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31화 - 왜인들은 왜인답게 산다 >
2년 전에 전쟁이 있었다. 머나먼 커다란 나라인 명나라의 명령을 받은 조선이 와코(왜구)의 본거지라 하면서 큐슈를 공격한 것이다. 해안가에 사는 놈들은 상당수가 와코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높으신 분들 가운데 으뜸인 쇼니 어르신 직접 보낸 이들이 나서서 병사들을 끌어 모으고 보인들도 마구 징집하였다. 전쟁에 나서서 한 몫을 잡을까 하였지만 아내의 만류로 차마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고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모든 일이 끝났다. 살고 있는 세부리(脊振)산 기슭에서도 호기롭게 나선 젊은이 가운데 태반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조선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당시의 일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았다.
“당시에 보인으로 나서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야. 잘못했다가는 옆에 살던 소우타처럼 조선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소?”
“물론입니다. 얼마 전에 소우타의 집은 조선으로 이주했다던데 가서도 고생이겠지요.”
“바다를 땅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말이 안 되지 않소. 조선 사람들이야 크고 힘이 세니까 가능한 일이지. 우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조선이 다스리니 무언가 변할 것이라 여겼지만 변한 것이라고는 기근을 대비하여 기르라 하였던 작물인 고구마가 생긴 것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녀석이었지만 한 해를 길러보니 달랐다.
비어있는 땅에 잡초를 베어내고 대충 심으면 알아서 잘 자라난다. 겨울 동안 싹을 틔워 봄철에 옮겨 심어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그런 것을 감수할 만한 요긴한 작물이 아니겠는가.
고구마는 다른 장점도 있었다. 조선인들이 가르쳐준 대로 어린 줄기의 껍질을 벗기면 맛 좋은 나물로 변한다. 아내와 여섯 살 배기 아들이 고구마 줄기를 다듬느라 손을 놀리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가다 손이 부르트겠소. 너무 양이 많거든 아랫동네에 사는 이들에게 보내서 조금 떼어주면 될 일이 아니오.”
“직접 기르신 것이니 제가 다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너무 고생하지는 마시오. 나는 보름날이 되었으니 아랫동네에 좀 다녀와 보겠소. 그러고 보니 장날이 겹쳐서 편한 것도 있군.”
조선의 지배를 받았지만 여기가 조선의 땅이 되었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가끔 시내에서 조선의 병사들과 조선의 사람들이 돌아다녔지만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와코 놈들이 미친 것이지. 저렇게 강한 사람들이 있는 나라를 왜 쳐들어가? 그나마 저런 힘 센 사람들이 전쟁 생각을 하지 않아서 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할수록 조선의 왕이라 불리는 자. 주상전하라 하는 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 싸운 이들을 등용하지도 않았으며 새로운 땅에서 세금을 걷거나 병사를 모집하는 일조차 없었다.
대신 날을 정해 관아로 나오게 하였으니 귀찮고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고구마를 삶은 녀석을 찬거리로 챙기고 걸어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사부로가 투덜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이거 사부로 아닌가? 이제는 민 사부로(三郎)라 불러야 하는가?”
“그렇다면 자네는 초이 다이치(大地)인가? 웃기는 소리는 하지도 말게.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우리를 불렀을까.”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명을 받았으면 따라야지. 저들은 마음만 먹으면 우리를 모조리 죽일 수 있다네.”
산 중턱에서 약초를 캐고 재배하던 다이치의 집은 구년 전, 높으신 분의 명령을 받고 인삼이라는 약초를 심었다. 높으신 분이 손수 기르던 인삼의 씨앗을 받아낸 녀석이라 하며 착실히 기르라 명했었고 어르신도 심혈을 기울여 길렀다.
하지만 농사는 완전히 실패했다. 삼 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키웠던 인삼들은 이상한 잡초로 변해버렸고 진노한 무사들은 어르신이 농사를 게을리 지었다며 벌을 내린다고 매질을 하였다.
다이치는 이후 궁핍한 삶을 이어갔다. 기껏 일궈둔 약초밭이 쓸모가 없게 변했으니 산을 돌아다니며 자식을 키우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푼돈을 벌기 위해 보인이 되어 전쟁에 나섰고. 죽을 고비를 넘겨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다이치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받았던 성을 기입한 호패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투덜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보니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변한 것은 고구마라는 작물이 좋다는 것과 각자가 성을 받은 것이 전부라니. 참 얄미운 일이야.”
“이름만으로 잘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을 만들어준 이유가 뭐지? 나는 산 중턱에 사니 나카야마(中山)를 원했는데 근심한다는 뜻의 민(憫)이라 정했네.”
“나는 재촉한다는 뜻의 초이(최 - 催)라는 성을 받지 않았나. 성인이면 모두 목패(호패)를 주다니. 이걸 다듬는 것도 일이고 기름을 먹이는 것도 일이 아니겠는가. 저래놓고도 세금을 걷지 않다니 참 신기한 노릇이야.”
주변에서 사람들이 몇 명씩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조선인들이 세운 관아로 나아가 집결해야 하니 발걸음을 빨리 놀렸다. 이윽고 관아 앞에서 기다리니 조선에서 보낸 높으신 분이 나와 교지를 꺼내들고 어눌한 말을 시작하였다.
“조만간 호조 관리가 나아가 척진(세부리) 일대의 농토를 확인할 것이니 이를 염두에 두도록 하라. 이를 거절하거나 응하지 않으면 어명을 어긴 것이니 엄벌을 내릴 것이다.”
무사 나리들이 굽실거리는 높으신 분. 조선의 관리들이 찾아와 이런 저런 일을 한다는 것이니 귀찮은 일이겠지. 사람들이 점차 떠나가니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장터를 돌아다녔다.
전쟁이 끝났으니 사람들도 돌아왔고 예전보다 활기찬 모습이 보였다. 개중에는 좋은 터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는데 아무리 봐도 생소한 것이 조선 사람들이 짓는 건물이 분명해 보였다. 궁금해서 다이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 다음 물어 보았다.
“저 건물은 뭘 만드는 것이지? 다이치 자네는 아는가? 자네는 약초를 파니 마을에 자주 드나들지 않는가.”
“듣자하니 하카타 교코(향교)라 하는 곳이네. 사람들이 모여 글을 배우고 칸지(한자)를 익히는 곳이라 하였지. 원하는 이들은 언제라도 찾아가 배울 수 있다 하였는데.”
“글을 가르쳐 준다고? 우리들에게? 얼마나 비싼 값으로?”
“어린아이는 아무런 값을 받지 않을 것이라 하였고 어른은 조선의 말을 배우려면 한 해에 쌀 한 석(일본 석, 60kg)이라네. 칸지까지 배우려면 세 석을 내야하고.”
칸지, 겹쳐있고 꼬불꼬불한 글자를 익힌다면 어디 가서 부끄러울 일이 없었다. 당장 무사 나리들의 태반이 가나는 몰라도 칸지로 자신의 이름조차 쓰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세 석이면 엄두가 나지 않는 금액이었다.
사람이 먹고 살려 하면 쌀 여섯 석은 필요하니 자신과 같이 땅을 파먹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리라. 그렇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니 포목점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일까 하여 찾아갔는데 이상한 옷감을 팔고 있었다.
“오승포보다 더욱 값진 아마포! 아마포 한 필에 은 한 돈(3.5g)입니다. 시원하고 거슬거슬한 것이 아주 입기 좋으니 만져 보시지요! 조선에서 직접 가져온 물건입니다!”
“어디 한 번 만져 봅시다. 이거 참 좋은데? 여름철에 입으면 훨훨 날아다니겠어.”
조선 상인이 은자를 마구 거둬들이며 아마포라는 옷감을 마구 팔아치우고 있었다. 약간 누렇고 구김이 심하지만 습한 여름에는 입기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남는 곡식을 에이로쿠(영락통보)로 팔고 다시 쇄은으로 바꾼 것이 있었다.
“여기 이 은이면 충분할 것이니 세 필 주시오.”
“아이고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도 또 찾아올 것이니 돈이 남으시면 언제라도 오십시오.”
주머니는 비어버렸지만 마음은 훈훈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니 고소한 냄새가 났는데 역시나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 있었다. 다이치는 입맛을 다시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꼬치 세 개 주시오!”
“아이고 감사합니다. 여기 있으니 받아 가십시오.”
다이치가 검게 물든 이상한 음식을 건네면서 실실 웃어대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된장도 아니고 소금도 아닌 기묘하면서 달착지근한 향이 나기에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어떤가? 조선에서 널리 쓰이는 간장에 엿을 발라서 구운 음식이라네.”
“허어 거 참, 생선과도 다르고 이게 뭐지? 뭔가 심심한 맛이 나는데 역한 냄새도 나고.”
“처음이라서 그런 것이지. 처마 위에 올라가 소리만 지르는 닭의 고기일세. 기력을 북돋워 주는데 최고이지.”
“지금 이시다키(石抱 - 압슬형)를 당할 일이 있······. 아니네. 지금 여기는 조선 땅이니 고기를 먹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 하지만 역한 냄새가 나니 많이 먹을 것은 못 되는군.”
처음 한 입은 단맛과 짠맛이 어우러져서 괜찮았지만 한 입을 더 삼키니 역한 냄새와 비린 냄새가 치밀어 올라서 먹을 것이 못 되었다. 다이치의 얼굴을 보아서 모조리 삼켰지만 아무래도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데 소우타의 뒤를 이어 이치로(一朗)의 집도 이주를 결심하였는지 짐을 꾸려 하카타로 향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치로의 아내를 좋아하던 다이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가는구나. 가서 죽을 고생을 할까 염려되는데 뭐라도 좀 챙겨주면 좋으련만.”
“생각보다 편할 수도 있지. 조선이 이렇게 물산이 넘쳐나는데 오히려 여기서 사는 것 보다 편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소리는 집어 치우게나!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 가면 고생을 하는 것 외에 무엇이 남는가!”
그건 그렇다. 정든 고향을 떠나면 남는 일은 고생뿐이니까. 하지만 정말 고생하는 이들은 머나먼 북방에서 명나라의 병사가 된 이들이겠지. 듣자하니 마을 청년 몇 명은 명나라로 끌려갔다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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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 11월, 혹한이 몰아치는 요동의 평원에 군마들이 질주하였다. 군마의 입에서 거친 숨이 토해지고 가장 앞에 선 장수는 머나먼 벌판을 바라보다 고함을 쳤다. 영덕제가 신뢰하는 굳건한 요동의 병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도적떼와 같았다.
“저기 도적떼가 머무는 마을이 보인다! 저 마을을 불태우고 모든 자들을 죽여라! 어차피 장계에도 없는 마을이니 도적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 분명하다!”
“죽이자! 도적놈들을 죽이자!”
“모조리 죽이고 불태워라! 달자 놈들의 간자가 분명하다!”
기병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말을 쏜살같이 몰며 나아갔다. 요동 총병관인 석형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급기야 멀쩡히 장계에 올라온 마을에 손을 댈 지경에 이르렀다.
작년 말, 석형을 통제하며 수습 가능한 범위의 약탈을 저지르게 통제하였던 사례감 태감 조길상이 죽은 이후 환관 사이에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후 통제를 벗어난 석형은 요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날뛰었다.
예전처럼 고립된 마을과 정말 도적으로 돌변한 이들을 대상으로 삼는 일은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석형을 제지할 세력조차 없었으니 병사들은 그의 앞잡이를 하는 일에 지칠 지경이었다.
인근의 구릉지에서 한 무리의 기마병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말머리를 돌려서 대응해야 하지만 석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병들을 이끌고 마을로 향했다. 본대에서 세 명의 기병이 분열하여 보병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너희들이 처리해라! 왜병들은 기병과 맞서 싸우는데 능숙하다 하였으니 저런 비루먹은 말을 타고 있는 마적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황상의 은혜를 입었다면 은혜에 걸맞게 행동해라!”
일방적인 명령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기병대가 속도를 올려 마을로 향했다. 상대가 비루먹은 말을 타고 있었는지 쫒아갈 방법이 없었던 이들은 보병들을 향해 대열을 돌렸다.
삼천 가량의 보병들에게 일천 명이 조금 넘는 기병들이 들이닥쳤다. 어떻게든 별동대를 물리치고 마을을 구원하겠다는 계획인지. 아니면 마을을 포기하고 최대한 피해를 입히고 도망치려는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보병과 기병이 벌판에서 맞서 싸우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라! 칙쇼! 빠가! 석형 자라새끼! 당장 방진 만들어! 여기서 밀리면 우리 다 몰살이야! 도망쳐 봤자 갈 데도 없단 말이다!”
“방진을 만들어라! 어서! 어서!”
보병에 속한 왜인들 모두 필사적으로 대형을 갖추었다. 마방책도 없고 지형도 불리하지만 석형의 명령 한 마디에 자신들의 목숨이 결정되니 맞서 싸우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작달막한 왜인들이 전열을 구성하고 억지로 석형을 따라온 명나라 병사들도 아닌 보인에 가까운 이들이 대열을 만들었다. 그나마 명나라 병사들 가운데 지휘첨사(指揮僉事) 이가(李家)의 병사들이 빈 틈을 메웠다.
병사들이 어설픈 방진을 구성하자 상대 또한 눈에 핏발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한 장년의 남성이 어설프게 만든 칼을 휘두르며 고함을 치고 앞으로 말을 몰며 마구 달려들었다.
“이놈들이라도 죽이고 돌아가자! 마을은 포기해야 한다!”
“마적단이 온다! 놈들이 돌격을 시작한다!”
마적단이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이 고장에서 먹고 살던 명나라의 백성들이었다. 석형과 조길상의 난행으로 장계에 존재하지 않는 마을이 하나씩 소멸하는 일이 벌어지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다.
군데군데 보이는 명나라의 군복이 진격을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군대도, 높으신 황상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니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한 무리의 기병이 어설픈 방진으로 돌진한 순간이었다.
“어림없는 짓이다!”
한때는 우에스기 가에 속해 있던 가신이었던 잇신(一心)이 창을 놀리며 말의 목을 찔렀다. 마갑조차 갖추지 못한 늙은 말이 목을 찔려 피를 쏟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돌격이 실패했다고 공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돌격이 실패하고 잠시 주춤하던 적의 대열은 오십 보정도의 거리를 두고 화살을 쏘아붙였다. 방진에서도 궁수들이 나서 활을 쏘니 언뜻 보기엔 두 군대가 맞서 싸우는 일과 같았다.
기병에 대응할 병장기도 없는 상황이라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승리는 왜인을 포함한 보병대가 거머쥐게 되었다. 상대가 퇴각하자 왜인 병사들은 진가사(투구)를 벗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한탄을 늘어놓았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어. 가져온 카타나는 구하기 힘든 왜도라 해서 석형 놈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이래서 뭘 어떻게 싸울 수 있지? 갑옷이라도 달란 말이야! 얼어 죽겠고 활에 맞아 죽어나가는데!”
“십 년을 살라 하였지? 염병! 지금도 우리 중에 오십 명이 넘게 죽었는데 뭘 어떻게 살라고! 저 자라새끼는 우리도 죽이고 명나라 사람들도 모조리 죽일 생각인가?”
장계에는 ‘왜병들의 기세가 날쌔어 더욱 많은 도적과 달자들을 처단할 수 있습니다.’ 라고 적힐 일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보병들은 지독한 피로를 견뎌내며 억지로 석형이 진군한 마을로 향했지만 마을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남자라는 남자는 가리지 않고 목이 베어져서 산을 이뤘다. 불길이 치솟는 마을 안에 시체가 즐비하였으며 병사들 가운데 몇 명은 옷이 흐트러진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분노를 억누른 잇신은 나아가 보고를 시작하였다.
“마적들을 물리쳤습니다. 부상을 입은 병사가 이백 여명에 죽은 병사가 백여 명입니다.”
“마적 따위를 상대하고 그렇게 많은 손해를 봤다고?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손해를 보았다는 말에 석형이 화를 내며 술병을 내리쳤지만 건장한 남성이 이를 막아섰다. 투구에 막혀 부서진 술병을 본 석형은 상대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이문빈(李文彬)! 지휘첨사 주제에 감히 나에게 무슨 무례인가! 네 녀석은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줄 아는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도 온전하지 못하고 병장기 또한 형편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제가 잘못한 일이니 저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벌이라. 내가 조금 흥분하였나 보니 다음부터는 갑주라도 제대로 된 녀석으로 주겠네.”
이문빈은 요동 일대의 호족이자 고려 출신인 자였다. 석형의 난행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이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횡포에 그도 견디기 힘들어 할 지경이었다. 잇신이 감사의 뜻을 표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지휘첨사님 덕분에 고된 일을 모면하였습니다.”
“자네야말로 고생이 많았네. 듣자하니 자네가 전열을 가다듬고 적장을 베어버린 덕분에 병사들이 손해를 입지 않았어.”
공치사는 고마운 일이지만 끔찍한 날이 계속 이어지리라. 자신은 몰라도 일반 병사들은 오늘도 성 구석에서 홑이불을 덮고 화로의 불에 의지하며 추위를 버틸 것이다.
도망치려 하여도 방법이 없었다. 조선으로 도망치는 일은 자살 행위이며 북쪽으로 도망치려면 장성을 넘어야 한다. 이 넓은 땅에 발을 붙일 곳이 없는 것이 왜인 병사들이었다. 잠을 청하려던 잇신에게 사람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여나 총병관께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별다른 일은 아닐세. 그저 오늘의 공을 치하하기 위하여 술을 한 잔 하려 한다네.”
익숙한 얼굴인 지휘첨사 이문빈이 직접 찾아왔기에 졸린 눈을 부비며 따라 나왔다. 이문빈의 집무실도 아닌 외진 창고에 간단한 주안상이 차려졌고 독한 술병이 여럿 놓여 있었다. 이문빈은 다짜고짜 술 한 잔을 들이켜고 한숨을 토해냈다.
“자네가 보기에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과연 이 일이 옳다 여겨지는가?”
술잔에 술이 따라지고 잇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피에 굶주려 명나라를 노리는 흉악한 무쿠리(몽골인을 지칭하는 요괴)들을 토벌하여 권세를 누릴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정작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는 일에 목숨을 바치고 있는 잇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문빈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옷소매로 잇신의 눈을 훔쳤다. 그 또한 분기에 찬 모습을 숨기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하겠네. 태감 어른에게 많은 사례를 받아 총병관을 도왔던 나이지만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네. 수습할 수 있는 지경을 넘어섰으니 소문이 퍼질 것이 분명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저희는 총병관의 명령을 받아 행동한 것이니 다른 곳으로 팔려나가게 됩니까?”
“나와 자네는 수장죄(뇌물수수)를 시작으로 온갖 죄목을 붙여 처형당할 것이네. 중앙 관리들이 받아먹은 뇌물을 감안하면 석형과 우리 둘, 아마도 내 친족과 왜인 병사들 여럿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이 분명해.”
“그게 말이나 됩니까! 저희가 무슨 뜻을 품었다고 죄목을 덮어씌운다는 말입니까!”
이문빈은 영덕제가 알아차린다 해도 철저히 명령만 들어왔던 잇신은 살아남을 것이며 자신은 처참하게 죽을 것이 분명하다 여겼다. 그러나 잇신이 분노로 숨을 씩씩거리자 이문빈은 술을 들이켜고 말했다.
“이 나라의 법도이자 순리일세. 하지만 이러한 일에서 탈출할 방법이 단 하나가 있다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머나먼 명나라 변방에서 고생을 하다 죽을 목숨이 아닙니다!”
“소식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석형을 죽이고 철령 이씨가 요동 총병관의 직위를 차지하는 것이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으니 염려하지 말고 자네가 할 일을 충실히 따르면 된다네.”
논의는 갈수록 길어지고 술병이 계속 비워졌다. 마침내 잇신은 술이 올라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문빈의 손을 맞잡았다.
“결행은 보름 뒤일세. 부디 병사들에게 소문이 퍼지지 않아도 잘 통제할 수 있도록 조련하게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살다 죽느니 한 번 발악이라도 하고 죽겠습니다.”
보름 뒤, 석형이 머무는 심양에 급보가 들어왔다. 오천 가량의 몽골 기병이 장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정탐한다는 첩보였고 석형은 부리나케 병사들을 소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