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22화 - 갈매기는 서쪽을 향한다(1) >
1470년 음력 8월, 한명회를 필두로 한 탐검사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홍위는 탐검사가 출발하는 벽란도까지 나아가 한명회의 손을 잡으며 탐검사의 성공적인 임무 완수를 기원하였다.
홍위는 한명회에게 어명을 전달하며 다시금 강조했다. 이번 항해는 중간 이후에는 길잡이가 따로 없는 험난한 일이니 오로지 한명회의 능력을 믿을 뿐이었다.
“목표가 두 가지임을 명심하시오.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목적은 이주(離洲 - 아프리카)의 해안을 돌아 포도아(포르투갈)인과 접촉하여 서행사가 다닐 새로운 바닷길을 찾는 것이오.”
“주상전하가 명하신 바를 반드시 완수하겠사옵니다.”
“또한 두 번째 목표인 서행사와 탐검사가 머물 새로울 거점을 찾아내는 일을 염두에 두시오. 이를 위하여 종친인 구성군을 이번 탐검사에 포함하였으니 잘 보필하여 주기를 바라오.”
한명회의 뒤에서 멀뚱하게 서 있던 구성군 이준이 앞으로 나와 홍위에게 다시 인사를 올렸다. 엉겁결에 종친과 함께 항해하게 되었으니 한명회의 부담이 심해졌지만 구성군은 기대감에 부푼 눈빛으로 홍위를 바라보았다.
“신 구성군, 새로 만들어질 고장에서 식읍(食邑)을 거느릴 권리를 주셨으니 주상전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종친은 언제나 보살펴야 하는 법이 아니겠소. 항해에는 어려움이 많지만 부디 이번 일을 시작으로 영토를 개척하는 일에 제대로 된 법도를 적용할 선례를 남기길 바라오.”
문종의 명령으로 북방 개척이 가속되었지만 폐단도 있었다. 양반의 서자나 얼자를 보내면 일백 결까지는 자신의 소유로 삼을 수 있었으며 십 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는 혜택을 주었다.
하지만 북방에 사람이 늘어나자 문제도 같이 생겼다. 반농반수렵의 생활을 하는 여진족 분파, 정확히는 시베리아 원주민을 쫒아내고 토지를 약탈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폐단은 줄을 이었다. 서로 같은 땅을 개간하고 싸우는 일은 흔했으며, 관원이 엉뚱한 땅을 찾아가는 일도 빈번했다. 이런 행정 소모로 골머리를 썩었으니 새로운 법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땅을 개척하더라도 여러 조건을 제한하여 이를 공식적인 땅으로 확보하는 것이 새로운 법의 핵심이었다. 이번 탐검사에 구성군이 포함된 이유는 본인의 청도 있었지만 법의 본보기를 명확히 삼기 위한 방법이었다. 홍위는 구성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할 적에는 사람이 일 년 동안 머물 수 있어야 하며, 인근에 사는 토인들을 힘으로 억누르지 않는 것이 먼저요. 이후 관리를 파견하여 면밀히 조사한 다음에야 영토로 인정할 것이니 이를 잊지 마시오.”
“주상전하의 뜻을 명심하겠사옵니다.”
“항해에는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오. 바라는 일은 종친의 몸이 성하게 돌아오는 일 하나이니 이는 어명이며 반드시 따르시오.”
홍위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본 구성군도 고개를 숙이며 손을 잡았다. 어린 시절에는 어울리지 못했지만 종친을 염려하는 왕의 눈빛을 보니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홍위가 배에서 내리고 밧줄이 풀렸다.
“주상전하! 어명을 완수하고 돌아오겠사옵니다!”
벽란도에서 출항한 배는 천천히 남쪽으로 향했다. 약한 뱃멀미에 시달리던 구성군은 서책을 읽고 있던 한명회에게 쭈뼛거리며 물어보았다.
“항해 중에 어려운 일이 무엇이오? 압구 대감은 지금껏 많은 항해를 하였는데 잔뜩 긴장한 것 같소. 혹여나 종친인 내가 문제요?”
“애초에 어려운 일이 항해입니다. 더군다나 이번 항해는 길잡이로 삼을 이들이 중간부터 사라지지 않습니까. 열산도에 거주하는 신농도 주민(폴리네시아인)들도 온전한 항로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군요.”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한명회의 표정은 항해의 고난을 떠올리며 날이 갈수록 일그러졌다. 아무리 새로운 물동이에 숯을 채우고 끓인 물을 넣고 밀봉해도 보름이 지나면 물에서 쉰내가 올라와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식량은 찐쌀을 물에 불려 먹지만 쉰내가 올라오는 찐쌀이 될 뿐이었다. 그나마 수양대군이 창안한 보존식은 먹을 만 했지만 한 가지 식량을 보름 정도 먹으면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항해에서 한 달 동안 대양을 가로지르는 경로가 있으니 항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고통에 몸부림을 치리라. 물론 자신도 극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성군은 한명회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자 자신의 고난을 예측하였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길이 어긋나도 천리경을 통해 먼 거리에 있는 땅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새로운 항로에 나서는 것은 제 일이며. 구성군 대감께서는 새로운 항구를 만들면 충분한 일입니다.”
“실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싶었소. 가친(家親)께서는 희마납아(히말라야)를 오가시고 일객칙(시가체)을 다녀오신 일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소.”
“세상을 널리 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부디 큰 뜻을 품으셨으니 좋은 성과를 거두길 바랄 뿐입니다.”
배가 잠시 요동치자 한명회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선실에 있던 천리경의 밧줄을 단단히 맸다. 이현전에도 올해 하나를 더 만들어 네 개 밖에 없는 거대한 천리경을 보자 구성군의 관심이 쏠렸다.
“본래 천리경 가운데 거대한 물건은 천문을 보는 일에 쓰이지 않소?”
“저도 급하게 배운지라 정확한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세성(歲星 - 목성의 옛 이름)의 아들과도 같은 네 개의 별이 정렬된 모습을 파악하면 시차(視差)를 알 수 있고, 시차를 알면 거리를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학역재(學易齋 - 정인지) 대감과 가심(카심) 대감은 어디서 그런 것을 알았는지 궁금할 따름이오.”
“이런 일을 잘 아는 자는 이현전 응교(應敎) 하산(河傘 - 핫산의 음차)이 알고 있지만. 그 친구는 저 뒤쪽 배에서 신나게 먹은 물건을 게워내고 있을 것입니다.”
한명회가 지난 일 년이 넘는 시일 동안 축적한 지식은 천문과 관측에 대한 것이었다. 정인지와 가심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만 모든 일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니 구성군도 묻지 않았고 여덟 척의 대방선은 열산도로 향했다.
거의 2년 만에 돌아온 열산도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였다. 임시로 만들어뒀던 항구는 열 척이 넘는 풍역선이 정박할 만큼 거대하게 변하였으며. 민가들은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기둥 위에 세워졌다.
난생 처음 후덥지근한 열대 기후를 만난 구성군의 눈이 사방으로 움직였지만 한명회는 짜증을 억누르며 족장 박노포를 찾아 마을로 향했다. 신농도 주민(폴리네시아인)들은 중간까지 바닷길을 안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들이었다.
그물을 정리하고 있던 박노포는 갓끈을 고쳐 메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문신이 있고 갈색의 피부였지만 그는 온전히 조선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압구 어르신 오셨습니까? 이 년 동안 저희는 주상전하의 은혜덕분에 평안히 지냈습니다.”
“나는 잘 지냈다네. 그런데 어찌 사람들이 좀 늘어난 것 같기도 한데······.”
“실은 이주한 이들이 있습니다. 통가에서 백오십 명 정도의 젊은 남녀들이 조선을 동경하여 열산도를 찾아왔습니다.”
“지금 뭐라 하였나? 통가라 하면 아국에서 투이(족장 명칭의 음차)도라 부르는 섬이 아닌가? 잠깐! 저 배는 또 무엇이고!”
마을 구석에 지난 항해에서 보았던 거대한 카누, 폴리네시아인이 세운 가장 거대한 국가인 통가 제국에서 즐겨 사용하는 녀석이 보였다. 이윽고 통가 출신의 이주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한명회의 도착을 반겼다.
“저희가 조선이라는 나라에 공물을 가져왔습니다! 부디 저희의 귀부를 받아주시어 더욱 먼 세상을 보고 더욱 많은 마나를 축적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무턱대고 온다니 말이나······. 그런데 이게 뭔가?”
“배를 타고 오는 와중에 해안에 있는 거대한 뱀을 발견하고 여러 마리를 잡아서 가져왔습니다. 고기는 먹었지만 뼈와 가죽은 남겼으니 진귀한 물건이 아니겠습니까!”
열 자(약 3.5m)에 달하는 거대한 뱀이 세 마리나 있었다, 뱀이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도마뱀에 가까운 녀석이고 주변에 서식하는 대홀(바다악어)의 가죽이 아닌 회색의 두터운 가죽이 돋보였다. 훗날 코모도 도마뱀이라고 불리는 녀석이었다.
자랑스럽게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젊은이들에게 질린 표정을 지은 한명회이지만 진귀한 물건이었다. 어차피 열산도의 땅은 넉넉한 편이니 사람이 늘어나도 여유가 있었다.
반면 구성군은 거대한 코모도 도마뱀의 가죽을 쓰다듬으면서 단단한 질감을 느끼고 놀랐다. 시험 삼아 단도로 찔렀는데 날이 박히지도 않고 가죽에 상처만 낸 것이다. 구성군은 코모도 도마뱀의 쓰임새를 생각하다가 기묘한 발상을 떠올렸다.
“새끼를 산 채로 잡아오면 두고두고 기를 수 있겠군. 대룡기우(代龍祈雨 - 나라에서 행하는 기우제, 뱀이나 도마뱀을 사용해서 시행한다)를 지낼 때에 효험이 있겠어.”
“새로 발견한 녀석이니 구성군 대감께 작명을 일임하겠습니다. 이를 용(龍)으로 봐야 할지 석(蜥 - 도마뱀)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군요.”
“태궁석척(太穹蜥蜴 - 하늘같이 커다란 도마뱀) 이라 하면 좋겠네. 조만간 살아있는 녀석을 잡아 명국에 진상한다면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네.”
항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주요 거점인 말라카에 들려 보급을 하고. 다시 실론에 들려 보급을 한 조선의 함대는 급격히 남쪽으로 내려갔다. 천문 관측을 위해 동승한 오스만 제국 이주민, 하산이 만난 이슬람 상인이 디베히(몰디브)라는 섬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물자를 보급하는 동안 몰디브의 풍경을 즐길 수 있었던 탐검사 일행이지만 한명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한낮에도 한밤에도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며칠 동안 일한 한명회는 다시 배에 올라 항해를 시작했다.
다시 남서쪽으로 항해하기를 스무 날, 폴리네시아인이 발견하지 못했던 섬 하나가 천리경에 잡혔다. 보고를 들은 한명회는 자신의 선실에 있던 거대한 천리경을 들여다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 멀리 섬이 보이는구나! 탐라도와 비슷한 작은 섬이나 사람이 살 지도 모른다!”
“혹여나 사람이 살지 않으면 아국의 영토로 삼아도 충분한 일이 아니겠소. 물에서 썩는 맛이 올라와 몸이 상할 지경이니 어서 상륙합시다.”
높은 산과 푸른 해안 위에 처음으로 사람의 발길이 닿았다. 작은 배로 옮겨 상륙한 조선인들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창날을 번뜩이고 보총을 들이댔지만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상륙을 환영하듯 열대지방 특유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석감 가져와! 석감으로 몸을 씻자!”
“배 위에서 더위와 습기에 시달리다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줄 알았네! 역시 비가 내려야 사람이 산다니까!”
선원들은 신나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온 몸에 비누칠을 하며 몸을 씻었다. 높은 신분에 있는 자들은 나무그늘에서 비를 피했지만 그들도 끈적거리는 몸을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폭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선원들이 몸에서 비눗기를 닦아낼 때 쯤 폭우가 그치고 순식간에 하늘이 청명해지며 한 줄기의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한명회도 구성군도 넋을 잃고 산호초 위에 펼쳐진 무지개에 눈이 사로잡혔다.
- 꾸악!
“어이쿠! 이 축생은 대체 뭐란 말인가! 천축에서 온 닭보다 거대한 녀석인데.”
눈이 사로잡힌 것도 잠시. 한명회의 옆에 이상한 새가 다가와 두리번거렸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껑충 뛰었지만 새는 놀라지도 않고 사람들을 처다보고 있었다. 야생의 새가 사람 주변에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자 다들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항해 중에 간혹 얼가니새로 불리는 녀석은 본 적 있었다. 푸른 발바닥과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들이밀며 갑판 위에 멍하니 있던 녀석들이다. 하지만 이 새들은 발길질을 해도 도망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과 처음 접촉한 도도에게 비극 아닌 비극이 시작되었다. 다들 넋이 나가있는데 한 명이 재빨리 도도의 목을 잡아채고 꺾어서 죽인 것이다. 박노포는 단검을 들고 멱을 따내며 말했다.
“항해가 계속된 덕분에 신선한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습니까. 섬에 있는 싱싱한 과일과 고기로 배를 채웁시다.”
“자네는 정말······. 일단 알겠네. 사람이 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 다들 짐을 풀고 쉬도록 하라!”
바닷가에 숙영지를 만든 조선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찐 쌀을 끓여 밥을 만들고 섬을 오가며 풍성한 열대 과일들을 따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천혜의 자연은 많은 식량을 공급해 주었다.
주변에서 야자수를 파먹던 야자집게가 솥으로 들어가고. 전복을 비롯한 조개들은 한 광주리가 넘게 잡혀왔다. 심지어 한 열산도 주민은 자맥질을 하여 머리통보다 거대한 대왕조개를 가져왔다.
구성군도 한 몫을 거들었다. 별다른 일은 하지 않고 숲 속을 거닐며 돌아오니 스무 마리의 도도가 구성군을 졸졸 따라왔고 포획되어 통구이가 되었다.
맹수의 흔적도, 사람의 흔적도 없었으니 경계할 일도 없었다. 배 안에 있던 소주가 꺼내져 잔 위에 부어졌다. 사람이 살지 않던 모리셔스 제도에서 처음으로 주연이 시작되었다.
“다들 들도록 하세, 지극히 안락하고 살기 좋은 섬이니 이 섬을 극락(極樂)도라 부르는 것은 어떠한가? 바다 위와 달리 습하지도 않고 사시사철 평온한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참으로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렇다면 구성군 대감께서 잡은 새를 먼저 먹도록 하지요.”
솜씨 좋은 이들이 임시로 만든 화덕(오븐)으로 구워내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도도가 부위별로 분할되어 바나나 잎으로 만든 접시에 올려졌다. 술을 한 잔 걸치고 새의 고기를 입에 넣는 순간. 선원들은 물론이고 한명회와 구성군마저 역겨운 맛에 얼굴을 찌푸렸다.
고소한 냄새는 사라지고 텁텁하고 비릿한 냄새와 푸석푸석한 살결이 입 안을 메웠다. 구성군은 자신이 챙겨온 후추를 조금 뿌렸지만 후추와 섞여 더욱 역겨운 맛으로 변할 뿐이었다. 결국 선원 모두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구성군 대감께는 죄송하지만 이 새를 먹다가 병에 걸릴 것 같습니다.”
“새에 독이 있었나? 이렇게 맛이 없는 새는 본 적이 없네! 걸레를 빤 물에 고기를 담가 두어도 이렇게 맛이 없지는 않을 거라네.”
“이 새가 사람을 따르는 이유가 맛이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너무 맛이 없어서 사람이 거들떠보지 않으니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도도를 처음으로 잡은 박노포와 잔뜩 끌고 온 구성군 모두 쓴웃음을 지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음식으로 주연이 계속되고 도도들이 주연 사이로 파고들어 조선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성군은 자신의 앞에서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도도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맹한 얼굴을 보니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어 보이는 순진한 녀석들이었다.
“사람이 사는 것이 극락과 같은 곳이니 너희들도 극락과 같이 지내는구나. 내 너희의 이름을 안양(安養 - 안양정토, 극락의 다른 말)조라 지을 것이니 지금과 같이 살면 좋을 것이다.”
“좋은 이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극락도의 기후가 대양도(대만)와 흡사하니 돌아가는 길에 이 녀석들을 백 마리 정도 잡아다 대양도에 풀어 놓으면 어떻겠습니까.”
“그것 참 마음에 드는 일이구려. 주상전하께서 안양조를 드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소.”
휴식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사람이 없는 섬이지만 환경이 좋으니 영토로 삼아도 충분하다 여겼고. 임시 관아가 설치되며 천문 관측이 시작되었다. 한명회는 부채 같은 철판에 작은 천리경을 달아 놓은 기물을 이리 저리 움직이며 태양을 향해 움직였다.
이윽고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물시계에 물이 가득 채워졌다. 한명회와 하산 모두 대낮에 태양을 보며 이상한 부채를 주물럭거리니 모두가 궁금한 노릇이었으나 한명회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계산을 이어갔다.
“어디 보자, 오늘이 음력으로 10월 7일이니 태양의 각은 얼마지?”
“이미 계산하였습니다. 한양과 극락도의 위도(緯度) 차이는 남으로 57도이니 제법 멀리 떨어졌군요. 그리고 한 각(15분)전이 정오였습니다.”
“물시계의 오차가 한 각이었지? 그리 되면 경도(經度)를 계산하기 복잡하겠어. 다음번에 조금 더 정확한 경도를 측정해야겠군.”
물시계로 쓰이는 개조된 물동이의 마개가 뽑히고 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12시진과 각 시진마다 8개의 각(刻)이 적혀 있는 물시계와 천리경을 보던 구성군은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싶어 했던 하산이 이에 응했다.
“지금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군. 대체 땅의 위치를 하늘을 보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이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은 둥근 원이니 태양을 기준으로 하여 시차(時差)가 존재합니다. 한양에서 한낮이면 오사만국(오스만 제국)에서는 한밤중이지요.”
“세상이 둥글다는 사실은 알고 있소. 그렇다면 태양의 움직임을 파악하면······. 될 일이 아니구려.”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 년 전에 정인지 대감과 카심 대감이 새로운 천리경으로 세성(歲星 - 목성의 옛 이름)을 관측하다 네 개의 달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한참동안 설명이 이어졌지만 구성군의 귀에도, 정확히는 천리경을 옮겨와서 조심스럽게 설치하는 한명회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이야기였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구성군은 대화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그러니 세성에 있는 네 개의 달의 배열과 위치는 하루도 아니고 한 각마다 변한다는 말이오? 그래서 시간과 세성의 달의 배열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알려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열산도에 있던 가심 대감이 한 달 동안 관측을 거듭한 결과와 한양에서 관측을 거듭한 결과가 달랐고. 이를 역산하면 땅이 동서로 떨어진 경도를 알게 됩니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지만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다. 한명회와 하산 모두가 가지고 있는 시표(時表)라는 서책을 기준으로 하면 떨어진 거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초저녁에 목성을 관측한 한명회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양의 경도를 0으로 두었을 때. 자신들이 위치한 극락도는 70도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지도에 점을 찍은 한명회는 한탄을 늘어놓았다.
“여기서 도성까지 바다와 산을 가로질러 간다 하여도 이만오천 리에 달하는군. 하지만 항해는 절반도 이뤄지지 않았으니 어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일은 일이었다. 극락도를 조선의 강역으로 삼으려 하였으니 미리 준비한 표문에 정을 들고 글귀를 새겨넣었다.
[구성군과 탐검사 제조 한명회, 머나먼 서쪽의 극락도에 들러 표문을 남기고 감. 한양을 기준으로 남으로 57도, 서로 70도에 위치하였으니 이를 후세에 남길 것이다.]
혹시나 모를 일이니 선물로 바칠 도도, 이제는 안양조로 불릴 녀석을 열 마리 정도 잡은 한명회는 착잡한 심정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조만간 구성군과 패를 갈라 전혀 알 수 없는 항로를 더듬어야 할 날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