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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211화 (211/573)

< 3장 25화 - 갈매기는 서쪽을 향한다(4) >

서신은 안토니오가 귀족 가문임을 증명하듯 잘 다듬어진 양피지에 불가타 라틴어로 쓰여 있었다. 단순한 서신에 무슨 내용에 담겨있는지 궁금했던 한명회는 내용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그(제르지 카스트리오티)의 죽음 이후 알바니아도 혼란에 빠져 있다. 베네치아의 영토인 네그로폰테(에우보이아, 현 아테네 북쪽 섬)도 함락되었으며······.]

한명회를 비롯한 서행사와 탐검사 일행 모두 휴식년 동안 많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서역의 국가들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와 알력 관계에 대한 지식이 피렌체의 미술가를 통하여 전해졌다.

하지만 조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서신에 담긴 정보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한명회는 서신을 읽으며 현재의 상황을 예측하였지만 너무나 큰 오차 덕분에 갈피를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분명 아국으로 일 년 전에 전해진 서신에는 가시귀족 블라드(블라드 체페슈)라는 자를 물리치고 라두라는 이를 부하로 삼았다고 하였거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오?”

“대체 몇 년 전의 소식을 알았다고 늘어놓는 것이오? 팔 년 전에 일어난 일이오!”

서행사는 매 년 출발하고 매 년 돌아온다. 피렌체에서 파견된 미술가들은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이를 약속한 것은 오스만의 군주 메흐메트 2세였다.

간혹 민감한 내용을 담은 편지나 욕설에 대한 검열인지 잉크가 덧칠된 적은 있었지만 뜻은 전해졌으니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침략을 재개한 직후 검열을 그만두고 위조를 시작하였고 원본 대신 필적을 위조한 서신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이득을 목적으로 신의를 내세우고, 이득을 위하여 신의를 지키지 않는 자였다. 만에 하나라도 전쟁에 대한 소식을 온전히 전했을 경우 분노한 피렌체 미술가들에 의해 수입원인 인삼의 수출이 막힌다면?

그렇다고 서신을 온전히 창작할 수 없었다. 아예 헛된 말을 말하면 들킬 수 있으니 천천히. 서신의 전달을 늦추고 내용을 지체시키는 방법을 택하였다. 덕분에 조선은 전쟁의 징후를 알 방법조차 없었다.

만약 조선에 온전한 소식을 전했다면 오스만 제국 출신인 핫산을 비롯한 이주민들은 이번 항해에 끼어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화해를 위하여 피렌체 출신 미술가를 대동하였을 것이다.

한명회는 진실을 알아차리고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이는 약간의 이문을 위하여 조선을 능멸한 행위이니 지탄 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분노를 억누를 한명회는 안토니오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난 구 년 동안 거침없이 침략을 단행하였다는 말이오?”

“이제야 알아 차리셨구려. 이미 아드리아 해(이탈리아 동쪽의 바다)에 메흐메트의 군대가 닿아 있으며 베네치아가 전력을 다 하여 버티고 있소이다.”

“베네치아가 함락된다면 다음에는 라마국(신성로마제국)의 근본 가운데 하나인 로마를 침략할 것이 분명하군. 아니면 제노바를 공격할지도 모르고.”

“가당치도 않소이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무엇인지 아시오? 조선의 왕족이 선물한 홍삼이라는 영약 때문이 아니겠소! 젊은 나이에 질병에 시달리던 악마의 대리인, 메흐메트 2세의 힘을 되찾은 덕분이오!”

한명회는 홍삼은 효험이 있지만 죽은 자를 되살릴 정도의 약이 아니라는 진실을 말하려던 순간 말을 뱃속으로 삼켰다. 홍삼이 비싼 가격에 팔리는 이유는 메흐메트 2세가 자신의 질병을 치유한 동방의 명약이라고 선전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이 모든 말을 거짓이라 한다면? 홍삼의 가격이 폭락하고 서행사는 갈 길을 잃을 것이며, 국가에서 추진하는 모든 정책은 엉망이 되리라. 그런 일을 저지른 한명회 자신은 영원히 한직과 외직을 떠돌다 생을 마감하리라.

결국 한명회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오스만 제국에 다녀온 수양대군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니 자신이 번복하면 험한 꼴을 당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게 여긴다면 그렇게 여기시구려. 하지만 아국도 명백한 피해자요! 오사만국의 군주가 아국을 속일 생각으로 제대로 된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물어 볼 것이 있소. 분명 항로를 개척한다 하였는데 데려온 이들은 평범한 뱃사람이 아니고 병사가 분명하지 않소.”

“사람의 체격이 좋고 배가 크다고 함부로 트집을 잡는 것이오!”

“농담이 아니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캐러벨은 탐험에 최적화된 선박이오. 다루기 편하고 속도도 빠르며 설령 손해를 보더라도 이를 무마할 수 있는 물건이지.”

한 번 시작된 의심은 계속 이어졌다. 카보베르데를 함락시키고도 남을 거대한 선단을 몇 달이고 항해하여 억지로 가져온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한명회는 다른 배를 타고 올 방법조차 없었다.

물론 풍역선이 너무 크고 다루기 힘들다는 사실은 알았으며. 이로 인해 풍역선을 축소한 형태의 상무(祥霧 - 상서로운 안개)선을 설계하고 있지만 아직 연구조차 덜 된 물건이었다.

결국 풍역선은 서양에서는 너무 거대하다 여긴 선박이지만 조선에서는 평범하며 널리 쓰이는 배였다. 비록 부족한 면이 있지만 사용하지 못할 물건은 아니었으니 한명회 또한 진실만을 말했다.

“큰 배일수록 여유 공간이 있으니 편히 쉬기 마련이 아니겠소.”

“큰 배일수록 둔중하고 조정하기 어려운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니요! 나우(포르투갈 양식 카락)도 저렇게 거대한 함선이 되면 사람이 헤엄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소! 틈을 보아 카보베르데는 물론이고 리즈보아(리스본)도 위협할 수 있는 함선들이오!”

“항해에 대한 지식조차 없는 자가 총독 행세를 한다니. 차라리 저 청년이 가능성이 있겠소! 내가 어떤 역경을 겪고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못한단 말이오!”

한명회가 분노하여 탁자를 내리찍자 원목 그루터기를 가공한 탁자에 금이 가버렸다. 오십 세가 넘었어도 입신체비를 멈추지 않아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가 한명회였다.

작달막한 동양 노인(50대면 이 시대 기준으로 노인에 가깝다)의 괴력에 소스라치게 놀란 안토니오를 뒤로 남겨둔 한명회는 콧김을 씩씩 불며 총독 관저 밖으로 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풍역선에 탑승한 화기도감 병사들과 난동을 피우고 싶었다. 그렇게 모조리 쓸어버리고 포르투갈까지 나아가 국서를 전달하면 모든 일이 끝나리라. 하지만 실행에 옮길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일대가 군도(群島)이니 숨겨둔 배 한척이라도 도망가면 소식이 알려질 것이고. 포도아(포르투갈)의 수도에서 국서를 주고받지도 못하고 몰살당하겠지.”

상념에 잠긴 한명회는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기함으로 돌아갔지만 오스만 제국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병사들이 배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한명회의 분노한 눈빛을 마주하더니 흠칫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병사들의 기강은 헤이하며 총독이라는 자는 저렇게 감정적으로 나서니 이를 어찌 하겠는가. 하산? 거기 있는가?”

“한 제조님, 밖에서 소란이 있는 것 같았는데 저 덕분에 일이 틀어졌습니까? 분명 파티샤(메흐메트 2세)께서는 놈들을 침략한 적이 있었지만 예전의 일이 아닙니까.”

“말할 것이 있네. 지난 몇 년 동안 일어난 일은 아국으로 전달되지 않았다네. 애초에 자네도 나도 주상전하께서도 오사만국의 군주의 수작에 속아 넘어갔지.”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고 조선의 관료들은 물론이고 오스만 출신인 핫산조차도 메흐메트 2세의 행동에 대한 강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한숨을 몰아쉬고 갑판으로 나서니 누군가가 한명회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제독님! 한명회 제독님! 죄송합니다! 총독께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신 덕분에 일이 헝클어지고 말았습니다!”

“자네는 디아스가 아닌가. 이미 끝난 일이니 마음에 두지 말게.”

“실은 총독의 친족이 지난 전쟁에서 전사하셔서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격정적으로 나선 것입니다. 총독께서도 깊이 반성하고 계시니 이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용서라고 하였지만 한명회의 잔머리로 보면 속내가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화를 내 놓고 보니 인삼을 구매할 방법이 막힌 것이다. 결국 항로를 알려주지 않겠지만 인삼을 사들이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한명회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홍삼을 팔지 않으면 보급품을 마련하기 위해 보총을 비롯한 병장기를 팔아야 하는데 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결국 한명회는 바르톨루메우의 설득을 못이기는 척 총독 관저로 돌아갔다.

“지금 아국의 함선에는 스무 근의 홍삼이 있지. 홍삼의 값은 금의 세 배로 하겠소. 이를 지불할 자신은 있는지 모르겠소.”

“금의 세 배라 하였습니까? 죄송하지만 오스만에게 판매하는 금액은······.”

“금과 같소이다. 하지만 머나먼 거리를 돌아 왔으니 같은 값을 매길 수 없지 않소.”

홍삼을 금의 네 배로 가격으로사들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탈리아 반도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상인들의 손을 거쳐 포르투갈까지 닿으면 금의 다섯 배가 넘어가리라. 한명회의 계산이 정확했는지 안토니오도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금의 두 배로 합시다. 맘루크가 통행세를 걷는다 하였는데 같은 값은 아니더라도 더욱 싼 값에 팔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의 두 배로 파느니 불태워버리고 나의 가산을 내놓아 손해를 메꾸겠소. 이문이 남으려면 금의 세 배가 가까스로 합당한 가격이겠군.”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상대가 고집을 부리니 안토니오도 더 이상의 설득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조선과 포르투갈의 첫 무역은 인삼 스무 근을 금 80푼트(1푼트 = 480그램, 약 38.4kg)로 판매하는 것이었다.

안토니오의 명령이 떨어진 직후 연락을 위한 캐러벨이 바삐 움직였다. 말이 금 80푼트이지 실제로는 빠져나간 금을 메꾸기 위하여 제노바를 비롯한 각지의 귀족가문의 자금이 모조리 투입되리라.

한 달 뒤, 한명회의 함대는 보급을 마치고 조선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역풍과 거꾸로 움직이는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니 올 때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 소모되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번 기회보다 더욱 값싸게 조선으로 향하여 홍삼을 사들이리라. 만에 하나 조선까지 닿을 수 있으면 값비싼 홍삼을 훨씬 싼 값에 사들일 수 있겠지.

젊은 항해사이자 촉망되는 인재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항구를 떠나는 조선의 함대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그는 거대한 풍역선과 작은 캐러벨을 돌아보며 위대한 항해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는 결의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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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희망봉으로 되돌아온 한명회의 함대는 보급을 마치고 바로 극락도, 원래 역사의 모리셔스 섬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독한 더위에 시달린 나머지 선원 여럿이 죽었지만 감당할 수 있는 손해였다.

한명회는 간절도의 남서쪽에 있던 다른 섬에 비탄(悲嘆)도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많은 소득을 거뒀으니 적어도 말년을 평안히 보낼 보상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극락도에 상륙하자 구성군이 달려와 반갑게 맞이하였다.

“한 제조 아니시오! 서역인을 만나서 국서를 전달하였소?”

“만나서 국서를 전달하긴 하였습니다. 하지만 진상을 알게 되어서 기분이 좋지 않군요.”

여섯 달 만에 다시 만난 구성군의 얼굴도 바짝 타들어가 있었고 한명회 또한 지나친 항해로 지쳐 있었다. 서로 인원을 점검하였는데 항구를 개척하려고 보냈던 사람들이 줄어들어 있었다.

“사고라도 있었습니까? 혹여나 토인들이 마을을 습격하여서 사람이 상하기라도 한 것입니까?”

“실은 풍토병이 있었소. 학질에 걸린 이가 열네 명이었는데 다섯이 목숨을 잃었고, 학질과 비슷하지만 검은 피를 토하는 병에 걸린 이가 스물에 열넷이 목숨을 잃었소. 그러한 일 외에는 별 탈이 없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본디 학질은 병약한 이가 아니면 죽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검은 피를 토하는 병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탄주현을 떠나 극락도로 옮겨오니 더 이상 발병하는 이가 없어서 다행이었소. 혹시 모르니 약속한 기일보다 보름 먼저 극락도로 향했소이다.”

조선 원정대에서도 사하라 남부 개척의 가장 큰 장애물인 말라리아와 황열(黃熱)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나마 처음 개척할 때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마사이족과의 접촉 이후 말라리아 원충과 바이러스를 담은 모기도 같이 옮겨온 것이다.

아직도 황열의 후유증으로 사지를 후들거리는 유자광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지독한 병이기에 흑질(黑疾)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녀석이었다. 한명회는 유자광의 수척해진 팔근육 보면서 병의 지독함을 짐작하였다.

“그렇다면 탄주현은 사람이 오래 머물 수 없는 고장이겠군요.”

“어의들에게 증상을 전하여 약재를 만들고 치료법을 찾아낸다면 머물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탄주현에 오래 머물 방법이 없지 않겠소.”

“어의를 역임하는 전순의는 해박한 지식이 있으니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누구입니까?”

“탄주현 인근에 있던 퉁아니(마사이)라는 토인들이오. 탄주현 인근에 있던 이들인데 빼어난 재능이 있으니 아국에 보내 입신체비를 가르칠 생각이오.”

조선의 인사를 배운 마사이족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팔다리가 길고 훤칠한 모습이 인상 깊었으니 구성군이 빼어난 재능이라 칭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과 접촉한 마사이족 젊은이들은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구성군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한명회의 어깨를 두드렸고. 한명회는 이미 끝난 일이라 여기고 보고를 위하여 항해를 계속하였다.

항로는 이미 정해졌으니 되돌아가는 일은 쉬웠다. 어느덧 베트남 인근의 바다를 올라가는 탐검사 함대의 인근에 다른 함대가 보였다. 기존보다 조금 더 커다란 풍역선이 보였으니 새로 만든 함선이리라. 구성군은 천리경을 들어 함대를 바라보았다.

“저건 풍역선이야. 본디 서행사를 보낼 때도 아닌데 대월국(베트남) 인근까지 풍역선이 드나들다니. 대체 무슨 변고가 일어났단 말인가?”

구성군의 말을 들은 한명회도 천리경으로 살펴보았고 풍역선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였다. 흘수선(吃水線 - 배가 물에 잠기는 정도)에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무역을 위한 선박은 아니었다.

같은 조선의 배이니 만나는 것이 도리이리라. 해상에서 두 함대가 만났지만 놀랍게도 배에서 건너온 자는 훈련도감에 소속된 한철동이었다. 한철동은 한명회를 만나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한 제조님이 일 년하고 육 개월 만에 돌아오시게 되다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저를 조와국(마자파힛 제국)의 해구(海寇)를 격멸하기 위한 원양 함대로 임명하시어 탐망에 나서던 참이었습니다.”

“조와국의 해구라? 그들이 어찌하여 대월국 인근에 드나든단 말이오. 그리고 대월국으로 침략하는 해구는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 아니겠소?”

“조와국의 정변(政變)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두 군주가 서로 왕위를 자처하며 싸워대니 해구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기세를 올렸지요. 그것이 작년의 일입니다.”

한명회도 경험했던 일이지만 마자파힛은 화약무기를 쓰는 해군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정부의 통제가 소실되자 해적으로 돌변하였다. 한명회도 당시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왜구와 비교할 수도 없이 강대한 이들이니 풍역선을 보내 방비해야 뒤탈이 없으리라. 작은 섬인 열산도에 해적들이 침입하면 항구는 물론이고 이주민들의 목숨이 위험할 지경이었다. 한철동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덕분에 톤도(필리핀 북부의 도시국가) 일대도 침략을 당했습니다. 해구에게 시달리던 톤도국은 아국의 함대가 해구들을 물리쳐 주기를 원하였고. 주상전하께서 이를 허가하셨지요.”

“그렇다면 톤도국이 아국에 복속한 것이오?”

“처음에는 복속이 아닌 아국의 병사들이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인년 전쟁으로 단련된 병사들의 모습을 보더니 아국에 복속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톤도라 불리는 고장은 한명회가 다녀온 곳이었다. 듣기로는 금광도 있으며 수많은 구리광산도 존재하였고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곳이 많으니 조선의 역량은 날이 갈수록 커지리라.

그렇다면 경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한철동은 기쁜 얼굴을 숨기고 낮은 목소리로 한명회에게 말했다. 마치 비통함을 전하는 것 같은 말이니 한명회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구성군 대감과 한 제조님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작년에 불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불행한 일이라 하였소?”

“상세한 일은 도성에 들어가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기 힘든 일이군요.”

한철동은 구성군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하였는데  말을 하지 않다니. 대체 무슨 변고가 일어났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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