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23화 (223/573)

< 3장 37화 - 마사이 >

내모아의 말은 틀리지 않다. 역사상의 많은 민족들도 부족 단계에서 힘을 합쳐 발전하고 연합 국가를 형성하였지만 끝까지 발전한 경우는 별로 없다. 서로 묵인하고 있던 갈등이 불거지고 뭉쳤다 흩어지길 반복하다 쇠락하는 것이다. 나도 제자의 말에 동조하였다.

“틀린 말은 아니라네. 명확한 기반과 확고한 의지를 가진 이가 없다면 서로 만용을 부리다가 자멸하거나 외침에 견디지 못하고 몰락하는 일이 역사에 두루 있겠지. 더군다나 자네들이 머무는 이주(아프리카)는 드넓은 땅이지.”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면 조선의 풍속을 물려받은 나라를 세워야 하는 일이 가장 좋다 여겼습니다. 하지만 한낱 꿈에 불과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는 국가인 에티오피아 제국이 있다. 역사도 깊고 왕조는 몇 번 교체되었어도 국가의 핵심 기조는 유지되고 있으며. 서양과의 교류가 끊기고 이슬람 세력에게 공격당하는 국가이다.

마사이족이 초원의 유목민족이 아니고 폭력적인 약탈민족이라면 통제할 방법은 물론이고 명분도 필요하다. 본래 동맹을 주선할 생각이었지만 전략을 조금 변경해야겠다. 역사상에는 명분도 인덕도 없는 이가 힘으로 명분을 쟁취한 사례가 여럿이 있다.

“자네가 사서를 많이 탐독하였으니 들은 바가 있을 것이라네. 천자를 옹립하여 인망을 되살리고 명분을 획득하여 권력을 휘두른 이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네.”

“물론입니다. 진수의 삼국지를 읽어 보았는데 한의 마지막 황제 유협(劉協)은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욕망을 가진 이들에게 휘둘리다 조조에게 옹립되어 이용당하였습니다.”

“서주의 백성들을 학살하였던 조조도 천자를 옹립하여 명분과 관직을 얻자 원소를 꺾을 수 있었지. 자네들이 아무리 난폭하여도 조조와 비견할 일을 저질렀는가?”

본래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하지만 역사서를 읽다니 설명하기 편해졌다. 서주 대학살을 벌인 조조는 헌제를 옹립하여 권력과 명분을 얻어내려 하였으며 성공하였다. 하지만 내모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저희가 천자와 같이 옹립할 국가가 없습니다. 주변에는 기껏 하여야 회회교(이슬람교)에 속한 이들이 전부이며 이외에는 저희에게 착취당하던 부족만 존재할 뿐입니다.”

“내 생각은 다르네. 내가 보기에는 이주에 존재하는 국가 가운데 역사가 깊은 고장이 하나 존재한다네. 그저 추정에 불과하지만 만국전도를 통하여 알려줄 것이네.”

역사가 깊은 고장이라는 말에 의문을 품는 내모아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에 제작한 만국전도. 아직 호주가 그려져 있지 않은 녀석을 들고 와서 손가락을 짚어나갔다.

“자네들은 퉁아니에 속한 이들 중 가장 남쪽에 기거하는 이들이라 하였네. 또한 자네들은 북쪽에서 강을 따라 계속 남하하였다고 하니 대략 이러한 경로로 남하한 것이 아닐까 하네.”

나일 강의 경로가 이런 식이었나? 에티오피아로 흐르는 청나일 강이 아니고 백나일 강의 흐름이 탄자니아까지 흘러 내려오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내모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남하하면서 수많은 부족들을 복속시켰고 약탈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조선과 만난 탄주현이 저희가 거주하는 고장의 남쪽 끝자락이지요.”

“자네들의 조상이 남하하면서 모르고 지나친 곳이 있었다네. 서역의 역사에 대하여 배웠는데 옛 대진국(로마)과 동맹을 맺었던 국가가 두 개나 이주에 있었으며 이미 멸망한 애급(埃及 - 이집트)을 제외한 하나는 존재할 것이 분명하네.”

나를 제외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에티오피아라는 국가, 정확히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솔로몬 왕조의 정체에 대해 아는 이가 없을 것이다. 아마 가장 진실에 접근한 자는 일대의 이슬람 세력일 것이지만 귀찮은 토착민이라 생각하겠지.

심지어 서양인들은 명확한 정체도 모르고 동방에 있는 전설적인 사제왕 요한의 기독교 왕국, 속칭 프레스터 존 왕국이라 생각하고 있다. 내모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대, 대진국이라 하면 춘추전국(春秋戰國)과 비견할 역사를 가지고도 남는 고장입니다. 그런데 대진국과 동맹을 맺었던 국가라 하면 대체 얼마나 역사가 깊은 것입니까?”

“물론 온전한 왕조가 이어지지 않을 가망성이 높네. 천 년을 넘는 왕조가 이어질 연유는 없지만 과거의 국가를 계승하며 쇠락을 반복하였으니 후계라 자처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방법이 있으십니까? 저희는 그러한 일을 듣지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현재의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가 통치하는 영역에 손가락을 들이댔다. 마사이족이 머무는 곳에서 북쪽으로 1,000km쯤 될 것이며 한반도를 횡단해야 할 정도로 먼 고장이다. 내모아는 생각 보다 가까운 곳이라 여겼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전부터 의문이 있었지. 어찌하여 맘루크국의 강역이 끊겨 있으며. 스와힐리(아프리카 서해안 일대의 이슬람 국가)라 부르는 회회교 세력은 해안 일대에 기거하고 내륙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겠는가.”

“근방에 다른 국가가 있어서 침범할 수 없는 노릇일지도 모르지만 일대가 사막이어서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땅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일전에 오사만국의 군주가 역사를 논한 적이 있네. 알 쿠드스(예루살렘)로 구주의 국가들이 침공을 할 적에 이들을 돕는 검은 얼굴의 병사들이 동쪽에서 나타났다고. 당시에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생각하여 보니 아닌 것 같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을 다룬 영화인 왕국과 천국에서 풍습이 다른 흑인 기사가 나온 사례를 참고한 것이지.

하지만 역사를 아는 것의 장점이 뭐겠어? 단편적인 사실을 가지고 정답을 조합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내모아는 생각에 잠겨있다 나의 추론을 받아들이고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스승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대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던 오래 된 국가와 연을 맺어 좋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네들은 이미 회회교에 속하는 이들과 척을 지었네. 듣자하니 회회교 상인들이 수십 년 전에 자네들을 습격하여 노예로 부리려 하였고. 격렬히 싸우다 여럿이 죽고 다쳤다 하였네.”

“저희 부족이 십여 년 전에 습격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용맹한 전사들이 몇 배에 달하는 적과 굳건히 싸워 가까스로 몰아낸 적이 있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일을 생각하여 보게. 구주의 국가를 도울 정도로 회회교와 사이가 좋지 않은 국가가 아닌가. 자네들이 이러한 국가와 동맹을 맺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반 이슬람 사상으로 결집한 초월적 국가의 탄생이지. 제대로 된 힘도 없이 고립된 에티오피아 제국은 마사이족의 무력을 절실히 원할 것이며. 이들을 옹립하면 귀찮은 일을 모조리 처리해 줄 것이 분명하다. 내모아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라 여겼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나긴 세월을 시달리며 지내온 이들을 옹립하면 거칠 것이 없다네. 그저 자네들의 내분만 조심하면 귀찮은 일을 모조리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훗날이 되어 구주까지 세력을 뻗칠 지도 모르는 일이지.”

사상? 이들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할 무렵의 풍속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정교회(正敎會)이다. 함부로 선교 활동이나 백인의 짐을 내세웠다가는 정말 죽기 직전까지 맞고 쫓겨날 것이다. 내모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혹여나 나라가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네. 하지만 회회교에 속하는 이들이 귀족 가문들을 철저히 몰살시켰겠나? 혹여나 일이 틀어지면 그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면 될 일이네.”

“스승님의 혜안이 머나먼 이주의 변방까지 닿아 있으니 미욱한 제자는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네. 이제 나라를 온전히 유지할 방법을 알려 주었으니 온전히 유지할 나라를 세우는 것은 자네에게 달린 일이 아니겠는가.”

이쯤 되면 내가 할 일은 모두 다 했다. 조만간 환갑이 다가오는데 이 나이 먹고 아프리카에서 왕 노릇을 하라고? 마흔 정도면 모르겠지만 예순이 다 되니 의지도 욕구도 없다.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내모아는 지도를 뚫어져라 노려보다 나에게 절을 올렸다. 갑자기 무슨 절일까 하였는데 이어지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스승님께서 불초 제자의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이렇게 길을 알려주신 분이니 저희가 세울 나라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퉁아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나라의 이름으로 삼기 어렵습니다.”

“사람이라는 뜻이면 부족함이 있군. 그렇다면 자네들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이를 마사이라 부른다 하였네. 그렇다면 마사이(Maasai)라 하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마사이라 하셨습니까?”

“자네들이 나라를 세우면 지금과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네. 말을 할 줄 알고 글이 통하면 모두 자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인다 하면 복속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네.”

물론 내 편의적인 생각이다. 마사이족을 퉁아니라 칭하니 불편함이 있어서 아예 현대에서 따 온 대로 마사이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단어인, ‘말을 하는 사람’을 가져온 것이다. 그렇게 대충 지어줬는데 감동하였는지 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마사이는 같은 연배라 하면 차별 없이 모두 동속(同俗)으로 여기는 저희의 뜻과 닮아 있습니다. 국가의 시조가 누가 되었던 스승님의 존함을 남길 것이니 이를 받아 주십시오.”

“그렇다면 어찌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눈물을 흘리면 근손실과 직결되는데 눈물을 흘리는 대신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입신체비를 시행하게!”

이야기에 몰두해 있었는데 대청마루 주변에 제자들이 도열해서 멍하니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입신체비를 중단한 채로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들 모두 마음이 벅차오르나 보군. 다시 입신체비를 시작하지!”

“네 스승님!”

나의 섬세한 관리와 마사이족 특유의 식문화가 결합한 제자들은 예전처럼 알찬 근육만 남은 훤칠한 몸매가 아니었다. 그들의 팔은 흑표범과 같았으며 두꺼운 허벅지는 준마와 같았다.

이들이 제대로 된 문명을 일궈 내고 완성된 국가를 만들어 내면 역사는 정말 많은 곳에서 달라질 것이다. 혹시 알아? 식민지를 만들겠다고 호기롭게 쳐들어간 포르투갈이 말 그대로 ‘근육’ 당하여 박살나 버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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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 8월. 네 척의 풍역선과 열 척의 상무선이 동해 바다를 가로질러 끝없이 북서쪽으로 향하였다. 율도를 조선의 영토로 받아들였지만 너무나 부족한 고장이었다.

함대의 대장선에서는 한 남성이 뱃전을 부여잡고 요란하게 먹은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동해의 거친 파도를 정면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미숙한 뱃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 우웨에에에에에엑!

창백한 얼굴로 사지를 흐느적거리는 유자광은 입가를 닦으며 태연하게 시조를 읊는 한명회를 바라보았다. 기우뚱 거리는 배인데도 한명회의 하체는 부드럽게 움직이며 흔들림을 받아내었다.

어중간한 선원조차 힘에 겨워하는 거친 바다이지만 한명회는 태연하게 종이를 들고 자신이 읊은 시조를 적어나갔다. 이미 배와 한 몸이 된 사람이라 여겨질 경지였다.

“대감께서는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 오신 것입니까. 진갑에 다다른 연령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 할 일입니다. 젊은 제가 우웨에에에엑!”

“내가 자네만할 적에 구풍(태풍)에도 휩쓸려 본 적이 있고 해구들에게 시달리다 달아난 적도 있었네. 고작 동해의 파도로 이렇게 고생하다니.”

좌의정으로 진급한 한명회는 여전히 탐검사의 수장이었다. 수많은 시련을 겪어 온 그에게 율도에 새로 생긴 항구인 고엽현(庫頁縣 - 사할린의 당나라 시절 이름)을 다녀오는 일은 잠시 산책을 다녀오는 일에 불과하였다.

약속한 휴가가 끝났지만 한명회에게 하달된 명령은 간단하였다. 환갑이 넘은 한명회의 후계자를 양성하며 마지막 항해인 미주(迷州) 탐사를 준비하라고.

한명회의 후계자로 배정된 이는 셋이었다. 그가 발탁한 유자광은 한명회가 가르칠 것이며. 이극돈(李克墩)은 서행사에서 경험을 쌓고. 가장 어린 임사홍(任士洪)은 열산도 인근의 함대를 오가며 경험을 쌓고 있었다.

유자광이 다시 푸른 바다 위로 구역질을 하자 한명회는 혀를 차며 그의 등을 세차게 두드렸다. 출신이 한미하고 관직에 나설 길이 막혀 딱하게 여겼으니 그가 가장 아끼는 후계자였다.

튼튼한 톱과 도끼는 물론이고 만들다 실패한 보총을 개조하여 민간에 판매하는 장총통(長銃筒)을 쉰 자루나 사들였으니 고작 하나의 현을 지원하는 물자라 생각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갑판 아래에서 잔뜩 사들이 소와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대감께서 좌의정의 직위에 오르셨으면서 어찌하여 머나먼 율도까지 직접 나서는지 모를 일입니다. 혹여나 제가 모르는 일이 있습니까?”

“지겹도록 다녀온 신농도에 또 가느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율도를 원한 것이라네.”

그렇게 변명하였지만 한명회의 태도는 남달랐다. 자신의 사재를 동원하여 경원부에서 만든 잘 제련된 강철로 온갖 기구를 사들였다. 더군다나 다른 관료들을 설득하여 율도를 개척하는 이득에 대해 설파하기에 이르렀다.

관료들은 설득과 적당한 선물을 받고 노비와 소작농을 보내 한명회를 지원하였고. 한명회는 다른 관원이 다녀오기로 한 율도에 유자광의 경험을 쌓는 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유자광은 한명회의 아들이 참상관 진급을 위한 심사에 걸려있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법이 바뀌어 참상관 진급 조건으로 새로운 현에 파견되어 수령의 일을 행하는 것인데 하필 율도에 보내지게 된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아드님께서 율도 현감으로 파견된 일이 걸리시나 봅니다.”

“어허! 율도는 조선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고장인데 좌의정의 직위에 오른 이로서 사재를 털어 지원함은 마땅한 일이 아닌가!”

애써 변명한 한명회가 멋쩍게 고개를 돌리자 선창 아래에서 선원이 급히 달려 나왔다. 허둥거리는 얼굴로 한명회에게 보고를 올리는데도 소와 말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감님! 마소(馬牛)들이 토악질을 하며 힘에 겨워합니다! 이러다가 떼죽음을 당할 것이니 조금만 쉬어 가면 아니 되겠습니까?”

“쉬다니! 앞으로 세 시진 이내에 고엽현에 당도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하루를 쉬어 보았자 피로가 쌓여 다음 날을 버티지 못할 것이네!”

한명회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제대로 된 측량도 하지 않고 어제 밤에 지나쳐온 섬 하나로 항로를 추측하였지만 두 시진(4시간)이 지나고 선원이 고함을 쳤다.

“천리경에 율도가 보입니다! 대감께서 하신 말씀이 정녕 맞았습니다!”

“그러하면 어서 하선할 준비를 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

고엽현에 부설된 임시 항구에 짐이 끝없이 하역되었다. 이미 연락을 받고 나와 있던 율도상회의 상주 홍길동은 어마어마한 지원에 놀랐지만 더욱 놀랄 일이 있었다. 1품 관직을 상징하는 공작의 흉배가 수놓인 관복을 입은 한명회가 내려온 것이다.

“이거 율도상회 상주 아닌가. 가져온 물자가 많으니 조금 힘에 겨울 것이네.”

“세상에, 한 개 현이 아니고 한 개 군(郡)을 만들고 남을 지경이 아닙니까. 이미 물산이 풍족하고 사람이 부족한 실정인데 사람들은 또 어디서 데려 오신 것입니까?”

“사람? 관료 가운데 율도를 개간할 노비들을 선발하여 데려온 것이라네. 그나저나 관청은 어디 있는가?”

“관청이라 부르기에 조금 민망한 곳입니다······.”

한명회는 이미 탐검사를 초월하여 좌의정의 자리에 오른 이였다. 삼정승의 방문에 모든 이들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지만 한명회는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이 있다는 듯이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이윽고 약간 벌채한 숲 사이로 거대한 초가지붕 끄트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한명회는 잠시 바라보더니 생각 외로 거대한 지붕에 놀랐고 지붕이 덩굴과 잡풀을 닥치는 대로 엮어 만든 것에 다시 놀랐다.

“창고를 거대하게 만드니 겨울 동안 불편함이 없겠군. 하지만 관청을 보고 싶으니 어서 안내하게.”

“대감께서 실망하실지 모르겠지만 저것이 관청입니다. 북방으로 피난하였던 왜인들이 만든 합장조(合掌造 - 갓쇼즈쿠리)라는 양식이지요.”

“이게······. 이게 무언가! 이게 관청이라 하였는가!”

한명회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관청이라 칭한 거대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초가지붕 아래에는 가까스로 한 개의 층(層)이라 부를 공간이 있었으니 조선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홍길동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율도의 가장 큰 문제는 추위가 아니고 겨우내 내리는 폭설입니다. 아국에서 쓰이던 양식으로 집을 지으면 튼튼한 목재도 쌓이는 눈에 무너져 내리니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이게 사람이 사는 집이란 말인가! 그저 거대한 움집이 아닌가! 구들은? 두툼한 벽은?”

“제가 노력하여 전벽(벽돌)을 사용하여 사람 사는 모양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왜인의 크기에 맞춰 지어진 집이라 구들을 둘 공간도 부족하여 화로를 잔뜩 두어 불을 때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어두컴컴한데다 그을린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정말 노비들이 몸을 녹이는 움집보다 못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안에서 게슴츠레한 눈을 뜬 현감이자 한명회의 장남 한보(韓堡)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왔다.

“아버지!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그저 주상전하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할 뿐이다. 이런 머나먼 변방에 주상전하의 은덕을 전하라는 명이었으니 내가 당도한 일은 우연일 뿐이다. 그런데 건물이 조금 낮구나.”

한보도 한명회를 닮아 신장이 작았지만 합장조라 불리는 양식은 신장이 작은 왜인이 만든 것이며 구들을 설치한 덕분에 더욱 낮아져 갓이 천장에 닿을 지경이었다.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인 채 만난 두 부자(父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관청이라 하였지만 움집이나 다름없는 건물이니 흉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너무 어두워 촛불도 아닌 횃불을 사용하는지 한보의 옷에는 그을음이 스며들 지경이었다. 밖으로 나선 한명회는 아들의 옷에서 그을음을 털며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법도를 새로 정하신 덕분에 네가 율도로 발령되기에 이르렀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내 마소 백여 필과 개간에 쓰일 장구를 모조리 갖추었으니 아국의 방식으로 새로운 집을 지으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

“지금 아버지께서 밟고 계신 곳이 조선의 방식으로 만든 집이었습니다. 작년에도 눈이 여섯 자나 내린 바람에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지요.”

한명회가 발을 드니 기와가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무들도 보였다. 허리보다 두꺼운 재목은 기둥이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한명회는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아들이 저런 비참한 집에서 이 년을 살아야 하니 용납할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흉물을 관청이랍시고 만들었던 왜인들을 당장 불러오게!”

한때 슈고 다이묘였던 시부카와 노리나오는 늙은 몸을 이끌고 한명회에게 고개를 숙였다. 의정(議政)이라 하면 지난 경인년 전쟁을 총괄하였던 찬성(贊成)보다 높은 직분인 것은 알고 있었으니 사시나무 떨듯이 팔다리를 후들거렸다.

“자네의 이름은 무언가? 그리고 어찌 이리 흉물스러운 것을 만들었는가!”

“조선에 귀부하여 성을 율도 교씨라 하였고 이름을 천직(川直)이라 정했습니다. 저희 지방에서 연이은 폭설에 견디기 위한 방식으로 건물을 만들었으니 저의 부족함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부족함을 알고 있으니 내 더 이상 추문하지 않을 것이네. 하지만 관청이라 함은 당당히 사람이 드나들 수 있어야 하는데 어찌 이리 작고 비좁단 말인가! 내가 물자를 보냈으니 새로운 관청을 만들게!”

서슬 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한명회를 통해 율도의 개척을 위해 파견된 노비들과 소작농들이 달려왔다.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팔다리를 푸는 모습을 보자 한명회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아국에 귀부한 교천직이라는 자를 도와 새로운 관청과 자네들이 기거할 숙소를 만들게! 양식은 왜국의 풍속을 따라 합장조로 만들어도 좋지만 반드시! 사람이 거주하기 편한 곳을 만들게!”

본래 농부였던 자들이지만 개척에 능숙한 이들이니 불편함은 없었다. 본래 땅을 개간할 때에는 나무를 베고 잡목을 정리하는 일인지라 율도의 개척은 나날이 가속될 것이 분명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저렇게 하실 마음이셨겠지······. 내가 조금만 더 철이 빨리 들었다면 모를 일인데.”

유자광은 억지로 웃으며 물자를 운반하였다. 관직에 올라 아버지에게 용서를 청하려 하였지만 좌도도(사도가시마)의 금광을 찾아낸 일을 보고하기 직전 아버지인 유구가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형은 공을 인정하여 예전처럼 친밀한 사이를 되찾았고 호적에도 면천된 사실을 기입하였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한명회가 한보를 꼭 껴안은 다음 돌아와서는 아직도 멀미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유자광을 보며 말했다.

“이정도로 지원하였는데 큰 변고가 일어나지 않겠지. 그렇다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도록 하지. 잠시 동래에 들려 휴식을 취한 다음 바로 열산도로 향할 것이네.”

“네? 열산도라 하셨습니까? 저를 가르친다 하셨는데 열산도까지 다녀와야 하는 일입니까?”

“자네와 이의(而毅 - 임사홍의 자)는 기천군도(솔로몬 제도)부터 양상도(사모아) 그리고 일호천도(타히티)까지 오가며 신농도인이 말하는 라파누이(이스터 섬)까지 항로를 개척하고 물자를 쌓아야 하네. 자네와 이의에게 여섯 척의 풍역선을 배정할 것이네.”

항해를 하는데 준비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유자광의 변명을 예상했다는 듯이 한명회의 말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마지막 미주 개척에는 열두 척의 풍역선이 동원된다네. 또한 미주가 얼마나 머나먼 고장인지 모르니 식량을 각 섬마다 비축하여 소모하지 않아야 한다네. 앞으로 삼 년 뒤에 출항할 것이니 자네가 경험을 쌓을 시일로 충분하지 않겠나.”

“삼 년이라 하셨습니까! 대체 어느 식량이 삼 년을 버틴다는 말입니까. 곡식이 묵어 썩어 문드러질 시기가 삼 년입니다! 심지어 보존식도 일 년이 지나면 상하지 않습니까.”

“잘 말린 녀석을 죽통에 넣어 겉을 석회로 감싸면 절반가량은 삼 년을 버티고도 남는다네. 나서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서 보존 식량을 사용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유자광도 탄주현까지 항해해본 자였으니 식량 소모 정도는 계산할 수 있었다. 여섯 척의 풍역선이 순수하게 식량을 옮긴다면 대략 세 번 정도 다녀와야 한다. 그가 긴장하여 침을 삼키자 한명회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염려하지 말게. 라파누이라는 섬은 몰라도 일호천도까지 나아가는 항로는 구풍을 제외하면 편안한 항로일세. 기껏 해야 머나먼 바다가 지겨운 것이 전부가 아니겠는가.”

“대감님께서 다녀오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내가? 내가 왜 가는가. 나는 열산도와 개성을 오가며 식량과 필요한 물자를 계속 옮겨올 것이네. 정 여의치 않으면 신농도(뉴기니) 정도에서 만날 수는 있겠지.”

그렇게 말했지만 유자광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하였다. 세 번 왕복한다면 경험이 일천한 임사홍 대신 자신이 두 번 다녀올 것이 분명하니까. 한명회도 그런 생각을 눈치 채고는 애둘러 말했다.

“혹여나 다른 방법을 찾고 싶은가? 듣자하니 넉 달 뒤에 아국의 함대가 맘루크국의 항구를 모조리 공격하고 돌아올 것인데 자네와 같이 무재가 있는 자가 참가하면 좋을 일이네.”

“제가 반드시 라파누이라는 고장을 찾아낼 것입니다! 저보다 어린 친구에게 질 이유는 없지요!”

한명회가 슬쩍 웃으며 배로 향하자 유자광은 필사적으로 한명회의 뒤를 쫓았다.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일 보다 항해를 택했으니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

하지만 유자광이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그가 다녀올 항로는 마자파힛 제국이 붕괴하여 수많은 해적들이 들끓는 고장이며. 차라리 맘루크의 항구를 공격하는 일이 편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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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 12월. 조선의 함대는 백양 왕조의 지원을 받아 페르시아 만의 이름 없는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스무 척에 달하는 풍역선은 서행사와 탐검사의 함선을 조금씩 모아 만들었으니 들킬 염려가 없었다. 백양 왕조의 관원은 배를 돌아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한 함대입니다. 메흐메트놈이 가지고 있는 화포와 비견할 만큼 거대한 화포가 열 개가 넘게 있으니 해전에서 당해낼 상대는 존재하지 않겠지요.”

“과찬이오. 자고로 모든 일에는 전력을 다해야 하는 법. 그런데 전쟁은 어떻게 되었소? 정녕 오사만국이 맘루크국을 공격한 것이오?”

조선의 일방적인 무역 금지는 오스만 제국에 크나큰 파란을 불러왔다.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후원받은 백양 왕조에게 대패한 일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있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물론 조선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지금까지 통행세와 관련된 항의를 몇 번이고 하였지만 오스만과 맘루크 두 개의 세력에서는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힘 센 놈이 이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전해져오는 첩보에 따르면 알 카히라(카이로)가 함락당하고 각지에서 지원하던 제후들이 모조리 꼬리를 말았다 합니다. 한 달 전의 일이니 지금은 종전 직전이겠지요.”

“그렇다면 슬슬 출항할 때가 되었소.”

전쟁 징후를 포착한 홍위는 남이를 필두로 한 원양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이간질의 끝은 약해진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며. 그 상대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여 흡수된 직후의 맘루크라 하였다.

이미 수도가 함락되고 한 달이 지났다면 전쟁이 끝난 직후이며. 가장 긴장이 풀어지고 조선에 사신을 보낼 시기이리라.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진 관계이니 가장 화끈하게 청산하려는 의도였다. 남이는 동 트는 바다를 바라보며 시구를 읊었다.

“구주의 땅은 칼을 갈아 다 하였고. 천축의 풀은 말이 먹어 없도다. 사나이 마흔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나에게 대장부라 말할 수 있으랴.”

“훌륭한 말씀입니다. 구주가 어느 땅인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영역이 된 땅이 확실하군요.”

“미숙한 시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좋은 일이오. 장병들은 들어라! 밧줄을 풀고 닻을 올려라! 메카를 제외한 맘루크국에 속한 모든 항구를 보이는 대로 박살낼 준비는 되었느냐!”

-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국의 고혈을 빨아먹던 맘루크국과 주상전하를 속여왔던 오사만국에 벌을 내릴 시일이 되었다! 화포도 화약도 잔뜩 있으니 모두 박살내자!”

스무 척의 풍역선이 일제히 돛을 펼치고 먼 바다로 나섰다. 우준 하산의 후원을 받은 조선 함대에게 거칠 것은 없었지만.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 일대는 제외해 달라는 청원만이 있었다.

종교적 성지에 대한 개념은 없었지만 조선에게 힘을 보태는 이의 부탁을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메카에 있던 오스만 제국 함선들은 거대한 함선 스무 척의 그림자를 보고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폭력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부족함을 알고 있으니 내 더 이상 추문하지 않을 것이네. 하지만 관청이라 함은 당당히 사람이 드나들 수 있어야 하는데 어찌 이리 작고 비좁단 말인가! 내가 물자를 보냈으니 새로운 관청을 만들게!”

서슬 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한명회를 통해 율도의 개척을 위해 파견된 노비들과 소작농들이 달려왔다.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팔다리를 푸는 모습을 보자 한명회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아국에 귀부한 교천직이라는 자를 도와 새로운 관청과 자네들이 기거할 숙소를 만들게! 양식은 왜국의 풍속을 따라 합장조로 만들어도 좋지만 반드시! 사람이 거주하기 편한 곳을 만들게!”

본래 농부였던 자들이지만 개척에 능숙한 이들이니 불편함은 없었다. 본래 땅을 개간할 때에는 나무를 베고 잡목을 정리하는 일인지라 율도의 개척은 나날이 가속될 것이 분명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저렇게 하실 마음이셨겠지······. 내가 조금만 더 철이 빨리 들었다면 모를 일인데.”

유자광은 억지로 웃으며 물자를 운반하였다. 관직에 올라 아버지에게 용서를 청하려 하였지만 좌도도(사도가시마)의 금광을 찾아낸 일을 보고하기 직전 아버지인 유구가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형은 공을 인정하여 예전처럼 친밀한 사이를 되찾았고 호적에도 면천된 사실을 기입하였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한명회가 한보를 꼭 껴안은 다음 돌아와서는 아직도 멀미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유자광을 보며 말했다.

“이정도로 지원하였는데 큰 변고가 일어나지 않겠지. 그렇다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도록 하지. 잠시 동래에 들려 휴식을 취한 다음 바로 열산도로 향할 것이네.”

“네? 열산도라 하셨습니까? 저를 가르친다 하셨는데 열산도까지 다녀와야 하는 일입니까?”

“자네와 이의(而毅 - 임사홍의 자)는 기천군도(솔로몬 제도)부터 양상도(사모아) 그리고 일호천도(타히티)까지 오가며 신농도인이 말하는 라파누이(이스터 섬)까지 항로를 개척하고 물자를 쌓아야 하네. 자네와 이의에게 여섯 척의 풍역선을 배정할 것이네.”

항해를 하는데 준비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유자광의 변명을 예상했다는 듯이 한명회의 말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마지막 미주 개척에는 열두 척의 풍역선이 동원된다네. 또한 미주가 얼마나 머나먼 고장인지 모르니 식량을 각 섬마다 비축하여 소모하지 않아야 한다네. 앞으로 삼 년 뒤에 출항할 것이니 자네가 경험을 쌓을 시일로 충분하지 않겠나.”

“삼 년이라 하셨습니까! 대체 어느 식량이 삼 년을 버틴다는 말입니까. 곡식이 묵어 썩어 문드러질 시기가 삼 년입니다! 심지어 보존식도 일 년이 지나면 상하지 않습니까.”

“잘 말린 녀석을 죽통에 넣어 겉을 석회로 감싸면 절반가량은 삼 년을 버티고도 남는다네. 나서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서 보존 식량을 사용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유자광도 탄주현까지 항해해본 자였으니 식량 소모 정도는 계산할 수 있었다. 여섯 척의 풍역선이 순수하게 식량을 옮긴다면 대략 세 번 정도 다녀와야 한다. 그가 긴장하여 침을 삼키자 한명회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염려하지 말게. 라파누이라는 섬은 몰라도 일호천도까지 나아가는 항로는 구풍을 제외하면 편안한 항로일세. 기껏 해야 머나먼 바다가 지겨운 것이 전부가 아니겠는가.”

“대감님께서 다녀오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내가? 내가 왜 가는가. 나는 열산도와 개성을 오가며 식량과 필요한 물자를 계속 옮겨올 것이네. 정 여의치 않으면 신농도(뉴기니) 정도에서 만날 수는 있겠지.”

그렇게 말했지만 유자광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하였다. 세 번 왕복한다면 경험이 일천한 임사홍 대신 자신이 두 번 다녀올 것이 분명하니까. 한명회도 그런 생각을 눈치 채고는 애둘러 말했다.

“혹여나 다른 방법을 찾고 싶은가? 듣자하니 넉 달 뒤에 아국의 함대가 맘루크국의 항구를 모조리 공격하고 돌아올 것인데 자네와 같이 무재가 있는 자가 참가하면 좋을 일이네.”

“제가 반드시 라파누이라는 고장을 찾아낼 것입니다! 저보다 어린 친구에게 질 이유는 없지요!”

한명회가 슬쩍 웃으며 배로 향하자 유자광은 필사적으로 한명회의 뒤를 쫓았다.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일 보다 항해를 택했으니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

하지만 유자광이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그가 다녀올 항로는 마자파힛 제국이 붕괴하여 수많은 해적들이 들끓는 고장이며. 차라리 맘루크의 항구를 공격하는 일이 편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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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 12월. 조선의 함대는 백양 왕조의 지원을 받아 페르시아 만의 이름 없는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스무 척에 달하는 풍역선은 서행사와 탐검사의 함선을 조금씩 모아 만들었으니 들킬 염려가 없었다. 백양 왕조의 관원은 배를 돌아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한 함대입니다. 메흐메트놈이 가지고 있는 화포와 비견할 만큼 거대한 화포가 열 개가 넘게 있으니 해전에서 당해낼 상대는 존재하지 않겠지요.”

“과찬이오. 자고로 모든 일에는 전력을 다해야 하는 법. 그런데 전쟁은 어떻게 되었소? 정녕 오사만국이 맘루크국을 공격한 것이오?”

조선의 일방적인 무역 금지는 오스만 제국에 크나큰 파란을 불러왔다.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후원받은 백양 왕조에게 대패한 일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있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물론 조선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지금까지 통행세와 관련된 항의를 몇 번이고 하였지만 오스만과 맘루크 두 개의 세력에서는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힘 센 놈이 이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전해져오는 첩보에 따르면 알 카히라(카이로)가 함락당하고 각지에서 지원하던 제후들이 모조리 꼬리를 말았다 합니다. 한 달 전의 일이니 지금은 종전 직전이겠지요.”

“그렇다면 슬슬 출항할 때가 되었소.”

전쟁 징후를 포착한 홍위는 남이를 필두로 한 원양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이간질의 끝은 약해진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며. 그 상대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여 흡수된 직후의 맘루크라 하였다.

이미 수도가 함락되고 한 달이 지났다면 전쟁이 끝난 직후이며. 가장 긴장이 풀어지고 조선에 사신을 보낼 시기이리라.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진 관계이니 가장 화끈하게 청산하려는 의도였다. 남이는 동 트는 바다를 바라보며 시구를 읊었다.

“구주의 땅은 칼을 갈아 다 하였고. 천축의 풀은 말이 먹어 없도다. 사나이 마흔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나에게 대장부라 말할 수 있으랴.”

“훌륭한 말씀입니다. 구주가 어느 땅인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영역이 된 땅이 확실하군요.”

“미숙한 시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좋은 일이오. 장병들은 들어라! 밧줄을 풀고 닻을 올려라! 메카를 제외한 맘루크국에 속한 모든 항구를 보이는 대로 박살낼 준비는 되었느냐!”

-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국의 고혈을 빨아먹던 맘루크국과 주상전하를 속여왔던 오사만국에 벌을 내릴 시일이 되었다! 화포도 화약도 잔뜩 있으니 모두 박살내자!”

스무 척의 풍역선이 일제히 돛을 펼치고 먼 바다로 나섰다. 우준 하산의 후원을 받은 조선 함대에게 거칠 것은 없었지만.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 일대는 제외해 달라는 청원만이 있었다.

종교적 성지에 대한 개념은 없었지만 조선에게 힘을 보태는 이의 부탁을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메카에 있던 오스만 제국 함선들은 거대한 함선 스무 척의 그림자를 보고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폭력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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