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20화 - 이제 큐슈는 조선겁니다 >
1470년 4월 23일, 히로시마 일대에서 벌어진 일대 격전에서 조선이 승전하고 보름 가까이 지났지만 나는 바쁘다 못해 일에 치어 살다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담당하는 업무는 보급 및 포로 수용인데 일이 벅차다 못해 밤을 지새울 지경이었다.
“미곡이 부족합니다. 지금 한창 보릿고개인데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관한지 오래 되어 돼지 사료로 써야하는 건면포라도 짚이는 대로 운송하라 말하게! 각지의 군영에 건면포를 쌓아두지 않았는가.”
“하지만 김치(백김치)도 장아찌도 젓갈도 모두 부족합니다. 포로들이 먹고 살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장이던 어포든 소금이든 짠 맛이 나는 것이라면 모조리 사들이게. 이러다가 우리가 먼저 탈진해 죽을 지경인데 왜인이 뭔 상관인가!”
삼 년 넘게 묵은 건빵에 진하게 우려낸 참치 내장으로 만든 어장(魚醬)의 조합이라. 생각만 해도 역겨운 맛이 올라오지만 조선인도 아니고 왜인인데 상관없겠지. 여하튼 전쟁을 이겨도 너무 완벽하게 이긴 것이 문제였다.
전쟁 직후 전과에서 적의 사망자 일만 사천, 부상자를 포함한 포로 팔천이라 하였지만 전과는 날이 갈수록 확대되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사방으로 달아난 적들이 사로잡힌 것이다.
덕분에 지금 포로는 이만 명이 넘어 삼만 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최종전과? 부상자가 죽어서 적의 사망자 일만 팔천, 포로 일만, 보인 가운데 사망자는 계산하지도 못하겠고 보인 포로가 일만을 넘어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예상 인원을 1.5배나 초과한 상황이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 가냐고? 이들이 사용하는 물품이 훈련도감을 위해 생산한 물건이어서 조선인 기준으로도 규격이 크고 이들 기준으로는 남아 돌 지경이니 가능했다.
8인이 군장을 포함해 사용하는 천막에 16인, 20인이 우격다짐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식사가 부족해도 포로들이니 대충 나눠먹고 대충 살고 있다. 하지만 포로가 계속 늘어나니 언젠가는 한계에 도달하리라.
“포로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 하였느냐. 듣자하니 왜인들이 광도(히로시마) 일대에서 패주하며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적으로 돌변할까 염려하여 잡아들였다 하더구나.”
“이미 이만 명을 넘어섰으니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이들이 유순한 이들이면 일을 시키거나 하다못해 소작으로 부려도 될 일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병장기를 들고 사람을 해하던 이들이니 방법을 모르겠구나.”
사실 병사들이 돌아오면 간단한 일이지만 모두 일본 열도에 남아 있다. 조선이 여력이 남아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교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히메지(姫路)까지 치고 나가 군영을 차리고 있었다. 형님은 내 표정을 보면서 커피를 한 잔 따라주었다.
“전쟁이 끝났다 여겼는데 전후 정리만 하여도 수명을 갉아먹는 것 같구나. 하다못해 홍 지사라도 구주에서 돌아오면 될 것인데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영문을 모를 일이다.”
“홍 지사는 명국의 병부상서 백규에게 아국 병졸들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명을 내리기를 그렇게 하였지. 하지만 이미 칙령으로 토벌이 정해진 왜국의 영주 셋 가운데 둘의 목을 베어 명국으로 보냈다 하더구나.”
홍윤성이? 고작 일만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큐슈를 헤집고 돌아다녀? 그것도 슈고 다이묘 둘의 목을 따버렸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장 나가지 않아 좋다고 자랑하던 사람 아니었나? 하지만 형님의 말을 듣자 이해가 되었다.
“홍 지사는 태재부(다자이후)에 머물며 영주들의 규합을 막고 견제하려 하였다. 하지만 인자(닌자)라는 이들이 군영에 침투하였는데 하필 병부상서의 거처에 침입하다 발각되었다 하더구나.”
그 닌자가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지만 백규의 분노를 터트리게 만든 것이 분명하며. 홍윤성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닌자가 임해도감과 훈련도감의 경계를 뚫고 침입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좋은 생각이 났다.
“명국에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러하니 포로 가운데 보인이 아닌 병졸들을 명국에 진상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시옵소서.”
“명국에 진상하라······. 명국은 지난 전쟁 이후 병졸들의 손해를 미처 메꾸지 못하였으며. 왜인들은 흉험하고 사람을 죽이길 우습게 여기는 이들이니 좋은 답이구나.”
“아국에 병사를 많이 두어야 쓸모가 없사옵니다. 차라리 생업에 종사하고 억척같이 살아갔던 보인들을 두고 쓰심이 마땅한 일이옵니다.”
형님은 내 방안이 옳다 여겼는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력을 따져도 평범한 조선 정규군과 비슷하고 훈련원 삼군과 비교하면 대폭 열세이니 두고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보인들은 다르다. 포로가 되어 어디론가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할 사람들에게 적당한 일감을 던져주고 공노비(公奴婢) 비슷하게 살게 한다면? 일을 끝나면 면천까지 약속한다면? 어지간한 일에는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당분간 안평대군에게 네 업무를 넘겨주어라, 이틀 전에 왜국의 관령으로 복직한 전산의취(畠山義就 -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마지막 협정을 논하자 하더구나.”
“관령은 세천(호소카와)이지 않았사옵니까?”
“얼마 전에 술을 마시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하더구나. 덕분에 협정이 진전되어 대내씨가 거느린 고장인 산구(山口 - 야마구치)로 대리인을 보낼 것이라 하였지.”
이미 일본과의 협정은 절반 이상 진행되었다. 큐슈의 할양은 당연한 일이며. 앞으로 남은 항목은 전쟁 포로 관련과 내가 제안한 사도가시마의 양도와 왜관 개설이다.
오우치는 이미 조선의 충실한 개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와미 은광에서 얻는 수익의 3할을 내놓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형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배로 향했다. 사도가시마에 잠든 동양 최대의 금광을 얻어낸다면 명나라가 기를 쓰고 매입하는 은이라면 몰라도 금을 사용한 화폐를 정착시킬 수 있겠지. 상념을 이어가면서 배에 올라 일본 열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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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의 항구에 풍역선을 타고 도착하자 각지에서 모인 권세가들의 가몬(家紋 - 가문의 문장)이 달려 있는 함선들이 보였다. 이윽고 항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숙주가 고개를 숙이며 나를 맞이하였다.
“보한재 아닌가? 좌찬성과 병판 대감은 어디에 있는가?”
“아직 희로(히메지) 일대에 군영을 마련하고 왜인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신숙주도 피로가 남아있는 것을 보니 얼마 전까지 히메지에 머물며 협상을 이어나가다 나를 보좌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겠지. 업무에 투철하다 못해 상을 줘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신숙주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아국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전쟁을 이어갈 수 있습니까?”
“북방의 병사들이 전쟁에 참가하게 해달라고 상소문을 올리고 있으며. 오 년 전에 퇴직한 훈련도감과 화기도감 병사들도 다시 군문에 발을 들이고 싶어 한다네!”
일부러 큰 목소리와 당당한 태도로 말하자 신숙주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한 것과 정 반대라는 것을 신숙주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인구가 부족하니 전쟁에 나선 이들 덕분에 한 해 농사를 망친 일은 당연하고. 최소한 올해 8월 이전에 복귀하여 한가위를 지내야 내년 농사라도 제대로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신숙주는 나의 거짓말을 이해했는지 크게 웃으며 화답했다.
“실은 병사들의 피로가 심해져서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잘 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훈련도감에서 퇴역한 이들은 철령 전투에 참전한 자들이니 나이는 들어도 기세는 흉험할 것입니다.”
“지금 절제사들보다 연배가 많은 이들이니 백전노장이 따로 없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협정을 맺기로 하였으니 이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겠군.”
듣는 귀가 많았는지 사방에 있는 짐꾼들 가운데 여럿이 고개를 쭈뼛거리며 귀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오우치가 마련한 협상장으로 나서자 각지에서 보낸 대리인들이 나를 보며 인사를 올렸다.
“반갑습니다. 이번 협정을 주도하게 된 칸레이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입니다.”
“전임자인 호소카와는 어떻게 된 것이오. 술을 마시다 변을 당했다 들었는데 그자와 할 이야기가 많았거늘.”
“이미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논하지 않는 것이 좋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슬쩍 성질을 긁었지만 바로 받아넘기는 것을 보면······. 아니다, 아예 모든 권세가들이 호소카와 가문을 협공했는지 슬쩍 웃는 놈조차 보였다. 호소카와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을지는 모르지만 이제 외교 협상의 단계이다.
가장 먼저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꺼내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주고받은 편지와 나무 상자였다. 진물이 질질 흐르고 파리가 들끓는 것을 보니 사람의 목을 담은 것이 분명하지만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다음 말을 듣고 할 말이 없었다.
“실은 안 좋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호소카와 공이 급사하고 그의 저택을 수색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부카와의 도주에는 호소카와 공의 양자 카츠유키의 입김이 닿아 있었습니다.”
“지금 뭐라 하였소? 그러니 세천씨의 양자가 도주를 도왔다는 말이오?”
“그러하니 저희도 잡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황제의 칙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카츠유키의 목을 보낼 것이니 저희의 노력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호소카와 가문을 아예 박살내 버렸겠구나. 아니 박살을 넘어서서 말 그대로 해체해 버린 것이 분명하다. 이대로라면 후계자가 살아남을 가능성도 별로 없지만 지나간 일이니 잊기로 했다.
결국 조선군이 빨리 물러나 달라는 암묵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어차피 물러날 생각이었지만 명분까지 챙겨주니 고마운 일이지. 그리고 다음 협상을 시작하였다.
“다음은 큐슈의 양도에 관한 것이오. 이미 토벌의 대상이 되었으니 조선이 세 개 쿠니(國)를 소유하고 명국이 여섯 개 쿠니를 소유하는 일에 불만을 가진 자가 있소?”
“다만 말미를 두시어 친척들을 데려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할 뿐입니다.”
“명국 황상의 분노를 억누르기 위하여 무던히 애를 썼소. 부디 훗날의 화를 불러들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친족들을 모두 거두어들이시오.”
영덕제의 대답? 조선이 으뜸가는 번국이자 충심을 보였다면서 향후 5년 동안 큐슈에 필요한 물자를 모두 제공하기로 하였다. 애초에 큐슈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 넘어가는 눈치겠지. 이제 마지막 협정을 준비하는데 한 젊은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말했다.
“조선의 대군께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전쟁 포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에스기 가문에 속한 병사의 몸값을 일 인당 은자 스무 냥으로 계산할 것이니 반환하여 주시기를 청하겠습니다.”
“문장을 보아하니 상삼씨(上杉 - 우에스기)에서 보내온 대리인이겠군. 미안하지만 포로 가운데 병사들은 절대 반환할 수 없소. 병사들은 전쟁의 증좌로 삼아 명국으로 보낼 것이며 보인들은 아국에서 잡부로 노역형을 내릴 것이오.”
포로로 잡힌 병사라고 해봤자 호소카와의 세력이 태반이고 나머지는 우에스기 병사 일부이다. 애초에 좌군과 우군 모두 도주하였으니 포로로 잡히지 않았고. 후미에 남은 이들은 결사 항전을 벌이다 대부분 죽어버렸지.
다른 이들은 흠칫거리면서 내 얼굴을 보았고 젊은이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여기에 쐐기를 박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상삼씨는 세천씨의 제일가는 수하이니 전열에 나선 것이 아니요. 이를 징벌할 수 없지만 아국이 안심할 거리를 만들어야 훗날을 대비할 수 있겠소. 월후(에치고)의 앞바다에 있는 좌도도(사도가시마)를 양도하시오. 아국의 함대가 머물며 변란을 예측할 것이니.”
“너무 잔혹하십니다! 저희는 참전한 정병의 대부분이 죽었으니 조만간 수세에 몰려 멸족을 당할 것이 아닙니까! 애초에 호소카와는 저희 병사를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닥치시오! 아국에서 보기에 사지로 몰아넣었는지, 충심을 자랑하기 위하여 진군하였는지는 알 방법이 없소. 또한 대내씨(오우치)의 영지를 나눠 가지기로 한 사이가 아니오!”
“흥분은 그만 두십시오. 자네는 우리와 이야기를 좀 나누도록 하게.”
협상이 잠시 중단된 사이 커피 한 잔이 나왔다. 텁텁한 터키식 커피를 들이켜고 기지개를 편 다음 곱게 접은 쪽지 하나를 우에스기 가문의 대리인에게 몰래 넣어달라고 했었다.
한 시진 정도 흐르고 다시 협상이 시작되었다. 다른 다이묘들은 우에스기의 몰락을 보며 좋아하고 있었지만 젊은이는 내가 보낸 쪽지의 내용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깊게 숙이고 말했다.
“다만 하나의 청이 있습니다. 우에스기 가문에 속한 사람이나 가문을 물려받은 이가 몰락하여 도주할 일이 생긴다면. 조선으로 귀부할 때에 편의를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일은 받아줄 수 있소. 그렇다면 좌도도에 대한 양도를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좋소이다. 앞으로 좌도도에 아국의 병선 스무 척이 머물 것이며. 성채를 만들어 둘 것이오. 일대에서 분란이 벌어질 경우 이를 면밀히 조사하여 판가름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협정은 끝났다. 상세사항까지 담은 구체적인 약조문, 경인약조라 불리는 조문이 하나하나 작성되었고 세 장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두 장은 조선과 일본이 나눠 가지고 한 장은 영덕제에게 보낼 예정이었다.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1. 일본의 쇼군, 슈고 다이묘, 기타 관직에 있는 이는 큐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이를 명나라에 할양한다. 훗날 명나라가 반환할 의사가 있다면 협정을 갱신한다.
2. 큐슈에 거주하는 이들 가운데 혼슈와 시고쿠에서 연관된 혈연, 지연을 내세울 경우 즉각 추방할 수 있으며 일본의 관직과 권위는 통용되지 않는다.
3. 조선은 큐슈에 대하여 명나라가 지정해 준 3개 쿠니에 대한 통치 대리 자격이 있다.
4. 토벌 칙령이 하달된 시부카와 가문의 도주를 도운 호소카와 카츠유키의 수급을 제공하였지만 시부카와의 징죄는 계속 될 것이다.
5. 조선은 향후 오우치가 현재 소유한 4개 쿠니에 보호를 위한 병력 파병이 가능하다. 하지만 오우치가 조선의 도움을 거부할 경우 파병할 수 없다.
6. 에치고를 소유한 우에스기 가문은 사도가시마에 대한 권리를 조선에 넘긴다.
7. 사도가시마에 주둔한 조선군은 일대에서 일어나는 변란을 면밀히 관찰하고 조사할 권한이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즉각 병력을 파병할 수 있다.
다들 내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항목에 숨겨진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큐슈는 넘어가도 5, 6, 7번 항목은 치명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 이상 오우치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오우치가 소유한 이와미 은광의 소유권을 마음대로 나눠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 협약을 맺었으니 생산량의 3할은 조선의 것이 되었다.
또한 우에스기를 쓰러트리고 사도가시마 협정을 없는 일로 한다고? 조선군이 변란을 면밀히 관찰하고 조사할 권한이 있다는 말은 생각하지 못했다. 에치고 일대에서 전쟁 징후가 포착되면 조선에서 파견된 감찰관이 일대 군영을 헤집어도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선은 큐슈를 얻었고. 남부의 오우치를 군사적으로 복속시켰으며, 북부의 우에스기를 외교적으로 복속시켰다. 훗날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인재가 태어나도 조선까지 침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서 회담장을 나서는데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천천히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대체 무슨 일일까 하였는데 나도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큐슈 일대에서 아직도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조선의 뜻이 맞습니까? 피난 온 이들의 말을 들으니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이어지고 있어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목불인견의 참상? 전쟁이 이어져? 피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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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동산 위에 짜임새 있는 일본식 성채가 있었다. 훗날 에도 시대에 세워지는 해자와 높다란 천수각을 바탕으로 한 거성이 아니고. 가마쿠라 시대부터 이어진 백제의 축성술을 바탕으로 산세를 살려 쌓은 관성(館城)에 포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지막 성이다! 도진(島津 - 시마즈) 놈만 죽이면 모든 전쟁이 끝난다! 모두 힘을 내라!”
“드디어 이 전쟁도 끝이다!”
“홍 지사님이 날 보셨어! 홍 지사님!”
전열에 서서 자신의 신장보다 월등히 거대한 미늘창을 휘두르는 홍윤성에게 지휘관 같은 모습은 없었다. 두정갑에 아로새겨진 핏물만 하여도 그가 격전을 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진 포격은 시마즈 가문의 마지막 보루인 오비성(飫肥)을 쉴 새 없이 강타하였다. 산 정상에 축조한 천수각에서 필사적인 고함이 들려왔다.
- 한 달만 버티면! 단 한 달만 버티면! 호소카와님이 원병을 보내 주실 것이다! 조선 놈들의 진격은 중간에 가로막혔으니 염려하지 말고 싸워라!
협정이 끝나고 큐슈의 운명이 정해졌지만 홍윤성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두 달. 이제 석 달이 다 되어가는 동안 일본의 말을 익힌 홍윤성은 들려오는 고함을 듣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거짓을 늘어놓는 도진입구(시마즈 타츠히사) 개잡놈의 호로 자식을 보아라! 저런 동산을 믿고 버티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나!”
“때려 죽여야 합니다!”
“오냐 좋구나! 나와 함께 전열에 설 자들을 모집하겠다! 내가 뛰어가면 전열에 서서 적을 맞이할 자들은 같이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큐슈 정벌군에 속한 훈련도감 병사들과 임해도감 병사들은 홍윤성이 움직이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홍윤성의 눈은 울고 있었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이윽고 적절하게 날아간 천자총통이 오비성의 입구를 부수면서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산노마루(三の丸 - 성의 가장 외곽부분)에 적이 돌입하였습니다!”
“막으라고! 제발 막아! 저 붉은 야차를 막으란 말이다!”
“미도리오니가 야차를 앞세워서 돌격한다아아아아!”
일본의 성의 구조는 복잡하고 난해하였다. 수많은 갈림길과 고저차는 적의 병력을 분열하여 격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진입한 적군은 소수 정예의 병사가 아니라면 살아 돌아갈 수 없는 구렁텅이와 같았다.
“도끼귀신이다! 도끼귀신이 올라온다!”
“막아! 불화살을 쏘라고! 아아아악! 내 손!”
하지만 적의 병사가 모두 정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가파르게 쌓은 석축 위로 임해도감 병사들이 갈고리를 박아대며 미친 듯이 기어올랐다. 몽둥이로 후려쳐도 도끼가 날아들며 돌을 굴려도 얄밉게 피해버린다.
차라리 임해도감을 상대하는 병사들은 도끼에 맞아 도주할 기회라도 주어졌다. 반면 골목마다 훈련도감 병사들이 질주하며 수비병력들을 일방적으로 박살내고 있었다.
좁은 길목으로 적을 분열한다는 말은 소수 정예끼리의 싸움이 연속된다는 말과 같았다. 덕분에 골목에서 들리는 비명은 모두 시마즈 병사들의 비명이었다.
거대한 미늘창을 휘둘러 적의 병사들을 무참히 짓뭉갠 홍윤성은 눈을 번뜩이며 다음 병사들에게 달려 들어갔다.
쑥색 철릭이 붉게 물들 때마다 시마즈 병사들 사이에서 공포와 좌절이 번져나갔다. 하지만 홍윤성의 눈은 울고 있었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그는 기괴하게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나는 전쟁이 정말 좋고! 주상전하의 어명도 정말 좋다! 그러니 네놈들을 다 죽여서 이 전쟁을 끝내 버리겠다!”
산성의 가장 위에 있는 혼마루로 한 무리의 조선군이 쏜살 같이 달려 올라갔다. 이윽고 할복조차 하지 못한 시마즈 타츠히사의 목이 홍윤성의 미늘창에 베어지고 마지막 전투가 끝났다.
한편 본영에서 천리경을 통해 상황을 면밀하게 보고 있던 명나라의 병부상서, 백규는 미소를 지으며 홍윤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명나라가 아닌 번국에 군신이자 천고의 기재가 있었다.
“저러한 이가 다섯 명만 있었어도 명국이 이 세상을 평정했을 것이거늘. 어찌 저리 충심이 깊고 몸을 사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참으로 딱한 일이로다.”
어딘가 엇나간 평가였지만 백규는 조심스럽게 장계를 작성하였다. 훗날이 되어 본국으로 돌아갈 날이 되면 영덕제가 아주 좋아할 이야기가 장계 안에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