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20화 (220/573)

< 3장 34화 - 국제화 시대(1) >

1474년 2월, 각지에 있는 내 땅에서 올해의 소작세가 걷혔다. 요즘 들어 갈수록 재산이 늘어나니 처리하는 일이 골치가 아프다. 자식들 모두가 먹고 살기에 불편함이 없으며 나도 재산을 쌓을 이유는 없다.

그런 와중에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들었으니 잘 되었다 싶어 호조에 연락을 넣어 남아도는 재산을 처분하려 하였다. 호조에 찾아가 서류를 내놓고 일천 석을 보내니 호조 관리들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역시 수양대군 어른께서는 종친의 본이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마침 곡식을 모으는 일이 곤궁해질 찰나였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본래 나라가 어려우면 나서는 법이 아니겠는가. 금주령이 내려질 조짐이 있던가? 본디 흉년이면 금주를 명하는 일이 평범하지 않은가.”

“주상전하께서 명하시기를 세율을 낮추고 경원에서 생산되는 진가루를 조금 더 들여오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셨습니다. 내년까지 흉년이 이어지면 금주령이 시작되겠지요.”

조선이 여태까지 발전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인구 대비 생산량이 월등히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식생활에 집착을 한 이유도 입신체비라 하여 보디빌딩을 소개할 적에 가장 필요한 것이 식생활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고 보디빌딩을 하면 몸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근육이 늘어나지 않고 헛된 힘을 사용하니 흔히 말하는 골병이 드는 일은 다반사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다음 날 아침 박살났다. 식량 공급이 늘어나니 한양 주변에 술집들이 늘어나서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 제자들과 함께 도성 주변을 뛰어다니는데 길바닥에 술로 만든 빈대떡이 여럿 보인다.

분뇨는 초석전에 공급하기 위하여 길거리에 설치된 공공화장실에서 수거하지만 빈대떡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 제자 중 한명이 바닥에 깔린 빈대떡을 밟고 울상을 짓는다.

“천지 사방에 흉물들이 널려있는데 나졸들은 대체 치우지 않고 뭘 한단 말인가! 못 볼 꼴을 보여줘서 미안하네.”

“조선에서는 마시고 토하는 풍습이 있습니까? 저희에게는 벼락을 맞을 일입니다!”

“우둔한 이들이 자신의 몸을 다스리지 못하여 벌어지는 일이네. 술은 즐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마사이족 청년들이 상상도 못할 광경이라 여기니 내가 다 부끄럽다. 식량 생산이 늘어나면서 여유 곡식이 늘어났고. 여유 곡식은 자연스럽게 묵어서 말의 먹이가 되거나 술로 바뀌어 팔리는 것이다.

이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연쇄 효과다. 북방에서 개량 밀인 사종(四種)이 대세가 되면서 식량을 밖으로 내보낼 지경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북방 지역에 팔리던 잡곡이 남으니까 술이 되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작금에 들어 술을 마시는 이가 늘어나고 진고개(남산 북쪽, 수양대군의 자택이 있는 지역) 인근에 목로술집이 여럿이 생기고 색주(色酒) 마저 생기니 문란함이 극에 이를 지경입니다.”

“색주는 주상전하께 말씀드려 변방으로 쫒아내겠소. 일을 무턱대고 막으면 틈을 타고 스며드는 법이니 변방으로 보내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런 형편인데도 현동이는 이틀 전에 마신 술로 오늘도 입신체비를 궐(闕)할 지경입니다.”

술 이야기가 나왔는데 오늘도 현동이가 입신체비를 걸렀다고? 이제 36살이어서 근손실이 시작될 나이인데 정신을 차리지 않고 뭘 하고 있지? 군부인 한씨가 저녁을 거른 현동이에게 꿀물을 가져다 줬는데 숙취에 시달리다니 한 소리를 해야겠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인사를 올린 현동이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평소에는 나를 닮아 술이 강한 녀석인데 대체 무슨 일일까. 현동이도 내 표정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네 나이도 이제 불혹(不惑)에 다다르지 않았더냐.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이다지도 숙취에 시달리느냐?”

“도성 남쪽에 주루(酒樓)가 들어서며 이국의 물산이 몰리니 참으로 좋은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독한 맛이 일품인 당주(럼)를 너무 과하게 마셨습니다. 소자 이러한 일을 다시는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주는 조선시대에 만든 럼이다. 설탕을 정제하고 남은 당밀을 발효시켜 대충 증류하고 항아리에 넣고 한약재를 넣어 숙성시킨다. 제대로 걸러내지도 않아서 거친 맛이 도드라지는데 숙취는 몇 배나 심하다.

당연히 나는 마시지 않으며 집에도 사 두지 않는다. 그저 비싼 값이라 귀하게 여겨 마시는 이들이 있지만 현동이가 마셨다고? 나이를 이렇게 먹어도 사람은 아이라 하지만 이건 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당주는 숙취가 심하고 사탕(설탕)의 생산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흔해질 술이다. 평시에 즐기던 소주를 마실 것이지 어찌하여 그러한 술을 마시는 것이냐.”

“실은 벗이라 하여도 제가 금석문을 탐독할 적에 만난 이들이 도성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도성에서 이국의 물산을 경험하기를 원하여 알음알음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현동이도 지방에 인연을 둔 자들이 있었지. 누가 만들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머리를 잘 쓰는 자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소문이 퍼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대의 강남 일대를 개발한 것이겠지. 기껏 해야 초가집 좀 있는 고장이니 땅을 사들이기도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현동이가 값을 지불한다 하여도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이국의 물산이라 하면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가 들어간 안주가 나왔을 것이 분명한데 현동이가 그만한 돈을 술을 마시는데 쓴 적이 있나? 녀석이 써 봤자 은자 서른 냥이 전부이다.

“고관대작이라 하여도 서행사가 다녀온 무역품을 하사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쉽사리 다루기 힘들 것이다. 네가 다녀온 주루의 정체가 궁금하구나.”

“한강 변의 광주(廣州) 유수부가 아닌 목이 좋은 곳에 누각 여러 곳을 지어 여럿이 즐길 자리를 마련하니 알려지지 않은 명소입니다. 뜨내기 유생부터 상인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강남에 차린 술집이 분명하다. 지금의 강남은 초가집이나 있는 허름한 동네니까 땅을 구하기도 쉬울 것이고 경치도 좋겠지. 그렇지 않아도 내가 움직이면 고관대작들의 시선이 집중되니 편히 다니기 힘든 지경이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이들과 편히 대화를 나눌 장소가 필요하였는데 어디인지 알려 줄 수 있겠느냐.”

“이름이 압구정(壓鷗亭)이라 합니다. 듣자하니 고관대작이 사재를 털어 지었다 하던데 정작 벗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압구정? 누를 압자에 갈매기 구자를 써서 압구정이면 내가 아는 압구정과는 한자 하나가 다른데. 좋은 장소를 알았으니 찾아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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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압구정동 인근은 기껏 해야 초가집만 있는 고장이니 한강 이북 도성에 사는 이들은 접근하기 힘들다. 당연히 고관대작들이 다니기 불편하니 알려지지 않을 만 했다. 물론 나야 일행들과 같이 나룻배를 빌려 강을 건너는 중이다.

“명심하게. 젊은 유생들이 많이 있으니 우리가 함부로 신분을 드러냈다가는 불편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기껏 해야 체장(관장)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입신체비장의 체장이면 관직으로 따지기 힘들지만 당하관 이상의 신분이 아닌가. 거기다가 나와 종제는 종친이기까지 하지 않나.”

지금 모인 이들은 입신체비장을 처음 꾸릴 때에 모았던 이들이다. 서산군, 마일용, 우현규 그리고 하위지까지 있으니 당상관도 아니고 의정부 관원 수준의 인연을 맺은 자들이지만 너무 거물이 되어서 모이기도 힘들었다.

종친이 둘에 형님의 스승은 아니지만 도움을 준 자, 그리고 입신체비장의 체장 두 명이 모인다 하면 무언가 큰 일이 있을거라 지레짐작을 할 것이 분명하니까.. 물론 홍위에게는 몰래 이야기 해뒀지만 다른 이들이 보아서 좋을 일은 없다.

배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가니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압구정에서 청년 여럿이 달려내려와 인사를 올린다. 그들도 젊은이들이나 만나 보았지 나이 많은 장년들이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겠지.

“어르신들이 방문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압구정은 여러 채의 누각을 두어 풍류를 즐기는 곳이니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혹여나 원하시는 곳이 있으십니까?”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면 좋을 것 같으며 풍류를 즐기고 싶으니 소주와 찬거리를 가장 좋은 것으로 가져다주게. 그런데 이 주루를 만든 이가 누구인지 궁금하군.”

“저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듣자하니 성씨가 유(柳)씨 이시며 젊은 분이었습니다. 물목을 관리하실 뿐 상시 머물러 계시지 않은 분이니 만나뵙기 힘들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누각을 안내받았다. 아무리 봐도 한명회의 손길이 닿은 것 같은데 정작 유 씨라? 한명회의 주변에서 이런 큰 사업을 벌일 수 있는 유 씨 성을 가진 인물은 없다. 관원이라면 불가능하며 상인이라면 한명회와 친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니까.

궁금함이 앞섰지만 안내받은 누각으로 올라서자 경치가 좋아 휘파람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쌀쌀한 공기를 달래기 위해 화로를 여럿 두었으니 견디지 못할 정도의 추위는 아니다.

“이러한 주루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본 적은 있다네. 일전에 명국의 남경의 주루 가운데 이러한 곳이 있었지만 드나들지는 않았지. 아국에도 이러한 곳이 생기다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네.”

평상시에는 도성에 있던 술집에 가끔 들리던 마일용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주변을 돌아본다. 다 같이 경치를 즐기니 요리가 들어왔다. 이 요리는 내가 만든 당수육(바비큐)인가? 하지만 특이한 냄새가 난다.

“이건 당수육이긴 한데 완전히 다르군. 박혀 있는 것이 정향(丁香)이 아닌가?”

“내관들이 구취를 막기 위하여 정향을 찾는 모습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향을 고기 요리에 사용하다니요. 처음 보는군요.”

내가 어설프게 재현했던 바비큐가 아니고 정향을 넣어 향을 돋우고 아직도 제법 비싼 당밀을 뿌려 고기에 윤기를 낸 녀석이다. 이러니 현동이가 즐겨 먹었겠지. 다음 요리는 피렌체에서 건너온 이들의 손길이 닿은 요리이다.

“이건 유어(鮪魚 - 다랑어)의 알을 소금에 절이고 말려 만든 어란(魚卵)입니다. 삶아낸 난조면(卵條麪 - 푸질리 파스타)에 버무려 후추를 쳤으니 모양도 좋고 맛도 좋습니다.”

“유락(치즈)을 이렇게 푸짐하게 사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맛을 보니 대양도에서 물소 젖으로 만든 녀석이겠군요. 차이가 여실히 느껴집니다.”

물소 젖으로 만든 모차렐라 치즈는 아니지만 말린 가지에 버무려 구색은 갖춰 놓았으니 나쁘지 않은 요리이다. 마음 한편에서는 압구정의 주인에 대한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오늘 술자리를 만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축하를 위해서이니 먼저 축하할 일을 이야기하자.

서산군이 드디어 인도에서 데려온 요가 수행자들의 수련 내용을 익히고 다듬어 유가집성(瑜伽集成)이라는 서적의 초고를 얼마 전에 끝냈다. 앞으로 퇴고 과정을 거치면 입신체비의 분파로 요가가 들어오는 것이니 그것을 기념하자.

서산군에게 소주를 한 잔 담아주자 그동안의 고난을 보상받았다는 듯이 거침 없이 한 잔을 홀짝 들이켰다. 다시 술잔을 받고 술을 받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두(요가 수행자)들의 의견을 모두 서책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그렇게 고단한 일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 궁금한 일이군.”

“고단한 일이라 하여도 나이가 들어 몸이 쇠해지니 입신체비를 줄여 유가(瑜伽 - 요가의 조선식 표기)라는 학문에 발을 들이기가 쉬웠습니다. 다만 아쉬운 일은 유가에 있는 속뜻을 도저히 반영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나도 어깨너머로 요가를 배우면서 들은 사실이지만 요가는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사색이 결합된 학문이지만 현대에서는 철학적인 면은 사라지고 오로지 육체적인 면만 남았다 한다.

서산군은 나름 학문을 익힌 유학자이니 요가의 철학적인 면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몸을 다루면 충분하지 정신이 문제란 말인가? 내가 술을 들이켰지만 서산군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대유(大儒 - 학식이 높은 선비)에 속하는 자였다면 이들이 논하는 괴력난신을 철저히 논파하여 제대로 된 뜻을 남겨놨을 것이지만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부족하여도 수행법에 관해서는 빠짐없이 기입하였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네. 어차피 유가를 익히는 사두들은 천축에 있으니 언제라도 물어볼 수 있지 않은가.”

“실은 수행법도 빠트린 것이 있습니다. 제가 부족한 점을 도우려 하였는지 여기 현규(玄圭)가 제 동작을 눈여겨보고 몸을 상하게 하는 동작을 모두 제외하였습니다.”

우현규, 우공(禹貢)이며 한때 세조의 충신이자 빼어난 무신이었던 자는 어느 새 조선에서 으뜸가는 명의가 되어있었다. 침술과 탕약이 아닌 관절과 근육의 부상을 치유하는 재활(再活)이라는 학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환갑이 다 되어서 머리가 희어졌지만 그의 명성은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다. 심지어 나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제자인 우현규에게 치료를 받아서 보답을 보낸다는 자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현규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군어른께서 제 몸을 치유하셨으니 이는 대군어른의 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요즘 주상전하께서 과거 제도를 고치신 이후로 제 제자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제자들이 늘었다 하니 효험이 좋은 것 같군.”

“요즘이 정말 더없이 바쁩니다. 형무소에 후임자를 보내고 나니 주상전하께서 이제 간척지에 있는 왜인들을 치유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덕분에 참상관의 끄트머리인 부정(副正)까지 진급하였으니 이 또한 주상전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도성에서 만나기 힘들었나 보군. 우락부락하거나 반항하기 쉬운 죄수들을 다루다 가벼운 왜인들을 다루니 편안해지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간만에 보는 자이니 얄궃은 표정으로 놀리듯이 술을 주고 받았다.

“삼 대를 이어가지 않은 의원에게 치료를 받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는 당대에 이런 업적을 만들었으니 평가가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네.”

“그런 말을 늘어놓는 이들은 제가 손수 수기요법(手技療法)으로 교정하여 줍니다. 골격이 풀리는 소리가 많이 들릴수록 더욱 자주 오게 되더군요.”

그런 말을 들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술을 한 잔씩 돌리면서 얼굴을 바라보니 처음 입신체비장을 세울 시절이 생각났다. 다짜고짜 입신체비장을 세우고 골격이 좋다고 마일용을 받아들인 시절이니 나도 조선시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를 생각하면 앞일이 까마득해 보였는데 어느덧 입신체비가 잡과에 속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그렇게 저무는 해를 보며 술을 마시는데 옆의 누각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도대체 이해를 하지 못할 노릇이라네. 어찌하여 북방에 있던 야인들이 당당히 관직에 오를 수 있는가. 그들을 위해 마련한 빈공과(賓貢科)에서 관직을 얻을 것이지!

생각해 보니 얼마 뒤에 정기 과거인 식년시(式年試)가 열리지만 형님의 관직 개편을 반영하며 북방의 관료 보충을 위하여 제도가 변하였다. 기존에 임시로 잡과에 해당되는 율과(律科 - 법관을 뽑는 시험) 인원을 두 배로 늘린 것과 차원이 다르다.

소과의 진사와 생원시는 인원을 3할 확충해서 260명을 선발한다. 대과도 초시의 인원을 300명으로 증설하였으며 복시는 50명을 선발하니 관직에 들어갈 폭이 늘어난 것이다.

무과는 훈련도감이라는 좋은 기구가 있으니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이 시대의 전문직을 선출하는 잡과가 정말 많이 변하였다. 역과(譯科)는 탐검사와 서행사의 관원을 위하여 세 개의 과가 추가되어 초시에서 80명을, 전시에서 27명을 선발한다.

의과와 음양과도 두 배로 늘었지만 가장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산과(算科 - 수학과)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체과(體科)라는 대놓고 입신체비를 가르치는 과가 신설된 점이다. 하지만 자리가 늘어났다고 모든 일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 주상전하께서 품으신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네. 북방은 이전처럼 토관을 두어 그들이 다스리게 만들면 될 것을 어찌하여 전시 순위에 들지 못하면 북방으로 보낸다 하는가!

저게 문제겠지. 나름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머나먼 북방으로 발령받으니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면 뭐 어쩌겠어. 참하관을 벗어나려면 무조건 배 타고 떠나야 하는 곳으로 갈 것인데. 마일용도 한숨을 내쉬며 술을 들이켰다.

“제가 알고 있는 자가 분명합니다. 제 입신체비장에 머물며 학업에 몰두하는 유생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이이지만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호되게 야단을 쳐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스스로의 힘을 갈고 닦을 생각을 하지 않고 관직에 나서게 된 야인들을 헐뜯는단 말인가. 어차피 관직에 오르면 가문의 힘으로 출세할 것이 아니겠는가.”

여진족들 가운데 초창기에 합류한 이들. 경원과 거양 일대에 사는 이들의 2세대는 조선의 관습을 받아들여 학업에 몰두하는 이들이 생겼다. 그러한 이들이 토관의 자리를 받을 수 있는 빈공과가 아닌 정식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가문의 힘과 자신의 학식으로 이기면 충분한 일이 아닐까. 나와 같은 생각을 품었는지 하위지도 한숨을 쉬었고 마일용은 아예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큰 소리가 들려왔다.

- 그게 무슨 망발인가? 같은 말을 쓰고 같은 풍속을 따르는 이들을 구분하려 들면 사람이 할 짓이 아니 되네! 당장 저 멀리 퉁아니라는 부족이 아국의 습속을 배우려 하는 일은 잊었는가? 그러한 이들을 보면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 종친 가운데 명망이 높은 효령대군 어른과 수양대군 어른의 지도를 받은 이들이 관직에 나서게 될 것이 아닌가. 내가 그런 분들 아래에서 학문을 익혔다면 지금쯤 장원에 오르고도 남았을 것인데!

기분이 상하다 못해 술맛이 더러워질 지경이라서 벌떡 일어났는데 상대도 같은 마음을 먹었나 보다. 갑자기 욕설이 들려오더니 깨지고 뒤엎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고함이 들려왔다.

멀리서 보아도 누각이 흔들리는 것이 싸움을 벌이는 것이 분명하다. 마일용의 방침 상 근육량을 키웠을 것이 분명하며 삼대 팔백 근(512kg)을 치고도 남는 이들이 여럿이니 건물이 붕괴될 지경이었다. 마일용이 서둘러 아래 누각으로 달려가고 소리가 들려왔다.

- 체장님! 어찌하여 여기 계십니까!

- 잠시 아는 이와 술을 마시러 왔는데 목소리가 들려서 왔다네! 자네들은 멱살을 잡고 싸우면서 무엇을 하는가! 일단 질식투(초크슬램)부터 받게!

역시 마일용다운 수습법이다. 와장창 하면서 대판 깨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오고 반대편 누각의 지붕에서 기와가 떨어지는지 무언가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래서야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할 판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몰려오고 어떻게든 수습 되었다. 시비를 걸었던 유생은 마일용의 초크슬램에 맞아 등에 피멍이 들고 어깨뼈가 손상된 것 같은데 우현규가 빠르게 응급처치에 나서니 볼 장은 다 보았다.

“세상에! 수양대군 어른께서 여기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게. 그냥 몇 년은 고향으로 돌아가 푹 쉬도록 하게!”

결국 종친이 먼 곳으로 와 술을 마신 사실이 관료들에게 퍼지면서 압구정의 주인의 뜻과 전혀 다른 상황이 되겠군. 주인으로 보이는 서른 쯤 되는 사람이 달려오다 내 이름을 듣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수양대군 어른 아니십니까! 대군어른께서 오신 줄 알았으면 제가 직접 모셨을 것인데 무례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러한 일은 되었네. 내가 와서 술을 즐긴 것은 나의 뜻이니 괘념치 않아도 좋다네. 그런데 자네가 주인이 맞는가? 아무리 보아도 당당하지 않으니 진짜 주인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군.”

“실은 여기의 주인 되시는 분은 탐검사의 도제조이신 압구 어르신입니다. 저는 그저 어르신에게 발탁되어 압구정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습지요.”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자신과 같은 호를 따면 욕을 먹을 것이 분명하니 약간 호를 틀어 정자의 이름을 정한 것이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는데? 겸직도 줄이는 추세인데 이런 주루를 만들어도 되나 몰라?

“한 도제조라면 사리에 맞는군. 주상전하께서 한 도제조에게 하사하는 물품이 풍족하다 들은 적이 있네. 그런데 관료가 이런 자리를 만든다면 법에 어긋나지 않는가.”

“주상전하께서 특별히 은혜를 내리셨다 들었습니다. 외방(外邦)에 나설 적에는 항상 나라의 일을 수행하니 원하는 일을 청하라 하였고 압구정은 주상전하의 허가 하에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홍위가 좋은 수를 썼네. 이 시대에는 관료로서 업무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산을 불리고 관리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한명회가 매번 해외에 나서니 집안 재산을 관리하기도 힘들고. 설령 아내가 관리하려 해도 죄다 상업(商業)에 관련된 일이니 다루기 힘들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인에게 값비싼 물품을 처분하고. 딱히 처분하지 않아도 될 값싼 물건 가운데 식재료나 향신료가 많은 점을 응용해 술집을 차리게 된 것이리라. 앞에서 고개를 굽실거리는 유 씨 성을 가진 이는 나와 마주칠 줄 몰랐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러한 좋은 곳은 여러 사람이 다녀야 하는데 어찌하여 관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생들로 국한하였는가. 당상관에 속하는 이들도 이러한 곳에서 풍경을 즐기며 술을 마시기를 꺼려하지 않을 거라네.”

“실은 제 가친(家親)께서 지엄하신지라······.”

“가친이라? 그러고 보니 자네는 중추부에 있는 유 대감(유구 - 柳規)의 친척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저는 중추부지사 대감의 얼자가 맞습니다.”

유구의 얼자라 하면 딱 하나 기억나는 인물이 있다. 조선 전기의 풍운아이자 권력에 몰두한 간신이자 권신인 유자광이지. 내 앞에서 쭈뼛거리는 남자가 유자광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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