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19화 - 화약과 포탄의 노래(2) >
“우에스기 군 전멸! 사실상 궤멸하여 어육이 되었습니다! 조선군은 별다른 피해도 없이 진군하고 있습니다!”
“지금 뭐라 했나! 칠천에 달하는 정병이 모조리 궤멸하였다고? 도주한 것이 아니고 궤멸? 좌익과 우익은!”
“명령대로 많이 진군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호소카와는 보고를 듣고 눈이 뒤집히고 뒷목을 잡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잡았다. 하지만 나가오 시게카게의 눈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호소카와에게 다가섰다. 명령대로? 무슨 명령을 내렸단 말인가?
“지금 뭐라 했었나? 명령대로 많이 진군하지 않아? 칸레이!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조선군의 화력을 삼면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좌우 양익을 진군시키기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명령에 착오가 있던 모양이네. 나는 선발대에 맞추어 천천히 진군하라고 하였지.”
“지금 그게 무슨······. 에치고를 되찾았다고 어린 주군의 힘을 빼놓으려는 수작이오! 칸레이! 당신은 대체 어떤 인간이오! 당신의 몸에 피가 흐르기는 하는 거요!”
“진정하게! 아직 좌우 양익이 멀쩡하니 공세를 뒤집을 수 있어. 좌우 양익에게 조선군의 양면을 두들기라 전해라! 놈들의 진군을 멈추게 명령을 하달하라!”
군영 밖으로 끌려간 나가오 시게카게가 욕설을 퍼부어댔지만 호소카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명령을 하달했다. 힘을 꺾기 위해 손해를 크게 입힐 생각이었는데 손해가 아니고 궤멸이니 승전하지 못하면 감당할 수 없으리라.
이윽고 좌우 양익을 담당한 시바(斯波)와 야마나(山名)에게 명령이 하달되었으나 좌익을 담당한 시바 가문의 병사들은 진군 명령을 거부하고 제자리에서 대기할 뿐이었다. 시바 가문의 직신인 아사쿠라 타카카게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진군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어찌하여 군을 움직이지 않으십니까!”
“지금 죽을 생각인가? 남쪽에 조선군 진영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분명 남쪽의 진영에도 조선군이 삼천 정도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을 격멸하면 충분한 일이 아닙니까.”
본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의 말이 들리며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니 순식간에 패주한 것이 분명하리라. 그런 조선군이 남쪽에 진영을 차렸으니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군대를 궤멸시킨 정체불명의 적을 상대로 만용을 부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좌익이 침묵하였지만 우익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 야마나 소젠의 손자 야마나 마사토요(山名政豊)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동시에 진군하라 명했으면 눈치를 봐서 들어야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어떤가? 우리는 오우치 놈들이 뒤를 칠까 염려되니 진군할 수 없다네.”
양익이 침묵하자 산개 대형을 유지하며 진군하던 본진은 어쩔 줄 몰랐다. 서로 떨어져 있을 때에는 화포 사격을 막아낸 것처럼 느껴졌지만 집결하니 병사들의 상당수가 고혼이 되어 있었으니 제대로 된 대열을 갖출 시간조차 없었다.
“양익은! 양익이 막아야지 지금 뭘 하고 있어!”
“막아! 맞서 싸우라고! 염병할!”
한 병사가 앞으로 달려 나가 자신의 몸보다 거대한 오오타치를 크게 휘둘러 전열에 선 훈련도감의 방패를 내리 찍었다. 유려한 곡선과 두터운 칼날을 자랑했지만 원패를 부수지 못하고 금이 가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단 세 걸음을 물러나게 한 대가로 자신의 오오타치보다 거대한 미늘창이 날아들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병사의 시체를 짓밟은 조선군은 신속하게 진군을 거듭하였다.
급격한 진군을 위해 단창을 패용한 훈련도감 병사들과 창병들은 적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긴 창은 대열을 만들고 적을 밀어내거나 버티기 좋다면. 단창은 적을 찔러 몰아치는데 적합하다.
거리낌 없이 날아간 단창이 열다섯 보(24m)를 날아가 나기나타를 휘두르던 왜병의 배로 빨려 들어갔다. 두터운 갑주라 하여도 잡철을 철편(鐵片)으로 만들어 엮었으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잠시 대열을 갖추어 적의 진격을 돈좌시키면 보총의 일제사격이 날아든다. 후열에서 뭉치면 주저 없이 발사한 각궁의 화살세례가 대열을 붕괴시킨다. 하지만 맞서 싸우지 않으면 더욱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놈들의 카샤(火車)가 온다! 누가 좀 막아!”
“엎드려!”
크게 빈 틈이 생기면 화기도감 병사들은 그 틈을 노려 총통기화차를 끌고 들어가 쏘아댔다. 수십 발의 보총을 일제 사격하는 것과 같으니 전열에 구멍이 뚫리며 병사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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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남북으로 배치된 적의 양익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니 권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구치관은 껄껄 웃으며 답했다.
“저걸 보게나, 저것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의 본모습이라네. 각 호족간의 세력을 규합하였다고? 본진이 궤주당하니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군.”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적의 양익을 방치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온전히 방치하면 아니 될 일이지. 대내씨(오우치)에 사람을 보내 적의 우익과 교섭하게 만들고. 훈영절제사 성담로에게도 사람을 보내 적의 좌익과 교섭하게 만들게.”
봉건제도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적이 압도적인 위력을 과시하자 억지로 만들어 놓은 동맹에 금이 생기며 자신의 욕심을 챙기려 하는 것이다. 권절은 뒤늦게 사실을 알아차리고 구치관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진군 명령을 하달하였다.
호소카와의 작전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선발대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입혀 우에스기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지만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렇게 좌우 양익의 호위를 받지 못한 호소카와의 본대를 조선군이 꿰뚫었다.
“놈들이 대오를 갖추려 한다! 보총수! 나와!”
“장전까지 반 정도 남았다!”
“그럼 치고 들어간다! 빨리빨리 들어가라! 그냥 다 죽여!”
훈련도감 병사들은 쉴 틈이 없었다. 수백 정도의 대열을 만들어 마구 진격하며 보이는 왜군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버리고 있었다. 단병전을 벌이니 피해가 속출했지만 조선군의 대열은 붕괴되지 않았다.
초록색 옷은 아군이요, 나머지 옷은 적이로다. 적들도 마찬가지라 여겼는지 간혹 장수들을 중심으로 대열을 만들어 맞서 싸우는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한 병사는 보총에 화약을 부은 다음 짜증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화영절제사님이 운총수를 다 데려가신 덕분에 이게 뭔 꼴이란 말인가! 저 장수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뚫어야 뭉치지 못할 것인데.”
“그분도 지금 신나게 싸우고 계시겠지. 높으신 분이 군략을 우리보다 더 잘 알 것 아니야.”
병사들은 순식간에 화포 사격이 불가능한 곳까지 진군했으며 적의 본진을 꿰뚫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머나먼 동쪽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증원병의 발걸음이 들려왔다. 훈련도감 병사들은 저 멀리 보이는 사람의 파도를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염병할 왜놈새끼들! 도대체 저 많은 병사는 어디서 충원한 거야?”
“이 정교(正校)님, 놈들이 뭔가 이상합니다. 큰 무기는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고 그냥 칼만 들고 있는데요?”
여진족 출신의 훈련도감 병사가 뛰어난 시력으로 전열을 바라보며 자신의 상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 정교는 당연한 것을 물어본 여진족 출신 병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놈들에 대해 교육 받은 것 몰라? 왜놈들은 사시사철 싸워대기만 해서 보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왜도를 패용하고 패잔병의 목을 벤다는 것을. 저놈들을 내보내서 대열을 갖추려는 수작이겠지!”
분명 충분한 포상을 약속해서 전장으로 내몬 것이니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조선군의 기병은 아직도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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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의 진영 북쪽에는 오우치의 마지막 병력과 조선의 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갑사들은 본래 침묵하고 있던 적의 우익을 관통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가 전장으로 나온 것은 오우치의 영지인 아키(安藝)를 넘겨받기로 하여 참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젠 어르신을 생각하니 창을 들이댈 수 없습니다.”
“소젠 어르신을 기억하니 눈물이 나오는군요. 앞으로 이런 일을 벌이지 맙시다.”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싸우지 않으면 충분한 것이다. 그렇게 야마나의 병력이 오우치와 갑사들의 사이를 통해 북쪽으로 퇴각하였지만 본영까지 다가서는 길에는 마방책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오우치의 병사들은 함께 진격하기를 원했지만 갑사들의 입장에서는 필요 없는 도움이었다. 억지로 보병들과 같이 진격하면 될 일도 그르치게 될 것이다. 갑사를 지휘하는 병조참의 박중선(朴仲善)은 천리경으로 적진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왜놈의 자식들이 참으로 꾀를 요란하게 쓰는군. 마방책(馬防柵)을 사중으로 만들다니. 기마 돌격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모습이 보이는가.”
“저기 왜놈들 보이십니까? 체격은 작아도 왜장도(倭長刀 - 나기나타)를 하나씩 들고 굳건히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이래서야 그냥 들어가면 손해가 클 것입니다.”
호소카와의 진영 북쪽은 일본에서 거마(拒馬)라 불리는 목책과 병사들로 가로막혀 있었다. 본진에서 갑사들의 돌격 이전에 적을 몰아내기 위해서 몇 발의 벽력포를 쏘았지만 포탄에 불과하였다.
- 놈들이 불벼락을 쏜다! 불벼락이다!
- 당황하지 마라! 불벼락이라 하여도 이렇게 먼 거리에 쏘는 녀석들은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벽력포가 오십 발의 포탄을 쏘았지만 마방책 여러 개가 부서지고 운 없는 병사 서른 정도가 휩쓸려 죽은 것이 전부였다. 벌벌 떨고 있던 왜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무기를 곧추세웠다.
- 역시 효험이 없다! 놈들의 불벼락도 마방책을 걷어낼 수 없으니 자리를 굳건히 지켜라!
예상은 했지만 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무기를 휘두르는 왜병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자신들이 고생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벽력포가 아무리 강해보았자 쇠구슬이지. 운 좋게 적중한 한 발을 제외하고 효험이 없네.”
“저기에 쌓인 것이 성벽이라면 효험이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저희가 달자들처럼 궁시를 계속 쏘아대면 말의 다리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마방책을 뚫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유목민족은 원진으로 활을 쏘아 적의 병사를 걷어내고 마방책 사이를 파고들어 돌격하며. 그렇지 못해도 마갑과 갑주의 힘을 믿고 마방책을 철거하며 돌격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화기도감 병사들을 불러와 비격진천뢰나 신기전기화차로 마방책과 병사를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것이 답이었다. 하지만 갑사들은 새로운 해결책을 얻었다. 박중선의 명령이 하달되자 보인들이 달려와 커다란 통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작렬신기전(炸裂神機箭) 신형 대령하였습니다!”
“상왕전하께서 요긴히 사용하라 명하신 물건이니 마음껏 사용해야지! 상왕전하 천세!”
“상왕전하 천세!”
스무 근에 달하는 작렬신기전을 한 손으로 짊어 쥔 갑사들은 훈련에서 요긴하게 사용했던 작렬신기전의 위력을 기대하며 천천히 진형을 갖추었다.
본래 작렬신기전은 이십여 년 전 철령 전투에서 처음 선보인 신병기였다. 대신기전의 탄체를 키우고 틀이 터지지 않도록 사거리를 줄여서 말 위에서도 사용 가능하게 개조한 물건이었다.
당시에도 열다섯 근의 무게에 여섯 근의 화약을 사용하는 물건이라 이백 개를 제조한 것이 전부였다. 천자총통 여섯 발을 쏠 화약을 필요로 하는 무기이니 연습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천축에서 가져온 초석은 모든 것을 바꾸기 충분했다.
‘너희에게 새로 만든 작렬신기전을 내릴 것이니 너희들이 원하는 곳에 쓰면 좋을 것이다.’
문종이 친히 갑사들에게 신형 작렬신기전을 보급하면서 했던 말이다. 무게가 더욱 증가하고 파괴력 또한 증가한 작렬신기전이 일천 개나 되었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은 갑사들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화약이 값지다 하여도 사람의 목숨보다 값지겠느냐. 마음껏 사용하고 더욱 많이 사용하여 왜인들에게 아국의 막대한 힘을 보여주어라.’
십만 근의 화약을 새로 만들고, 지금까지 만들어 뒀던 화약이 오만 근에 달하니 큰 부담도 아니었다. 갑사들은 호령에 맞추어 일자진으로 진형을 변경하여 간격을 맞추어 도열하였다.
“먼저 오백 발! 일자진으로 발사 준비! 도화선은 세 번 감으면 충분할 것이다!”
“도화선 세 번 감겠습니다!”
흑색화약을 절인 아마섬유를 꽁무니에 세 번 휘감고 나머지를 잘라낸 다음 횃불로 불을 붙이니 천천히 타들어갔다. 말 세 마리의 간격을 유지한 갑사들이 일자진으로 쏜살같이 돌격했다. 그에 맞서 적진에서 환호성이 들리며 화살이 산발적으로 날아들었다.
“그래 보았자 백 보도 쏘지 못하는 놈들이. 이놈은 이백 보를 날아가고도 여력이 있다고!”
한 손으로 말고삐를 휘어잡고 뛰어드는 방향의 사선으로 작렬신기전을 움켜쥔 갑사는 천천히 다가올 충격을 대비했다. 이윽고 도화선이 작렬신기전의 화약에 불을 붙였고 갑사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크아억! 훈련을 수도 없이 했는데 허리가 분질러질 뻔 했네!”
사선으로 솟구쳐 이백 보 가까이 날아간 작렬신기전이 적진에 박히고. 굉음이 들리며 하얀 연기와 함께 흙모래가 치솟아 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불규칙적으로 발사되는 작렬신기전이 하늘을 뿌연 연무로 뒤덮기 시작했다.
어느 누가 예상했겠는가. 갑사들이 쑤시는 허리를 매만지며 말과 한 몸이 된 듯이 기침을 내뱉으며 본진으로 돌아오니 마방책의 대부분이 박살나고 수비병들의 태반이 사라져 있었다. 박중선은 가볍게 지휘봉을 휘두르며 명령을 하달했다.
“전군! 진군!”
“참의님이 함께하신다! 어사도를 보며 진군하라!”
한혈마 혼혈종도 아닌 순종 한혈마의 옆구리를 걷어찬 박중선의 몸이 쏜살같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석 자가 넘는 어사도, 경원의 최고급 강철을 왜국에서 건너온 장인들이 한 달 넘게 두드려 만든 칼이 바람을 가르며 명령을 내리던 왜장에게 날아들었다.
잘 벼린 오오요로이(大鎧)라 하여도 쓸모가 없었다. 머리장식과 함께 두개골을 가르고 지나간 어사도가 핏물을 흩뿌림과 동시에 한껏 기세를 올린 갑사들의 궁시가 패주하는 이들의 등에 날아 꽂혔다.
- 저게 말이야! 소야! 아니면 괴물이야!
- 큐슈 놈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어! 정말 말의 높이가 한 보(1.6m)는 될 것 같아!
조직적인 대응 따위는 없었다. 말이 스치고 지나가니 불벼락이 터져나가고 마방책과 병사들이 찢겨 나갔다. 그런 틈을 노리고 거대한 말이 쉴 새 없이 몰아치니 병사들은 사방으로 도망치며 제대로 된 대응을 이어가지도 못했다.
“새끼양들이 잔뜩 도망가는구나! 몰아쳐라! 계속 몰아쳐서 놈들이 애타게 찾는 불씨(부처의 낮춤말) 앞으로 보내버려라!”
“네노오오오오오옴!”
지난 두 달 내내 전장을 전전하며 소득이 없던 갑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적을 찔러 죽였다. 간혹 용감한 이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달려 들었지만 말과 혼연일체가 된 갑사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어이쿠! 고맙다 순동아!”
측면에서 날아든 오오타치를 피하지 못하지만 말은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가볍게 옆으로 뛰어 칼을 피해내자 갑사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말의 유도에 맞추어 창을 찔러 상대를 죽였다.
갑사들이 입은 마갑의 무게와 근육으로 충만한 육체의 무게로 인해 둔중해진 몸놀림이라도 충분했다. 사뿐하게 뛰어오른 말이 앞발로 불운한 병사의 머리통을 짓밟고. 측면으로 다가오는 적에게 여덟 자(약 2.8m)의 거창이 날아들었다.
퇴각하여 대열을 정돈하던 병사들은 도저히 다가설 방법이 없었다. 무쇠로 둘러싼 거대한 말과 거대한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날뛰니 수천에 달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짓뭉개기에 충분했다.
“이놈들은 조금 강합니다!”
“그렇다면 궁시로 쏘아 죽여라! 활은 두었다 뭘 하느냐!”
본영에서 갑사들을 막아선 이들은 직신 휘하의 호위병으로 구성된 후발대이지만 한계가 있었다. 창날을 피하면 화살이 날아들고, 화살로 대응하려 하여도 일본 활의 위력은 제대로 된 마갑과 두정갑을 뚫을 재간이 없었다.
간혹 본진에서 공수한 작렬신기전이 날아들며 대열을 갖춘 병사들을 유린하였다. 하지만 갑사들은 일방적인 공세를 취하면서도 때를 기다리는 듯이 적에게 일방적인 피해를 입히며 시간을 끌 뿐이었다.
“조금만 더, 작렬신기전 소리가 들리면 진군을 시작해야 하는데. 옳지! 원병이 왔다! 북방 기병과 임해도감 병사들이 본영을 급습한다! 몰아쳐라!”
산 위에서 함성이 들리며 후방에서 말발굽 소리와 임해도감 특유의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시작 직후 후방으로 빠져나간 여진족 출신 기병들과 산을 넘나드는 임해도감 병사들이 때에 맞추어 기습을 시작한 것이다.
호위병이 갑사들을 막아서는 시점에 경기병들과 임해도감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사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안전하다고 여긴 산과 후방을 넘어서 진군하니 본진은 벌집을 들쑤신 듯이 아우성을 쳤다.
“참의님! 병조참의님! 본영에서 소식이 전달되었습니다! 놈들의 좌익과 우익 모두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 적은 본진 일부와 후발대만 남았습니다!”
호소카와의 본영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한 무리의 기마병과 오천 정도의 병력이 필사적으로 도주를 택하였다. 박중선은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기마병, 아마 호소카와의 직신일 자의 핏발 선 눈동자를 보면서 외쳤다.
“놈들이 전군(殿軍 - 대열의 맨 뒤에 남는 군대)을 두고 도주하려 한다! 젠장! 임해도감은 도주하는 적을 저지할 수 없는데!”
박중손의 판단이 옳았다. 어설픈 충격기병은 이동하는 적에게 화살을 퍼부으며 추격하는 것이 전부이며. 설령 추격하여도 적의 후방 거점이 있다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호소카와와 각 영주들이 속한 본영은 필사적인 도주를 택하였다.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본대와 후발대에 속하는 병력 모두가 도주를 택하였고 전장에는 수많은 주검과 핏물이 흘러 내렸다.
훗날 히가시 히로시마에는 전설이 생겨났다. 조선에서 온 거인들이 십만에 달하는 이들을 무참히 학살하였으며. 당시에 흐른 핏물이 보름 내내 씻겨나가지 않았다는 전설이었다.
“병사의 피해는?”
“적의 피해는 정병 가운데 일만 사천을 쓰러트렸고 팔천을 사로잡았습니다. 보인들은 오천 가량이 죽자 모조리 항복하였습니다.”
“아군의 피해를 물은 것이네.”
“아군의 피해도 제법 큽니다. 이천 가량의 병사가 죽고 삼천 가량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대로 맞서 싸웠다면 정말 위험할 수 있는 전투였다. 적의 본대를 사정없이 짓밟던 병사들이라 하여도 적의 숫자가 1.5배가 되면 피로가 쌓이고 피해가 누적되어 궤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소카와의 퇴각은 교토까지 이어졌다. 오우치의 땅에서 호소카와를 비롯한 서정군에 속한 병사들이 모조리 퇴각하였으며 전쟁을 끝마치기 위한 협정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