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13화 (213/573)

< 3장 27화 - 거인이 떠나간 자리 >

1470년 10월 6일, 세종대왕님을 안치하기 이전에 칠칠제가 먼저 열렸다. 흔히 49제라고 말하는 불교식 장례풍속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실질적인 제사의식이 끝나니 업무로 돌아가라는 증거이다.

졸곡제(卒哭祭), 풍악을 연주함을 금하고 가축의 도살을 금지함을 해제하는 제사도 단번에 열렸다. 모두 세종대왕님의 뜻이니 백성들을 위하여 의식을 간소화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신료들은 검소한 생활을 이어가면 충분하지만 나는 형님이 삼년상을 치르는 25개월 동안 매사에 조심하며 지내야 하리라. 이궁에 있는 여막(廬幕 - 무덤 가까이에 지은 초가집)에서 형님이 걸어 나오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다.

안색은 물론이고 피로에 시달리셨는지 입술조차 갈라져 있었다. 형님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리니 형님은 나의 얼굴을 보시더니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아바마마를 하루라도 더 뵙고 싶었는데 막상 상제(喪制)가 되니 몸이 피곤하고 사지가 요동치니 얄궂은 일이로다.”

나이가 들며 입신체비를 줄였다 해도 삼대 운동 700근 까지는 거뜬했던 형님이다. 하지만 며칠 동안 끼니를 굶었는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아마 식사도 거르는 일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형님에게 다가서서 환약을 꺼내며 말했다.

“기력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만약 상을 치르다 몸이 상하게 되면 정녕 불효이옵니다. 제가 꾀를 내어 환약을 몇 개 만들어 보았으니 드십시오.”

“약이라, 몸이 상하지도 않았는데 약을 먹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이 환약은 곡식으로 만든 것이구나. 혹여나 귀한 약재를 섞은 것이냐.”

“소화가 잘 되는 편두(扁豆 - 납작한 콩, 렌틸)를 갈아 쓴맛이 진한 고과(苦瓜 - 여주)를 감쌌습니다. 귀하지도 않고 몸을 보하기에 좋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삼년상의 핵심은 허름한 초막에서 지내며 험한 음식을 먹고 험하게 사는 것이다. 부모를 잃은 죄인이니 하늘을 볼 수 없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자책감이 핵심이지.

현대로 따지면 비건(Vegan)에 가까운 생활을 억지로 이어가는 것이다. 현대에도 철저한 영양학적 지침에 따라 식이요법을 해도 몸이 상하는 사람이 속출하는데 이 시대에는 정말 사람 잡을 일이다. 형님은 환약을 보시더니 웃으며 말했다.

“편두와 고과는 모두 이국의 음식이지만 아국의 것이 되었구나. 시전에서도 쉬이 팔리는 물건이니 값싸고 투박한 물건이다. 네 마음을 알 수 있겠구나.”

“고과는 쓴 맛이 강하니 물과 함께 삼키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환약이라고 해도 충분히 고려해서 직접 만든 물건이다. 쪄낸 다음 볶은 렌틸은 콩 가운데 단백질이 많기로 손꼽히고 여주는 영양 불균형을 잡아주기에 적합한 물건이다.

형님이 무언가 드시는 모습을 본 소헌왕후님이 손짓을 하며 부르시기에 잠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소헌왕후님은 품안에 둔 낭(囊 -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덩어리를 꺼내며 흐느끼듯 말씀하셨다.

“끼니를 거르다 시피 하였는데 유가 주는 것은 고스란히 삼키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사탕(설탕)은 한사코 거부하였는데 잘 된 일이다. 네가 만든 것이 무엇이냐.”

“이국의 작물이 저자에서 널리 팔리기에 사들여 만들어 보았습니다. 약재를 쓰지 않고도 몸을 보하니 이보다 좋은 물건이 있겠습니까.”

소헌왕후님은 내가 형님에게 드리지 않고 남겨둔 환약을 씹어 드시더니만 눈을 크게 뜨셨다. 여주의 쓴맛 때문인지 곤혹스러운 눈치셨지만 내 뜻을 알아차리셨나보다. 소헌왕후님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유교(유언)에 남긴 말대로 네가 상왕을 보좌하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혹여나 일이 잘못된다면 삼년상을 치르다 몸이 상하면 그보다 나쁠 일이 없다. 효심이 너무 지극해도 탈이니 네 도움이 절실하다.”

“소자도 아국이 발달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이전에는 불가하다 여겼습니다. 하지만 아국에 들어온 새로운 식료의 힘을 빈다면 상왕전하의 몸을 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직 신대륙의 음식물은 없지만 유라시아 대부분의 식재료가 모인 조선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전공은 아니지만 회원 가운데 비건, 개중에서 락토(유제품을 먹는 채식주의자)까지는 다뤄본 기억은 있다.

철저한 식품영양을 기본으로 하여 형님의 식단을 조금씩 수정할 것이다. 매일 만난다면 서로가 피곤해지겠지만 며칠 걸러 한 번 꼴로 세종대왕님을 같이 모시겠다 말하면 형님도 말릴 방법은 없겠지.

49제가 끝나고 세종대왕님이 승하하신지 5개월이 지났다. 세종대왕님이 영릉(寧陵)에 안장되는 국장이 끝나자 사실상의 예식은 끝이 났다. 이틀이 지난 다음 영릉을 찾아가니 형님은 초막 안에 계셨다.

“유더냐, 번잡하게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어마마마의 당부가 있었사옵니다. 상왕전하께서 상중에 몸이 상할까 염려되니 이를 보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탕국을 만들었으니 드시기에 편할 것이옵니다.”

“아바마마를 잃은 순간부터 죄인의 몸이나 다름이 없는데 무슨 말이더냐. 적어도 능에 머물 적에는 형님이라 부르도록 하여라. 이는 어명이니라.”

세종대왕님이 미처 저술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서책이 형님의 손으로 다시 쓰이고 있었다. 아마 세종대왕님이 완결하지 못한 저서를 다시 쓰는 것이 형님이 삼년상 중에 행할 일이리라.

또한 상왕이 아닌 형님이라 부르라 하시며 어명을 말하다니 역시 형님답다. 하지만 형님도 이번 겨울 추위를 버티기 힘들지 모른다. 그래서 꾀를 부렸다. 추위를 버티기 위해서는 지방 보충이 최고지.

조심스럽게 형님에게 탕국이 담긴 뚝배기를 내놓았는데 형님은 손짓을 하며 꺼려하셨다.

“삼년상을 치르는 와중에 호사스러운 음식을 먹으면 아니 되느니라. 네 마음은 알겠지만 내 뜻을 거부할 생각이 있더냐.”

“호사스러운 음식이 아닙니다. 도토리를 찧어 만든 국수를 들깨를 갈아 넣은 탕에 끓였습니다. 산에서 사는 이들이 기력을 찾을 때 먹는 음식입니다. 제 손으로 직접 만들었으니 이를 아바마마께 올리고 형님도 드시면 좋을 것입니다.”

세종대왕님에게 올리는 소반에 내가 만든 들깨탕이 올라갔다. 그리고 형님을 위한 저녁 소반 위에도 들깨탕이 올라갔고. 잡곡밥과 산나물이 전부인 식탁에 식어서 미지근해진 탕국이 올라가니 형님은 한 수저를 드시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이 들깨를 빻는 일을 생각하니 네 정성을 거절할 수 없구나. 아바마마께서도 이러한 일은 좋아하실 것이다. 입에 거친 음식이지만 마음이 담겨있구나.”

그리고 형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식사를 마쳤다. 아직 보여드릴 식재료는 무궁무진하니 며칠마다 한 번씩 와서 식사를 같이 하면 충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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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 1월, 형님이 삼년상을 치르니 군권은 자연스럽게 홍위에게 흡수되었다. 국상을 끝낸 홍위는 산적해 있는 업무 가운데 대외 업무인 대마도와 큐슈의 흡수를 진행하였다.

“종정국(소 사다쿠니)은 고개를 들라. 이전부터 아국을 위하여 힘쓴 공이 있으며 경인년 전쟁에서는 탐망을 게을리 하지 않아 아국의 손해를 막고 위험을 감수하였다. 따라서 토관(土官)의 직위가 아닌 외관(外官)으로 임명할 것이다.”

“신 종정국, 전하께서 내리시는 성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대마도는 땅이 좁고 척박하니 본디 도호부(都護府)로 두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아국과 구주를 이어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니 이를 목(牧)으로 정하겠다. 앞으로 경상도에 속한 대마주(對馬州)를 다스리며 후임자를 내정하도록 하여라.”

종정국은 홍위가 만들어둔 상복과 관복을 받아들고 큰절을 올렸다. 이윽고 부하인 평무적(平茂績)이 대마주에 귀속된 일기도(壱岐 - 이키 섬)의 토관직을 물려받았으며 영주들이 차례로 나와 관복과 상복을 동시에 받아갔다.

“소이교뢰(少弐教頼 - 쇼니 노리요리)는 비록 아국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는 자신의 땅을 지키려는 충심의 발로이니 죄를 사하겠다. 비군(肥郡 - 히젠의 새 이름)의 토관으로 임명할 것이니 조만간 파견할 하주도(下州道) 관찰사를 보좌할지어다.”

“성은에 감사를 올리나이다. 하오나 주상전하께 청이 있사옵니다. 부디 종정국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가까운 이름을 하사하시어 대대손손 번창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주십시오.”

“본관은 조상이 물려온 비군으로 삼으며 성은 소(少)씨로 하여라. 이름 두 자는 그대로 두어도 좋을 일이다.”

곧이어 이마가와도 금(今)씨의 성을 하사받았고. 홍윤성이 날뛰자 약삭빠르게 조선의 편에 붙었던 아소씨의 분파들도 옥(阿 - 언덕 아, 호칭 옥의 두 독음이 있다)씨 성을 하사받았다. 본토에서 일어날 정쟁 대신 평안한 조선의 품을 택한 것이다.

다시 한달이 지났다. 겨울의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 거제도에 임시 수용되었던 왜인 포로들이 강화도로 모두 이송되었다. 본래 전후처리가 끝나고 한가위 이후 배정될 이들이지만 국상 덕분에 시일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포로들은 따스한 거제도에서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강화도로 끌려와 정신이 없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변에는 공포의 대상인 훈련도감 병사들이 장구류를 치켜들고 경계에 여념이 없었다.

“포로들이 모두 집결하였습니다! 겨울에 병환이 생긴 자는 모두 거제도에 남겨 두었으니 구천백여 명이고 다른 이들이 회복하면 구천오백여 명에 달합니다.”

“구천오백여 명이라. 먹이고 재우는 일도 고생이겠군.”

“어쩔 수 없습니다. 당장 경군(京軍 - 한양에 주둔하는 병사)만 하여도 이만 명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들을 관리하느라 골머리를 썩을 지경인데 일이 잘 풀릴까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이 옳다면 이곳에 있는 포로 가운데 아국에 귀부되지 않으려는 이는 없을 것이네. 백옥헌(이개의 호) 자네는 슬슬 연설할 준비를 하게나.”

강화도 곳곳에는 간척지가 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각지에서 일하던 피렌체 미술가들은 겨울이면 강화도로 돌아와 간척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결과물이 새로 만들어질 농토이다.

주민들은 농번기동안 급료를 받아 일하니 좋고, 피렌체 미술가들은 기나긴 겨울동안 설계한 다음 다른 곳으로 나서면 되니 좋았다. 아쉬운 점은 현대처럼 철근콘크리트가 없으니 길고 튼튼한 제방을 만들지 못한 것 하나이다.

거대한 갯벌은 바닷물이 막히며 염분이 말라붙어 단단한 진흙 벌판이 되어 있었으니 사람들이 모이기 좋았다. 내 옆에 있던 공조판서 이개는 준비한 대로 단상의 앞으로 나서 나아가 연설을 시작하였다.

“너희들은 이 벌판이 보이느냐? 이곳은 한때 바다였으며 십 년 동안 오백 명의 사람이 힘써 개간한 곳이다. 그러니 충청도와 전라도에 있는 갯벌을 간척하며 너희의 죄를 갚아나가도록 하라!”

“저희는 짐꾼에 불과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저희가 죄를 지었다 하십니까. 명령을 받아 일한 것이 죄라면 저기 계시는 쇼니 어르신에게 따지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포로로 잡혀온 이들 가운데 장년의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와서 쇼니 노리요리, 새 이름인 소교뢰를 지목하며 고함을 쳤다. 자신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려댔지만 이개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너희는 구주(큐슈)에서 부덕한 세천(호소카와)을 도와 아국의 병사들을 손상시킨 죄가 있다. 그런데도 발뺌을 할 생각이라면 너희를 다른 곳으로 보낼 것이니 각오하고 있어라.”

“그만 두게나. 모든 일은 나의 잘못이 아니고 칸레이로 나라를 움직이던 호소카와의 잘못이네. 하지만 그 죄가 우리에게 내려온 것이니 도리가 있겠나. 만약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간다면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주변의 병사들이 창을 들고 접근하자 모두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보인이라고 해도 지난 전쟁에서 잡혀온 자들이니 전쟁 포로로 분류해야 옳은 일이다.

이제 채찍 이후 당근을 물려줄 차례가 되었다. 가만히 뒤에 서있던 내가 단상에 올라서니 다들 내 덩치를 보고 장수라 여겼는지 눈치를 보면서 쭈뼛거리기에 바빴다. 포로들이 조용해지자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그만들 하게나, 나는 왕실의 종친이며 이번 간척의 기본 계획을 담당하는 수양대군이네. 머나먼 고장으로 끌려와 십 년간 살게 되었으나 일을 열심히 하면 빨리 끝날 것이네.”

“십 년 이라 하셨습니까? 제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일하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땅이 있나? 집이 있나? 만에 하나라도 무엇이라도 있었다면 보인으로 나설 일이 있었겠나?”

전국시대든 무로마치시대든 전쟁에 보인으로 나서는 자들은 생활이 궁핍하여 약간의 급료를 위하여 나서는 것이 전부이다. 이들이 병사라면 뭐라도 가진 것이 있었지만 보인은 푼돈이 아까워 움직이는 이들이다.

정곡을 찔렸는지 웅성거리는 포로들이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명나라로 다루기 힘든 병사들을 보낸 것이다. 다음부터 말할 내용을 포로들이 들으면 적극적으로 따라오리라.

“십 년의 일이라 하여도 기존에 일한 이들은 사시사철 일하는 것이 아닌 농한기에 일한 것을 기준으로 삼았지. 너희들이 더욱 열심히 일하여 오 년 이내에 끝낼 수도 있고. 혹여나 십오 년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물론 간척 난이도와 간척 영역에 대한 조사는 모두 끝난 뒤였다. 피렌체의 미술가들 가운데 석조 건축에 조예가 깊은 이와, 이들에게서 배운 조선의 기술자들이 조사한 것이니 틀릴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배정되는 인원은 간척 지역의 난이도에 비례한다. 죽을 정도로 노력하지 않으면 칠 년 정도가 흘러야 가까스로 간척이 마무리 되리라. 하지만 포로들의 눈빛이 변하니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또한 충분한 보상을 줄 것이다. 너희들 구천여 명이 간척을 마치면 간척이 끝난 토지를 세 결씩 분할할 것이니 가정을 꾸리고 먹고 살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제 가족들이 없는데 저 혼자 풍족하게 살아야 무얼 하겠습니까!”

“가족들이라 하였는가? 가족들이 원하고 자네들이 원한다면 왜국에서 데려올 수도 있다. 아니라면 가정을 잃은 이들과 새로운 살림을 차릴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고. 집은 너희들이 만들어야 하지만 식량은 지급할 것이다.”

얼핏 보면 가족도 데려와주고 포로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을 시킨 다음 땅을 주는 것이지만 커다란 함정이 있었다. 간척이 끝난 갯벌은 염분이 너무 많아 십 년 정도 소득을 창출할 수 없다.

설령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땅의 염분을 뽑아내도 장마가 지나가면 다른 땅의 염분이 스며든다. 포로들은 아마 한 세대가 지나기 전까지는 갯벌을 돌아다니며 염분을 빼내는 일에 종사하리라.

“만에 하나 간척한 땅이 불안정하여 소득이 나오지 않아도 염려하지 말라. 아국은 흉년이 심하면 세금을 면하는 것이 법이며, 굶주린 이들을 구휼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구휼을 할 형편이 아니 되거든 언제라도 나를 찾으면 된다.”

“정말 약속하실 것입니까? 저희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좋은 일입니까?”

“포로로 일하며 죗값을 모두 치르면 아국의 사람이 되는 법이지. 지금부터라도 아국의 말을 배우고 풍습을 익혀 훗날을 대비하면 좋을 것이네.”

설령 가족들이 온다 해도 손해는 없다. 조선 사람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것 보다 왜인 포로들에게 일을 시키면 더욱 싼 값으로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요역 품삯은 간척과 같은 힘든 사업 기준으로 일당이 쌀 석 되이다.

만 명에 달하는 조선 사람들이 연간 200일, 일이 빨리 끝난다 치고 5년을 일하면 순수 경비만 20만 석에 달한다. 여기에 기타 잡비나 식대를 포함하면 40만석을 넘어갈 것이다.

반면 왜인이 가족을 만든다 하여도 끼니를 때울 정도의 식량만 지급한다 치면 같은 수준의 경비만 지출된다. 비용도 별로 들지 않고 부족한 인구를 채울 수 있는 방책인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꾀가 더 있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이개가 나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관리들이 나와 필요한 인원을 배정할 것이네. 적은 곳은 오백 명, 많은 곳은 천삼백 명에 달하니 각자 줄을 서서 자신들의 신상명세를 기입하게나.”

“줄을 서라! 그래야 일이 빨라지니 염려하지 말고 질서를 지켜라!”

책상이 옮겨지고 관리들과 역관들이 도열하자 포로들이 모여서 자신의 신상명세를 고변하기 시작하였다. 훗날 호패를 발급받을 정도로 신상명세를 말한 이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조선에 옮겨 타서 간척지로 향했다.

포로의 관리를 위한 신상명세를 얻어내려 해도 거짓증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을 찾기 위한 신상명세이니 거짓이 없이 적히리라. 이들 대부분은 가족들을 데려와 조선에서 살림을 차리려 하겠지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포로가 된 사람이 머나먼 이국으로(조선은 멀지 않지만 이 시대 사람들 기준으로는 멀다) 끌려갔다면 죽었다 취급하는 것이 이 시대이다. 기껏 해야 삼 할 정도가 가족을 되찾으면 다행이리라.

이개는 나에게 감사인사를 올렸지만 막중한 책무를 생각하는지 낯빛이 좋지 않았다. 임시 관청인 토건사(土建司)의 제조로 임명되니 쉴 틈도 없이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녀야 하리라. 하지만 내가 도울 방법도 없었다.

“대군어른의 심계 덕분에 일이 온전히 풀렸습니다. 처음에는 포로들을 천 명씩 분할하여 억지로 보낼 생각이었지만 수고를 덜게 되었지요.”

“앞으로 고생할 사람은 자네가 아닌가. 나야 가끔 얼굴을 비추며 포로들을 독려하면 될 일이지만 자네는 아니라네.”

“대군어른께서도 주상전하의 윤허 하에 과업이 있다 들었으니 부족한 제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앞으로 일이 많지. 이런 상황에서 머리가 빙글빙글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은퇴한 관료 이맹전을 비롯한 노신들이다. 나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이들이다.

한숨을 쉬면서 임시로 관료들과 일하는 이궁으로 돌아갔다. 어디까지나 형님과 홍위의 허가 하에 이궁에서 관료 조직 개편이라는 중책을 인수받았으니 나 또한 업무에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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