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09화 (209/573)

< 3장 23화 - 갈매기는 서쪽을 향한다(2) >

1470년 12월, 조선의 함대는 아쉬움을 가득 남긴 채 마다가스카르에서 서쪽으로 출항했다. 한명회는 멀어지는 섬의 모습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국보다 훨씬 큰 섬인데 발을 붙일 곳이 없다니요. 대양도의 네 배는 되는 거대한 섬입니다만 얻어낸 것이라고는 지도에 기입할 표문 네 개가 전부였습니다.”

“섬 전체가 온갖 세력들이 득시글거리는데다 사시사철 분쟁이 일어나니 불안정한 것은 사실이잖소. 서행사가 머물 항구로 쓰이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전쟁이라도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오.”

구성군도 아쉬운 표정을 아끼지 않으며 자신이 명명한 남양도(南陽島 - 마다가스카르)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발견할 당시만 하여도 신농도 원주민들의 분파를 만나 환대를 받을 생각에 잔뜩 기대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신농도 원주민은 없었고 부족들의 태도는 완전히 갈렸다. 극단적으로 조선을 환영하는 부족도 있었던 반면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 부족도 있었다. 심지어 정박한 함선에 불을 지르려다 발각된 이들도 있었다.

북부에는 이슬람 상인들이 노예무역을 위하여 인간을 사냥하니 생전 처음 보는 배가 자신들을 납치하려 온 줄 아는 이들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박노포는 고개를 숙이며 울먹거렸다.

“죄송합니다. 분명 저희의 기록대로 움직였는데 살아있는 사람이 없으니 참담할 노릇입니다.”

“그만 하면 되었소. 수십 년 전의 일도 아니고 수백 년 전의 일이 아니오. 덕분에 이주(離洲 - 아프리카) 인근까지 무탈하게 도달하였으니 할 일을 모두 마친 것이오.”

박노포의 어깨를 두드린 한명회였지만 지난 시일 내내 해안가를 돌아봤던 고생을 생각하니 분통이 치밀어 올랐다. 한 달 하고도 보름 동안 남양도를 일주하며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폴리네시아인이 살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천 년 전에 이주한 폴리네시아인은 아프리카 계열의 이주민, 아랍인, 인도인, 말레이시아인에게 밀려 자취를 감추고 그들에게 동화되었으니 찾을 방법이 없었다. 결국 조선이 거둔 소득은 일대를 오가는 이슬람 상인을 만난 것 하나였다.

갑판 위에서 이슬람 상인이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자랑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한명회와 구성군을 비롯한 모두 노예상인으로 인한 간접적 피해를 입었지만 그는 눈치도 없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프리카야(아프리카)의 동쪽 해안에는 저희 무슬림이 세운 소국가가 많습니다. 이런 곳을 중개지로 삼아 무역을 행하시면 저희도 좋을 노릇이지요.”

“우리는 무역을 주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요, 세상을 널리 파악하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일을 목표로 삼았으니 헛된 수고는 버리시는 것이 좋겠소.”

“하지만 이런 머나먼 고장에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면 많은 것이 필요할겁니다. 물산을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몸바사에서 저, 나세르를 찾아주십시오.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메카까지 다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명회도 구성군도 침묵으로 대답하였다. 눈치가 느린 나세르도 냉랭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자신의 배로 돌아가 북쪽으로 향했다. 한명회는 상선이 돌아가는 모습을 천리경으로 확인한 다음 되물었다.

“나세르라는 자가 맘루크국의 상인이 맞는가?”

“맘루크의 사람은 아니고 인근의 스와힐리에 속한 사람이겠지만 확실히는 모르는 일이지요. 당장 메카를 논했으니 그쪽 사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맘루크국은 악독한 고장이니 어떠한 속내를 드러내면 아니 된다네. 혹여나 우리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리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훼방을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저도 저를 조선으로 보내신 파티샤(메흐메트 2세)께서도 맘루크의 세 치 혀에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때 맘루크 술탄국과 우호관계였던 오스만 제국 출신 이주민들도 거리낌 없이 분노를 표현했다. 자신의 옛 군주이던 메흐메트2세와의 교역을 막는 파렴치한 이들이라 여긴 것이다.

머나먼 서쪽에서 아프리카의 해안선이 보이자 함대를 나눌 시기가 다가왔다. 한명회를 필두로 한 네 척의 함선은 남쪽으로 향하니 필요한 사람이 한정되어 있었다.

풍역선 사이의 판자에서 사람들이 오갔다. 구성군은 기함에서 내리기 직전 한명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여섯 달 뒤에 다시 보게 될 사람이며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압구 대감, 무리하지 말고 몸을 보전하시오. 커다란 구풍을 만나면 강대한 풍역선이라 하여도 위험할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시구려.”

“구성군 대감께서도 몸조리를 잘 하십시오. 극락도(모리셔스)에는 없지만 덥고 습한 고장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사소한 독사 한 마리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니 종친으로서 몸을 건실히 다루십시오.”

한명회의 함대가 머나먼 남쪽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고 구성군의 함대는 천천히 일대의 해안의 항구를 정하고 뱃머리를 틀었다. 나세르가 알려준 뭄바사가 아닌 엉뚱한 항구였지만 구성군은 거리낌이 없었다.

작은 무역항이었던 말린디(현 케냐 남부)에 거대한 함선 네 척이 도착하고 난생 처음 보는 하얀 피부의 사람이 내렸다. 항구에 있던 이들은 모두 기겁하였지만 구성군은 거리낌 없이 총독이 머무는 관저로 향했다.

총독은 난생 처음 보는 조선인을 보고 놀라서 어쩔 줄 몰랐지만 구성군은 무덤덤하게 목례로 인사를 올렸다. 상세한 보고를 들은 총독도 정중한 인사를 올리고 대화를 시작했다.

“상인의 소개를 받아 머나먼 서방의 말린디에 당도하게 된 조선의 사신입니다. 저는 대표이자 왕족인 구성군이며 옆에 있는 이들은 저의 수행원입니다.”

“머나먼 이국에 와서 태연하게 행동하다니 덩치에 걸맞게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참으로 보기가 좋소.”

구성군이 손짓을 하자 예물이 전달되었다. 이미 얻은 정보에 의하면 원주민을 벗어나 어엿한 국가를 구성한 이들이니 잡철을 준다면 지독한 무례나 다름이 없었다.

무명과 비단 그리고 아마포를 예물로 전해졌다. 말린디의 부족장이자 도시의 총독을 겸하는 이는 난생 처음 만져보는 비단의 감촉에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윽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모르고 당신 같이 피부가 하얀 사람(상대적으로)은 처음 보았네. 그런 머나먼 국가에서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청하는가.”

“항구 하나와 항구에 거주하는 이들이 배불리 먹을 양식을 만들 토지를 원합니다.”

“주변에는 좋은 항구가 많은데 새로운 항구를 만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주변에는 항구도 많지만 여기도 손꼽히는 좋은 항구일세. 이런 예물이면 아깝지 않으니 염려하지 말게.”

“주상전하께서 바라는 일은 새로운 거점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머나먼 이국에 와도 명을 따르는 것이 왕족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이곳에 유능한 항해사가 있으니 많은 곳을 알지 않겠습니까.”

이슬람의, 정확히는 맘루크의 영향권을 피하는 것이 먼저인 구성군과 조선 사람들을 머물게 해서 이득을 챙길 총독의 눈빛이 교차했다. 이윽고 한참을 고민하던 총독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좋은 항구가 많으면 남은 곳은 나쁜 항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항구를 만들기에 좋은 지역이면서 만들어지지 않은 곳이 있다네. 정확히는 만들지 못한 곳이지.”

“그렇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곳이 분명합니다.”

“옳은 말이네. 실은 좀 더 남쪽에 있는 탕가라는 고장에서 노예사냥을 한 적이 있었지. 그리고 크나큰 화를 입었다네. 자신들을 마사이라 부르는 이들이 어찌나 거세게 저항하던지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어.”

총독은 한숨을 내쉬면서 얼굴을 비볐다. 다른 고장에 쳐들어가 마음대로 날뛰는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니 구성군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총독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소를 키우며 이리 저리 떠도는 자들이기에 다시 만날 일은 없었지. 하지만 호되게 당한지라 탕가 인근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실정이네. 우리의 모습만 보면 길길이 날뛰며 달려들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하지만 저희의 생소한 모습을 본다면 다른 사람이 왔다 여기고 환대할 것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기껏 해야 저기 있는 두어 명이 무슬림이 아닌가. 저들만 드러내지 않으면 크나큰 문제는 없을 거라네. 아흐마드! 아흐마드를 불러오게!”

중년을 넘어서 장년이 된 무슬림 남성이 항구에서 급히 돌아와 높다란 터번을 자랑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 기간 항해를 거듭했는지 검버섯과 그을린 흔적이 역력했지만 눈은 어린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항로를 안내할 사람입니까?”

“항해사인 아흐마드 이븐 마지드라네, 일대의 항로를 훤히 꿰고 있으니 눈을 감고도 항해를 할 수 있는 자이지. 자네는 이들을 도와 탕가로 안내하고 나머지 일을 돕게.”

“참으로 요긴한 인재를 내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기에 사람 넷을 더 붙여주겠네. 일대의 언어를 잘 아는 사람이자 항해사이기도 하지.”

총독의 속마음은 분명했다. 항해사만 다섯 명을 붙여줬으니 풍역선에 대한 상세를 알아내서 자신들의 새로운 선박을 만들려는 목표가 보였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엉뚱한 고장을 찾아 문제를 일으키느니 풍역선의 설계가 아닌 실제 모습은 보여줘도 상관이 없으리라. 아흐마드와 인사를 나눈 구성군은 다시 풍역선에 올라 남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훗날 바스코 다 가마가 고용한 항해사이자 이슬람의 수호성인, 이슬람 문명의 항해지침서를 남기게 될 위인인 아흐마드 이븐 마지드가 현존하는 최고의 함선인 풍역선에 탑승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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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드의 안내를 받은 탕가는 항구로 쓰이기에 좋은 고장은 아니었다. 외부에 몇 개의 섬과 모래톱이 있어 파도를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만큼 물길이 복잡했다.

하지만 아흐마드의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기에 복잡한 물길을 자유롭게 안내하고 있었다. 스와힐리 특유의 사투리가 번역되어 선원들에게 전달되었다.

“거기서 좌측으로! 조금 더 좌측! 천천히! 돛을 조금 접으시오!”

“거 참 되게 빡빡하게 구네. 풍역선이 암초에 스친다고 상하나?”

“네놈의 목이 상할지도 모르니까 닥치는 대로 지시에 따라 움직여!”

풍역선 네 척이 만(灣)의 안에 닻을 내려 정선을 마쳤다. 잔잔한 파도를 가르고 최소한의 경비 인원을 제외한 선원들이 모두 상륙하여 손에 익은 듯이 천막을 세우고 터전을 만들었다.

구성군은 인부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한 발자국 물러나 조심스럽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한 젊은이가, 차림새로 보아서는 서자나 얼자쯤 되어 보이는 자가 일꾼이 들고 있던 마체퇴(정글도)를 빼앗아 들고 신들린 듯이 수풀을 베어나갔다.

다른 일꾼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팔을 거침없이 놀리니 일의 진척이 더욱 빨라졌다. 구성군은 기특한 마음에 솟구친 땀을 닦아내고 잠시 쉬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을 건네주었다.

“이번 탐검사에 소속된 이들 가운데 북방에서 일하던 자가 여럿 청원했다는 말은 들었네. 자네는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부친의 존함이 무엇인가?”

“존함은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고 그저 유 대감님입니다.”

“유 대감이라. 그러고 보니 중추부지사 유규(柳規)대감의 자제 가운데 얼자가 하나 있다 하였지. 듣자하니 부친의 등쌀에 밀려 경원부 일대에서 야인의 자제를 가르쳤다 하던가.”

구성군의 칭찬 아닌 칭찬을 들은 유자광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출세의 기회라 여기고 돌아서서 미소를 지었다. 신들린 듯이 마체퇴를 놀려 수풀을 베어내던 유자광(柳子光)은 갈피를 잡았는지 팔을 흔들며 신호를 보냈다.

“구성군 대감님! 드디어 사람이 살던 흔적을 찾았습니다. 물골과 형태를 보아하니 이건 밭 같군요. 아마 기장이나 수수를 기르면서 먹고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일을 잘 아는가?”

“제가 북방에서 칠 년 동안 일했던지라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슬람 노예상인들의 습격을 당해 사라졌을 마을의 터에 조선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사라져서 수풀과 나무가 우거졌지만 선원과 병사 모두가 합심하여 자신들이 머물 거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지만 임시로 살게 될 집을 만든 것이 전부였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지독한 더위가 문제였다. 적도 인근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했으며 인력으로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구성군조차도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입신체비복으로 갈아입고 다른 이들 모두 간편한 입신체비복을 입었지만 더위를 견딜 재간이 없었다. 심지어 임해도감 병사들마저 도끼를 건성건성 움직이니 구성군도 한숨을 내쉬었다.

“덥고 습해서 이렇게 살다가 죽어버릴 것 같군. 무엇보다 대양도에서 징병한 임해도감 병사들까지 기를 못 펴는 실정이니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그나마 일을 하는 자는 신농도와 투이에서 건너온 폴리네시아인이 전부지만 이들은 백 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구성군도 생각이 있었다. 잠자코 풍역선의 구조를 베끼고 있는 아흐마드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한 달 뒤, 가까스로 항구의 구색을 갖출 무렵 풍역선과 함께 다섯 척의 상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다우선(중동 일대의 함선)이 유연한 선체를 자랑하며 암초와 모래톱 사이로 파고들었다.

뭄바이에 거주한다 하였던 나세르는 구성군이 원하는 품목을 모두 구해 돌아와 자랑스럽게 인사를 올렸다. 그가 주선하는 가장 큰 거래이니 일꾼들이 쉬지 않고 물품을 하역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고 조선에서 오신 분들은 손도 크십니다. 잘 빠진 말 삼십 마리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모두 한혈마로 준비해서 가져왔습니다. 한 마리에······.”

“지금 나를 무엇으로 보고 거짓을 논하는가! 이미 첩목아국(티무르 제국)에서 수입한 한혈마를 거느린 사람에게 한혈마 혼혈종도 아니고 좋은 말을 가져와 속이려 들다니!”

구성군은 거리낌 없이 상인의 멱살을 잡았지만 상인을 보호하던 병사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평소에는 도포자락에 가려져서 덩치만 크다 여겼지만 구성군 또한 입신체비에 능한 자였다.

땀에 젖은 입신체비복이 찰싹 달라붙으며 거대한 대흉근과 두터운 이두박근을 드러냈다. 어중간한 사람의 허벅지만한 두꺼운 근육을 보자 나세르는 오줌을 지렸는지 사타구니를 움켜잡으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맞습니다!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한혈마라고 하여도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녀석들이지요. 하지만 명마는 맞습니다! 어중간한 사람은 모두 태우고 다닐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품목도 가져오게. 비루먹은 소를 가져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겠지?”

삼십 마리의 말, 오십 마리의 천축산 소, 나무를 자르고 베어내기 위한 톱과 도끼를 비롯한 각종 도구, 그리고 석감은 없어도 석감을 만들기 위한 기름을 비롯한 물산들이 즐비하게 놓였다. 상인은 값을 치르려고 하였지만 구성군은 도자기를 보여고는 건네주지 않았다.

“금이 담겨있으면 모를까 고작 도자기 하나로 이 값을 모두 치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선의 명물인 홍삼이 담겨있다네. 다음번에도 동일한 품목을 가져오면 고스란히 넘겨줄 것이니 홍삼이 상하기 전에 바삐 움직이게나.”

“당장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진짜 한혈마는 몰라도 한혈마 혼혈종 정도는 가져올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상인이 쏜살같이 사라지고 다시 작업이 진척되었다. 더위를 견딜 수 있는 천축산 소는 다루기 까다로운 품종이었지만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녀석들이었다.

다시 시일이 지나 1471년 3월이 되었고 사람들이 거주할 고장도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항구가 완성되자 아흐마드의 안내를 받은 풍역선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식량을 사들여 풀어놓았고 새로 만들어둔 항구는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인근에서 사들인 안남미로 탁주를 만들고 닭을 잔뜩 사들여 요리하여 간단한 주연이 시작되었으며 구성군 또한 항구의 완성을 축하하며 잔을 높이 들었다.

“이 고장의 이름을 정하겠다. 섬과 모래톱이 배를 삼키는 형상이니 탄주(呑舟 - 배를 삼키다)현이라 할 것이며 주변을 정탐할 시기가 되었다.”

주변을 정탐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바짝 긴장했다. 지금까지 안전한 항구에 머물러 있었지만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일이 어찌 될지 몰랐다. 탐검사의 관원 가운데 한명회와 함께 신농도(뉴기니)에 들렸던 자들은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아직까지 토인들도 보이지 않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여기 올 적에 들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나? 자신들을 마사이라 부르는 토인들이 있으며 소를 끌고 사방을 오간다 하였지. 이들을 먼저 만나 아국의 존재를 알려야 할 일이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관원들 모두가 우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직 미지의 고장인 내륙에는 무슨 위협이 기다릴지 몰랐던 것이다. 구성군은 쐐기를 박기 위해 일어나 당당하게 말했다.

“생각하여 보게. 만에 하나라도 아국의 사람들이 자리를 비울 때에 마사이라는 토인이 오면 어떻게 되겠나? 자신들을 납치하려 하였던 도적떼가 차린 거점이라 여기고 탄주현을 부숴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거부할 수 없는 논리였다. 앞으로 석 달 동안 마사이라는 사람들이 온다는 보장도 없었으니 조금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안으로 진출할 이유로 충분했다. 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성군은 유자광에게 낮게 속삭였다.

“가친(家親 - 아버지의 높임말)께서 눈표범을 잡아오셨을 때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듣자하니 아주에는 대월국(베트남)에서 기르는 것 보다 거대한 상(象)이 있고 전설속의 영수인 기린도 존재한다더군.”

“지금 사냥을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압구 대감이 돌아올 때 까지 석 달이 넘게 남았네. 그동안 하릴없이 탄주현에 머물며 시조라도 읊을 셈인가? 이런 무더위에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지치는 법이지.”

유자광 또한 갑사를 자처할 정도로 무재(武才)가 있는 자이니 손이 간지러운 상황이었다. 조선에서 가져온 각궁의 아교는 풀려 버렸지만 각궁을 대신할 철궁은 여러 개 있었고 비상시에 사용할 보총도 있었다.

구성군을 필두로 한 마사이족을 찾기 위한 원정대, 정확히는 희귀한 짐승들을 사냥하기 위한 원정대가 당당하게 출발했다. 상인에게서 구매한 준마를 타고 일정 간격을 두어 깃대를 꽃아 위치를 표시하였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해안을 벗어나 내륙으로 일백 리(40km)를 들어오자 우거진 숲과 드넓은 초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초원 위로 거대한 기린이 웅장한 모습을 뽐냈다. 조선에서 온 모든 이들은 침을 삼키며 기린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허어 저게 기린이란 말인가? 망루만큼 거대하니 목이 긴 사슴이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구나. 저런 녀석은 어찌 잡아야 좋겠는가.”

“걷어차이면 허리가 부러질 것이 분명합니다. 단번에 보총으로 머리를 노리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구성군도 침을 삼킬 뿐이고 유자광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냥을 해서 마나를 얻겠다고 호기롭게 나선 대양도 청년들도 어찌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고함과 맹수의 울음소리가 섞인 방향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것은 순록과 닮은 녀석(가젤)도 아니고 호랑이와 비슷한 크기의 맹수였던 것이다.

“저쪽에서 무슨 소란인가? 세상에! 저건 산군. 아니 산군은 아니야! 산군에 갈기가 달려 있을 리가 없어!”

한 무리의 사자가, 수사자와 암사자가 섞인 무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겁에 질려 벌판을 가로질러 도망치고 있었다. 혹시나 난폭한 코끼리가 사자를 쫒아냈는지 모르니 잔뜩 긴장하던 조선인들의 눈에 검은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렇게 조선인들과 마사이족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다. 마사이족은 처음 보는 사람들을 보고 잔뜩 긴장하였지만 구성군은 말에서 내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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