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22화 (222/573)

< 3장 36화 - 대동통보(大同通寶) >

돌아가서 제자들 가르칠 준비나 하려는데 다른 사람이 이현전에 방문했다. 한명회가 휴가를 보내고 있으니 탐검사의 도제조로 임명된 이는 사육신 가운데 한 명인 유응부였다.

탐검사의 제조이지만 실적이 적고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느라 진급에서 밀린 이였으니 후임자로 적합하리라. 유응부는 상급자인 한명회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간 고생이 많았소. 주상전하가 명을 내리시어 다음 탐검사의 항해를 도울 기반을 마련하라 하였으니 편히 쉬시구려.”

“벽량(유응부의 호) 대감께서는 제가 벌인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압구정에 머물며 편히 쉬고 몸을 다스릴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평소에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경박한 발걸음으로 가마에 올라 탄 한명회가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자 유응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압구 대감이 호주에 다녀왔다 하는데 얼마나 큰 고난을 겪었을지 궁금합니다. 삼 년을 휴식하라는 말은 다음에 내려질 직무가 극도로 힘들다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바다에서 이 년을 보내면 사람이 저렇게 되는 것 같네.”

“저도 삼 년을 보내게 생겼군요. 내년부터 이주를 오가며 서역에 홍삼을 팔아야 하니 골치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분명 한명회가 원한 일은 사직이 분명한데 고작 휴가로 저렇게 만족하다니. 아무래도 사직은 진작 포기하고 눈앞의 휴식을 즐기는 모습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놈의 아프리카 항로를 담당한 자는 유응부가 되었군.

“다녀올 적에 언제나 조심하시구려. 탄주현에 머물 때에는 문(蚊 - 모기)을 주의하여야 하니 이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대책을 마련해 두겠소.”

“탄주현의 풍토병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습니다. 오래 머물지 않겠지만 대군어른의 심계가 대단하시니 이를 믿어봄직 만 한 일입니다.”

오스만 제국 공략의 다음 단계에 접어들었다. 맘루크 제국의 통행세에 대한 반발심으로 조선이 일방적으로 인삼 무역을 중단하고 한명회가 개척한 아프리카 항로로 인삼을 팔아버리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신나게 두들겨 맞을 맘루크 제국이며 조선에서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필요 이상의 비용을 받아내며 배를 불렸으니 오스만과 함께 공멸하면 될 일이다.

유응부가 돌아가고 다시 사람들이 움직였다. 모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현전의 학자들이 알아서 분석해 주겠지.

석 달의 시간이 흐르자 이현전의 학자들은 장구벌레를 사육해서 모기를 만들어 냈고. 이들이 가장 기피하는 향신료가 계피임을 밝혀냈다. 덕분에 계피 물에 적신 삼베를 엮은 모기장이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지만 모든 일은 이현전의 관료들의 공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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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년 2월. 정월 대보름이 끝나고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 홍위가 나를 사섬서(司贍署), 화폐의 제조와 저화의 유통을 위한 관청으로 불러들였다. 이와미 은광과 사도가시마에서 거둬들인 금과 은으로 뭘 할지 궁금했는데 사섬서라니. 아마 화폐를 만들고 있겠지.

사도가시마, 조선의 명칭으로 좌도도라는 섬에서 금광이 발견된 것은 재작년의 일이다. 유자광을 비롯한 인부들이 섬을 살폈고 석영 광맥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천리경을 만들기 위해 수십 근의 석영을 소모하는 이현전으로 새로운 석영이 배달되었다.

‘금입니다! 석영 속에 금맥이 흐르니 이는 석영 따위를 캐낼 곳이 아닙니다. 석영 속에 섞인 금을 분리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이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좌도도의 금광을 발견한 이는 하필 이현전에 소속된 관원이었고 금이 섞여있다는 사실만 알았지 정확한 산출량은 몰랐다. 이후 대남도에서 고용된 사람들이 사도가시마의 금광에 발을 들였고. 곡괭이질을 할 때마다 금이 산출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산출되었는지 나에게도 알려주지 않다니. 하기사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 명나라에서 가만히 있겠어. 자신들의 덕이다 뭐다 하면서 금을 조공으로 내놓으라고 큰 소리를 뻥뻥 치겠지.”

가마에 앉아서 안내를 받는데 사섬서의 원래 위치인 현대의 종로구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른 어디도 아니고 북한산 자락에 있는 암자가 사섬서의 분원(分院)이었다.

심지어 나를 맞이하러 온 자는 사섬서에 임시로 파견된 것이 분명한 성삼문이었다. 청렴결백하기로 손꼽히는 인물이니 적절한 인선이라 할 수 있지만 성삼문도 피곤한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상전하께서 고안한 일인지라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먼 곳에 드나들 사람이 있던가?”

“일하는 이들 대부분이 각지의 관청에서 불러온 공노비입니다. 보름 마다 교대시키니 일의 진척이 더디지만 구체적인 사항이 퍼지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화폐에 대한 소문은 퍼져도 구체적인 액수가 공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명나라의 견제나 조공 요구를 줄이기 위한 술책이니 홍위의 생각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문으로 들어서자 걱정이 샘솟아 올랐다. 이미 조선은 화폐 도입에 실패한 전적이 있다.

본래 조선에는 후대에 만들어질 표준 화폐인 상평통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종대왕님이 저화 이후 야심차게 준비하였던 조선통보(朝鮮通寶)가 있었지만 다양한 문제에 봉착하였다.

동전이니 당연히 동이 들어가지만 조선에 제대로 된 동광이 없어 일본에서 수입하는 입장이니 공급이 더뎠으며. 명나라가 금과 은을 모조리 빨아들여 고액권을 만들지도 못하고 신용도도 급락하였다.

신용도가 떨어진 조선통보는 실질 가치보다 그 자체가 품고 있는 구리의 가치가 높아진 순간부터 유기나 각종 구리 장식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이제는 극복할 수 있으리라. 홍위는 서류를 훑어보다가 나를 돌아보고는 반갑게 맞이하였다.

“숙부님께서 오셨습니까. 종친 가운데는 아바마마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당도하셨으니 여기에 대한 일은 일절 언급하지 말아 주십시오.”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다만 걱정되는 일은 이렇게 엄중히 관리하면 지방 관리들이 혼선을 빛을 지도 모를 일이옵니다.”

“이미 공노비들을 교대로 불러들이는 일과 함께 지방 관아마다 화폐를 도입한다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시중에 많은 금과 은이 풀리니 혼선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화폐의 발행에 대해서는 일선 관청이나 지방 관아들도 익히 알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지만 수량에 대해서는 불문율이라. 이미 화폐의 도안은 완성되었는지 홍위가 화폐 세 개를 건네주었다.

화폐의 명칭은 세종대왕님이 만들었던 조선통보가 아닌 대동통보(大同通寶)였으며 종류는 세 가지였다. 다른 곳에서 만들어졌는지 주조 특유의 둔탁함이 남아 있는 동전은 일문(一文)이라 적혀 있었다. 흔히 말하는 한 푼이겠지. 그리고 금화의 형태가 독특했다.

“금화와 은화는 세세한 것이 주조(鑄造)한 물건이 아니고 틀에 넣고 힘차게 내려친 물건이 분명하옵니다. 참으로 기묘한 형상이니 복제하기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명국과 교역을 할 적에 마제은이나 은화를 받은 적이 많았지만 표면이 깎여 나간 물건이 많았습니다. 듣자하니 은화를 깎아 쇄은(碎銀)으로 팔아치우는 이들이 있더군요.”

“대단한 일이옵니다. 이렇게 파문(波紋 - 물결문양)을 새긴다면 깎아낸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으니 화폐를 훼손시키는 이들이 줄어들 것입니다.”

처음에는 뉴턴이 고안한 화폐 훼손 방지 문양을 고안했겠지. 정확도 때문에 불가능하니 대신 물결무늬를 새긴 것이다. 화폐의 물결무늬는 크기도 다르고 숫자도 달랐다.

외곽에 스물네 개의 물결무늬가 새겨진 금화, 열여섯 개의 물결무늬가 새겨진 것이 은화이다. 홍콩의 2달러와 20센트처럼 생겼지만 이 시대에 이런 형태를 만들려면 시행착오가 많았을 것이다.

“고안하느라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파문을 새기자니 주조로 만들 방법이 없었고. 금화는 구단배(구텐베르크)가 만든 인쇄기를 응용하여 형틀에 찍어내는 방식을 도입하였지요.”

홍위의 말을 들으니 공노비들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내 눈앞에서 일정한 두께의 금이 틀 안에 단단히 고정되고. 노비들이 힘을 주어 인쇄기를 개조한 틀을 돌리니 압력이 가해지면서 금화가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은화는 어떻게 만들까? 궁금한 마음에 옆을 돌아보니 다른 노비들은 아예 나무망치를 들고 강철로 만든 틀을 내리찍어 은화를 하나하나 찍어내고 있었다. 홍위는 뿌듯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금화는 한 관이며 열 냥이고, 은화는 한 냥이며 열 문(文)입니다. 마지막으로 동화가 한 문이니 서로의 가치를 맞추기 위하여 많은 고심을 하였습니다. 덕분에 금화는 팔 할이 금이고 이 할이 은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방침이십니다. 본디 금은 은의 열두 배에 해당하는 가격이니 순수한 금으로 정하면 크기를 매번 변경해야 하니 불편한 일이 생겨날 것이 분명하옵니다.”

금화와 은화의 무게가 동일해서 이상하다 했더니 결국 은본위 제도를 도입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금화의 순도는 조금씩 변하면서 유동적으로 조절되겠지.

유럽 각지에서 순도와 가치를 중구남방으로 발행하여 혼란을 빛은 것과 달리 조선의 한 냥은 근대 이전까지 확실한 기축 통화로 자리 잡을 것이다. 홍위가 은화가 쌓인 나무상자가 밀봉되는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태상왕께서 완수하지 못한 화폐의 도입을 제 손으로 끝낼 작정입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주상께서 심계가 깊으시니 신이 더 이상 간언을 드릴 방법이 없사옵니다. 하지만 영릉에 계신 분(세종대왕)께서 성공하지 못하신 일을 극복할 방안이 있으시옵니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이렇게 금화와 은화를 만들어 내도 시중에 유통되지 않으면 장롱 속에 잠들어 있는 금과 은이 되다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홍위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정에서 거두는 전세가 한 해에 70만 석에 달하니 은자 70만 냥에 해당합니다. 화폐를 모두 합쳐 전세의 열 배가 넘기 전에는 통용하지 않을 방침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본디 화폐라 함은 널리 통용되어 사방에 퍼져야 좋은 일이지 알음알음 퍼져나가면 창고에 머물다 녹여 사라지는 일이 빈번합니다.”

세종대왕님의 실패는 홍위가 극복하는 모습이니 참으로 보기 좋았다. 조선통보의 실패 원인 중 하나가 4년 동안 40만 냥을 만든 덕분에 수도 인근에서만 쓰이고 널리 퍼지지 않은 것이니까. 그런데 700만 냥? 이거 만들 돈이 되나?

“하오나 칠백만 냥은 너무 큰 금액이라 사료됩니다. 그렇게 많은 금액이 조정에 쌓이면 크나큰 화를 불러올 수 있지 않습니까.”

“이십 년 전부터 연해주에서 금을 모아오고 있었으며 대내씨(오우치)가 상납하는 은도 있습니다. 비록 서행사의 총 수익이 줄어들어도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오우치가 가지고 있는 이와미 은광에는 조선 관리가 파견되어 있으며. 일본의 부족한 제련술이 아닌 내가 귀띔하여 이현전이 창안한 연은 분리법(鉛銀分離法)을 적용하였다.

하지만 구체적인 액수에 대한 정보는 없다. 이와미 은광에서 얼마의 은이 생산되는지. 새로 개척한 사도가시마에서 얼마의 은이 생산되는지 모르고 있으니 답답하지. 홍위는 주변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내씨가 거둬들이는 은은 한 해 이만 사천 근에 달합니다. 이 가운데 팔천 근을 아국이 거두며 다시 명국에 이천 근을 보내니 육천 근을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매 해 소출량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육천 근이라고? 놀라서 홍위를 돌아봤는데 홍위가 진정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진정할 일인가? 명나라와 일본에 인삼을 수출할 때 거두는 총 수익이 사천 근인데 그것의 1.5배이다. 홍위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말을 이어갔다.

“또한 좌도도는 섬 전체가 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첫 해에 사백 근의 금이 쏟아져 나오고 이듬해에는 구백 근의 금이 쏟아져 나오니 이를 감당하기 힘들 지경입니다. 더군다나 은맥도 발견하였으니 좌도도를 할양받은 일은 모두 숙부님의 공입니다.”

“주상께서 신이 과거에 우둔한 말을 하였던 일을 책망하시니 어찌 할 도리가 없사옵니다. 제가 은으로 겉을 덮고 구리로 속을 채운 화폐를 유통하라 간언한 일을 제발 잊어 주시옵소서.”

뒤에서 사관이 눈초리를 빛내고 있기에 멍청한 소리를 했더니 홍위도 크게 웃고 사관도 농담을 주고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붓을 놀렸다. 조선이 가진 경제력이 소름이 돋는 수준이라 홍위의 행동이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조선이 한 해 거두는 금은 연해주에서 한 해 100근, 얼마 전 복속한 필리핀 북부에서 200근 그리고 사도가시마에서 900근이고 은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이와미 은광의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조선이 받아들이는 은의 양도 늘어나리라.

세부 사항을 제외하면 3년 이내에 새로운 화폐인 조선통보가 보급될 것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화폐를 매만졌지만 홍위는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만 아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금은 만지기 쉬운 녀석이라 인쇄기를 응용한 틀로 찍어내면 족합니다. 하지만 은은 단단하니 틀에 넣어 하나씩 찍어내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만들어 내시면 될 일이 아니옵니까?”

“그렇다 하여도 축이 망가지면 잘못된 주화가 찍혀 버리니 사람의 힘을 동원하는 일이 편합니다. 혹여나 숙부님께서 혜안이 있으시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은화라. 생각해 보니 화폐의 표준이나 마찬가지인 은화의 생산량이 중요하겠구나. 금화를 만드는 기계는 하나이지만 은화를 만드는 이는 수십 명에 달하니 고충을 알 것 같다.

만드는 과정을 보니 은판을 틀에 넣고 나무망치로 세게 내리쳐 찍어내는데 몸놀림이 신통치 않다. 생각보다 힘이 필요 없는데 뭘 그리 불편해 하나. 신나게 나무망치를 내려치는 노비를 옆으로 치운 다음 주먹을 들고 은화를 찍어내는 틀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틀이 쾅 소리를 내며 은화를 찍어내자 홍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려와 나의 손을 매만졌다. 손이 얼얼하기는 한데 버티지 못할 아픔은 아니다. 손에 붕대라도 감고 있었으면 스무 번 정도는 찍어낼 수 있겠지.

“숙부님! 그러다가 손이 다칠 것인데 무리하지 마십시오!”

“주상께서는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보십시오, 입신체비를 능숙하게 하는 자이면 은화 정도는 쉬이 찍어낼 수 있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삼대 운동 일천 근보다 부족하지만 아직 내 몸은 정정하다. 틀을 분리하자 은화가 또르르 굴러 나왔고 노비들이 입을 벌린 채 나의 이두박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홍위는 내 손과 은화를 교대로 바라보더니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숙부님··· 제발··· 체통을······.”

“관원들 가운데 입신체비에 능숙한 이들이 많으니 자신의 녹봉을 스스로 찍어내게 하면 될 일이 아니옵니까? 이보다 더 좋은 방책은 없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되었습니다! 은화를 손으로 찍어내다니 그러한 일은 당장 그만두십시오! 다만 관리들에게 녹봉을 찍어내도록 일임하는 방침은 쓸 만한 방법이니 채용하겠습니다.”

아주 좋은 해결책 아닌가? 자고로 입신체비를 했으면 손으로 해야지 도구를 사용할 필요가 있나. 홍위는 당당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고 사관은 나와 홍위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붓을 마구 놀렸다.

당시에는 우스갯소리로 끝난 일이지만 이듬해 정월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했을 무렵. 관리들의 내기거리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녹봉을 손의 힘으로 가장 깔끔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하였다.

본래 찍어내기 편하라고 나무망치를 지급하였지만 입신체비를 행한 이들은 거리끼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틀을 내리쳐 은화를 만들어 냈다. 가장 빼어난 은화를 수양전(首陽錢)이라 부른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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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6년 5월, 제자들의 근육이 굵어진 만큼 머리도 굵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머리가 굵어졌다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성취가 뛰어나니 어중간한 유생들을 뛰어 넘는다.

물론 유학과 기초 상식에 대한 공부는 모두 근육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근면육연화기억술은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한 제자가 상식을 외우지 못하여 이를 꽉 다물고 대역기를 밀어 올린다.

“어허! 자고로 무과로 길을 정했으면 무경칠서(武經七書)를 완독해야 하거늘! 그렇게 잔꾀를 부리면 몸을 단련하여 훈련도감에 들어가는 일이 편할 것이다! 알겠는가? 민가타(밍가티)!”

“죄송합니다! 앞으로 책을 읽는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유능한 이를 쫒아가지 못하더라도 맡은 바 직분을 다 하면 충분한 일이 아니더냐.”

마사이족이 조선에 당도한지 오 년이 넘었으니 아직도 관직에 오르지 못한 제자가 있는 반면 성취가 뛰어나 빈공과에 합격하고 사역원(司譯院 - 역관을 양성하는 기관)에 다니는 이도 있으며 의외로 충훈부(忠勳府)에 소속된 이도 있었다.

충훈부는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에 대한 포상과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관청이다. 홍위의 의도는 신하들의 행적을 보고 지표로 삼으라는 의도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문화가 너무나 달라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반면 마사이족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문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별다른 기록문화가 없는 이들이고 다른 민족의 문자를 아는 이도 드물었다. 하지만 소리 나는 대로 읽는 훈민정음을 접하자 눈이 트인 것과 마찬가지로 문자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저희는 조선의 방식대로 합자(合字)를 쓸 수 없습니다. 그러니 풀어쓰는 방식을 택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을 것입니다.”

“자네들의 언어가 아국의 문자와 다른 점이 여럿 있으니 방도가 없다네. 아바마마께서 계셨다면 자네들의 언어를 명쾌히 해석하였겠지만 너무 늦었으니 아쉬운 일이군.”

문자의 매력에 빠졌다고 하여도 훈민정음의 자모를 그대로 사용할 방법이 없으니 풀어쓰기와 마사이족을, 정확히는 퉁아니 문자를 위한 발음기호 몇 개를 첨부하는 방식으로 퉁아니음(音)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마사이족이 속속들이 자신의 직분을 찾고 조선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고 있으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제자 중 한 명이 얼굴이 창백해진 채(검은색이지만 오래 지내니 알 수 있다) 나에게 다가왔다.

홍위에게 인사를 올렸던 청년들의 대표, 사자를 잡은 자인 레무나이이자 조선에서 내모아라는 이름을 받은 자였다. 평상시에 충훈부에서 모범을 보이던 제자가 왜 이럴까. 그는 자신이 보고 있던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를 가르치시는 분들이 마음씨가 좋으셔서 스승님께 배우지 못한 역사서를 많이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서책을 탐독하니 많은 배움을 얻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라라 하였는가? 이미 퉁아니라는 이름이 있다면 그 자체가 나라가 아니겠는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조상부터 내려온 설화에 의하면 저희는 머나먼 북쪽의 거대한 강을 벗어나 누가에 누가이(신의 집, 킬리만자로의 마사이어) 근방까지 내려와 살게 되었습니다.”

“아국의 이름이 조선이 아닌가. 아국의 거주하는 민족의 시조는 단군왕검이며 한양보다 훨씬 북쪽인 요동 일대에 터를 잡았다 하네. 그러하여도 나라를 만들었으니 큰 문제는 아닐 걸세.”

인류학은 모르지만 내 제자인 내모아의 말을 해석하면 마사이족이 나일 강을 따라 이동하다가 킬리만자로 인근으로 터전을 옮겼으니 기반이 부족하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의외의 답이 나왔다.

“실은 저희들의 행적이 서적에서 보아온 흉노나 말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흉노와 말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효령대군 어른께서 저희를 대동의 풍속이 있다 칭찬하셨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저희는 수많은 부족을 지배하며 달자들보다 더욱 악랄하게 살았습니다. 저희는 사냥을 즐길 뿐이지 가축을 기르지 않고 빼앗아 올 뿐입니다.”

이런 것은 몰랐네. 아프리카 역사에 대한 지식도 적고 기반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내모아가 숨기는 사실이 없다면 마사이족은 공격적인 지배계층이자 사냥꾼이며 농경도 유목도 하지 않는 민족이다. 이런 일은 몰랐지만 나도 스승으로서 할 말은 많다.

“아국에서 배운 것은 허사라는 말이던가. 정 힘든 일이라 하면 가축을 부리는 법이나 작물을 기르는 법을 배워서 실천에 옮기면 좋은 일이네.”

“저희의 모든 것을 바꾸려 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꾸지 않고 나라를 만들려 하면 주변의 부족들이 모두 결집하여 저희를 몰아내려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서로 패를 나누어 싸우다가 패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배운 것이 많으니 걱정도 많아진 것이 분명하다. 수많은 역사서를 탐독하였으니 민족 내부의 갈등, 각종 외침 그리고 분열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었겠지. 하지만 나도 숨겨둔 한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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