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207화 (207/573)

< 3장 21화 - 다시 개척으로 >

자금성의 앞마당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거제도에 있던 포로들 가운데 병사에 속하는 이들은 조공과 전쟁의 증거로 삼아 북경으로 이송된 것이었다.

북경까지 끌려온 왜인 포로의 숫자는 구천에 달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성곽에 주눅이 들어있는 것도 잠시. 높다란 단 위에 환관이 나타나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황제폐하 납시오!”

“왜인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리지 못할까! 네놈들이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더냐! 네놈들의 생사여탈은 모두 황상의 뜻에 달려 있도다!”

성벽과 주변에 빼곡히 도열한 금군(禁軍)과 험상궂은 얼굴로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포로들의 몸을 후려치는 금의위가 지나가자 포로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윽고 풍악이 울리면서 가마에 탄 영덕제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영덕제는 엎드린 포로들을 보며 첫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고개를 들어도 좋다.”

갖은 고초를 겪으며 자신들이 아는 사실을 털어놓은 포로들이었다. 정말 명나라 황제가 자신들을 토벌하라 명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현실을 알게 되었으니 절망감이 감돌았다. 영덕제는 그런 사실을 알고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왜구나 다름없는 자이니 죽어 마땅하지만 기회를 줄 것이다. 본래 주인을 충실히 따르는 자들은 다른 주인을 섬길 수 있는 법이 아니겠느냐. 너희들 가운데 왜인들이 구주(큐슈)라 칭하는 고장에서 살던 이들은 일어나도 좋다.”

포로 가운데 삼천 명 가량이 벌떡 일어나자 영덕제는 손가락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이들은 따로 쓸 곳이 있으며 명나라의 병사로 다시 태어날 자들이었다.

“너희들은 강남으로 내려가 일대에서 병사의 책무를 다 하여라. 십 년이 지나 너희들의 죗값을 씻어낼 때가 되었으면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토벌 대상이니 철저히 벌해야 하지만 이미 명나라의 영토가 된 곳이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환호성을 지른 큐슈 출신 포로들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아직도 고개를 숙인 포로들을 돌아본 영덕제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왜국에서 본주(혼슈)라 불리는 고장에서 온 자들이구나. 너희들은 칙명을 어긴 세천(호소카와)의 병졸들이니 더욱 혹독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금의위는 포로들을 둘로 나누도록 하라.”

포로 사이에 금줄이 쳐지고 무성의한 분류가 시작되었다. 졸지에 동료와 헤어진 자, 자신의 형제가 반대편에 선 모습을 본 자가 가득하였지만 금의위의 병사들이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윽고 영덕제의 다음 명령이 하달되었다.

“짐의 오른편에 있는 자는 죗값을 씻어내기 위하여 대동(大同)으로 나아가 달자들을 상대하며. 왼편에 있는 자들은 요동 총병관 휘하의 병사가 되어 달자들을 물리치며 죗값을 씻도록 하여라.”

이들은 백병전에 능숙하니 요긴하게 쓰일 인재이며 도주하려 하여도 혹독한 북방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 것이라 여겼다. 포로의 분류를 끝낸 영덕제는 흡족한 표정으로 대전 안으로 돌아가 옥좌에 올랐다.

“포로들의 배분은 끝났으니 이제 새로 얻은 고장의 이야기를 논하자꾸나.”

“황상께서는 왜국의 새로운 관령과 맺은 협정이니 황상께서 확인하시어 진위를 판가름 하시옵소서. 또한 조선에 배분할 고장을 정하는 일은 오롯이 황상께서 정하실 일이옵니다.”

“이미 정해진 일이니 관여할 것이 없도다. 다만 조선이 통치하기 쉽도록 북쪽에 위치한 세 고장을 정해줌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경인약조의 초안은 영덕제 자신이 허가한 일이었다. 이전에 없던 항목인 좌도도(사도가시마)라 불리는 섬을 조선이 할양 받은 것은 의외였지만 조선도 먼 곳에 있는 좌도도를 관리하면서 골머리를 썩을 것을 예상하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관료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새로운 영토를 획득한 일은 좋으나 제대로 된 해군도 없는 상황에서 다스리는 일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영덕제는 그런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흥분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새로 영토로 삼은 고장이 여섯 곳이니 이를 육주성(六州省)이라 칭하겠다. 당분간 왜인들을 토관(土官)으로 고용하여 기본적인 통치를 행하고. 십 년이 지나면 귀향할 왜인들과 백성들을 함께 보낼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영덕제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적은 야인들을 명나라에 귀화시킬 때에 적당한 토관직을 부여하고 나중에 관원을 보내서 적당히 세금을 거두면 끝나는 일이었다.

기껏 해야 만 명 단위도 살지 않는 야인들을 다스리는 방법이지만 백 만이 넘는 인구가 사는 큐슈에 같은 방법을 적용하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눈앞의 업무가 줄어들은 관료들은 입을 모아 영덕제를 칭송하기에 바빴다.

논의가 끝나고 영덕제는 천천히 백규가 작성한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조선이 혼슈에서 벌인 전투에 대한 보고서는 간략하였지만 백규는 세 권이 넘는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던 것이다. 영덕제는 큐슈 일대의 전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홍윤성이라는 자는 참으로 담대한 자이군. 크나큰 실책을 저질렀지만 이를 무마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돌진하여 왜적들을 몰아 붙였단 말인가. 애초에 군영을 제대로 만들었으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좋으련만.”

본래 계획대로면 홍윤성이 마구 날뛸 필요는 없었다. 왜인들을 견제하고 한 무리로 뭉치지 못하게 하면 자신의 역할을 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홍윤성은 실책을 범했다.

군영의 경계를 섣불리 하여 백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였으니 이를 무마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려가며 공훈을 세우려 발악한 것이다. 홍윤성이 최전선에 선 이유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징벌이나 마찬가지의 행위였다.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어. 종2품이라 하면 병부시랑에 준하는 관직인데 최전선에 나서서 용맹을 떨쳤다는 말인가. 유시(流矢)가 날아들어 몸이 상했다면 전군이 위험했을 일인데.”

그런 실책을 범한 자임에도 인재를 보는 눈이 인색하기로 유명한 백규가 입이 부르틀 정도로 칭찬한 것은 덤이오. 그가 사용하던 청색 두정갑(처음에는 검붉은 색이라 여겼는데 모두 피였다)을 얻어왔을 지경이었다. 고민하던 영덕제는 백규를 불러왔다.

“신 병부상서 백규 대령하였사옵니다. 혹여나 보고에 관하여 부족한 점이 있사옵니까.”

“본영에 간자가 침투하여 목숨을 노렸다 한 항목이 있더구나. 홍윤성이라는 자는 군문에 대한 기본조차 모르는 자가 아니더냐. 이런 자를 좋아할 이유가 있더냐.”

혹여나 홍윤성이 뇌물을 주거나 힘으로 윽박질렀을 가능성을 확인한 영덕제는 백규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백규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황상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조선의 훈련원 지사 홍윤성의 잘못은 없고 오로지 소신의 잘못이 있었을 뿐이옵니다.”

“모두 병부상서의 잘못이라 하였는가. 군영을 만든 자는 홍윤성이요, 초병(哨兵)을 배정한 이도 홍윤성이 아닌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제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일은 모두 제가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보고에 없던 이야기, 홍윤성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백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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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성이 지휘권을 넘겨받은 이후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은 본영을 하카타에서 다자이후로 옮기는 것이었다. 큐슈 남쪽의 영주들을 견제할 목적이었으나 토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할 일은 본군이 돌아오기 전 까지 구주 남쪽의 영주들을 견제하는 일 하나이지.”

하지만 군영의 경계는 삼엄하였다. 임해도감과 같이 산을 드나들며 적진을 염탐하고 상황이 좋다면 요인을 암살하며 보급품을 파손하는 전문 부대. 닌자의 존재가 확인된 덕분이었다.

몇몇 상인들이 들려 보급품을 판매하려 하였으나 훈련도감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상인이라 하였지만 몇몇은 철저히 단련해야 생기는 굳은살이 아로새겨진 것이었다. 즉각 체포하고 수색하니 상인의 것이라 여길 수 없는 물건들이 가득하였다.

덕분에 다자이후에 설치된 조선군의 군영은 철저한 경계가 계속되었다. 설령 같은 병사들이라 하여도 눈을 마주친 순간 암구호를 제시하지 않으면 창대가 날아들 지경이었다.

“암구호! 창살!”

“발연!”

조선의 말을 알아도 ‘ㄹ’ 받침을 하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발음하기 까다로운 암구호가 이어졌다. 길을 잃어 군영으로 들어온 자를 발견한 병사가 대놓고 호각을 불었고. 늙은 승려는 뒤로 주저앉으면서 양 손을 하늘 위로 올렸다.

“네놈은 또 누구냐! 여기는 조선의 군영인데 네가 정녕 죽고 싶은가 보구나!”

- 저는 순례승입니다. 다자이후에 위치한! 아이고 살려주십시오!

“무슨 말인지 모르니 입을 다물고 손을 내놓아라! 네놈을 추포하여 엄히 심문할 것이다!”

병사들 모두 익숙한 일이어서 잠을 설치지 않았다. 이미 임해도감과의 모의전으로 군영을 지키는 방법을 숙달하였으니 피곤하고 지친다 하여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한 군영에서는 끊임없이 잠을 설치는 자가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야간 경계를 취하는 훈련원 삼군의 호각소리와 발걸음 소리에 잠을 설친 백규는 핏발선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래서야 잠을 자란 말인가 자지 말란 말인가. 그놈의 목소리와 새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면  사람이 죽어나가기라도 한다는 소리인가? 거기 밖에 누구 없느냐?”

“여기 있습니다.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있습니까?”

“밖에 나가서 순찰중인 병졸들을 좀 불러오도록 해라.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으니 말라 죽게 생겼군.”

병졸 여럿이 들어오자 백규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늙은 나이에 머나먼 이국까지 왔는데도 이런 고생을 시킬 필요가 있는가, 병사를 지휘하는데 잠을 설치면 실책을 범할 수도 있다. 그러한 잔소리를 끝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니 내 군막 주변 오십 보 밖으로 물러나게. 황상께서 내려주신 호위병도 있으며, 자네들이 간자가 여기로 오기 전에 잡아들이면 충분한 일이 아닌가!”

병사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현재 이 군영에서 가장 직위가 높은 자는 백규였으며. 백규의 명령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어두운 산기슭에서 본진을 정탐하던 닌자들은 확실한 목표를 포착했다.

병사 여럿이 드나들고 주변이 조용해졌다면 멍청한 지휘관이 순찰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닌자들은 천천히 그림자 사이를 오가며 명나라 출신 호위병들을 단번에 제거할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주변이 고요해지니 모든 소리가 들렸다. 누워서 잠을 청하던 백규는 어디선가 들어봤던 가죽부대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온 몸의 털이 솟구치고 식은땀이 솟아올랐다.

‘분명 단번에 목을 찔린 것이야. 북경 수비에 나설 때 목에 화살을 맞아 죽은 병사가 내뱉은 소리와 똑같아.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정녕 적의 간자들이 침입하였단 말인가.’

백규는 조심스럽게 침상 아래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이윽고 가죽부대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다른 병사의 죽음을 알렸다. 군영 밖에 있던 네 병사가 모조리 살해당한 것이다.

천천히 군막의 천을 들어내서 천천히 칼을 들고 주변을 살피는 상대의 모습을 본 백규는 숨을 죽이고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저 잠을 자겠다고 군율을 어기다 영원히 잠들게 생겼다. 그 순간 홍윤성이 병사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군막으로 찾아왔다.

“병부상서 어르신, 훈련원 지사 홍윤성입니다. 주무시고 계십니까? 이게 무슨 일이야! 거기 너희! 지금 순시를 돌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던가!”

어두운 군막 속에서 날카로운 단도가 번뜩였고 홍윤성은 전력을 다해 옆차기를 날렸다. 발차기에 맞은 상대가 군막 안을 굴러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무렵. 홍윤성은 밖에 있던 화로를 받치는 목봉을 빼들며 고함을 쳤다.

“적의 간자가 침입하였다! 병부상서 어르신의 목숨이 위험하다! 순찰을 도는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였느냐!”

번개같이 날뛰는 홍윤성은 순식간에 군막으로 침입한 닌자들을 소탕하였고. 이후 임해도감은 미친 듯이 날뛰며 수상해 보이는 이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붙잡았다. 지휘관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적극적인 전쟁 의사 표현이었으니 이를 벌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통솔해야 할 백규는 너무나 놀란 덕분에 며칠 동안 경증(驚症 - 놀라서 일어나는 병)에 시달리며 병상에 누워 있었고. 홍윤성은 오로지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고 실책을 무마하기 위한 공훈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적당히 일하려 했던 홍윤성은 사라지고 분노에 휩싸인 큐슈의 야차 홍윤성이 태어났다. 멋들어진 푸른 두정갑을 뽐내던 장수는 어느 새 최전선에서 날뛰는 괴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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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백규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영덕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광소를 터트리며 백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랬군. 그랬으니 병부상서의 안색이 그리 좋지 못했던 것이군. 잠을 청하려다가 영원히 잠들 경험을 하였으니 앞으로 밤잠을 설칠 일이 없겠구나.”

“소신의 허물을 대신 짊어진 홍윤성은 참된 장수입니다. 이런 장수에게 크나큰 포상을 하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렇다면 무슨 포상을 내려야 좋겠는가. 은자는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며 명마는 조선에도 많으니 관직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겠군.”

영덕제는 기쁜 얼굴로 환관을 불러 종이를 받은 다음 친히 조선으로 보낼 칙서를 한 장 더 작성하였다. 명나라의 관직은 조선의 관직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덕제의 마음은 기쁠 뿐이었다.

예전 영락제의 첩으로 자신의 누이를 바친 한확은 고작 정5품 광록소경(光祿少卿)의 관직을 받았지만 정3품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렇게 영락제의 손은 홍윤성의 관직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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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고 협정도 완료되었다. 경사가 겹친 한양은 축제가 시작되었으며 더군다나 병사들이 복귀한 날은 음력 5월 5일. 수릿날(단오)이었다.

아직 복귀하지 못하고 동래 일대에서 짐을 풀고 있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대방선과 풍역선을 타고 먼저 복귀한 병사들이 사열식을 마치고 홍위는 큰마음을 먹고 병사 모두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그러하면 논공행상을 시작하겠소. 영의정 한확이 노령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니 이를 윤허할 것이며. 좌찬성 구치관은 공을 인정하여 영의정에 제수하며 본관을 따서 능성군(綾城君)에 봉작할 것이오.”

이후로도 논공행상은 계속되었다. 권절은 병조판서에서 겸직이 아닌 단일직 의금부 판사(判事)로, 신숙주는 예조판서에서 홍문관 영사(領事)로 진급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논공행상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던 홍윤성이 불려 나왔고. 홍위는 난데없이 명나라에서 보내온 칙서를 꺼내들었다. 홍윤성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홍위의 눈은 크게 떠지다 못해 칙서를 여러 번 확인하였다.

긴급히 전해진 칙서인지라 칙서를 받는 예식만 하였는데 무슨 내용이란 말인가. 홍위는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거리면서 칙서의 내용을 읽었다.

“훈련원 지사 홍윤성을······. 명··· 명국의 새로운 영토인 육주성의 도지휘동지(都指揮同知)로 임명한다. 홍윤성은 명국 황상의 명을······. 받들라.”

홍윤성은 실책을 범했기에 그를 무마할 수 있는 전공을 쌓았다. 덕분에 논공행상에서 언급되지 않았는데 난데없는 명나라 도지휘동지의 직책이 수여된 것이다.

다른 이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형님조차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명나라 기준으로 종2품 관직인데 조선으로 따지면 4등이나 올라가서 정1품을 넘어선 무품이다. 무품의 관직? 나와 같은 대군이나 내명부의 왕비, 세자빈이 전부이다.

홍윤성 또한 말을 더듬으면서 헛웃음과 울먹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을 다잡은 홍윤성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홍위에게 의문을 표시했다.

“신 홍윤성 아뢰옵니다. 혹여나 신이 왜국의 구주로 나아가 왜인들을 다스려야 하옵니까?”

“그러한 일은 없다 하였소. 다만 도지휘동지의 직책을 수여하였으니 이에 대한 녹봉을 명국 황상이 직접 지급할 것이오. 또한 다음 동지사에 정사(正使)로 필히 참가하라는 명이오.”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 도독의 직위를 받은 일과 비슷하다. 명나라 사서에는 기재되지 않아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홍윤성의 전공을 들은 영덕제가 만족하고 작위를 내린 것은 확실하였다. 홍위는 홍윤성을 보면서 고민하다가 직급을 정하였다.

“훈련원 지사 홍윤성의 관직을 군기시 도제조(都提調 - 정1품)로 임명하겠소. 당분간 훈련원 지사와 겸직하여 직무를 수행하시오.”

“성은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현재 군기시의 책임자는 종1품의 제조(提調)이다. 병기 개발에 대한 지식이 없는 홍윤성이니 실질적 직무는 훈련원 지사로 남아있겠지만 품계를 올리기 위한 수를 쓴 것이다.

내 공은 논할 필요도 없지만 우에스기와 주고받은 밀서의 내용은 홍위도 알아야 하는 일이다. 술자리를 핑계로 홍위와 형님 그리고 안평대군 넷이 모여 간단한 주연을 시작하였다.

“숙부님께서는 결국 좌도도를 아국의 영토로 삼으셨사옵니까. 그리고 상삼씨(上杉 - 우에스기)와 밀서를 주고받았는데 정녕 조선관(朝鮮館 - 조선 객사) 하나로 만족한다 하였습니까?”

“일천 명의 병사가 주둔하고 삼백 명의 상인이 기거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라 하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왜국의 북부에 조선의 강역이 하나 생긴 것과 마찬가지이옵니다.”

“과연 상삼씨가 가진 월후(에치고)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혹여나 수익이 형편없다면 명목상의 관아만 두어도 좋은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우에스기의 새 당주,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定昌)에게 제시한 조건은 홍위에게 말한 대로였다. 천 명의 조선군이면 어중간한 왜군 삼천 명과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니 거리낌 없이 밀약에 응한 것이다.

여기에 다른 노림수도 있었다. 사도가시마의 금광 개발은 당연한 일이며, 에치고의 농업 생산도 월등한 편이니 상업이 발달하기 좋았다. 심지어 인근에 있는 가이(甲斐)에도 금광이 있으니 북일본 일대의 수익을 마음껏 빨아먹을 수 있는 장소였다.

홍위는 이런 복합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내가 쓸데없는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일본 정계에 대한 진입로를 하나 더 마련해 둔다면 훗날을 대비할 수 있겠지.

“숙부님의 혜안을 믿겠습니다. 하오나 시일이 조금 걸릴 것 같으니 이에 대한 국서를 보내야 하니 안타까운 일이군요.”

“풍역선은 서행사가 사용하는 선박을 제외해도 스무 척이 넘지 않사옵니까.”

“탐검사의 다음 항해가 정해졌습니다. 아주(아프리카)를 넘어서 서역과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것이지요. 풍역선의 수요가 갈수록 부족하니 조만간 새 풍역선을 건조해야 할 것입니다.”

드디어 한명회가 다음 항해에 나설 때가 되었다. 최근 들어 규칙적으로 아침에 일어나 입신체비를 하고. 점심에 이현전에 들려 천문과 기후에 대한 공부를 한다는데 이번 항해에서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둘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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