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14화 - 계륵(鷄肋) >
1470년 2월 17일, 대마도를 경유한 전령이 긴급히 동래에 도착했다. 분조 안에 들어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얼굴이 상기되 있었다.
“승전이더냐.”
“대승이옵니다! 육상과 해상 양면에서 대승을 거뒀으니 구주(큐슈)의 왜인들을 절반이나 격멸하였다 하옵니다.”
큐슈 왜인의 절반이라 하면 적게 잡아도 적의 사상자 및 포로로 잡힌 인원이 이만 명에 가깝다는 소리이다. 형님 또한 적잖게 놀랐는지 용상을 움켜쥐고 눈을 부릅뜨더니 장계를 받아들고 한참을 읽어 내리다 웃었다.
“다음 장계를 가져오너라. 과연 좌찬성답게 평시의 행적이 장계에도 묻어나오는구나.”
분조의 우의정 역할을 수행중인 나에게도 장계가 전해졌다. 장계를 요약하면 ‘군문의 일은 알 고 있사오나 모든 일은 주상전하의 뜻이기에 힘써 따를 뿐입니다.’이었다.
구치관은 원래 역사에서 세조에게 신임을 받은 관료이며 부패와 비리로 얼룩졌던 세조 통치기 몇 명 없는 청렴한 대신이며 문무 양면에 재능이 있는 자이다. 무관인 권절과 현장 지휘관인 홍윤성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겠지.
형님은 장계를 먼저 읽고 크게 웃더니 권절과 한철동이 올린 장계를 읽었다. 권절의 승전은 예상한 대로 돌아갔지만 한철동의 대승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여겼는지 직접 읽어 신하들에게 알려주었다.
[신 한철동 상왕전하께 승전을 올리나이다. (전략) 왜구들의 본거지인 우구도(宇久島 - 우구지마)에 머물러 있을 것이나 수효가 너무 많았습니다. 임해도감의 능력이 출중하여도 백오십 척에 달하는 적도의 함선을 감내할 수 없었나이다.
하오나 부장인 남이는 비범한 이이며 우둔한 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다 위에서 배를 모는 것이 육전에서 준마(駿馬)를 타고 종횡하는 장수의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계책을 마련하고 적도를 나누어 격멸하였나이다.
뛰어난 기병이 대오를 갖춘 적을 상대할 때에 활을 쏘아 타격을 입히듯 항구를 기습하여 적을 공격하였으며. 적이 맞서 싸우려 뛰쳐나오면 싸우기를 거부하며 적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듯이 도주하고 좋은 지형을 찾았사옵니다.
천기(天氣)도 아국의 것이었사옵니다. 풍역선이 선회하기 좋은 지형에서 지친 적을 상대로 선회하니 왜선을 정(丁)자 모양으로 포위하게 되었고. 일제히 화포를 쏘아 대장선을 격멸하고 도주하는 왜구들을 천천히 추포하였으니 대승을 거뒀사옵니다.
덕분에 적도의 함선 일백오십 척 가운데 최소 칠십 척을 격멸하였으며. 항구에서 손상된 함선을 감안하면 일백 척 이상을 격멸하였사옵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남이는 중한 인재이니 아껴 쓰시옵소서.]
“참으로 비범한 자로다. 본래 이러한 대승을 거뒀으면 공을 치하하기 바쁘거늘. 부장의 식견을 칭찬하니 한철동에게 은자 오백 냥을 하사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T자 전법을 동원한 것도 대단한데 기동 함대 개념을 도입하였으니 남이의 무재(武才)는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범주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요긴하게 쓰일 인재겠지.
분조 영의정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맹전도 군문에 있었던 자이지만 놀란 눈을 뜨고 형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큼 독창적인 전술이니 앞으로 두고두고 연구해야 하리라.
“일전에 종정국이 말했던 바를 기억하는 이가 있더냐. 왜국의 변방인 구주의 병졸들과 함선이 얼마나 된다 하였더냐.”
“병졸의 합은 오만 명에 달하며, 함선은 병선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사백 척이라 하였사옵니다.”
“육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팔천을 격멸하고 사천을 포로로 잡았다. 이미 박다(博多 - 하카타)와 주변의 섬을 공략하며 적도 사천을 격멸하였구나. 또한 해전에서 이미 왜선 칠십 척을 격파하고 다시 일백 척을 격멸하였다면 구주의 병력은 얼마나 남아있더냐.”
함선 전체를 평균 잡아 세키부네로 가정하면 한 척당 병사는 40명 정도 탑승한다. 이미 6,800명이 물고기 밥이 되었으니 22,800명이 날아간 거다. 한마디로 큐슈 동원병력의 절반이 박살났다.
한 달이나 두 달에 걸쳐서 싸운 것도 아니다. 준 전시체계를 갖추어 최대한 동원한 병력이 말 그대로 일소된 것이다. 이제 큐슈에서 걱정해야 할 일은 토벌 대상이 된 영주들의 발악이니 오우치를 지원하려 병력을 돌려도 될 것이다. 형님은 기분이 좋았는지 다음 명령을 내렸다.
“함락한 태재부(다자이후) 일대에 군영을 차리며, 순번을 정하여 주연을 열어 병사들을 위문하여라. 조만간 포로로 잡힌 왜인들이 대마도를 거쳐 동래로 압송될 것이니 수양대군은 거제도에 포로를 수용할 장소를 마련하여라.”
가뜩이나 귀찮은데 일이 생겼지만 열심히 해야지. 다음 날 주연이 열렸다. 형님은 쉬운 전쟁이라 여겼는지 웃는 얼굴로 어사주를 내려줬다. 가장 먼저 받은 이는 피렌체의 미술가들과 함께 회화를 만들고 있는 안평대군이었다.
“명국에게 많은 것을 넘겨줘야 하겠지만 구주를 아국의 영토로 만들 수 있을 것 같구나. 이미 구주를 손에 넣은 것과 같으니 불가한 일은 아니겠지.”
“옳은 말씀이옵니다. 구주의 병력은 보인을 제하면 오만 명에 불과한데 이미 절반을 격멸하지 않았습니까.”
형님의 폭탄 같은 발언을 바로 받아주는 안평대군이지만 소름이 돋았다. 뭐? 큐슈를 날름 먹어? 조선이? 형님은 홍위에게 선물을 주려는 생각이겠지만 나는 결사반대다. 지금까지 먹은 영토와 큐슈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다시 술이 한 순배 돌아가고 내 표정을 바라본 형님이 한 잔을 내려주신다. 어사주를 들이켜고 형님에게 술을 한 잔 올리니 바로 질문을 시작하셨다.
“수양대군은 탐탁지 않아 보이는구나. 구주를 아국의 영토로 삼는데 문제가 있더냐.”
“신이 바라는 것이 있사온데. 부디 구주의 태재부 일대만 권역으로 삼으시옵소서.”
“축전(筑前 - 부젠 국) 일대만 아국의 영토로 삼으라는 말이더냐. 그렇게 다스리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더냐.”
“가급적이면 사람을 보내 세금을 거두거나 병사를 파견하는 일도 행하지 마시고 왜인을 영주로 두고 아국의 상인들이 오가며 물산을 교류하게 하심이 올바를 것이옵니다.”
형님의 표정도 일그러지고 임시로 영의정 직을 수행하는 이맹전도 나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기껏 싸워놓고 통치하지 말라는 소리이니 다들 이해할 수 없나보다. 하지만 나도 생각이 있다.
일본은 빠르면 9세기, 늦어도 11세기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이들이 칭하는 쿠니(國)도 고장을 나누는 것이지 아예 별개의 국가처럼 움직이는 수준이 아니다. 물론 서로간의 교류가 적지만 분명히 있고 민족의식도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하나하나 묻고 싶구나. 어찌하여 그렇게 무위지치(無爲之治 -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를 행하라 권하느냐.”
“이유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왜국은 영주들이 혈연과 지연으로 고장을 다스리는데 이것을 무마할 방법이 없습니다. 인구와 크기가 전라도와 비슷한 고장의 질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스리는 방법이 있겠사옵니까.”
“불가하지는 않지만 한동안 무력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겠구나.”
중앙집권제인 조선에서도 가까스로 해낸 일인데 완벽한 봉건제인 일본에서 지방 호족을 축출한다? 처음에는 따라오긴 해도 이후 밑도 끝도 없는 반란, 일본에서 잇키라 부르는 민란이 큐슈 전체에서 일어나겠지.
권력에서 밀려난 호족들이 농민들을 설득해 작은 난동을 부리고. 결국 그게 민란으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물론 일본에서는 일본답게 해결한 경우가 많았지만 조선에서 그걸 쓰면 왕의 권위는 물론이고 국가의 근본이 흔들린다.
일본의 잇키 가운데 상당수는 무력진압. 무력진압으로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생매장하고 마을 자체를 불태워 없던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민본(民本)사상이 바탕이 되어 세워진 조선이면 항적(項籍 - 항우)의 재림이라고 간관들의 사직과 상소가 빗발치리라.
물론 이런 것은 이야기할 거리가 안 된다. 하지만 형님이 운을 띄웠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지. 군사 기밀 누출도 심각한 문제니까.
“둘째의 문제로 무력으로 다스리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구주는 넓은 고장이며 왜인들은 농업과 어업을 즐겨 하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창칼을 들고 병사로 징집되지 않습니까.”
“내가 염두에 둔 것도 이러한 일이다. 구주의 왜인들을 징집하여 병사로 사용하면 번잡할 일이 없을 것이며. 대양도 사람과 같게 다룰 수 있겠지.”
“하오나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대양도의 토인들은 십만에 불과하였는데 추정 인구가 백이십만 명에 달하지 않습니까. 조만간 보총은 물론이고 화포에 대한 비밀이 새어나가고 바다를 따라 왜국 전체에 번질 것입니다.”
“분명 왜국은 구리와 유황이 많이 나는 고장이니 초석만 구할 수 있으면 아국보다 많은 화포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 그렇다면 본주(혼슈) 영주들이 더욱 강해지겠구나.”
물론 잇키 자체를 봉쇄하는 방법도 있지. 하지만 핵심 병력인 훈련원 소속 삼군이 머물러야 하는 일은 당연하고 이로 인해 전략 전술의 노출과 병장기의 노획 혹은 절도로 인한 기술 유출이 시작되면 격차는 순식간에 좁혀진다.
이렇게 되면 단기 결전은 불가하고 장기전이 시작되는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선의 현재 전력으로 장기 원정 전쟁은 불가능하다. 아마 전쟁이 3년만 이어져도 농지가 비어 작황이 불안정해지고 인력 공백이 가까스로 메워지고 있는 북방에서 문제가 빗발치겠지.
물론 참수작전과 같이 적의 수뇌부를 일소해버리면 된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 수뇌부가 있던가? 막부는 호소카와의 독재기관이고 호소카와가 실각하는 순간 전국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각지의 다이묘들이 연합해서 끝없는 전쟁이 이어지겠지.
하지만 형님은 만족스럽지 못한 눈치이다. 말년에 홍위를 위한 선물을 마련하는 아버지의 모습 같지만 선물과 짐덩어리는 구분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구주의 백성들에게 여러 혜택을 부과하고 세율을 면한다면 호족을 감시하는 아국의 관료들을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그것이 세 번째 문제이옵니다. 호족은 군사와 수취를 겸임하며 한 고장을 다스립니다. 이렇게 되면 감시를 명목으로 하여 수많은 인재를 파견해야 하옵니다. 결국 녹봉을 지급하는 일이 문제이옵니다.”
“결국 호족의 통치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지방관을 아국과 동일하게 두어야 할 것이며. 결국 이득을 얻을 방법이 없구나. 내가 알기로 왜국의 세율은 삼 할에 미치지 못하니 이 이상 거둔다면 거센 반발이 있을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설령 세율을 올리는 방안을 모색하여도 흉년이 이어지면 피할 수 없는 민란이 발생할 것이옵니다.”
전국시대라면 세율이 5할을 넘어서 6할에 근접하니 세금만 내려도 두 손을 들고 환영할거다. 하지만 지금의 세율은 3할 정도이니 조선이 관여해도 이득은 없다. 오히려 큐슈를 다스리는데 지속적인 자금이 소모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득을 보려고 해도 최대한 이득을 볼 지역을 택해서 먹어야지. 그러니까 알짜배기인 지쿠젠, 부젠, 히젠 정도만 먹는게 최대치이다.
형님도 이런 생각까지 이어지지 못했는지 점점 더 내 의견에 동조하고 있으며 다른 신료들도 놀라움보다는 나의 식견에 감탄하는 눈치였다. 여기서 쐐기를 박기 위해 물주의 이야기를 해야지. 다들 잊고 있는데 지금 감관으로 명나라 병부상서가 근무 중이잖아.
“마지막 문제는 명국입니다. 이미 아국은 원정에서 비장의 패를 모두 꺼내들었습니다. 북방 전쟁보다 강해진 병사의 수준, 더욱 많은 동원 병력 그리고 함대와 화포의 사용까지 드러냈사옵니다.”
“분명 동원할 수 있는 원정 병력을 모두 쥐어짜냈지. 이러니 명국이 아국을 경계할 것이라는 말이더냐.”
“옳은 말씀입니다. 만약 구주를 그대로 집어삼키면 아국을 충실한 번국이 아닌. 비수를 숨긴 음험한 나라로 여길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형님도 한참 고민을 했다. 적과 싸워서 힘들게 승리를 거두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 버렸다. 아무리 큐슈가 변방이며 전투력이 형편없다 해도 병부상서는 아첨으로 따낸 자리가 아니다. 지금 조선군에 대한 장계를 작성중이겠지.
결정적으로 조공으로 바쳤던 말 보다 거대한 한혈마 혼혈종을 사용한 기병대까지 보여줬다. 영덕제가 아무리 조선을 좋아해도 번국으로 좋아하지 군사적 위협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 관계가 파탄날 것이다. 형님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잔을 채우자 단숨에 들이켰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처음에는 모든 수를 동원하여 구주의 왜적을 격멸하여 대내씨를 구원하려 하였다. 전력으로 임하니 너무나 큰 승리를 단숨에 거뒀구나.”
“그러하니 아국이 다스릴 수 있는 영토를 제외한 구주 일대를 명국에게 할양함이 옳다 여겨지옵니다. 명국의 봉신으로 두게 하면 염려가 줄어들 것이 분명하옵니다.”
“명국이 구주를 다스린다 하였느냐. 그렇다면 아예 국서를 작성하여 명국으로 보내는 것이 옳겠구나. 대승을 거둔 장계와 같이 보내면 명국에서도 만족할 것이다.”
술자리를 망쳐 놓을 뻔 했지만 이런 시선이 중요하다. 어디까지나 필요한 영토를 먹고 필요한 수준에서 이득을 얻는 자제력이 필요하지. 형님도 완벽한 승전에 자제력을 잃을 뻔 했지만 나의 조언 덕분인지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았다.
“내일은 왜국의 패장인 소이교뢰(少弐教頼 - 쇼니 노리요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처우를 결정하고 아국에 복속하면 구주 일대를 토벌하는 주구(走狗 - 사냥개)로 삼을 것이니 주연을 적당히 끝내는 것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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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쇼니 노리요리가 복장을 갖춰잎고 형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본영에 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습격으로 인해 죽었지만 운이 좋았나보다. 그는 인사 대신 도게자(土下座)를 하며 형님에게 예의를 표시헀지만 형님은 한심하다는 듯이 노려보면서 말했다.
“진작 항복하였다면 네가 몸을 상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배에 칼을 대는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니겠느냐. 애초에 명국에서 보내온 칙서에 무어라 적혀있었는지 읊어 보거라.”
“부덕한 이를 벌할 것이라 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길을 열라 하였습니다.”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이라는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구나. 죽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 것이니 무슨 생각으로 길을 막았는지 고변하여라.”
쇼니 노리요리는 토벌 대상이 아니었다. 하카타가 함락당한 이후 항복했다면 조선 입장에서도 훗날 통솔하기 편한 세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 물론 병력들은 다른 영주들에게 빼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싸운 덕분에 이득을 봤다. 너무 완벽하게 박살난 덕분에 큐슈 전체 병력의 절반을 말아먹었고. 도주한 병력들은 사방으로 떠돌며 조선군에 대한 소문을 퍼트렸겠지. 이런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일지 나도 궁금하다. 노리요리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본래 변견(番犬 - 집 지키는 개)는 한 끼를 대접받아 집의 식구가 되며 도둑의 발등을 뭅니다. 하지만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변견은 상대가 정당한 권리를 얻어 집을 수색하여도 짖어대며 발등을 깨무는 일입니다.”
“변견이 아니고 몸값을 불리려는 투구(鬪狗)의 모습이 아니더냐! 아국의 정병들이 박다에서 보인 무용을 모를 이유가 없거늘! 정녕 패전을 원했다면 천기를 노려 습격하는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리요리의 창백한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세차게 박아댔다. 아마도 자신의 몸값을 불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기 싫었겠지. 하지만 승산이 있다 싸웠단 상대가 너무 강했으니 아예 박살이 난 것이다.
명나라의 칙서를 따르자면 징벌 대상이 아닌 영주들에게는 조선의 판단이 우선이다. 즉 형님의 한 마디로 대양도로 끌려가 유황광산에서 일하다 죽을 수도 있다. 형님은 분노를 숨기지 않고 노리요리를 다그쳤다.
“네가 거짓을 논했으니 다음 기회는 없다. 본디 구주의 병사 업무를 담당하여 탐제(探題 - 단다이)로 태재부에 있어야 할 삽천교직(渋川教直 - 시부카와 노리나오)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장계를 보니 그의 셋째 아들이 원병을 보낸 것이 전부더구나.”
“시부카와 노리나오는 에치고(越後)의 슈고 다이묘직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새 영지를 다스리려고 머나먼 고장을 다녀오는지라 제가 임시로 큐슈 단다이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대마도주가 보낸 이들이 구주 일대를 돌아다녔느니라. 다시 거짓을 논하는 것이냐.”
“지난 달 초에 막부의 명이 하달되어 슈고직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야마나씨(山名氏)와 하타케야마씨(畠山氏)가 권력에서 멀어지며. 그들의 영지를 호소카와와 친밀하던 이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그 공백을 메우는 이가 시부카와 가문입니다.”
그러니 시부카와가 도주한 것이 아니고 그냥 다른 고장의 슈고 다이묘로 발령되었다고? 오우치의 세력을 일소하는 대업을 눈앞에 둔 호소카와는 원정 직전에 세력 편성을 해서 내부 불만을 잠재운 것이다. 그런데 에치고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