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29화 - 넓어지는 영토 >
1471년 7월, 세종대왕님이 승하하시고도 1년이 지났지만 나라의 일은 계속 돌아가야 한다. 새로 영토가 된 큐슈 지방에 대한 정리가 끝나고 새로운 세력들이 자리를 잡을 시간이다.
특히 홍위가 관심을 보인 이들은 통치에 능숙한 관리들이었다. 본래 역사에서는 진작 판서로 올라갔던 도승지 노사신이 진급 대상이 되었다. 예전에 세종대왕님과 이야기를 나눴던 대로 본격적인 통치 이전 사전 작업을 시작할 좋은 인재들이지.
“하주도의 관찰사로 노사신(盧思愼)을 임명하니 태재대도호부(大宰大都護府 - 다자이후)로 나아가 옥유충(阿惟忠 - 아소 코레타다)과 함께 통치에 유념하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또한 사간원에서 공을 세운 성준(成俊)을 박다목(하카타)의 목사로 임명하겠소. 부디 옥 씨 가문의 승계 분쟁을 조정할 수 있도록 관찰사와 협력하시오.”
조선이 새로운 영토인 하주도에 취하는 정책은 조선 행정 권역으로의 편입이다. 조선의 관리들은 자문 위원이자 보조 행정 관료로 일하며 영향력을 직접 행사하지 않는다. 여전히 통치는 임명된 토관들이 담당한다.
임명된 토관들은 정2품 직위인 총관(摠管)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전직 영주였던 이들을 위해 설립된 별개의 직책이며. 중앙 관직으로 따지면 정3품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토관을 우대하는 척 비슷한 품계에 있는 이들을 배치한 것이다. 조선의 정책을 강요할 수 없지만 조선에 반발할 수 없다. 그렇게 시작했으면 다음 작업은 행정적 동화이다. 홍위는 미리 준비한 듯이 말하였다.
“하주도에 머무는 왜인들은 아국과 습속이 다르니 이를 단번에 포용할 수는 없을 것이오. 다만 아국의 방식대로 호적을 작성하고 토지를 측량하는 일을 가장 먼저 행하시오. 이를 위하여 호조의 관리들을 파견할 것이니 관리들이 힘쓸 수 있도록 하시오.”
“신 노사신, 주상전하의 명을 필히 받들겠나이다.”
“신 성준, 옥 씨 가문이 헛되이 숨긴 땅이 없도록 모든 주의를 기울이겠나이다.”
각지의 관찰사들과 목사들을 비롯하여 기존 세력을 보좌할 30대 후반 정도의 관료들이 속속들이 임명되었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세금 수취도, 조선인 이주도 아닌 행정 일원화다.
형님이 간편화한 공법(貢法)을 바탕으로 토지를 조사하고. 여기에 부가적으로 행정 구역과 호적 등본을 갱신한다. 기존 호족들의 군사권은 제한해도 나머지 권한은 유지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모든 조사를 끝낸다.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 여기겠지만 함정이다. 토관으로 임명된 자들이 자신의 장점으로 여기는 것은 지방 행정에 대한 완벽한 파악인데 이런 것을 문서로 만들어 버린다면? 홍위는 마음에 들었는지 용상에서 고개를 높이 들고 말했다.
“상왕께서도 호적을 면밀히 만들고 토지에 대한 조사를 마친 다음에야 온전히 나라의 구실을 할 수 있다 하였으며. 태상왕께서도 이를 좋아하셨음을 명심하시오.”
군사적 문제에 대해서는 손을 놓기로 했다. 육주성의 도지휘동지(都指揮同知)로 임명된 홍윤성은 명나라 병사들과 치안을 위해 남은 조선군의 총괄 지휘권을 획득하였다. 홍윤성 정도의 실력자라면 사소한 분란 따위는 억제할 수 있겠지
이후로도 좋은 소식은 계속 이어졌다. 난데없는 북방의 율도(栗島)라는 고장이 생겨났고. 9월이 되자 류큐 왕국의 사신과 톤도(필리핀 북부의 도시국가 연합체)의 사신이 한양으로 올라왔다. 두 사신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유구국(流球國)은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번국이자 조선의 오랜 벗으로 생업을 이어 왔습니다. 근래에 들어 변란이 있었고 여러 불운이 나라를 겹쳤는지라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이미 들은 적이 있소. 듣자하니 오도열도(고토열도)의 왜구(倭寇)들이 도주하여 유구국을 약탈하던 일이 있었군.”
“그들을 격퇴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조선이 아닙니까. 바라는 것이 있으니 부디 조선의 강맹한 병사들을 주둔시키시어 왜구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류큐 왕국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대남도(대만)가 개척되고 인도와 오스만 제국과의 무역을 시작하면서 류큐가 가진 장점이 모두 소멸된 것이다.
기존에 인도산 물품을 사들이려면 벵갈 술탄국에서 출발해 동남아를 거치고, 다시 동남아에서 오키나와로 향하는 기나긴 항로를 거친 이후 일본을 통해 사들이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조선과 오스만 제국간의 무역이 이루어지니 머나먼 인도의 상품도 한양에서 바로 분배되어 상인을 통해 북경과 남경에서 팔린다. 더 이상 류큐가 중간상인으로 소득을 거둘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정국이 불안정하고 내란이 벌어졌고. 정신을 차리고 내란을 수습하니 시대에 뒤떨어졌다. 이들이 남은 선택은 단 하나였다.
“류큐는 수많은 군도로 이루어진 고장이니 배를 몰기에도 좋고 쉴 고장은 얼마든지 있사옵니다.”
“류큐에서 아국의 해군을 보조하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없소. 조만간 사람을 보낼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사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협정을 마쳤다. 앞으로 오키나와는 조선을 위해 일하는 중간 기착지이자 비상시를 대비한 첨병(尖兵)이 되리라.
다음 사신은 지난 3월에 긴급히 구원을 요청하였던 톤도국, 필리핀 일대 도시국가를 대표하는 사신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감명을 받았는지 큰절을 올리고 나서 말했다.
“여섯 달 전에 보내주신 병사들이 불순한 이들을 격퇴하여 경각에 달한 나라를 구원하였사옵니다. 흉포한 마자파힛 출신의 해구(海寇)들을 격퇴하셨으니 저희는 조선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를 올리옵니다.”
“아국의 강역인 열산도(루방 섬)에 해구들이 침습할까 염려하여 벌인 일이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오.”
“하오나 바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해구들이 조선의 함선만 나타나면 겁을 먹고 도주하지만, 저희가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려고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으니 조선의 함대를 주둔하게 하시어 아국을 수호하여 주십시오.”
경인년 전쟁 이후 더욱 증설된 함대가 쓸모없이 방치되는 것도 문제이며. 한철동과 남이를 비롯하여 수군에 종사하는 장수들이 직급에 비하여 하는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강력한 수군을 두어도 생계형 왜구의 준동만 방지하는 것이 전부이니 홍위도 답답했겠지. 홍위가 권절을 돌아보자 권절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 하였다.
“좋소이다. 다만 아국의 함대가 머물 적에는 함선을 보수하고 병사들이 쉴 고장이 필요하지 않겠소. 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열산도 밖으로 나아갈 방법이 없소.”
“땅이야 얼마든지 있사옵니다. 이미 해적들의 침략으로 인해 곳곳의 마을이 버려지고 주민들이 도주하니 이러한 고장에 머물면 될 일이옵니다.”
“그러하면 하나가 더 필요하지 않겠소. 탐광(探鑛)자들을 보낼 것이니 해적을 격퇴하는데 필요한 화포들을 만들 수 있도록 구리를 찾는 일을 도와주시오.”
사신도 그런 일은 생각하지 못한 듯이 슬슬 눈치를 살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을 정도는 빌려줄 수 있지만 광산을 만드는 일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인사를 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생각하여 보니 자신들의 고장을 버리고 도주한 이들이 어렵게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들을 고용하여 구리를 캐내시면 효험이 있을 것이옵니다.”
“앞으로 스무 척의 풍역선이 열산도와 톤도국 일대를 오가며 해적들을 쫒아낼 것이오.
이제 더 이상 금을 만들면서 얻어내는 구리도 아닌. 필리핀에 산재한 구리광맥을 파헤쳐서 마음대로 화포를 만들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조선의 간접 지배권이 넓어지고 있으니 모든 일은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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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 음력 2월, 한명회와 구성군이 이끈 탐검사 함대가 귀환하였다. 목표로 삼았던 중간 항해거점의 설립과 포르투갈과의 접촉 모두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보고가 시작되자 조정이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오스만 제국이 더 강해져 유럽을 집어삼킬까 염려하여 별다른 변수를 만들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덕분에 조선과 오스만 제국은 홍삼을 주요 상품으로 한 국제무역 관계를 맺은 것이 전부가 되었고.
하지만 홍위 앞에서 한명회의 보고를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역사를 변화시키지 않으려고 해도 오스만 제국은 본래 역사보다 더욱 강해진 것이 분명하다!
“포도아(포르투갈)의 총독인 안토니오라는 자와 접견하였사오나 참담한 일을 아뢰옵니다. 근래에 들어 오사만국은 라마국(신성로마제국) 인근의 베네치아라는 고장까지 세력을 넓혔다 합니다.”
“대체 무슨 말이오? 기껏 하여야 왈라키아라는 고장을 병탄한 것이 전부라 하지 않았소.”
“정녕 사실이옵니다. 신이 불가타(라틴어)로 작성된 서한을 면밀히 읽은 결과 서한 자체가 거짓일 연유도 없었사옵니다. 그러니 오사만국을 통해 아국에 전달된 서신이 모두 위조된 것이었사옵니다.”
“당장 이현전의 대제학 가심을 입궐시키고 서신 모두를 가져오라 하라. 한 제조는 보고를 계속 하시오.”
한명회의 말이 이어졌다. 베네치아를 시작으로 두 번의 회전을 벌였지만 오스만 제국의 기세를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었으며. 그나마 서신이 작성되기 삼 년 전인 1468년부터 후방 안정을 위해 침략을 중단했다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베네치아는 한 번의 회전을 가까스로 막아내면서 오스만 제국의 기세를 꺾었지만 두 번의 회전이라니? 홍위는 보고를 듣더니 한명회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이미 구주(歐洲 - 유럽) 일대가 경각에 달했다는 것이오? 라마국은 구주의 종주국이자 제국을 칭할 정도로 강대한 세력이라 하였으며 오사만국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다 하지 않았소.”
“신은 영문을 모를 일이옵니다. 다만 구주에 속하는 이들 모두가 손꼽아 아국을 비난하고 있으며. 가장 서쪽에 위치한 포도아가 아니었다면 대화가 아닌 화포를 쏘았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조선은 오스만 제국을 돕는 머나먼 동방의 악의 축 정도로 인식된 것이 분명하다. 안평대군이 광고를 잘 해놨더니만 이런 상황에서 일이 제대로 틀어져 버렸다.
메흐메트 2세와 조약을 맺은 당사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다. 안평대군은 중간에 로마로 향했으니 조약 당사자가 아니지. 주변의 시선이 쏟아져서 부끄러운 마음에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신 수양대군 아뢰옵니다. 조약을 맺을 당시에는 홍삼과 무역품에 대한 조약만 맺었을 뿐이며 그 외의 일에 대한 것은 추후에 논한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알고 있소. 다만 구주 일대에서 아국에 대한 적개심이 끓고 있지만 이는 조약을 맺을 당시에는 알지 못하는 일이오. 하지만 구주의 일은 구주의 일이니 넘어 갑시다. 그렇다면······.”
“이현전의 대제학 가심 입궐하였사옵니다.”
대제학 가심, 본래 카심으로 불리던 자가 들어오자 정인지를 제외한 모든 관료들의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오스만 제국에서 전달한 서신을 받아서 나눠주는 이가 가심이었으니 그가 이번 일을 암묵적으로 도왔다는 의심을 하는 것이다.
영문을 몰랐지만 가심 또한 지금까지 받은 서신을 모두 챙겨두고 있었다. 홍위는 정인지를 시켜 서한을 순서대로 읽게 하여 이를 대조하였다.
놀랍게도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의 신하였던 이들, 오스만 제국 출신의 학자들에게도 위조한 서신을 보냈었다. 이어지는 사실에 가심은 공황상태에 빠진 듯이 횡설수설하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전하, 신은 영문을 모르는 일이옵니다. 제 어린 자식이 장성하여 보내는 서신을 파티샤(메흐메트 2세)께서 가로채 위조하였다니 이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옵니다.”
“열두 살의 아들이 장성하여 스물 둘이 되었는데 전해지는 소식은 8년 전의 것이오. 그러니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오사만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법도요? 머나먼 타국에 위증(僞證)을 제시하며 신하들을 기만하는 것이오.”
가심은 아랍어로 욕설인 것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 바닥에 고개를 박은 다음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가까스로 억누른 분노와 실망감 모두가 담겨 있었다.
“기만조차 아닙니다. 저를 비롯하여 오스만 제국에서 이주한 이들은 사람이 한 일이라 여겨지지 않을 지경입니다. 신성한 쿠란을 담는 문자를 헛되이 적었으니 당연한 일이옵니다.”
“일단 진정하시오, 보아하니 이현전에 기거하는 관료들도 모두 위조된 서신을 받은 것이 분명하구려.”
“그렇사옵니다. 신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전해진 서신 또한 거짓된 내용을 담았사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알고도 남을 일이었사옵니다.”
홍위도 화가 났지만 가장 화가 난 사람은 카심이었다. 소매에서 난데없는 아랍어 서적을 꺼낸 카심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조선에 향할 적에 천문을 전파하며 머나먼 이국에 은혜를 알리라 하였고. 때가 되면 주상전하께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 갈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허사가 되었사옵니다.”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돌아갈 수 있소. 비록 맘루크국(맘루크 술탄국)이 가로막는다 하여도 다음 서행사가 다녀올 적이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오.”
“신은 마음을 정했사옵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힘써 일하는 자에게 이런 대접을 하면 파티샤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진실을 전하며 쿠란을 기입하는 문자로 거짓을 논하다니. 이는 역적조차 하지 않을 일입니다.”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 충격적인 발언이 끝나자 가심을 변호하려던 정인지조차도 놀라서 노려보았고 다른 관료들도 의심이 아닌 의문의 눈으로 변했다. 문화적 차이를 감안하면 카심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말이다.
명나라와 조선이야 중앙집권제이지 이 시대의 아랍과 유럽 모두 봉건제도이다. 적절한 계약 관계를 통하여 권위와 실리를 따지는 정치 방식이다. 군신유의니 뭐니 하는 단어는 카심의 입장에서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다. 가심은 주변의 시선을 견디며 말을 이어갔다.
“이는 불순한 일입니다. 조선에 와서 군신유의(君臣有義 - 군주와 신하는 의리와 도리가 있다)라는 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의리와 도리 모두를 저버린 이이니 더 이상 섬길 가치가 없습니다.”
카심의 말은 이현전에 머무는 오스만 제국 학자들 모두의 의견이나 다름이 없다. 이현전에 대한 혐의가 완전히 풀렸는지 홍위는 이제 신숙주와 예조판서로 임명된 박인년(朴引年)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신 영사(領事 - 홍문관의 종1품 관직)와 예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이를 얼마나 큰 결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오?”
“신 신숙주 아뢰옵니다. 국서가 아닌 서신에 대한 기록이니 사소한 일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하오나 이를 주도한 이는 명백히 오사만국의 군주인 메흐메트이니 국서를 위조한 일과 같사옵니다.”
“신 박인년 아뢰옵니다. 사 년 전까지 서행사의 대표로 오사만국에 다녀왔지만 근황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전하지 않았으니 철저하게 계획된 기만입니다.”
철저하게 계획된 기만이자 국서를 위조한 일과 같다. 당장 외교를 닫아걸고 공세에 나서도 할 말이 없지만 지금은 세종대왕님의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니 답이 없었다.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과 조선은 너무 먼 거리가 있다. 다녀오는데 일 년하고 육 개월이 더 걸리는데 병사를 파병할 수 있을까? 나의 생각과 다르게 논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신 권절 아뢰옵니다. 태상왕전하께서 영면에 들지도 않으셨는데 전쟁을 논하는 일은 불순하옵니다. 하오나 이러한 일을 일벌백계 하지 않으면 부덕한 군주의 배를 불리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신 한명회 아뢰옵니다. 오사만국으로 함대를 보내려 하시면 왕복으로 이 년이 넘게 걸리는 고달픈 원정이니 병졸들이 크게 상할 것이옵니다. 부디 다른 방책을 찾으시옵소서.”
오스만 제국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유럽 전체보다 강하다. 만에 하나라도 유럽의 힘으로 막아내려면 백년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프랑스와 영국이 화해하고 합류하는 기적이 일어나야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는 거대한 국가다.
그나마 원래 역사에서는 삼중전선을 만들며 후방을 불안하게 해서 시간을 끌었다. 메흐메트 2세의 침공에 겁을 먹은 베네치아가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백양 왕조를 참전시켰고. 이에 자극받은 맘루크 제국도 후방을 괴롭혔다.
그는 백양 왕조를 물리치고 맘루크 제국으로 원정을 떠나다 병사하며 침공이 끝났다. 하지만 이 역사에서는 홍삼을 먹어 수명이 길어졌을지도 모르고. 베네치아가 백양 왕조를 설득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생각과 다르게 논의는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미 첩목아국은 내전을 벌이고 있지 않소. 내전이 극에 달하여 대군어른이 가진 흑우라는 말도 반납하지 못하는 형편인데 이들의 병사를 고용할 수 있겠소!”
“태상왕께서 영면에 드신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분란을 일으키면 아니 될 일이오! 다음 서행사를 보낼 적에 항의의 국서를 보내고 응답을 받고 정할 일이 아니겠소.”
홍위의 일갈에 신료들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렇게 조용해진 가운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스만 제국이 강해졌으면 백양 왕조와 맘루크를 강화시키면 되는 일이 아닐까.
이는 전쟁도 아니다. 그저 화포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화약병기를 팔고 인도산 초석을 조금 많이, 한 이십만 근 정도 팔아치우면 되는 일이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신 수양대군 아뢰옵니다. 아무리 강대한 자라 하여도 후방이 불안하면 제대로 된 공세를 취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오사만국을 직접 징벌하기 이전에 힘을 빼놓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계속 말하여 보시오.”
“오사만국의 주변에는 맘루크국과 첩목아국(티무르 제국)이 있으며. 이들 모두 오사만국이 강성함을 질시할 것이옵니다. 다음 서행사를 보낼 적에 두 국가에 더 이상 쓰기 힘든 구식 화포를 팔아 오사만국의 후방을 노리게 유인하시옵소서.”
이미 한혈마를 받아올 때에 검증된 사실이 있다. 티무르 제국의 패권을 잡고 있을 백양왕조는 화약병기에 대한 관심도가 크며 이를 비싼 가격에 사들이고 있다. 맘루크 술탄국은 시큰둥할지 몰라도 백양왕조에게는 확실한 도움이 되리라.
홍위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뭐라 중얼거리면서 고뇌하였다. 세종대왕님의 삼년상 중에 전쟁을 일으키면 예의를 저버린 짓이지만 물건을 파는 일이니 무역으로 볼 수 있을까.
“오사만국과 타국의 분쟁이 벌어지면 좋은 일이오. 얼마 전이라 하여도 귀한 구리를 함부로 해외로 보내는 일이니 불가한 일일 것이오. 하지만 톤도 일대에서 구리 광맥을 많이 발견하였으니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겠군.”
상황이 좋아도 너무 좋다. 톤도가 복속하지 않았다면 구리를 얻어낼 길이 없어 고민하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박살내는 꼴을 넋 놓고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 홍위는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군기시에서 오래 된 천자, 지자총통 가운데 이백 문을 폐기하고 새로 만들 계획이라 하였소. 오래 된 화포를 녹여 현자총통으로 변용하고 첩목아국에 매매하여 한혈마를 벌충하도록 하시오.”
모든 일이 잘 돌아가서 기분이 좋을 메흐메트 2세에게 선물하는 첫 폭탄이다. 앞으로도 전쟁 상황을 조율하면서 분쟁을 유도하며 시간을 때우다가 훗날 크게 한 방 먹여야지.
무게로 따지면 현자총통 500문 정도가 나올거다. 한혈마가 고픈 조선이 화포를 좀 많이 주면 어때? 현자총통이면 기마병 위주의 백양 왕조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될거다. 끌고 다니면서 쏘기 좋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