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14화 (214/573)

< 3장 28화 - 율도 >

1471년 3월, 형님의 계획을 정리하는데 형님의 천재성에 나같은 범재는 따라올 방법이 없었다. 한 번에 개혁하는 것이 아닌 체계를 유지한 채 직급을 분리하는 방식이니 형님의 무서움을 알겠다. 다시금 철칙이자 기본 전제조건을 읽어 보았다.

“관료라 하여도 같은 업무를 반복해서 하지 않고 여러 업무를 포괄하여 기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훗날을 위해 필요한 일이니 참하관(參下官 - 7품 이하 관료)시절에는 다방면에 걸친 지식과 실무 능력을 기른다.”

“상왕전하께서 명하신 것이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당장 집현전과 이현전에서 삼 년 이상 일하여도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실정이지요.”

이맹전이 내 말에 따라왔지만 이 양반도 뺀질거리기는 선수다. 사직을 윤허 받았으니 나는 철저히 대군어른을 돕는 것이 전부라 하는 꼴이다! 내가 출근하면 같이 출근하고 내가 퇴근하면 같이 퇴근한다.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상왕도 아니고 왕도 아니며 종친으로 기존에 해왔던 일을 비워두지 않고 이어나가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삶을 사는 것 같지도 않을 지경이다. 이맹전은 내 한숨을 듣더니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대군어른께서도 요즘 너무 많은 업무를 동시에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대왕대비께서 피접(避接 - 병을 피해 다른 집에서 생활함)하심은 물론이거니와. 사흘에 한 번 꼴로 능으로 나아가 태상왕께 직접 만든 수라를 올리지 않습니까.”

“어마마마는 내가 모셔야 하는 분이고, 상왕전하는 내가 보좌해야 하는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그리고 육조 직계제도 아닌 십조라니.”

“상왕전하께서 용상에 계실 적에 한 번 시킨 일은 거듭해서 하도록 명하셨지요. 덕분에 지금 육조 판서들은 제각기 직무에 충실합니다.”

“이러다가 집현전과 이현전도 아닌 외현전을 따로 두어야 하겠구려.”

육조는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호구,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 외교, 교육, 제사의식을 담당하는 예조. 군대를 담당하는 병조, 형법을 담당하는 형조. 건축, 토목을 담당하는 공조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형님의 계획을 보자. ‘이조는 인사권을 양분하며, 호조는 재정과 호구를 분리하고. 예조는 외교와 제사를 분리한다, 병조 또한 둘로 나누며. 공조는 두 분야 이상으로 나누어 제각기 둔다.

어처구니가 없다. 여기저기 산적한 임시기관과 고위 관료들의 겸직을 위한 기관을 포함한 대규모 혁파. 60개가 넘는 부처의 행정처리를 모두 꿰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진급이었다.

“말은 쉬운 일이지. 신료들의 진급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오? 고과를 판가름하는 일부터 열 개 이상으로 나뉜 기관에서 직급을 판별하라니.”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참상관 진급과 당상관(堂上官) 진급에 자격을 부여하는 방책이라도 마련하면 좋겠군요.”

“외방(外邦 - 외부)에서 일하면 외방의 정황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하고. 경관(京官 - 한양)에서 일하면 판단 자체가 흐트러질 수 있소.”

머리가 딱딱 아파왔으니 원래 수양대군의 지능을 탓할 수도 없다. 나 혼자로는 그저 틀을 잡아 형님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이 전부이고. 상세한 일은 삼년상이 끝난 형님과 함께 다루어야 하리라.

해가 저물어 오는데 오늘은 소헌왕후님에게 뭐를 올려야 할까. 고구마 말랭이에 설탕을 뿌린 것을 좋아하시는데 너무 많은 당분은 몸에 좋지 않다. 이럴 때에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 필요한데 김시습은 예조참판으로 진급해 있으니 당분간 일에 치어 살리라.

“머리가 좋은 놈이 필요해. 이럴 때에 한명회는 해외에 나가 있다니, 두어 달만 늦게 출발했으면 세종대왕님의 삼년상 기간이라 해외에 나가지도 못했을 것인데.”

아마 지금쯤 아프리카 해안을 돌면서 죽을 정도로 고생하고 있겠지. 한명회가 돌아오면 꼬셔서 이번 일에 참가하게 하자. 잔머리도 그냥 머리도 좋은 사람이니 충분한 효과가 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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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 4월, 조선이 북방이라 부르는 거대한 땅의 끝자락에는 원래 역사에서 사할린이라 불리는 섬이 있었다. 사할린의 남단에 조선의 상선이 도착하고 장년의 남성이 거침없이 뛰어내렸으니 상회의 상주 홍길동이었고 섬의 이름은 율도(栗島)이었다.

먼 바다에 불룩 솟아나온 섬이 밤송이와 닮아 있으니 율도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밤나무는 기를 엄두도 나지 않는 섬이리라. 여전히 싸늘한 바람이 부니 홍길동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작년에 보내놓은 이들은 잘 살고 있을지 모르겠네.”

“설마 몸이 상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였고 북방에서 고용한 야인들도 거주하고 있으니 별 탈이 없겠지요.”

봄날이 다 되었건만 높은 산에는 눈이 녹지 않았는지 하얗게 물든 곳이 있었다. 홍길동의 일행은 발을 놀려 자신들이 만들어 두었던 마을로 향했다. 작년에 거금을 들여 만든 마을은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있었으니 더욱 많은 눈이 내렸을 것이다.

“전에 거주하던 야인들에게 들으니 눈이 한 보(1.6m)가 넘게 쌓인다 하였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녕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겠군.”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이 곳곳에 쌓여있으니 얼마 전까지 눈이 내린 것이 분명합니다.”

“율도를 개척하여 말년을 평안히 살려 하였는데 개척하는 일이 고난이군.”

곳곳에 쌓인 눈을 보니 지금이 음력 4월인지 2월인지 구분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하지만 눈이 지독히도 많이 내리는 고장이니 방법이 없으리라. 홍길동의 부하는 율도라는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옛 기록에 따르면 여기가 유귀(流鬼 - 당나라 시절 조공을 바친 고대국가)국일 가망성이 있지 않습니까. 매월당 어르신의 말씀대로면 유귀도라 불려야 하지 않는지요.”

“옛 사람의 자취가 남아 있던가? 전조 시절에 달자들이 나라(원나라)를 만들었을 적에 여기에 있던 유귀국을 공격하여 만호부를 세운 기록도 있다 하였지. 당시에 멸망한 것이 분명하네.”

사할린의 원주민들은 강성한 부족을 이뤘으며 한반도의 부족국가와 교류하고 당나라와 조공관계를 맺었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몽골제국의 침입으로 모든 일은 물거품이 되었고 다시 부족 단위의 삶이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귀중한 철과 옷감을 제공하는 조선인들은 반가운 상대였다. 홍길동은 북방으로 갈수록 많은 야생동물이 있으니 수익을 거두기 위해 율도상회의 재력을 동원하여 원주민들을 구워삶았다.

결국 원주민들을 통해 안내받은 곳이 원래 역사의 사할린, 그가 율도라 이름 붙인 거대한 섬이었다. 이미 북방의 원주민에게 신의 사자라 칭송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걸릴 것은 없었다.

하지만 홍위가 권좌를 물려받은 이후에 조선은 새로운 개척지를 만들 때 여러 조건을 걸어두었다. 홍길동이 율도를 고스란히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고 수익을 거두려면 다음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였다.

첫째. 정당한 방법으로 땅을 구하여 일 년 이상 거주할 터전을 만들며 이를 관리들이 나아가 확인할 수 있게 할 것.

둘째. 농토를 개간할 경우 소유주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만든 다음 개간에 나서며 관리들의 입회하에 명확한 토지 문서를 작성할 것.

셋째. 이후 일년 이상 외방(外方) 관리들이 거주하며 주변의 광맥 혹은 물산에 대한 조사에 나설 때 적극 협조하며 빠짐없이 기입할 것.

다른 고장이면 몰라도 율도에 적용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지독한 추위가 이어지니 수확이 빠른 메밀을 기르는 것이 전부였으며 보리도 가까스로 자랄 정도였다.

하지만 홍길동은 혹독한 추위가 이어지는 거양현에서 형 홍일동을 도운 일이 있었으니 불가능하지 않다 여겼다. 홍길동이 접근하니 마을에서는 그의 도착을 알아차린 이들이 마을에서 쏜살같이 뛰어 나왔다.

“홍길동 나리! 정말 지독한 추위였습니다! 말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니 일 년을 보낸 것으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저게 마을인가? 겨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멀쩡한 집이 두 채만 남아있단 말인가!”

삼 년 전에 섬에 도착할 당시부터 사람을 머물 집과 창고를 마련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잘 말린 재목을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더욱 튼튼하고 추위를 버틸 수 있도록 벽돌을 구워 벽을 쌓았다.

하지만 여덟 채의 집 가운데 남은 것은 단 두 채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무너져 있었다. 서른 명의 장정을 두었는데 장정들은 그 좁은 집에 부대끼며 살고 있던 것이 분명하였다. 여진족 출신 청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추위는 버틸 수 있었습니다. 다만 눈이 하루에 두 자씩 내리니 지붕에 끊임없이 쌓여 도저히 치우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결국 커다란 집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하루에 두 자나 내린다 하였는가? 일 년에 열 자라도 내리는가?”

“그렇습니다. 내렸다 하면 닷새고 열흘이고 펑펑 쏟아지니 눈이 너무 내려 밖을 돌아다니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결국 버틸 재간이 없었는지라······.”

처참하게 무너진 지붕 안에는 당시에 쌓여있던 눈의 무게를 증명하듯 부러진 서까래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거주민들을 불러다 겨울을 버틸 건물을 짓게 하겠지만 그러면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북방에서 마을을 만들었다 주장하던 이들이 있었다. 재물을 잔뜩 주고 기존에 살던 토인들을 이주시켰다. 남은 집에 노비들을 거주시키고 마을로 인정해 달라 하였지만 관리들은 제대로 된 집을 짓지 못하였다고 단번에 거절했던 것이다.

추위는 몰라도 폭설을 견디는 방법은 홍길동으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산도(울릉도)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 말은 있었지만 눈이 내리고 녹기를 반복하지 이곳처럼 끝없이 쌓이지는 않을 것이다. 부하는 사람들을 살피고 돌아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

“겨울동안 병에 걸려 죽은 이가 셋이나 되는데 머물며 살 수 없지 않습니까. 토인들의 도움을 받아 해달과 가지어(加支漁 - 강치, 바다사자의 옛 명칭)만 잡아도 벌이는 충분할겁니다.”

겨울의 혹한에 시달린 고용인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홍길동은 인상을 찌푸리며 빌어먹을 눈덩어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제 나이도 들고 자식도 장성하였으니 평안한 삶을 이어가려 하였다.

그러니 율도라는 섬을 발견하고 거기에 매달렸다.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니 겨울에는 경원이나 원산으로 내려와 살고, 봄부터 가을까지 한적한 곳에서 사냥을 하며 돈을 벌면 충분하다 여겼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상인으로 일하며 세상 물정을 배운 홍길동은 손을 털며 이번 사업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부하의 말대로 손해는 보지 않을 방법은 무궁무진 하였다.

“지난 겨울동안 고생이 많았네. 앞으로 한 달 동안 주변을 탐망하여 돈 될 물건을 모두 모으고 안개가 끼는 여름이 되기 전에 원산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정말 감사합니다! 거기 김서방! 우리 이제 여기 살지 않아도 된다네!”

“홍 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여진족 청년들과 경원부 일대에서 고용된 조선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겨울동안 묵혀두었던 활을 꺼내들고 창날을 붙여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사냥만 하면 신세를 바꿀 정도의 모피가 널려 있는 고장이지만 그놈의 눈이 문제였다.

“상주님께서는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여기서 거주하는 우타리(아이누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족을 구슬리면 됩니다. 이들이 귀부한다면 아국의 영토가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율도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우타리의 족장들이 되겠지. 나는 온전히 내가 살기 편한 고장을 만들려고 한다네.”

한숨을 늘어놓으며 배로 돌아가려던 홍길동은 애꿎은 해초를 발로 걷어차며 분노를 삭였다. 그놈의 망할 눈이 문제이다. 이만큼 많은 눈을 버텨낼 수 있는 건물을 지을 기술자가 천지 사방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냥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귀한 바다사자 가죽과 해달 가죽이 끝없이 쌓여갔으며 산채만한 불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율도상회에 고용된 사냥꾼들은 미리 준비했던 무기를 꺼내들었다.

“보총보다는 못해도 이 녀석이면 충분히 잡을 수 있지!”

“거기 조심해! 열 보 안에서 단번에 쏘아야 한다고!”

보총 총열 가운데 검수과정에서 탈락한 물품들은 장총통(長銃筒)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에 판매되었다. 개머리판이 없어서 얼굴과 뺨 사이에 끼우고 쏘아야 하며. 총열이 짧아 명중률도 형편없었지만 오히려 사냥꾼들이 가지고 다니기에 좋은 물건이었다.

장총통이 사정없이 쏘아지고 거대한 불곰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홍길동은 몰이를 도와준 아이누 족에게 고기를 내어 주었으며 아이누들은 그런 홍길동의 배려를 고개를 숙여 화답하였다.

사냥이 계속될 것 같았지만 해달을 잡으러 바다에 나갔던 이들이 혼비백산하여 해안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배가 모래사장에 박혀도 아랑곳 하지 않고 크게 외쳤다.

“상주님! 홍길동 상주님! 해안가에 왜인들이 나타났습니다! 우타리가 아닌 왜인들입니다!”

“왜인? 대체 이 고장까지 왜인들이 나타나는 일이 말이나 되는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난왜변 때에 보았던 왜선이 확실합니다!”

일 년 전의 전쟁은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도 군수품을 납품하느라 바빴다. 혹여나 왜병의 잔당이 도주하여 여기까지 표류하였단 말인가? 자신의 상단에 고용된 사냥꾼은 서른 명에 불과하지만 흉포한 왜인들이 덮치면 크나큰 손실을 입을 것이다.

홍길동은 부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천리경을 비추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부하의 뒤통수를 세차게 내리치면서 말했다.

“저 배의 몰골이 보이지 않더냐! 아예 폐선이 다 되었는데 사람을 잃고 떠도는 배가 아니겠느냐!”

“하지만 똑똑히 율도 방향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타리 족과 왜인들은 사이가 좋지 않다 들었다. 아마 왜인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왔다가 우타리 족에게 습격당해 표류하는 모양이구나.”

홍길동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저렇게 호되게 당한 왜인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설령 반항하려는 마음을 먹으면 인근에 거주하는 우타리 족을 보여주면 순순히 명령을 따르겠지.

그렇게 봄부터 가을까지 실컷 부려먹은 다음 본국으로 돌려주면 공짜 인력을 부리는 것이다. 이윽고 처참한 몰골의 세키부네가 천천히 백사장에 상륙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며 조선인들을 향해 다가왔다.

- 물! 물을 주시오!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하였소!

“저들이 기갈(飢渴)에 시달리는 것이 보이지 않더냐! 어서 물을 주고 메밀로 죽을 쑤어서 주린 배를 채워주어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절박함은 통했다. 정체불명의 왜인들이 허겁지겁 메밀죽을 퍼먹는 동안 홍길동의 눈빛은 그들의 행적을 유추하느라 바빴다.

기존에 입던 옷은 거의 다 헤졌으며. 이를 메꾸기 위하여 곰의 가죽이나 늑대의 가죽을 두른 모습이 우타리(아이누)와 흡사하였다. 하지만 체격이 작은 모습을 보아 분명히 왜인이었다. 홍길동은 부하를 불러다 통역을 시도하였다.

“자네는 우타리의 말을 할 줄 안다 하였지? 저들이 우타리와 왜인의 혼혈일지도 모르니 우타리의 말을 알고 있나 시험해보게.”

- 당신은 어디에서 온 사람입니까? 혹여나 우타리의 혼혈입니까?

- 에미시 놈들의 말이잖아! 당신은 대체 누구야!

소스라치게 놀란 노인이 사방을 돌아보며 겁에 질린 눈빛을 보였다. 분명 왜인들이 즐겨 입는 관복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나 거센 풍파에 시달리며 걸레나 다름없게 변하였다.

홍길동은 조심스럽게 표류한 왜인들의 행색을 보았다. 분명 노인에 가까운 이가 이들의 우두머리이며 서른이 조금 넘은 남자가 부두목이며 얼굴이 닮은 것이 아들처럼 보였다.

다른 이들은 연령대가 제각각이었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대접하는 것이 그들 나름대로 위계를 갖춘 것이 분명하였다. 이들은 분명 왜인 가운데 호족에 속하는 이들이리라. 홍길동은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노인에게 붓을 건네주고 필담을 시작하였다.

- 당신들은 어디서 왔소? 왜인이오? 우타리요?

- 전쟁이 끝난 직후 내란이 시작되어서 도주를 택한 왜인입니다. 목숨을 노리는 놈들을 피해 북방으로 이주하다가 여기까지 표류하였으니 귀인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건졌습니다. 여기가 어느 고장입니까?

- 이곳은 율도라 불리는 고장이오. 이 고장의 주인은 나인데 존함이 궁금하구려.

한동안 고민하던 노인은 자신의 이름을 노리카와(教川)라 하였다. 하지만 홍길동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분명 삽천교직(渋川教直 - 시부카와 노리나오)이라는 왜인이 수배를 받은 것을 기억하였다.

생포하면 은자 이천 냥을 지급함은 물론이고 명국 황상을 도운일이니 종6품의 관직에 제수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홍길동은 시부카와 노리나오를 바라보며 필담을 재개하였다.

- 궁금한 것이 있소. 분명 남쪽에 있는 섬에서 올라왔는데 겨울은 어떻게 지낸 것이오? 이 고장의 겨울은 혹독하기 그지없으니 참으로 궁금하구려.

- 제가 거주하던 고장은 눈이 많이 내리기로 소문난 지방입니다. 같이 지내는 이가 갓쇼즈쿠리(合掌造り - 폭설이 내리는 일본 지방의 건축양식)를 지을 줄 알아서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었지요.

- 계속 지낼수는 없었던 모양이구려.

- 제가 목숨 하나는 질기게 이어갔지만 제 목을 원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계속 도주하다 결국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홍길동의 마음이 정해졌다. 폭설을 견딜 수 있는 이들이면 약간의 도움을 받는다면 율도에서 거주할 수 있으리라. 이들을 생포해서 조선으로 보내 버는 수익보다 율도를 개척하고 얻는 수익이 더욱 클 것이다.

관직은 귀찮을 뿐이었다. 명나라 황제를 도운 일로 관직을 제수 받으면 사신으로 불려갈 것이 뻔하고. 주상전하보다 까마득하게 높은 황제를 만나는 일이니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런 외방(外邦 - 타국)까지 나설 관리들은 말단 관리들이거나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관리들일 것이다. 약간의 거짓말을 더하면 이들의 정체를 숨기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 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여기서 살아도 좋소. 관리들에게 보고하길 왜인 가운데 전쟁을 피해 이주한 이들을 받아들였으며. 조선으로 귀부하기를 청하였다 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오.

- 통할 일입니까? 정녕 저희가 여기서 살아도 될 일입니까?

- 안 될 일은 없소. 혹여나 원한다면 몇 년을 지낸 다음 따스한 조선으로 이주하면 될 일이 아니겠소. 내 편의는 많이 봐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확고한 조선의 영토이니(실제로는 아직 아니다) 추적자들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며. 이 섬의 주인이라는 자는 자신의 정체를 모르니 훗날의 일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시부카와 노리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홍길동의 손을 잡았다. 한때 큐슈 단다이의 자리에 있었던 시부카와 가문은 사할린 섬으로 자신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들은 훗날 북방의 수호자라 불리는 율도 교씨의 시조로 탈바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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