상 대감은 조만간 미주를 찾아 떠날 것이라 하였는데. 준비는 끝났소?”
“새로 발견한 석상도(라파누이, 이스터 섬)은 정말 골치 아픈 고장이어서 일 년이 미뤄진 내후년이 되었습니다. 모든 물산이 부족한 고장은 처음 보았으니 얼마나 기묘한지 모를 일입니다”
한명회가 다녀오지 않았지만 유자광의 보고를 받은 자이니 설명이 끝없이 이어졌다. 거대한 석상이 있어서 기묘하게 생각하였지만 섬에 나무가 없어서 배를 수리할 재목도 없었으며. 원주민들은 모두 굶주려서 걸신들린 듯이 식량을 탐하였다고.
“덕분에 석상도에 있는 이들을 열산도로 옮겨 놓기에 이르렀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덕분에 유 직장(直長 - 종6품 관직)과 임 직장이 네 번이나 들락거려야 하였지요.”
“기갈에 시달리던 섬이라 하니 아국이 당도한 것인 천운이나 마찬가지구려.”
“주상전하께서 크게 노하셔서 일 년의 시간을 들여 석상도를 온전한 섬으로 만들라 하셨습니다. 이러다가 배 위에서 칠순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명나라의 태감 정화가 62세까지 원정을 다니다가 숨을 거뒀는데 한명회는 정말 칠순을 바라보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그나저나 이스터 섬의 사람들은 조선을 숭배할 지경에 이르렀겠군.
그런데 머리가 아파오니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분명 이스터 섬과 관련해서 뭔가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너무 옛날 일이라서 떠올리기도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