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32화 - 만국전도(萬國全圖) >
요동 외부에 드디어 몽골의 군대가 나타났다. 심양으로 전달된 소식을 들은 석형은 이를 악 물고 밖으로 나섰다. 가장 빨리 움직인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지휘첨사 이문빈이 거느린 사병이었다.
“총병관님이 오셨다!”
“총병관님! 오천 가량의 달자들이 장성 북방을 사수하며 이곳저곳에 화살을 쏘고 부리나케 달아났다 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것인가! 어차피 약탈을 하려다 굳건한 장성을 보고 도망친 것이겠지!”
“다른 일이 문제가 아닙니다. 흠차태감(欽差太監)인 정동(鄭同) 어르신이 방문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극비에 벌어질 일이니 심양 일대만 시찰하시겠지만······.”
석형이 투구를 매만졌다. 만에 하나라도 몽골의 병사들이 약탈을 위해 장성을 넘는다면? 장성은 군대를 상대로 막는 것이 전부이지 소규모의 약탈 병력은 산을 넘어 장성의 틈을 파고 들 것이다.
그들이 마적으로 돌변한 이들과 합류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변란이 일어날 것이고 요동의 사정이 사례감 태감이 된 정동을 통해 알려질 것이다 하지만 의심 가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대체 지휘첨사에 불과한 자네가 어떻게 사례감 태감과 연이 닿아 있는가.”
“저는 본디 고려의 사람이며 고려는 곧 조선이 되었습니다. 정동 어르신은 본디 조선에서 오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인연을 맺어 많은 도움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물론 정동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어져 있던 이이며 요동과 인연도 없었다. 하지만 석형도 정동이 조선 출신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았으니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말에 올라탄 석형은 호기롭게 외쳤다.
“달자는 오천에 불과하며 요동의 병사들은 십이만 명에 달한다! 염려하지 말고 장성 밖으로 나아가 달자들을 쫒아내도록 하자!”
호기롭게 나선 석형이었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전공을 세운 적도 없었다. 병사들은 그의 행적을 잘 알고 있으니 오랜 경험을 쌓아온 이문빈을 신뢰할 지경이었다.
일만이 넘는 병사들은 그렇게 계획도 없이 요동변장(遼東邊墻 - 요동에 쌓였던 만리장성 이전의 방어체계)을 넘어 다시 완비된 장성을 넘어섰다. 지독한 추위 속에서 몽골의 척후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이다! 저 놈들이 보이니 돌격하라! 어서 돌격하여 놈들의 수급을 거둬라!”
난데없는 적의 출현이었지만 몽골의 척후병들은 지난 내전을 겪으며 철저히 단련되어 있었다. 너무나 큰 소모로 원정에 나설 힘은 없었지만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어 움직이는 멍청이들을 격퇴할 힘은 있었다.
닷새가 넘게 추격하면 어느 새 사라져있고. 군영을 차려 몸을 쉬려 하면 거침없이 습격하였다. 기껏 해야 이천 명에 불과한 척후병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석형은 눈에 독기를 품으며 이문빈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뭘 하는 것인가! 놈들이 우리를 우습게보아도 한참을 우습게보지 않는가! 이러다가 동상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속출할 것인데 지휘첨사 자네는 무얼 하는가!”
“답이 없습니다. 저희는 기병과 보병이 모두 섞여 보병에 움직임을 맞춰야 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손해를 보더라도 분열하는 것이 나을 일입니다.”
이문빈의 병사들도 많은 손해를 보았다. 지독한 혹한에 손과 발이 썩어 들어가는 이가 속출하였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역심을 품을지도 몰랐다. 석형은 애써 눈빛을 돌리며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삼로병진(三路竝進)을 택하도록 하지. 내 병력과 자네의 병력을 나누고 보병을 본영에 두는 일이라네. 이렇게 하면 달자들을 소탕할 수 있겠지. 다만 자네의 아들인 이춘미(李春美)를 나의 보좌로 붙여주게나.”
이미 예상한 일이었기에 이문빈은 흔쾌히 수락하였고 병사들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춘미가 안내한 길은 투메드부로 직행하는 사로(死路)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투메드부에 머무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대 칸이자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권력을 내놓은 타이순 칸이었다. 그의 휘하 케식들과 정예병은 여전히 투메드부를 지키고 있었다.
팔천에 달하는 석형의 병력이 단 삼천에 불과한 타이순 휘하 정예 병사에게 녹아내린 것은 한 순간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피로가 축적된 기병들은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지도 못했다.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고 조금만 대열이 흐트러져도 철기들이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석형의 병사들은 삽시간에 몰살당하며 붕괴하였다. 도주를 택하여도 답이 없었지만 이춘미가 이를 악 물고 석형이 들고 있던 요동 총병관의 군기를 거머쥐었다.
“놈들이 정말 원정을 준비하였나 봅니다! 이런 정병을 두었다니 병력은 일만이 넘어갈 지경이 아니겠습니까! 총병관님! 어서 도망치십시오!”
“이춘미! 자네 지금 뭘 하는 건가!”
“아버지에게는 죄송하다고 말씀하여 주십시오. 제가 후방을 막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도주 하십시오!”
이춘미의 결사대가 후열에 남았고 석형은 도주를 택했다. 사흘을 넘게 도주한 석형의 병사는 오백 명에 불과하였으며 모두 추위와 피로에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석형은 본영으로 들어온 직후 크게 외쳤다.
“왜병! 왜병들을 불러라! 어서 날 호위하게 하여라.”
“잇신 여기 있습니다! 총병관 어르신!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달자들이. 달자들이 쳐들어 올 준비를 마쳤다. 나의 병사들이 몰살당하고 조만간 수만에 달하는 달자들이 진군할 것이네. 그런데 자네 지금······.”
가죽부대가 뚫리는 소리가 나면서 둔탁한 창날이 석형의 갑주 틈을 파고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굴리던 석형은 신음성을 내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이미 죽으신 총병관님이 살아 돌아다니시다니.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들 들어라! 총병관님이 돌아가셨다! 사악한 달자 놈들에게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셨다!”
“아이고 총병관님! 어찌하여 이리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나이까?”
평상시부터 석형의 행적을 경멸하던 병사들은 병장기를 들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석형의 사지에 칼날을 박아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육(魚肉)이나 다름없게 변한 석형의 시신 앞으로 이문빈이 나섰다.
“조만간 달자들의 전대 한(칸)이 올 것이네.”
모든 일은 미리 준비된 일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투메드부에 배치한 타이순 칸은 지독한 견제를 당하고 있었으며 언젠가 한 번은 전쟁을 치러 자신의 치적을 드러내고 힘을 강조하여야 했다.
그런 타이순에게 이문빈은 요동 총병관을 살해해 달라는 제안을 하였다. 총병관이면 수만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린 자이니 타이순이 만족할 만한 상대였다.
북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약탈에 전념하던 석형은 철저히 농락당한 채 비참하게 죽었다. 굳이 잇신을 끼워넣은 이유는 이문빈 자신이 악명을 덮어쓸지도 모르는 우려 하나 때문이었다.
먼 북쪽에서 이춘미를 선두에 세운 몽골 기병들이 내려왔다. 이춘미의 결사대는 모두 지휘첨사 휘하의 병력이었으며 그들 모두 살아 있었다. 이윽고 타이순 칸이 자신의 말에서 내려 이문빈 앞에 나섰다.
“이놈이 그 머저리 놈인가? 자신의 병사들을 다스리지도 못하고 백성들을 사냥했다는 빌어먹을 놈이? 이 놈이 나서지 않은 덕분에 내가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알기나 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석형의 두개골이 타이순의 칼날에 무참히 박살났다. 거들떠보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 타이순은 이문빈의 눈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뭘 하려는 것인지 궁금하군. 요동 일대를 다스려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이어가야겠지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고장이니 마적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타이순 칸이 돌아가고 이문빈은 장계를 올렸다. 석형은 삼만 명에 달하는 몽골 병사들을 상대로 장성 밖에서 항전을 거듭하다가 소식이 끊겼으며. 자신은 가까스로 장성에 나아가 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일에 급급하였다고.
영덕제는 석형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전공을 세운 이문빈을 요동 총병관의 자리에 올렸다. 하지만 이문빈의 능력으로 요동을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요동의 세력은 네 갈래로 나뉘었다. 요동 총병관을 담당하는 철령 이씨의 군대, 자유를 보장받은 왜인들을 기반으로 한 군대, 소수 생존한 여진족을 거느린 몽골의 분견대와 마적으로 돌변한 백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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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 9월, 세종대왕님의 삼년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묘호로 원래 역사와 같은 세종(世宗)을 정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상왕이자 아들인 형님이 정하는 것이 도리이지만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는 해야 하니까.
결국 형님이 의견을 수렴하여 세종으로 정하였다. 태(太)를 사용하자니 선왕인 태종이 있으며 문(文)을 사용하자니 영토를 넓힌 치적을 고려하지 못하였으며. 국토를 개척하였다는 환(桓)은 명나라의 영토를 물려받은 것이니 아니라 하였다.
결국 세종대왕님은 세종대왕님이 되셨다. 삼년상을 끝낸 형님이 몸조리를 하며 나와 이맹전 그리고 한명회를 비롯한 관료들이 정리한 개편안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셨다.
“상중에 고생이 많았구나. 가급적이면 네가 알려줘야 좋을 일이지만 혹여나 하는 일이 있더냐?”
“이현전의 학자들과 토의를 나누려 합니다. 일전에 오사만국과 분쟁이 벌어지면서 그들이 저에게 의탁하기를 청하였으니 저 또한 응하려 합니다.”
형님은 내 세력이 너무 커질까 염려하는 눈초리를 보내다가 이역만리에 기반도 없는 이들이라 생각하였는지 별 탈 없이 넘어갔다. 덕분에 골치아픈 일에서 벗어났으니 좋은 일이지.
이현전에 들어가 보니 놀라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군사 목적으로 개발했던 망원경 덕분에 이 시대에 등장할 수 없는 정밀한 세계지도를 만들 수 있었으며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
목성의 위성을 관측할 수 있으니 이들의 삭망(朔望)에 대한 관측이 가능해 졌으며. 정밀한 시차의 측정 덕분에 경도와 위도를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나라의 영토는 측정하지 못했지만 항해를 통한 기록과 기존의 지도를 조합하자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그러하니 이게 혼일강리역대국도를 넘어선 만국전도(萬國全圖)라는 것인가?”
“피렌체의 미술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구주(유럽)에 관한 정보도 포함하였으니 근래에 들어 가장 정확한 지도임이 분명합니다.”
세계 지도와 어느 정도 흡사한 모습이지만 많은 부분이 부족했다. 기존 지도와 측정한 위도와 경도를 기반으로 작성했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지 않아 태평양과 대서양이 이어져 있었고 북쪽도 비어 있었다.
가장 특이한 점은 호주가 없는 것이다. 이건 이해했지만 신농도, 원래 역사의 뉴기니 남쪽에는 여러 개의 섬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니 너무 궁금했다.
“신농도의 남쪽에 있는 섬은 무엇이오? 일전에 한명회의 말을 들은 적은 있는데 궁금하구려.
“잘은 모르지만 한 도제조의 항해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투이도(통가 제국)에서 이주한 이들이 말하기를 거대한 섬이 있었는데 싯누런 황토가 맴도는 것 같은 땅이라 하였습니다.
“그것 참 특이한 일이로군. 혹여나 이것이 섬이 아니고 거대한 대륙일지도 모르지 않소. 혹여나 근방의 해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겠소?”
지도에는 호주의 일부만 나타나 있었다. 정확히는 호주 북부의 토러스 해협 제도를 한명회가 발견하고. 통가 제국 출신 젊은이들이 퀸즐랜드 주의 해변을 발견하였으니 세 개 정도의 섬이 연달아 있다 여긴 것이다.
내 말이 끝나니 가심과 하산은 섬 사이에 손가락을 짚어나갔다. 지금까지는 섬으로 여긴 호주이지만 한명회의 항해일지에는 해류에 관한 기록도 있었으니 호주 일대를 흐르는 해류를 바탕으로 섬이 아니라는 사실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 도제조가 남겼던 항해일지의 해류를 덧씌워 보겠습니다.”
지독히 얇은 습자지(習字紙 - 붓글씨 연습을 위한 아주 얇은 종이)에 아마(亞麻) 기름을 먹인 기름종이 한 장이 지도 위에 올라섰고 한명회의 항해일지를 바탕으로 해류를 기입하였다. 놀랍게도 며칠 간격으로 기입된 해류는 한 가지의 사실을 드러냈다.
“이런 일이? 군도(群島)를 다닐 적에는 군도 사이에 해류가 흘러 방향이 불안정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근의 해류는 명백히 섬 사이를 흐르지 않고 거대한 대륙인 양 흐르고 있습니다.”
“혹시나 하였는데 잘 된 일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열산도보다 거대한 섬이 분명할 것이며 생각보다 더욱 커다란 섬일지도 모르겠소. 아마 이러한 형상일지도 모르지.”
호주를 그대로 그릴 수 없으니 기름먹(크레용)을 들고 기름종이 위에 대충, 엉성하게 뉴기니 정도의 크기로 그려나갔다. 사실상 내가 예측한 섬이니 내가 이름도 정해야겠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곳, 섬일지 대륙일지 모르는 곳의 이름을 호주(壕州)라 하겠소. 도랑을 이루듯이 해류가 흐르니 참호를 이룸과 같아 해자 호(壕)의 이름을 따 보았소.”
“이런 일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만!”
한명회의 항해일지는 여러 부 필사되어 이현전 학자들의 세계 지도 작성에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생소한 요소. 해류가 결합되자 이현전 학자들은 닥치는 대로 기름종이를 가져와 쌓아나갔다.
“아니 이걸로는 부족해! 얼마 전에 톤도(필리핀) 외해를 순시했던 함대의 기록도 가져오라 하게! 주상전하께 말씀드리면 며칠 걸리지도 않을 거라네! 대군어른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시대에는 해류에 대한 뚜렷한 분석이 없었다. 그저 강이 흐르듯 바다가 흐르는 것이라 여겨졌으며 바람이 부는 방향이 일정하니 해류 또한 일정하게 흐르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전 세계 지도를 명확하게 제작할 기술력을 갖춘 자들과 함께 만난다면? 학자들이 이미 커피콩을 갈아 화로에 올리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빠져나왔고. 삼일이 지나서 이현전에 들리니 모두 기진맥진해서 지도를 부여잡고 있었다.
“대군어른이 어디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해류의 흐름 가운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해류의 흐름 가운데 이상한 점이 있다 하였소?”
“분명 열산도 출신인 박노포의 증언에 따르면 적도(赤道), 태양이 항상 수직으로 거니는 곳에서는 거대한 해류가 세 갈래로 나뉘어 흐른다 하였으며 이 해류를 톤도 외해를 순시했던 이들도 알아차렸다 하였습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명확하지 않다. 스페인의 무역선단이 사용했던 적도 해류겠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말을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가심은 내 손을 잡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한 거대한 해류가 자취를 감췄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머나먼 동쪽에는 새로운 주(州)가 있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증거가 확실하오? 또한 다녀올 길이 있소?”
“얼마 전에 사재감(司宰監 - 어류, 육류, 진상품을 담당하는 부서)에 부임한 열산도 출신 참봉 윤와당의 증언을 들어 보니 가장 동쪽에 라파누이라는 섬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 곳을 기점으로 삼으면 충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뭔가 다른데? 이스터 섬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이스터 섬은 아마 문명이 초토화되고 환경이 파괴되기 직전의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고생할 일도 아니고 한명회가 고생할 일이지. 이미 학자들은 해류의 흐름을 끊은 정체불명의 대륙에 미주(迷州)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혹하는 섬이라는 뜻이니 정말 적당한 작명법이다. 가심은 눈을 부비며 하품을 하다 황급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삼 일이 넘게 밤을 지새운 덕분에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 푹 쉬시구려. 그나저나 만국전도를 완성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이를 주상전하께 보여드릴 수 없었겠구려.”
“미완(未完)인 지도를 보여주시면 더욱 좋아할 분이 아니겠습니까. 기름종이를 위에 덧씌우면 더욱 놀라실 분입니다.”
가심의 판단이 옳았다.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그려진 세계 지도를 훑어본 홍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대륙에 대한 정보가 없지만 세상이 너무나 넓었던 것이다.
“이주(아프리카)의 크기가 너무나 거대하구려. 명국 두 개가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가 아니겠소. 한 도제조(都提調 - 정1품 직책)는 정녕 이러한 머나먼 뱃길을 다녀왔다는 말이오?”
“한 도제조는 물론이고 수많은 이들이 건너온 고장입니다. 또한 포도아의 상인들도 천축과 아국에 당도하기 위하여 먼 바다를 돌아다니고 있는 형국이옵니다.”
“만국전도를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려. 지난 세월 동안 많은 자금과 인재들을 투입하여 헛된 일을 한 줄 알았으나 세상이 이렇게 넓으니 나아가 살지 못하더라도 아국의 사람들이 발붙일 자리를 마련해 두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소.”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 지도는 미완이옵니다. 영전사(領殿事) 가심과 직제학(直提學) 하산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해류에 대한 고찰을 거듭한 결과 두 개의 고장이 더 있을 것을 예측하였사옵니다.”
지도 위에 기름종이가 덧씌워지고 정체불명의 두 대륙이 표현되었다. 미 대륙의 특이한 형상이 아닌 둥그스름한 원형의 모습과 내가 억지로 축소하여 그린 호주가 있었다. 홍위는 놀라운 듯이 두 개의 대륙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두 개의 대륙이 더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해류의 흐름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옵니다. 호주라 이름을 정한 땅은 이미 일부를 발견하였지만 미주라 칭한 땅은 존재를 추측할 뿐 확답을 드릴 수 없는 지경이옵니다.”
“존재를 추측할 뿐 확답을 할 수 없다. 해류의 대한 고찰이니 혹여나 없을 지도 모르는 일이오.”
홍위가 망설이니 욕심이 생겼다. 한명회가 고생하는 것은 불쌍하지만 내 일도 아니고 콜럼버스, 기적의 수학자이자 원주민 학살자가 명성을 떨치는 것도 싫으며 훗날의 미국이 될 북미 대륙을 일부라도 흡수한 조선을 기대하였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며 말을 올렸다.
“하오나 미주가 실제로 존재하면 일이 편해질 것이옵니다. 아국과 혈맹이나 다름없는 투이도를 비롯하여 신농도에 거주하던 이들의 섬을 따라 움직인다면 서역과 접촉할 다른 길이 생길 것이 분명하옵니다.”
“틀린 말은 아니오. 투이도를 비롯한 신농도 사람들이 아국을 절실히 따르니 미주까지 오가는 일이 험난하지 않을 것이며. 미주에 거점을 만들고 서역인과 교역을 시작하면 오사만국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오.”
홍위는 만국전도에 기입된 폴리네시아를 하나씩 짚어나가며 가상의 항로를 그려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합한 거대한 바다 정 중앙에 있는 미주는 단순한 지정학적 위치라 하여도 충분히 매력적인 고장이었다. 하지만 홍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생각과 달랐다.
“미주는 너무나 머나먼 고장이니 함부로 다녀올 수 없소. 만에 하나라도 미주를 찾으려는 함대가 구풍에 휘말릴 지도 모르며, 망망대해에서 기갈(飢渴)에 시달리다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겠소.”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판단이다. 단번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라는 미친 지시를 내릴 이유가 없으니 안정을 택하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홍위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하니 다음 탐검사의 준비를 위하여 신농도 사람의 분파가 머무는 라파누이라는 섬에 곡창(穀倉)을 만드는 것이 먼저요. 또한 이현전 영전사에게 명을 내릴 것이니 한 달을 보관하여도 병에 걸리지 않는 식수의 보관법을 마련하도록 하시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구성군의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소. 보름이 지나면 물이 상해 도저히 들이켜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는데. 미주라는 고장을 발견하려면 한 달이 걸릴 지도 모르는 일이오. 우선 공을 치하하며 이현전에 은자 삼백 냥을 하사할 것이니 당분간 푹 쉬시구려.”
과제가 사라지자 새 과제가 생겼지만 가심은 이현전으로 돌아오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쉰 살이 넘은 이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쓰러지겠소. 사흘 가까이 잠을 설쳤으니 어서 푹 쉬시구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주상전하께서 저희를 신뢰하시니 이는 저희가 정녕 조선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표가 아니겠습니까!”
“조선의 말을 쓰고 조선의 풍속을 따르며 주상전하를 섬기면 어엿한 조선 사람이 아니겠소. 그나저나 한 달을 보관할 수 있는 식수를 만들라 하였으니 이 또한 골치가 아프구려.”
대항해시대에는 식수가 없었다. 조선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항아리에 숯을 깔고 끓인 물을 보관한 것도 아니며 그냥 맥주를 참나무통에 담아 보관해 두었으며 높으신 분을 위해 와인도 마련해 두었다.
항해가 길어지면 물을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알코올이 증발하여 식수는 썩은 물이 되었고 선원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내가 소독약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답답한 일이지. 하지만 이현전의 학자들은 내 말을 듣자 거침없이 답했다.
“골치 아픈 일이 아닙니다. 몇 번이고 시험해 보아야 하지만 대군어른이 만들었던 대로 주정(고농도 알코올)을 넣은 유리병을 두어 식수에 뿌리면 충분한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봉교(프로폴리스)를 비롯한 약재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홍위가 이현전 학자들을 설득하였으니 모든 일이 편해졌다. 의욕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은근 슬쩍 빠져나왔지만 학자들 모두 한 달을 보관할 수 있는 물을 만들겠다고 모여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다시 두 달이 지나 1473년 2월이 되었다. 다시 바다로 나아가게 된 한명회는 귀찮다는 듯이 축소하여 옮긴 만국전도와 가상의 섬, 호주를 보면서 혀를 차고 있었다.
“일전에 제가 천리경으로 보았던 섬이군요. 그런데 크기가 제법 크지 않습니까.”
“내가 추측한 크기보다 더욱 거대한 섬일지도 모르는 일일세.”
“그렇다 하여도 섬이 커 보았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기껏 해야 신농도의 두 배가 넘지 않을 일이 아닙니까? 이러한 섬을 한 바퀴 돌고 측량을 하는 일은 쉽습니다.”
내가 지도에 호주를 너무 작게 그렸었나. 호주 해안선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한명회는 이번 일을 주선한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군어른 덕분에 이번 일이 쉽사리 풀리게 되었습니다. 풍역선을 모선(母船)으로 두고 상무(祥霧)선을 분열하여 많이 파악한 섬의 동쪽을 돌게 하면 충분한 일입니다.”
상무선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풍역선을 축소한 형태이며 세장비를 더욱 길게 만들어 빠르고 쉽게 몰 수 있는 배라 하였던가. 대항해시대에 탐험 용도로 널리 쓰이는 배가 캐러벨이니 항해와 개척이 더욱 빨라질 것이다.
“상무선이 완성된 것이오?”
“대군어른 덕분에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입신체비기구를 만들면서 같은 형태의 도르래를 계속 만드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뭔 소리지? 도르래? 그러고 보니 철물에 구멍을 뚫는 작업은 불가능했지만 균일한 크기의 도르래를 만드는 일은 성공하였다. 깎아내는 작업이 아닌 정확한 형태로 줄여 나가는 작업이니 가능했었지. 한명회는 내 표정을 보더니 슬쩍 웃고는 말을 이어갔다.
“본디 선박에는 돛을 조절하기 위하여 수십 개의 밧줄이 엮입니다. 밧줄을 풀고 당기는 일에 전념하여도 이 년이 지나야 제대로 된 선원이 됩니다. 묶는 방법이 수십 가지이니 능숙하게 하는 데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지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구려. 그렇다면 도르래를 사용하여 밧줄을 쉽사리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오?”
“옳은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질 좋은 도르래 수백 개를 구할 수 있었는데 모두 대군 어른의 덕이더군요. 본디 상무선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나서려 하지 않았으나 쇠뿔도 단김에 빼낼 겸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여섯 척의 풍역선과 열 척의 상무선이 항해에 나섰다. 생각 외로 거대한 섬의 크기에 절망할 한명회를 위로하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내 일이 아니니 그만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