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16화 - 주인을 때리면 개를 내놓는다(2) (문단누락 추가 11:36) >
1470년 3월 6일, 하카타에 임시로 마련한 부두에서는 마지막 승선 작업이 한창이었다. 수많은 물자와 짐이 병조선과 대방선에 적재되었으나 남는 이들도 있었다. 구치관이 홍윤성의 손을 잡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네가 구주(큐슈)의 왜적을 토벌하게. 이미 왜적의 기세를 꺾어 놓았으며 아소(阿蘇)씨와 소이(少貳)씨의 가신들이 협력하기로 정하였으니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네.”
“좌찬성께서도 부디 주상전하의 명을 이룩하고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무도한 세천(호소카와)라 하여도 명국 황상의 칙명을 거스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일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네. 하지만 자네 휘하의 병력으로 무찌르지 못할 적도가 없으니 마음이 놓이는군.”
“명국의 병부상서께서 구주에 남아 제 무용을 확인하기를 청하셨으니 기꺼이 응할 것입니다.”
큐슈의 영주들은 전달된 칙서와 조선군의 힘을 보고 내분을 시작하였다. 이미 해전에서 호되게 당한 아소씨는 적극 협력하기로 말하였고. 가주만 변경된 쇼니씨의 가신들도 협력을 시작하였다.
덕분에 큐슈 토벌 병력은 전체의 1/3인 12,500명만 남게 되었다. 훈련원 삼군 병사는 3,500명에 불과하였고 기병은 여진족 토관 가운데 절반인 2,500명, 나머지는 일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홍윤성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항구를 떠난 배가 오우치의 영토인 아카마가세키(赤間関 - 현 시모노세키)로 향하고 부두에는 물고기를 잡으러 나서는 어부들이 보일 뿐이었다. 부관으로 배정된 한철동을 바라보던 홍윤성은 크게 웃고 나서 말했다. 어명을 받은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이었다.
“아무리 세천씨가 부덕한 왜적이라 하여도 황상의 명령에 불복할 수 있겠는가! 분명 삽천교직(시부카와 노리나오)을 내어주고 본주(혼슈)의 병력들이 돌아올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지사님, 혹여나 업무를 태만히 하실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명국의 병부상서에게 태만한 모습을 보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잠시만 고생하면 되는 일이니 오히려 쉬운 것이지. 어서 태재부(다자이후)를 지나 적도를 무찌르러 진군하세나.”
홍윤성은 자신의 한계와 병력의 한계를 잘 가늠해서 영주들을 토벌하고 왜적들을 물리칠 작정이었으며 충분한 자신이 있었다. 기껏 해야 보름 뒤에 본대가 합류할 것인데 힘들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문종의 밀서(密書)는 홍윤성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큐슈 일대 사령관으로 근무하는 그의 전쟁은 앞으로 석 달 이상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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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년 3월 7일, 조선의 함대는 하카타를 출발하여 아카마가세키(赤間関 - 현 시모노세키)에 상륙하였다. 한양까지 올라와 조선의 도움을 청했던 새 가주 오우치 마사히로(大内政弘)가 전선을 내버려 둔 채 버선발로 뛰어나올 지경이었다.
전대 가주 오우치 노리히로는 본래 1465년에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역사가 변하면서 조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며 생각보다 오랜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늘어난 수명도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침공을 예상하며 산성을 구축하고 병사들을 조련시키며 격무에 시달리던 오우치 노리히로는 석 달 전인 정월 즈음에 급사하였다. 당주를 물려받은 마사히로는 아버지의 전략에 맞추어 호소카와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려 하였다. 하지만 한계는 순식간에 찾아왔다.
모든 병력을 동원해도 네 배 이상의 수적 우위는 전략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아키(安芸 - 현 히로시마 현 서부) 일대가 함락당하고 가신들은 오우치를 배반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 순간에 조선에서 원병을 보냈으니 자신의 뜻이 닿은 것이라 여겼다.
“대내씨를 돕는 일이 아니라네. 명국 황상께서 칙서를 내리셨기에 명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하여 나서는 것이라네. 구주 또한 평정하지 않았지.”
“토벌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조선이 저희를 도우러 온 것이 아니라 협정을 하려 군대를 보냈다는 말씀이십니까.”
“말이 통하지 않으면 싸워야 하니 별 수가 있겠는가. 왜국의 섭정인 세천(호소카와)이 황상께서 토벌을 명한 삽천교직(시부카와 노리나오)을 감싸고 있으니 먼저 협상을 시작해야지.”
마사히로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구치관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차례차례 하선하는 병력을 돌아보았다. 이미 일의 상세를 담은 밀지를 전달하였으니 남은 것은 전쟁 하나였다.
구치관 또한 호소카와의 전횡을 보면서 분노한 신료였다. 오히려 자신의 손으로 호소카와를 징벌할 수 있으니 마음이 놓였지만 이런 사실을 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우치 마사히로는 구차관의 소매를 잡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언제! 언제 명국 황제의 칙서를 전달하였습니까. 저는 상세한 일을 알고 있으며 얼마나 먼 고장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부디 말씀하여 주십시오.”
“보름이 조금 더 지났을 거라네. 소이(쇼니)씨의 가신을 통하여 전달하였지.”
“그렇다면 에치고에 전령이 도달하고도 남을 지경이니 호소카와는 칙서에 응할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도 명국도 우습게 여기는 자이니 징벌하심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응할 생각을 가졌어도 시부카와 노리나오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그에게 명나라의 토벌 대상으로 정해졌으니 가족과 가신들이 북경으로 끌려가 능지형을 당할 것이라 조언한 것이 보름 전의 일이었다.
지금쯤 호소카와가 보낸 병사들을 피해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겠지. 하지만 이런 사실을 이야기 할 이유가 없는 구차관은 멀리 있는 산을 돌아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혹여나 모를 일이지. 세천(호소카와)이 아직도 역도를 내어놓지 않았으니 만용을 부리는지도 모르는 일이라네. 아무리 늦어도 지금쯤이면 서신이 도착하였을 것인데. 혹여나 대내씨에서 이를 숨긴 것은 아닌가.”
“저희가 숨길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분명 서신이 당도하여도 큐슈로 보냈을 것인데 이를 가로챌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사히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척의 세키부네가 남쪽을 거슬러 올라왔다. 무로마치 막부의 가몬(家紋), 원 안에 세 개의 선이 그어진 형태는 무로마치 막부의 상징이며 호소카와가 섭정의 권한을 이용해 보낸 서신이리라.
배에서 급히 사람이 내려 인사를 올리며 서신을 구치관에게 건네주었다. 피로가 역력한 모습을 보니 며칠 동안 쉴 새 없이 노를 저어온 것이 분명하지만 눈빛은 살아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미 큐슈를 거쳐 온지라 이틀 정도 지체되었습니다. 명국 황상의 칙서에 대한 답변을 조선에 먼저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고생이 많았겠군. 부디 세천씨가 명을 지켰길 바랄 뿐이라네. 늙은 몸이라서 밖을 돌아다니기 힘든 일이니 순탄하게 풀리길 바랄 뿐이지.”
서신에는 이미 구치관과 권절이 예상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시부카와를 찾아 에치고로 사람을 보냈지만 도주한지 이틀이 흐른 뒤였다. 북쪽으로 도주하였으니 언젠가는 사로잡힐 것이고 혹여나 반항하면 시체로 만들어 목을 베어오겠다.
하지만 구치관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눈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늙은 신하의 분노에 권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척을 하였고 마사히로는 눈치를 보며 상황을 짐작할 뿐이었다.
“거절하였습니까? 호소카와가 무어라 하였습니까?”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군. 응하였으면 좋은 일이고 거절하였으면 설득할 일이라네. 하지만 도주하였다고? 일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가 도주하는 일이 있던가!”
“좌찬성께서 읽으신 말이 사람이 할 말입니까? 자신이 임명한 영주가 도주하였다고 거짓을 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칙서는 응하기 싫고 거절하자니 명분이 서지 않아 늘어놓은 변명이 불과합니다!”
서신을 받아들어 읽은 권절 또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갑자기 진전된 상황에 마사히로는 안도하였지만 구차관은 분노한 모습을 보임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오우치와 함께 호소카와를 쓰러트리는 일은 쉽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힘자랑일 뿐이며 어떠한 이득도 생겨나지 않는다. 이번 기회를 노려 오우치를 확실한 조선의 세력으로 편입하고 다른 영주들에게 이득을 뜯어내리라. 그렇게 구치관은 마사히로와 함께 군영으로 향했다.
“세천씨가 칙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헛된 변명을 늘어놓으니 일전을 벌일지도 모른다네. 그렇게 되면 자네들의 협력이 필요하니 전황을 말하여 보게나.”
“닷새 전 가신인 스에 히로후사(陶弘房)가 다케하라(竹原 - 현 다케하라 시) 일대에서 분전을 벌이다 급사하였습니다. 거듭된 패배로 인해 이와미(石見 - 현 시마네 현)의 가신들은 항복을 택할 지경입니다.”
“장수가 사망하였고 가신들이 분열하였다 하니 중요한 고장이겠군.”
“단순히 육전에서 패배한 것이 아닌 해전을 벌일 거점을 상실하였습니다. 내해의 유일한 통로인 구루지마 해협(来島海峡)을 유지할 수 없으니 적들이 야마구치(山口 - 현 야마구치 시)를 공략하려 할 것입니다.”
지도를 확인한 구치관과 권절 모두 신음성을 낼 뿐이었다. 흰 바둑돌이 오우치를, 검은 바둑돌이 호소카와가 규합한 서벌군을 나타낸 것이지만 검은 바둑돌은 지도를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 권절은 믿을 수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검은 바둑돌 하나가 병사 일천 명을 의미하는가?”
“이천 명입니다. 조선에서는 병사와 보인을 분리하니 그렇게 따지면 일천 명이 되겠군요. 저희의 병력은 바둑돌 열다섯 개이니 조선의 방식으로 따지면 일만 오천 명에 불과합니다.”
조선에서 예측하기를 오우치가 주장하는 20만의 병력은 허장성세이며 자신의 위기를 알리기 위해 과장한 숫자라 여겼다. 실제로는 보인을 합쳐 10만이 조금 넘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상식적인 선에서 징집한 병사라 하면 일본 전역을 합쳐야 6만 내외(병사만)라 여겼으며 이는 안평대군을 통해 알려진 일본의 실상으로 역산한 것이었다. 권절은 믿을 수 없었는지 마사히로에게 되물었다.
“대체 세천씨는 무슨 생각인지 알 길이 없군. 기껏 해야 십만이 넘을 거라 예상하였는데 병력을 어떻게 마련했단 말인가!”
“쌀 일백 석(일본의 1석은 당시 60kg, 전국시대 이후 180kg)에 병사 한 명을 징집하면 수성전을 벌이는데 합당하며. 원정군은 쌀 삼백 석에 한 명을 징집하면 될 일입니다. 원정에 참여한 영주들은 이백 석에 한 명을 징집했다 하더군요.”
구치관도 권절도 군문에 대한 지식이 있으니 얼마나 위험한 수단을 동원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선으로 치자면 준 총력전에 해당하는 규모로 원정군을 파견한 것이다. 둘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마사히로는 손사래를 치면서 애써 말했다.
“온전한 이십만 대군은 아닙니다. 원정군이다 보니 보인이 다소 많으며. 이미 점거한 지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병력이 분열하였습니다. 본대만 따지면 칠만 오천 가량이라 여겨집니다.”
“칠만 오천 이라 하면 아군의 세 배에 달하는군. 자네들을 상대하는 자를 제외해도 두 배 반이라네.”
사람은 칼에 맞으면 죽고 화살을 잘못 맞으면 죽는다. 훈련원 휘하 삼군이 아무리 강해도 세 배가 넘는 적을 당해내기 힘들며. 일반 병사들은 한 사람의 몫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 이기더라도 피해가 막심할 것이 분명했다.
“일단 세천씨를 만나보도록 하세나. 아국의 병사들이 당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진군을 멈추고 이야기를 들으려 할 것이네.”
노령의 구치관을 사절로 보낼 수 없으니 길을 나선 이는 권절과 신숙주였다. 그의 길 안내를 담당한 이는 이키 국 일대, 현재의 히로시마 인근의 영주인 고바야카와 히로카게(小早川弘景)이었다.
다케하라 인근에 도착하자 협상 장소라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사방에 병사들이 도열하고 창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들을 겁박하려는 불쾌한 모습을 보면서 권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보았다.
“병사들의 기세가 삼엄하기 이를 데 없군. 저들은 어느 지방의 병사들인가?”
“교토의 정병들도 있으며 도호쿠(東北) 지방의 병사들도 제법 보이는군요. 북부의 낙후된 고장인지라 싸움을 즐겨하며 전쟁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야인들과 닮은 면이 있군, 구주의 왜인들은 나약하였지만 이들은 무장을 철저히 갖추었으니 제법 강하겠어.”
권절과 신숙주 둘 다 불쾌한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군영 안으로 접어들었고. 호소카와는 단상에서 내려와 목례를 올렸다.
“명국 황상의 칙서를 수행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오신 두 분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인사는 되었소이다. 지난날에 경도(교토)에서 안면을 익혔으니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어찌하여 칙서를 어기고 무력을 행사하는 것이오.”
“문제의 원흉은 시부카와입니다. 제가 신임하여 에치고 슈고로 임명한 이가 은혜를 저버리고 도주하였으니 사람을 보내 추포하기로 정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혹여나 삽천교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거짓을 논하는 것은 아니요?”
호소카와는 당당히 목판으로 인쇄하고 자신의 직인을 찍은 방문(榜文)을 보여줬다. 도주한 시부카와와 그의 일족 그리고 가신에 대한 상세가 빼곡하게 적힌 물건이었으며 은 일천 냥의 현상금까지 걸려 있었다.
“쇼군께서는 명국 황상의 책봉을 받은 분입니다. 비록 어리지만 영민한 분이시며 조만간 제 섭정을 벗어나실 분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에서 오신 분들은 일본의 일에 대한 간섭을 관두시길 바랍니다.”
“간섭이 아니고 칙명이라 하지 않았소.”
“칙명이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합니까! 머나먼 이국에서 헛되이 목숨을 버리실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권절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신숙주도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손으로 내리쳤지만 호소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조용하게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희의 병력은 이십만 대군이고 오우치는 기껏 해야 삼만 명에 불과합니다. 물론 조선에서도 정병을 보내 큐슈의 와코(왜구)들에게 징벌을 내리고 있으니 강함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같은 수로 싸우면 절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병사가 육만 명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왜국의 방식대로 계산한다면 육만 정도라 여길 것이오.”
“정병이라 하여도 셋을 상대로 이길 재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여기서 돌아가시고 조만간 보내올 시부카와의 목을 기다리시지요. 설령 조선의 함선이 강대하다 하여도 저희는 무라카미(村上) 수군과 함께하니 섣불리 싸우실 수 없을 것입니다.”
호소카와의 급변한 태도를 본 권절은 큐슈에서 벌인 전쟁에 대한 정보가 모조리 전달되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큐슈에 남아있는 병력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갔으리라.
저러한 태도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였기에 보일 수 있는 자만심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게 이대로 싸우면 조선의 피해가 막심할 것이다. 신숙주와 눈빛을 주고받은 권절은 허장성세를 늘어놓았다.
“오도열도(고토열도)를 공격한 스무 척의 풍역선이 전부라 여기시오? 예비용으로 남겨둔 풍역선을 합치면 쉰 척에 달하니 참으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해전이 되겠소.”
“저희의 함대는 물자의 운송과 해전을 대비하여 육백 척을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무라카미 수군은 고토열도의 머저리들과 격이 다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일입니다.”
서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입김을 내쉬며 화를 참을 뿐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협정을 재개하기로 한 권절은 히로카게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전선(戰船)으로 육백 척의 함선이라 하는데 세천씨가 휘하에 둔 수군은 어느 정도로 강한가. 듣기로는 구주(큐슈)와 본주(혼슈)의 질적 차이가 상당하다 하더군.”
“수군에 한해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고토열도의 수군과 견주면 내해를 돌아다니는 차이만 있지 기세나 강함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라카미 수군의 장점은 물길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활을 쏘고 승선하여 날붙이를 휘두르는 것이 전부라는 말이군. 결국 수전을 벌인다면 육전 병력들을 차출하여 배에 태우고 다닐 것이 아닌가.”
“무라카미 수군은 세토 내해를 주름잡는 이들이며 지리와 해류를 모두 꿰고 있는 이들이니 필히 길잡이로 나설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는 날에는······.”
히로카게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다음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 지경이었다. 혹여나 패배하거나 함선이 나포되고 탑재된 화포가 적에게 넘어갈 것을 염려한 것이다.
권절도 그런 일은 바라지 않았다. 스무 척의 배로 일곱 배의 적을 격퇴할 때에도 기습과 유인작전으로 적의 숨통을 끊어놓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면으로 열한 배의 적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함선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승산은 있다네. 지금 자네가 수비하고 있는 권역이 경산(鏡山 - 카가미야마)에 있는 산성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옛 주군(오우치 노리히로)께서 전쟁을 대비하여 축성한 산성이지요.”
“이미 이길 전쟁이지만 피해를 줄여서 대승을 거둘 방법이 떠올랐으니 염려하지 말게. 예판 대감, 앞으로 보름을 기다릴 것이라 전하십시오. 보름 뒤에도 삽천교직을 데려오지 않으면 대내씨와 협력해 싸우기로 정한다면 좋을 일입니다.”
“나는 군문의 일을 많이 알지 못하니 오로지 병판 대감을 믿을 뿐이오.”
협상을 끝내고 야마구치로 돌아간 권절은 풍역선을 담당하는 임해도감 병사들과 화기도감 병사들에게 엉뚱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모든 병사들이 기겁할 명령이고 구치관 또한 권절을 말릴 지경이었다.
“풍역선에 있는 화포를 네 문만 남기고 하역하여 경산으로 옮겨라! 말이 부족하다면 대내씨가 소유한 말을 빌려서라도 모조리 옮기며 화포와 탄약도 함께 옮기는 일은 당연하다!”
“병판! 지금 무엇 하는 짓이오! 풍역선에 화포가 없다면 바다 위를 떠다니는 나무토막에 불과한데 병사들의 역량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권절은 거침이 없었다. 함대로 맞서 싸울 수 없는데 적들이 공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온 풍향과 해류는 무엇이고. 뇌력포와 벽력포를 비롯한 수십 문의 화포가 야마구치의 부두에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적의 병력을 분할할 계책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적들은 아국의 함대가 바다 위에 있기만 하여도 기겁할 것이 아닙니까.”
야마구치 일대의 목공들이 모조리 달려들어 나무를 깎아 가짜 화포를 만들었다. 역청을 칠해 시커멓게 변색된 나무들은 멀리서 보니 그럭저럭 화포처럼 보였으며. 진짜 천자총통도 있었으니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화포를 거의 다 덜어낸 픙역선은 권절의 지시에 따라 히로시마 만으로 향했다. 이를 지켜보던 무라카미 수군의 함선을 쫒아내기 위해 화포 몇 발을 발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