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30화 - 갈매기는 조선이 나아가길 원한다 >
홍위의 선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신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홍위의 대응은 전면전을 벌이지 않지만 차도살인(借刀殺人)이나 다름이 없다. 황수신이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신 황수신 아뢰옵니다. 첩목아국(티무르 제국)에 화포를 판매하는 일은 이국에 변란을 조장하는 일이며. 이는 상왕전하께서 승하하신 분의 시호(諡號)와 묘호(廟號)를 정하지도 않은 시국에 행할 일이 아닙니다.”
“좌상의 말 또한 옳소, 하지만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말을 알고 계시오? 첩목아국과 맘루크국 모두가 복속하고 구주(유럽)일대가 오사만국에게 복속하면 이러한 행각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겠소?”
송양지인, 춘추시대에 송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이 벌어질 때 송나라가 어처구니없이 패한 일로 만들어진 고사이다. 군자는 남의 약점을 비겁하게 노리지 않는다는 자존심 하나 때문에 적의 도하를 방치하고 전열을 다듬게 하였지.
황수신은 이 고사를 떠올린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훗날에 평가한 ‘전시의 법도와 평시의 법도는 다르다.’ 라는 것을 떠올렸겠지. 홍위는 이마를 감싸 쥐고 말했다.
“물론 차도살인의 방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또한 옛 화포를 녹여 새로 만든 화포가 부족한 물건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중요한 일은 오사만국에 대한 징벌을 내리기 이전에 힘을 빼놓는 것이 아니겠소.”
“신이 주상전하의 혜안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송구하옵니다.”
“과인도 잘못이 있소. 만약 조금만 더 세상의 일을 알아차렸다면 이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오. 이러한 일은 앞으로 있어서는 아니 되며 있을 연유도 없소.”
홍위도 과인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니 다른 신료들 또한 할 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홍위의 말에 숨겨진 속뜻을 알아차리고 감동을 받을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세상의 일을 알아차려 방지하자는 말은 앞으로 대외 관계에 대한 정보 수집과 간접적인 외교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말이다. 황수신이 물러나자 홍위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군기시의 도제조(都提調)인 최공손은 빼어난 재주를 가졌으니 현자총통의 생산을 일임하시오. 아국의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죽절(竹節 - 화포의 강도를 보완하는 마디)을 제거하고 번호 또한 기입하지 않게 하시오.”
“주상전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후로 오사만국에 대한 일은 다음 서행사에게 일임하겠소. 첩목아국에 들릴 수 있도록 한 달 일찍 출발하면 좋은 일이니 오월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시오. 그러면 다음으로 이국의 물산을 볼 차례로군.”
아직도 피부가 검게 그을린 구성군이 나와 인사를 올렸다. 나이 차이가 크지 않던 홍위와 친밀한 배동(陪童 - 어린 시절부터 어울려 노는 세자의 친구)이니 홍위 또한 손을 잡아주면서 구성군을 칭찬하였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오.”
“한 제조가 항로를 잘 잡아둔 덕분에 무사히 기착할 수 있었으며. 풍토병에 시달렸지만 그리 큰 손해는 입지 않았으며. 덕분에 주상전하의 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구성군이 가져온 선물은 산더미 같았다. 수십 마리의 사자 가죽에 표범과 치타 가죽은 물론이고 상아와 기린의 가죽 및 머리까지 감안하면 들짐승의 씨를 말렸으리라.
그리고 가장 특이한 선물은 사람들을 봐도 놀라지 않는 새, 내가 기록상으로나 보아왔던 멸종당한 새인 도도이다. 박제를 남겨둔 회화와 달리 제법 날렵해 보였지만 멍청하게 생긴 것이 아무리 봐도 도도가 맞다. 홍위 또한 관심을 보이면서 친히 도도를 안아들었다.
“참으로 기묘한 새가 아니겠는가. 천축에서 가져온 닭과 비견하여도 더욱 거대한 녀석이 온순하기까지 하다니. 이 새의 이름을 무어라 정했소.”
“이 새가 머무는 섬은 극락도라 하였으며 새의 이름은 안양조라 정했사옵니다.”
“크고 탐스러운 새이구려. 혹여나 식량을 비축하기 위하여 잡아들인 것이 아니요.”
“사람을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잡아들일 염려도 없었사옵니다. 어린 녀석으로 일백 마리를 가져왔는데 항해하는 사이 이렇게 거대해졌으니 부디 주상전하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일을 원할 뿐이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도도의 맛이 지독히 없어서 식용으로 쓰이지 않은 일은 기억한다. 구성군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홍위는 거대한 도도를 내려놓고 아쉬운 듯이 말했다.
“애석하게도 태상왕께서 승하하시고 아직 묘호(廟號)도 정하지 못한 상황이오. 주연을 열 연유가 없으니 오랜 기간 항해하여 상한 몸을 안양조를 통해 다스리시구려.”
“성······.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안양조는 귀한 물산이나 이를 아낄 연유는 없소. 탐검사에 다녀온 이들에게 열 마리를 하사할 것이니 몸을 다스리는데 쓰시오. 자고로 기력을 북돋는 일에는 삼을 넣은 백숙(白熟)만한 것이 없소. 숙수들을 보내 제대로 요리하라 명하겠소.”
구성군의 얼굴이 일그러지니 분명 도도를 잡아서 먹었던 것 같다. 홍위와 구성군은 항렬도 같고 연배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아서 어린 시절에는 같이 지낸 적이 있으니 은근슬쩍 행동했지만 홍위의 배려로 인해 역으로 당하게 되었다. 구성군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이주(아프리카)의 변방에 도달하여 탄주현이라는 고장을 세웠습니다. 비록 모래톱이 많아 배가 기거하기 힘들지만 구풍이 몰아쳐도 쉬이 견딜 수 있었사옵니다. 또한 인근에서 퉁아니라는 토인과 접촉하였습니다.”
“퉁아니라는 토인이라 하였소? 신농도에 거주하던 이들처럼 귀부를 청한 자들이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손짓과 발짓으로 대화하였으나 아국을 보고 싶다 청하였사옵니다. 다만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지라 대표인 한 명을 동평관(東平館)에 두고 나머지는 신농도에 두었사옵니다.”
“이국의 사람들이라 하면 직접 만나야 할 일이 아니겠소.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퉁아니? 토인? 기껏 해야 아프리카 서해안의 주력 부족인 반투족이겠지. 언어는 공용으로 사용하지만 부족끼리 분쟁이 잦아서 거대 국가를 만들지도 못한 이들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동평관에서 도착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장신의 사내였다. 젓가락과 같은 훤칠한 몸을 가진 흑인을 보자 홍위는 할 말을 잃고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자네는 어서 인사를 올리지 않고 무얼 하나.”
“노······.노프신 어른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저, 저는 레무아니입니다.”
“머나먼 이국인 조선에 오니 적응하는 일이 힘들어 보이는군. 동평관에 사람을 보내 이 자의 수발을 돕게 하게. 그런데 이 자만 이렇게 장신인 것인가?”
“퉁아니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 체격은 작아도 신장이 월등합니다. 평범한 이들도 황종 척으로 다섯 척(173.5cm)이 넘는 장신들입니다.”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이들은 반투족이 아니고 마사이족이다. 전근대의 생활양식을 가지면서 평균 신장이 저렇게 월등한 부족은 마사이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며 퉁아니는 그들의 옛 이름이겠지.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자네는 날 따라 오게나. 그리고 이 갖옷(가죽겉옷)을 입어 추위를 다스리게.”
“어, 어, 어른이 이러면 안 됩 니다. 제가 갈 수 있습 니 다. 추워지 아느니 옷을 입으십시오”
나이가 많은 내관이 움직이자 홍위를 한 번 쳐다보고 내관에게 굽실거리니 황당한 일이었다. 다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데 구성군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들은 같은 연배에 있는 이들을 서로 평등이 대하는 풍속이 있으며. 나이가 많은 이들을 철저히 우대하는 풍습도 있사옵니다. 신은 이들이 섬기는 은가이라는 자가 보낸 사자로 알고 있어 우대를 받을 뿐입니다.”
“그러하면 나이가 많은 내관이니 철저히 우대하였을 것이 분명하구려. 또한 젊은이가 함부로 명령을 내리니 이상한 일이라 여겼을 것이군.”
“이들의 습속이 올바르긴 하옵니다. 하지만 불편한 일은 당장 저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나이가 많은 자를 따르니 데려오면서 무던한 노력이 필요하였사옵니다.”
신료들 모두가 ‘예의를 아는 자들이다.’ 라는 말이나 ‘장유유서의 법도를 지키는 이들이다.’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호의적인 태도로 바라보았다. 홍위 또한 마음에 들었는지 명령을 내렸다.
“날이 풀리면 저들을 비어있는 배재당에 머물게 하시오. 또한 나이가 많은 이를 우대한다 하였으니 좋은 일이 있군. 종친의 웃어른이신 효령대군에게 사람을 보내 배재당에 머물게 하시오.”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시옵니다.”
“저들이 아국의 언어를 배우고 풍속을 익히면 수양대군에게 보내도록 하겠소. 체격이 월등하니 입신체비를 배우면 효험이 있을 것 같구려.”
또 나인가? 하지만 마사이족과 같이 잠재력이 뛰어난 이들을 가르쳐 보는 것도 평생의 소원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이 일 년 정도 머물며 언어를 배우면 그때부터 가르쳐야지.
논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서는데 이현전에 머물던 가심과 자배를 비롯한 관리들이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체 무슨 일일까 하였는데 가심은 시름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대군어른께서 파티샤와 함께 계시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습니다. 구밀복검(口蜜腹劍)과 같은 행각을 감내하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별 일은 아니오. 애초에 의심부터 하는 이여서 어떤 일을 할지 궁금하였건만 참으로 멍청한 일을 하였소. 그러한 이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짓을 하며 나라를 먹어치운 것이지.”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가심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메흐메트 2세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았는데 옳은 말이라 하며 메흐메트2세에 대한 적개심을 늘어놓는다. 이현전에 모인 오스만 출신 사람들은 앞으로 조선에서 벗어날 일이 없겠지. 그런데 자배가 책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실은 근래에 들어 저희 이현전에 모인 이들의 관심사는 대군어른께서 공저하신 식료찬요입니다. 견상물이라는 것이 저희의 화두이니 조만간 이에 대한 논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건 줄을 서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만에 하나 변란이 생기면 오스만 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역만리의 조선에서 머물러야 하는 이들이 일종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나에게 의탁한 것이다.
문제는 없다. 내가 가진 세력이라고 해봤자 인맥이 전부이며 제자들도 슬슬 몇 대가 넘어서서 알아서 배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기껏 해야 여섯 명 정도가 전부이지. 이현전에서 일하는 이들이 모인다고 해서 공격을 받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알겠소이다. 상왕전하께서 명하신 업무를 수행한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나이가 들어도 심심한 일은 없겠다. 이현전에 머무는 이들과 마음껏 대화를 나누며 과학이나 발전시켜볼까. 어디까지나 영양학이 전부이지만 이들과 만나면 무슨 효과가 날지 정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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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머리가 좋다. 또한 어떠한 일에 몰두하여 철저히 파고드는 모습도 있다. 그놈의 잔머리와 이득을 챙기는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이니 믿을만한 인재라 여겼다.
그래서 다음 서행사의 별동대로 티무르 제국으로 파견될 뻔 했던 한명회를 관료 체계를 개편하는 일에 끼워 넣었다. 한명회는 나와 이맹전을 비롯한 관료들이 정한 방식을 모조리 훑어본 다음에 물어보았다.
“상왕전하께서 뜻하신 바를 이어나가는 일은 좋습니다. 하지만 가자법(加資法 - 근무일수에 따라 품계를 올리는 제도)에 의거하여 품계를 올릴 때마다 업무를 변경한다 하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왕전하께서 명하신 바가 그것일세. 여러 업무를 포괄하여 기본 지식을 갖추라 하였지. 부족한 점이 있는가?”
“부족합니다. 매우 부족하며 기껏 해야 참하관에 불과한 이들이 여러 업무를 경험한다면 혼란만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잖아! 근무일수 450일 기준으로 업무를 한 번씩 바꾸면 약 2년마다 업무를 변경하고 6가지 업무를 경험한다. 혼란이 일어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형님이 원하는 것을 채워 넣는 것이 전부이지. 그래서 변명하듯 물어보았다.
“압구 자네가 보기에는 나와 경은(耕隱 - 이맹전의 호) 대감이 정한 일에 문제가 많다 하였는가? 참하관이 업무를 두루 익히는 방법은 일 년마다 직책을 변경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게 정말 문제이다. 여러 업무를 포괄하여 기본 지식을 갖추라? 말이 쉽지 참하관 주제에 뭘 어쩌라고? 참하관이면 정7품이고 포괄적 지식을 갖추기 위해 지방을 관리하라 말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지방 관리는 가운데 가장 낮은 직책은 종6품 현감(縣監)이 전부이다. 훈도? 그것이야 현감을 보좌하는 종9품 신입이고. 문제가 있다하는 한명회의 말을 들은 이맹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탐검사의 제조가 하는 말이니 무엇인지 들어보겠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떠한 대책이 있는가? 현감도 아니고 현감에 보좌를 붙여서 고을을 다스리게 하여도 불가한 일이네.”
“사람은 머나먼 고장에 홀로 떨어져 책임을 짊어지면 변합니다. 참하관에서 참상관으로 진급하기 위한 조건으로 외방(外邦 - 외국)의 고을을 다스리게 만들면 될 것입니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인가? 그렇게 한다면 장원 급제가 아니면 모조리 외방에 나아가 험난한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한명회의 눈을 마주쳤는데 일종의 광기와 울분이 보였다. 사람의 눈빛이 저렇게 원망에 찰 수 있나 의심이 갔고 이맹전은 헛숨을 들이켜며 뒤로 슬쩍 물러날 지경이었다.
물론 한명회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한 고을을 다스리면 제반 문제 모두를 경험할 수 있으며 포괄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다.
하지만 머나먼 변방에 나아가 조선의 풍속과 전혀 다른 이들을 이끌며 한 고을을 다스려야 하는 혹독한 조건이다. 한명회는 목이 말랐는지 커피를 들이켜고 말을 이어갔다.
“대남도를 사례로 들겠습니다. 대남도는 서평부도 있으며 도호부 또한 존재합니다. 여기서 한 개 현은 삼백 호 정도의 인구를 다스릴 뿐입니다. 만약 현감으로 부임한 이가 삼백 호의 일을 망친다 하여도 서평부에 있는 관찰사가 이러한 일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한명회가 쉬운 말을 하지만 조선에서는 중인 계층의 향리들도 있고 육방관속이라 하여 나름 업무를 보조하는 이들도 있으니 현감의 일을 돕는다. 그런데 향리들에게 휘둘리는 현감도 있었지?
“더군다나 사특한 마음을 먹어도 이문을 챙길 수 없습니다. 작금에도 수많은 이들이 수장죄(受贓罪 - 뇌물수수)를 지어 형무소로 끌려가는 형국입니다. 변방은 이러한 형편에서 자유롭지 않습니까?”
“자네의 말은 업무를 배우기 쉽다는 말인가?”
“대감께서 하시는 말씀이 답입니다. 아귀다툼을 벌이는 향리들도 없으며. 지방 토관들은 관찰사의 감시를 받는 이들이니 반역을 저지를 걱정도 없습니다. 설령 수장죄를 지으려고 해도 새파란 신출내기가 변방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이맹전도 한명회의 광기 어린 언변에 휩쓸려 버린 것 같다. 점점 머나먼 고장은 세금을 거두기도 쉽고 유사시에는 관찰사가 달려들어 모든 일을 해결하는 편하고 행복한 고장인 착각이 들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도 있지. 제대로 된 의원도 없고 시설도 없으며 어중간한 일을 처리하려면 머나먼 부(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래서야 참하관 이전의 새내기 관리들이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았다.
“자네의 말도 옳은 바가 있지만 문제도 많다네. 아직 경험이 일천한 자들이 사고를 저지를 수도 있는데다 너무 머나먼 고장이라 문제가 생길 적에 대처할 수 없다네. 이를테면 의원이 없지 않은가.”
“의원이라 하셨으니 좋은 말씀입니다. 자고로 과거 시험에서 관직을 제수 받는 이들 가운데 칠할 이상이 양반가인데 지나치게 한미(寒微)하지 않으면 자식이 변방에 머물 적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사람을 외방으로 보내서 자식을 보좌하도록 하겠지요!”
물론 한명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개성에서 궁지기를 했던 자이니 친인척이라고 해봤자 존재하지 않았고 집안 또한 말 그대로 한미했지. 한명회의 눈에 광기가 스미더니 벌떡 일어나서 일장연설을 시작하였다.
“작금에 들어 관료로 일할 적에 인맥과 혈연으로 모든 일을 통하게 만들려는 습속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다가 아국이 변방의 관심을 끊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나도 경계하는 일이고 홍위도 경계하는 일이지. 그렇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하지만 한명회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와중에 외방에 양반가의 후손이 나가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하면 외방에 정성을 쏟을 것이고 새로운 문물을 보내어 자식의 무사안일을 기원할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외방에서 사는 이들이 평안한 삶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뭔가 이상하긴 한데 틀린 말은 아니다. 명문가 자식이 새로 생긴 영토인 율도에서 일한다 치면 난데없는 선물과 사람들이 율도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자식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탈출시키기 위하여 공적을 쌓는 일에 치중할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외방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국과 동화될 것이며! 아국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외방에 터를 잡고 살아갈 것입니다! 아국이 나아갈 길은 외방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러하면 훗날에 어떤 좋은 일이 있겠는가.”
“경은 대감께서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젊은 관료들이 수많은 이국의 풍속을 익히고! 다시 당상관까지 나아가 외방을 다스리는데 능숙한 관료가 되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처음으로 다스렸던 고장을 헛되이 둘 자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한 이들 가운데 자네처럼 외방을 주유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 분명하겠군.”
문득 생각나서 말을 해봤다. 그런데 내 말이 쐐기를 박았는지 한명회는 풀린 눈으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파리가 찰싹 달라붙어 눈으로 향했는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입술을 씰룩거리던 한명회는 울먹거리는 눈을 소매로 가리며 말했다.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듯 서글픈 목소리에 내 마음이 울적해질 지경이었다.
“여하튼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면 상왕전하께서 정하신 뜻을 따를 수 있지 않습니까.”
“자네가 너무 무리했나보군. 아직 몸에 피로가 가시지 않았으니 들어가 쉬도록 하게.”
한명회가 어제 하체를 한 듯이 갈지자걸음을 걸으며 돌아갔고 나는 오늘 내용을 정리해서 형님에게 드렸다. 형님은 나라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관료 체계 개편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였으니 어떤 평가를 내리실까. 형님은 허벅지를 주먹으로 세차게 내리치셨다.
“형님?”
“미안하구나. 아바마마께서 머무는 곳에서 대소(大笑)할 수 없어서 참느라 힘이 들었구나. 본디 외방으로 보낼 마음까지는 없었지만 한명회가 참으로 큰일을 해냈구나.”
“형님이 보시기에도 한명회의 말이 옳습니까? 너무 힘든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손을 봐야 할 것은 있다. 한미한 이들이 관직에 나아가면 외방에서 지독한 일을 겪을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조금만 조절하면 관계(官階 - 품계)를 올리는 일을 쉬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훗날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정읍 현감 이순신이 아니고 율도 ○○현 현감 이순신이 될 지도 모르지. 하지만 형님은 내 눈을 보더니만 슬쩍 웃으며 말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알고 있느냐? 농사를 장려하고, 징세하며, 호구를 늘리고, 군정을 다스리며 그리고 향교와 서당을 만들어 교육을 다스려야 하는 일이지.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군정이야 외방은 관찰사가 일임하고 있으니 향교를 만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향교를 만들려면 유생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지방의 명사가 없는 외방에 누가 머물 일이더냐? 당연히 지방에 머물던 이들이겠지.”
형님의 말을 들으니 사림파가 생각난다. 현재 사림파는 없고 사림파가 형성되지도 않을 시기이고 이들은 지방에 머물며 중소 지주층과 식자층을 겸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변방으로 나아가 다시 향교를 세울 것이다. 모든 이들은 아니더라도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자들이 생길 것이고 지역을 발전시킨다. 몇 세대가 지나면 이러한 발전에도 한계가 있겠지만 안하는 것 보다 좋다. 생각을 정리하니 정말 좋은 방안 같다.
“한명회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한명회는 전시 답안부터 상상을 넘어서는 해결책을 마련하였던 자이다. 조만간 홍위에게 청을 올려 탐검사의 규모를 더욱 확충해야겠구나. 자고로 큰 사람은 큰 바다에서 노는 법이다.”
이렇게 공을 세워도 형님의 은혜는 하늘과 같구나. 다시 바다로 나아갈 한명회에게 애도를 표하지는 못하지만 세종대왕님에게 저녁을 올려야겠다. 오늘도 날이 참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