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24화 - 갈매기는 서쪽을 향한다(3) (01:20 수정) >
머나먼 고장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에는 언제나 부정적인 태도로 접근하여야 한다. 서로가 긴장하는 일은 당연하며 긴장이 지속되면 사소한 일로 죽이고 죽는 사투가 시작된다.
사자를 쫒아내고 사냥에 나서려 하였던 마사이족의 심기를 잔뜩 자극하였다. 열두 명의 마사이 청년은 쉰 명이나 되는 이방인을 보고 잔뜩 긴장하였지만 개중에 한 사람이 무늬가 없는 이상한 얼룩말(마사이족에게 말이 없다)에서 내려 접근하자 더욱 긴장하여 창을 움켜쥐었다.
수풀을 헤치느라 억지로 입은 하늘하늘한 옷(두루마기)은 소매에 무기를 숨기고 있을 거라 여겨졌으며. 거대한 갓은 쇠로 만든 흉기처럼 보였다. 구성군은 마사이족의 눈빛 속에 담긴 경계심을 느끼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벌판에 거닐면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들이니 자신이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있음이 분명 하렸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사냥하지 않았으니 두루마기를 입을 자격이 없지.”
갓끈이 풀리고 두루마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를 특이한 인사 방법이라고 받아들인 마사이의 청년들 모두가 자신들이 두르고 있던 짐승의 가죽을 훌렁 벗어 던지고 서로의 몸을 보았다. 대체 이 하얀 피부의 이방인은 무엇을 원한단 말인가.
“중부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 입신체비에는 체형이 여럿 있지만 팔다리가 길고 상체가 짧은 체형은 가꿀수록 아름다운 몸으로 변한다고. 하지만 이들의 체형은······.”
두루마기 속에 입은 입신체비복이 땀에 절어 달라붙어 있으니 몸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났다. 구성군은 마사이족의 체형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으며. 척박한 야생에서 생활함에도 자신보다 신장이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헐벗은 것처럼 보여도 기골이 장대하며, 체격이 작지만 알찬 근육이 박혀있구나. 이러한 몸을 가진 이들이 입신체비를 시작하여 절육을 마치면 흑요석(黑曜石)과 같은 몸이 될 것이다.”
일종의 경외와 숭배에 가까운 마음을 먹은 구성군이지만 마사이족도 같은 마음을 품었다. 담대한 대흉근과 갈라진 복근. 거목의 줄기와 같은 이두박근 모두가 구성군이 위대한 전사임을 나타내는 증표나 마찬가지였다.
언어는 몰라도, 민족은 달라도 두 이방인은 손을 잡고 악수를 청했다. 서로를 경외하는 눈빛을 보이고 있으니 모든 일이 좋았다. 구성군이 손을 흔들자 말에서 내린 조선인들은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다.
갑자기 나아가 갑자기 옷을 벗은 구성군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지만 엄연한 종친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유자광이 놀라 나아가서 구성군의 옆에 섰다.
“구성군 대감께서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들이 마사이라 불리는 토인들이 맞습니까?”
“자네가 마사이라는 말을 하자 반응하는 것을 보니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자네도 입신체비를 하니 이들의 몸이 가진 잠재력이 보이지 않나.”
“분명 아국 사람들과 체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렇게 팔다리가 긴 자들은 상체에만 집중하여도 효험이 있겠군요. 저 두터운 허벅지를 보십시오.”
기마민족이 아닌 마사이족이 순수한 유목민족으로 생활하는 방식은 간단하였다.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걸을 수 있는 지구력과 발달한 하체가 있었지만 빼어난 입신체비사도 하체를 단련하는 일은 힘들었다. 이들의 잠재력을 확인한 구성군은 다시 눈을 돌려 몸을 훑었다.
하지만 마사이족의 눈빛은 어느 새 대열의 뒤에 있던 투이(통가 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향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폴리네시아인이며 입신체비로 체격이 더욱 커졌으니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생존을 위한 절약 유전자, 정확히는 지방 축적 유전자가 가장 강력한 폴리네시아인이 입신체비를 행하니 말 그대로 살집의 덩어리처럼 보인 것이리라. 서로의 눈빛을 본 구성군은 친해질 방법을 만들었다.
“여기 보게. 자네들은 이 짐승을 잡으려 하지 않았는가? 이 짐승을 무어라 하는가?”
바닥에 방금 전에 도망친 맹수의 모습을 그리자 마사이족 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들도 성인식을 위하여 사자를 잡으려던 참이었으니 무슨 소리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우와루.”
오우와루(사자)? 그렇다면 오우와루를 잡은 수로 경쟁하세나.”
사냥이 재개되었다. 마사이족 청년들은 성인식을 위하여 창과 활을 들고 둥글게 모여 춤을 추었으며. 조선인들 가운데 경쟁심을 불태우는 폴리네시아 청년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사바나의 높은 수풀 사이로 사방을 뛰어다니며 기척을 드러내자 멀리서 천리경으로 탐망(探望)하던 조선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사자가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거기 그쪽! 오우와루가 온다!”
“어느 쪽! 어느 쪽이야! 내 쪽? 다들 화살 매자고!”
“유자광! 이거 아무리 보아도 사자(獅子) 같다네! 가친(家親)께서 진귀한 짐승의 가죽이라 하였는데 산군과 비슷한 크기에 갈기가 있다 하셨지. 천축에서도 귀하다는 사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사자로 하겠습니다! 여하튼 갈기가 없는 놈은 도망치고 있는 놈은 따라옵니다!”
생소한 상대를 본 암사자들이 겁에 질려 달아나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수사자가 나서서 사람을 덮치려 하였다. 하지만 상대가 강해도 너무나 강했다.
폴리네시아인이 전력으로 던진 여섯 자(약 2.1m)나 되는 투창이 사정없이 날아들어 수사자의 돌격을 막아내는 사이 구성군 또한 자신이 챙겨온 철궁에 화살을 올리고 거리를 가늠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철궁으로 오십 보(80m)를 조준할 수 없고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입신체비로 단련된 구성군의 등근육은 단단한 철궁을 휘어버리며 힘을 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윽고 쏜살같이 날아간 화살이 사자의 등줄기에 내리 찍혔다.
마사이족이 맹수를 사냥할 때는 화살로 견제하고 투창으로 급소를 노리는 일이 상식이었지만 입신체비는 상식을 정 반대로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유자광 또한 말을 타고 접근하여 철궁을 쏘았으며. 수사자는 사지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조선인들이 여섯 마리의 수사자를 사냥하는 동안 마사이족은 기껏 해야 한 마리의 수사자를 사냥했다. 조선인들의 수가 더욱 많았으며 사자들은 조선인에게는 덤비지만 마사이족을 알아차리고 도망치니 사냥 속도가 더뎠다.
“이쪽에도 사자가 있습니다! 잠깐만 저건 상(象)이다! 상이 진노하여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하루 종일 이어진 사냥의 끝은 코끼리가 장식했다. 쉰 명에 불과한 조선인이 지독하게 날뛰었는지 인근에 있던 거대한 아프리카 코끼리가 분노하였고. 진정한 조선인의 힘이 발휘되었다. 유자광은 화들짝 놀랐지만 체계적인 명령을 내렸다.
“보총! 보총 준비해라! 거대한 상이니 말 위에서 접근하여 노려 쏘아라!”
“염병할! 애초에 보총이 통하지 않는데 운총으로 눈이라도 노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된다면 네가 여기 있겠어? 닥치고 말이나 몰아! 병법이 이거인데 뭘 어쩌라고!”
참파와의 일전을 통해 대 코끼리 전술도 정립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하였다. 화기도감의 보총수들은 장전을 마친 다음 기병 뒤에 올라타 신중하게 코끼리의 주변을 돌았다.
기껏 해야 사람보다 조금 빠른 코끼리가 말의 속도를 쫒아가지 못하는 일은 당연하였다. 주변을 선회하다 근접하여 사격한 보총은 얇은 뱃가죽을 뚫고 내장을 헤집었으며. 생전 처음 접해보는 굉음과 고통에 시달린 코끼리는 도주를 택했다.
“추격하라! 이번 기회에 상을 잡아 상아를 얻어내면 주상전하께 드리기 좋을 것이다!”
“장전은 말 위에서 하지 못한다고!”
유자광을 필두로 한 화기도감 보총수와 사냥꾼들은 벌판 저 멀리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코끼리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마사이족 청년들은 보총 소리에 화들짝 놀라 구성군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마사이족의 말로 올토메, 코끼리를 상대할 때에는 수십 명의 장정이 모여 투창으로 발꿈치를 손상시켜 며칠 동안 투창을 던지며 추격해야 한다. 하지만 고작 열 번의 천둥으로 도망치니 위력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보총의 천둥소리가 들린 다음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상아와 코끼리를 사냥한 증표인 거대한 코를 잘라왔으니 마사이족 청년들은 존경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구성군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만 두게나. 우리는 머나먼 이국에서 여기에 고을을 만들려고 찾아온 것에 불과하다네.”
하지만 경외심을 담은 눈빛은 그칠 줄 몰랐다. 그들은 구성군을 완벽한 전사의 육체를 가진 자이며 천둥의 힘을 부리니 은가이(마사이의 신화에 나오는 창조주)의 화신이라 여기고 있었다.
청년들의 환대를 받은 조선인들은 그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마을로 향했다. 유목민족이니 언제나 이동하는 이들이며 언젠가는 버려야 할 거처이니 진흙과 가시나무로 만든 간소한 마을이었다.
부족의 족장과 제사장은 청년들의 말을 듣자 거창한 환대의 의식을 시작하였다. 염소와 소의 목을 베고 우유와 피를 섞은 액체가 전해졌다. 다른 이들은 천박한 토인의 의식이라 생각하였지만 구성군은 히죽거리며 웃더니 거침없이 들이켰다.
“이들이 만드는 식사를 보게나. 이들의 식사가 곧 입신체비의 모범이나 다름이 없다네. 다만 아쉬운 일은 채소가 부족한 것이 전부이군.”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지질(지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육질을 기반으로 하며 약간의 기장이나 수수를 먹으니 어찌 보면 달자들의 식습관과 비슷하군요.”
“하지만 달자들은 술도 마시고 소금을 아끼지 않지. 이들은 소금조차 최소한으로 쓰는군.”
입신체비를 행했던 이들은 양생(벌크 업)과 절육(커팅)을 반복한다. 절육을 행할 시기에는 소금을 적게 쓰고 고기의 양을 늘리는데 마사이족의 식사 또한 소금이 매우 적었다. 흡족한 미소를 짓는 구성군에게 한 장년의 남성이 다가왔다.
“자네는 무언가? 내 앞으로 손을 내미는 것은 활을 당겨보겠다는 말인가? 재미있군.”
부족에서 최고의 전사로 보이는 이가 당당하게 활을 달라 하니 구성군은 자신이 사용하던 철궁을 건네주었다. 전사가 전력을 다하여 화살을 올리고 활을 당기니 강력한 철궁도 휘어졌다.
하지만 기껏 해야 일흔 보(112m) 정도를 날아간 화살은 원하는 자리로 보였던 나무 등치에 박히지 못했다. 구성군은 다시금 활을 잡고 전사가 목표로 했던 나무 등치에 세 발의 화살을 꽂아 넣었다.
“철궁이니 조준이 불안하군, 본래 쓰이던 각궁이라면 스무 발을 쏘아도 모두 명중하였을 것인데.”
마을에서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전사들 모두가 철궁을 잡았지만 예순 보를 보낸 이들도 극히 드물었다. 신의 사자이자 위대한 전사를 접견한 이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경의를 표시하였다.
“이렇게 원대한 가능성을 가진 이들이니 더욱 강해지고 싶지 않은가? 머나먼 조선으로 건너가 힘을 길러 더욱 나은 삶을 살고 싶지 않은가? 자네들이라면 진정한 흑룡이 될 수 있다네!”
구성군은 예전에 보았던 수양대군의 전성기 시절을 담아낸 병풍, 수양팔근도를 떠올리며 흑룡세를 만들어냈다. 마사이족 청년들이 그 근육에 경외감을 표했지만 진정한 흑룡세는 흑요석과 같은 몸을 지닌 이들에게 잠재되어 있었다.
한 달 뒤, 인근 부족에서 쉰 명의 청년들이 조선이 세운 항구인 탄주현으로 향했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이들은 조선의 말을 배우고 간단한 입신체비를 시작하였다.
그들 가운데 조선으로 향하기를 원하던 이는 서른둘이었으며. 남은 이들은 구성군이 선물한 소와 말을 가지고 자신의 부족으로 돌아갔다. 훗날 동아프리카를 지배하는 국가의 씨앗이 지금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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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의 함대는 항해를 계속했다. 마다가스카르를 벗어나자 노예 상인의 세력 밖이었는지 토인들 또한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니 모든 일이 쉬웠다.
약간의 무명과 비단을 주면 자신들을 떠받들고 칭송할 지경이니 쉬운 일이라 여겼다. 현대에서 케이프타운이라 불리는 고장을 떠난 한명회는 배 위에서 고을의 이름을 정하였다. 흥겨운 콧노래가 이어지며 그의 소망을 담은 작명이 시작되었다.
“방금 건너온 봉우리는 서역으로 나아갈 희망(希望)을 담고 있으니 이름을 희망봉이라 할 것이며. 저 서안(書案 - 책상)을 닮은 산(테이블 마운틴)은 사상을 표현함을 허락하는 일이 글귀와 같으니 사허(辭許)산이라 하면 좋겠네.”
“그렇다면 이 고장의 이름은 무어라 하실 것입니까? 말씀을 허락하다는 뜻에 대구가 될 일로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실한 직책이라는 뜻을 담은 윤직(允職)현이라 하면 좋지 않겠나.”
“어찌 이름을 이상하게 짓고 계십니다.”
하산은 한자에 대한 지식이 있었지만 한명회의 속내는 알 수 없었다. 산과 고장과 봉우리의 이름을 합치면 사직윤허희망(辭職允許希望)이 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한명회의 고난은 시작일 뿐이었다.
현대의 나미비아 일대. 아프리카의 남서부 일대를 따라 진출하였지만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해안의 백사장이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이 끝없는 모래사막을 본 이들은 황량함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이렇게 더운데 하늘은 건조하고. 저렇게 넓은 땅에 숲이 하나도 없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나도 저러한 광경은 처음 본다네. 올라갈 때에는 순풍을 받겠지만 내려갈 일이 걱정이군.”
조선의 함대는 가혹한 아프리카의 서해안 일대 항로를 개척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물의 고갈이 문제였다. 열흘을 항해하면 열흘을 소비하니 항해는 날이 갈수록 길어졌다. 탐망하던 이가 고함을 쳤다.
“한 제조님! 저 멀리 작은 섬이 보입니다!”
“당장 상륙을 시작하게. 여유가 있을 때에 상륙해야 별 탈이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더위와 피로에 지친 선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섬 안으로 달려갔고. 섬의 원주민에게 무명과 비단을 주고 며칠 동안 머물 자리를 손짓 발짓으로 요구했고 바로 승낙받자 선원들은 쏜살같이 강으로 달려 나갔다.
한명회와 하산을 비롯한 이들은 천막을 만들고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물 보급을 위하여 선창(船倉)에 적재되었던 항아리들이 속속들이 옮겨왔다.
“열흘을 항해하면 다시 물을 보급하는데 닷새가 걸리다니. 이래서는 돌아가는 길에 역풍이 불 것이니 구성군 어른과 합류하기로 한 극락도로 돌아가려면 넉 달이 소요되겠는걸.”
“애초에 식량이 거의 다 고갈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나아가 서역에 당도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동이로 쓸 녀석을 잔뜩 구매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렇지. 건면포(건빵)를 만들 진가루가 서역의 양식이라 하였으니 돌아가는 길에는 건면포를 잔뜩 만들어 둬야겠네. 어디까지나 포도아(포르투갈)인을 만나게 되면 말이네.”
숯은 미생물을 제거하지 못하지만 조금이나마 함유된 목초액은 수질 정화의 효과가 있었다. 이제 숯의 효험도 떨어질 때가 되었지만 한명회는 일어나 모래를 털어내고 기지개를 켰다. 어느 새 부선장의 자리에 임명된 하산은 불안한 표정을 짓다 한명회를 보았다. 한명회는 그 표정을 보더니 웃어 넘겼다.
“고민을 해서 무엇을 하나. 서역에 당도하면 당장 가마를 쌓아 숯을 만들고 건면포와 서역인 들이 사용하는 식량을 잔뜩 구하는 것이 제일이지. 세견물이 부족하면 사람이 병에 걸리기 마련이라네.”
“정녕 세견물이 부족하면 병이 생긴다 하였습니까. 그러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지만 저희가 몸으로 체험하지 않았으면 좋을 일입니다.”
“내 말을 믿게. 이미 수양대군 어른께서 죄수들을 통하여 검증한 것이 세견물이라네.”
세견물의 효험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하산의 말을 제지한 한명회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벌채한 나무로 물을 끓이고 식혀 보관해야 한다. 끓인 물은 숯이 있으면 보름, 숯이 없으면 열흘은 보관할 수 있으니 차선책이었다.
보급에 나흘이 소모되었지만 하는 일도 많았다. 본래 역사에서 적도기니의 비오코(Bioko)라 이름 붙여질 섬에는 한명회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뜻을 담은 간절(懇切)도라 이름이 붙었다.
간절도에서 항해를 거듭하고 사흘이 지난 1471년 2월, 조선의 함대는 마침내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고 문명인의 흔적이지만 천리경에는 나름 정돈된 부두를 비롯한 접안 시설이 있었다.
“서역인이 사는 고장이 분명하구나! 내 태상왕께서 만드신 사전으로 불가타(라틴어의 갈래, 대중적으로 쓰인다)를 익히느라 고난을 겪었는데 사용하는 이가 있다면 좋은 일이겠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물자는 충분하나 뱃길을 알아야 포도아로 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항구가 있지만 풍역선을 정박하기에는 부족함이 많군. 우선 내려 보아야 알 일이지.”
한명회를 비롯한 이들이 항구에 도착하였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주인이 없는 항구를 지키는 토인들은 겁에 질린 눈초리로 항구의 이름을 세하 지 레오(Serra de Leão – 시에라리온)이라 말할 뿐이었다.
말이 명확히 통하지 않았지만 서쪽에 있는 제도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이해한 조선의 함대는 보급품을 챙겨 다시 서쪽으로 향하였다.
마침내 1471년 2월 19일에 한명회가 이끄는 함대는 한 무리의 섬이 모인 군도(群島)를 발견하였다. 훗날도 지금도 카보베르데(Cabo Verde)라 불리는 군도이자.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를 비롯한 항해사들의 거점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한명회는 자신이 사용하던 고배율 천리경으로 먼 바다에 있는 돛의 끝, 명백한 범선의 흔적을 보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드디어 이 망할 항해의 끝이 보이는군. 눈물이 나올 지경이네.”
“네? 끝이라 하셨습니까? 한 제조님이 사직을 청할 예정이십니까?”
“주상전하께서는 포도아의 사람들을 만나 홍삼을 팔 방법을 만들라 하셨지만 아예 포도아와 서반아(스페인)에 닿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네. 다음에 시키실 것이 있을 리가 없다네.”
한명회는 사직의 꿈을 담아 섬으로 접근하였다. 가장 큰 섬인 리베이라 그란데(Ribeira Grande) 인근까지 다가섰고 마침내 서로 육안(肉眼)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까지 근접하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탐험용으로 사용하던 대형 캐러벨은 50톤 정도의 배수량을 가진 범선이었다. 150톤 규모의 나우(Nau – 포르투갈 양식 카락)는 있었지만 둔중한 나우는 단 한 척에 불과하였다.
반면 풍역선은 300톤에 달하는 거함이었다. 정체불명의 함대를 목격한 순식간에 항구에서 포성이 울리며 비상 상황을 알렸다. 네 척의 캐러벨과 나우가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더니 섬에서 함대의 기함으로 보이는 함선이 접근하고 쪽배가 풍역선을 향해 옮겨왔다.
상대는 잔뜩 긴장했는지 제법 높은 직위에 있는 장년의 남성과 젊은 병사 여럿이 있었다. 한명회는 목을 가다듬고 불가타 라틴어로 인사를 시작하였다.
“반갑소. 머나먼 동방의 조선에서 건너 온 압구, 한명회라고 하오.”
“머나먼 동방의 조선이라 하셨습니까? 저는 안토니오 드 놀리(António de Noli) 이며 한때 제노바의 귀족이었고 지금은 카보베르데의 총독이자 엔히크 왕자께서 임명한 항해사입니다.”
“나는 탐검사의 제조이자 조선의 신하이기도 하지. 그렇다면 여기가 포도아라 불리는 고장이 맞소?”
“엄밀히 말씀드리면 포르투갈에서 개척한 제도입니다. 덕분에 총독으로 말년을 보내고 있으니 참으로 잘 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안토니오와 한명회가 악수를 주고받았지만 긴장감은 가시지 않았다. 풍역선의 거대한 크기와 적재된 화포 모두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국의 문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배의 크기는 적재할 수 있는 화포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들이 판단한 풍역선의 전력이라면 카보베르데에 있는 함대 모두를 격파하고 남을 지경이며 한명회의 생각도 같았다. 한명회는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고 본론에 들어갔다.
“실은 맘루크국 놈들이 저희의 교역을 가로막을 움직임을 보이기에 여기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홍삼을 팔기 위해 머나먼 길을 돌아 이국에 당도하였으니 소득이 있어야겠지요.”
“홍삼? 홍삼이라 하셨소? 악마의 화신 메흐메트 2세의 기력을 되돌린 그것 말이오?”
“악마의 화신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거래를 시작하자니 너무 피곤하고 지쳐 있으니 신세를 지면 안 되겠소. 먼저 선원들이 머물 장소를 마련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겠소.”
진귀한 홍삼이 있다는 말에 모든 문제는 사라졌다. 풍역선이 부드럽게 항구에 정박하고 선원들 가운데 조선인들이 먼저 배에서 내려 기지개를 펴며 안내를 받았다.
거친 선원들을 상대한 일이 많으니 모두 술과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였지만 선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옷을 벗어던지고 강으로 뛰어들어 비누칠을 하며 온 몸을 씻는 이들을 보면서 선원들은 황당한 눈빛으로 조선인들을 쳐다보았다.
“항구에 들리면 술과 여자이지 왜 몸을 먼저 씻는단 말인가. 저들에게는 몸을 씻는 게 먼저라고?”
“선원들조차 비누를 사용한단 말인가? 찌든 때가 적은 것을 보니 씻는 것이 몸에 배어있는 것이 귀족가문 자제임이 분명해. 머리는 엄청 길어서 동여매고 다니면서 불편하지도 않나.”
“혹시 모르지. 귀한 홍삼이 나는 나라이니 금이 넘쳐날 정도로 부유하지 않을까?”
본래 전염병을 막기 위한 규칙이었지만 서양의 선원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이 착각 속에 빠져있었지만 한명회는 간만에 몸을 씻은 다음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새 관복으로 갈아입고 총독 관저로 향했다.
항해 와중 생긴 세견물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찬 물에 우려내 마실 녹차를 챙겨가는 일은 당연했다. 총독관저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토니오는 서양에서 진귀한 차를 거침없이 마시는 모습을 보고 한명회의 신분을 짐작하며 손을 비벼댔다.
“홍삼을 거래하는 항로를 개척한다 하셨는데 정녕 홍삼을 가져 온 것이 맞습니까?”
“애초에 인삼을 쪄서 홍삼으로 만드는 방법을 만든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라오. 홍삼은 삼 년은 상하지 않고 보관할 수 있으니 지금 가져온 녀석들은 이 년을 두고 쓸 녀석들이오.”
“직접 만드셨다 하셨습니까? 머나먼 동쪽에서 항해하심은 물론 교역상품인 홍삼을 제조하는 법을 알아내셨다니. 한명회 경은 타고난 항해사이자 바다의 보배나 다름이 없습니다.”
문화의 차이가 한명회의 호인 압구(狎鷗)를 이름으로, 한명회를 성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한명회는 미리 챙겨온 꿀에 절인 홍삼이 들어있는 백자를 내밀었다.
“본격적인 거래를 시작합시다. 백자에 담긴 인삼은 한 근의 무게이며 기존에 팔리던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과 같더군. 혹여나 확인이 필요하시오?”
“물품을 확인하는 것 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더위에 상한 물건일지도 모르니 즉각 확인함이 바람직한 일이지요.”
“사람을 보내서 기함에서 물건을 꺼내 오시오. 기함에 있는 하산이 부선장을 담당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한명회의 지시에 따라 더운 기후에 지친 조선인들이 먼저 휴식을 취하며 기함에는 통가 제국에서 건너온 폴리네시아인과 스스로 남아있기를 자처한 이현전 응교 하산이 남아 있었다. 안토니오가 손뼉을 치자 젊은 청년이 들어와 인사를 올렸다.
“이 친구는 귀족의 자제이자 포르투갈의 군주 알폰소 5세 전하께서 친히 육성하시는 인재 바르툴루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z)이지요. 조선의 선박을 보면서 영감을 얻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기 주상전하께서 전하라 명하신 국서가 있습니다. 이 국서를 제가 직접 포도아의 수도로 나아가 보낼 수 있겠습니까.”
“거래가 끝나면 당연히 이어질 일이지요. 염려하지 말고 차근차근 기다리십시오.”
젊은 청년이 나가고 한명회는 말없이 녹차를 들이켰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리니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런 위업을 세운 이는 주상이라 하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풍역선으로 가서 인삼을 가져오겠다던 바르툴루메우는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그는 다급한 눈으로 한명회를 노려보다 안토니오에게 말했다.
“총독님! 무어인(이베리아 반도의 아랍인)도 맘루크도 아닌 오스만인이 있습니다!”
“한명회 경! 어찌하여 배에 오스만의 사람이 있단 말이오! 맘루크와 사이가 안 좋다 여겨 오스만과 단순한 교역 상대라 여겼거늘!”
급변한 안토니오의 모습을 보며 한명회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직의 꿈이 멀어지는 것 같았지만 무슨 일인지 확인해 봐야 알 것이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제의(祭衣)를 입은 신부가 달려들었다.
“함선에 남은 이는 부선장이라고 하였는데 오스만인이 부선장이라니! 조선은 정녕 오스만과 한 패란 말이오! 당신들이 영약을 보낸 덕분에 베네치아가 함락당할 위기가 되었소!”
“오사만국(오스만 제국)은 단순한 거래 상대요! 지난 십이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이오! 당시에 종친이신 안평대군 어른께서 로마라는 고장에 머무른 적이 있단 말이오.”
분명 한명회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서역에 위치한 여러 국가와 조선은 중립 내지는 우호 관계를 맺었다고 여겼으며 홍위 또한 그러한 관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관계를 변화시키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메흐메트 2세는 역사를 변동시키지 않으려는 수양대군 덕분에 기존의 행적을 거의 비슷하게 이어갔다. 하지만 홍삼을 팔기 위하여 자신의 건강을 되찾게 만든 물건이 홍삼이라 선전하였다.
결국 유럽은 조선이라는 미지의 국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비한 명약을 주어서 메흐메트 2세의 건강을 되찾았으니 오스만 제국의 동맹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단순한 거래상대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기함에 있던 부선장 하산, 정확히는 오스만 제국 출신의 핫산이 문제였다. 한명회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은 안토니오는 분노를 억누르며 서신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