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13화 - 경인년 전쟁(5) >
다자이후(太宰府) 인근의 왜병들은 빗방울을 맞으며 사방을 뛰어다녔다. 한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패퇴했던 하카타 수비전의 끔찍한 패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수비를 핑계 삼아 조선군과 싸움을 피했던 오노죠산성(大野)에 있던 패잔병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산을 뛰어 내려왔다. 조선군의 출병이 전해진 직후 다자이후에 비가 내렸으니 쇼니 노리요리의 말대로 하늘이 감동하여(거짓말이다) 기적을 내린 것이라 여겼다.
“놈들이 카시이 궁에 진영을 차렸으니 히메노미코토(息長足姬尊 - 진구왕후의 시호)께서 진노하시어 신푸(神風 - 당시에는 가미카제라는 말이 없었다)와 신우(神雨)를 불러오셨다!”
“신라를 정벌하였던 일을 기억하라! 조선은 신라의 후계이니 타케우치노 스쿠네(建内宿禰 - 신화상의 인물, 신라를 정벌할 때 참모장을 담당하였다 한다)의 가호가 함께 하신다.”
“고려의 사신이 당도하여 간청하였던 일은 잊지 말라! 간제온지(観世音寺 - 관세음사)는 사신이 머물던 장소이니 주군께서는 머문 순간부터 천기(天氣)를 예측하신 것이다!”
알 수 없는 옛날이야기. 역사도 아닌 신화와 설화가 진실로 돌변하여 병사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병사들의 모습을 보던 쇼니 가의 가신은 한 방울씩 비가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주군께서 열흘 이내에 비가 내린다 하였는데 정말 닷새 만에 비가 내릴 줄은 몰랐지. 비가 자주 내리긴 하지만 정말 때를 맞추어 내리는군.”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스쿠네의 연령이 280세라 하던데 실존하는 인물은 맞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74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주군께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라 하시면 끌어올리는 것이다. 잡생각은 집어치우고 병사들을 통솔하여 출병 준비를 마쳐라.”
어제까지만 해도 탈영병이 속출하여 목을 베어 군기를 잡을 지경이었다. 패배와 조선군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니 원병으로 도착한 병사들조차 소문을 듣고 질겁할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쇼니 노리요리는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을 시작했다. 조선군의 본영은 덴노가 제사를 올리는 카사이 궁이니 신들이 진노할 것이며, 열흘 이내에 불벼락을 몰아낼 비를 퍼부어 승리를 약속한다고.
조선이나 명나라라면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을 이야기지만 아직도 일본, 특히 큐슈 일대는 신화의 흔적이 남은 고장이었다. 그런 병사들에게 가신들이 일대의 역사와 자신들도 믿기 힘든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이야기를 조합한 소문을 퍼트렸지만 소문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조선 놈들은 카쿠즈치의 가호를 받아 왼쪽 어깨에서 불길을 뿜어내 눈으로 쏜다더라! 하지만 비에 맞아 불길이 사라질 것이니 힘을 쓰지 못하겠지!”
“미도리오니들이 비가 내리면 풀로 돌아간다더라! 놈들이 비가 내릴 때에 싸운 적이 없었지!”
물론 소문에 살이 붙어 기괴하게 변하는 일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만에 하나 패배하기라도 하면 도주한 병력들이 온갖 소문을 퍼트릴 것이 분명하지만 그런 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설마 패할 일은 없겠지. 시부카와 가문의 삼남인 다다시게(渋川尹繁) 휘하의 정병까지 지원하였으니 우리의 병력은 사만 명(실질 전투병력은 이만 명)에 달하니까.”
군막 안의 장수들이 대부분 병사들을 통솔하고 있지만 쇼니 노리요리와 마사스케 두 부자는 마지막까지 남았다. 끝까지 일전을 벌이려고 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마사스케는 억울한 표정으로 하소연을 하였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조선과 맞서 싸우려 하시는 겁니까? 항복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내왔으니 협력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네 생각은 정말 짧구나. 만약 공격이 시작된 직후 명나라의 권위에 굴복하여 항복하였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느냐. 형편없는 자라 여기고 마음대로 부려먹다 내칠 것이 아니겠느냐.”
노리요리의 꾸중에 장남인 마사스케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노리요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천기를 틈타 단 한번만 승리를 거두고 항복하면 될 일이다. 너는 하카타에 있었는데 네가 이야기한 조선군의 실력이 분명하다면 화포를 쓰지 못한다고 대패할 일은 없겠지. 그저 적을 몰아내 하카타로 되돌리는 것이 전부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실력을 보인 이후 고개를 숙이면 조선이 헛되이 대할 일은 없을 겁니다.”
“네가 드디어 배운 것이 있구나. 그런데 무언가 불만스러운 것이냐.”
“하지만 조선군이 먼저 치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거대한 오죠노산성을 끼고 수성전을 벌이는 일이 옳습니다.”
북쪽에 보이는 오죠노산성은 한반도의 삼국시대에 세워진 산성이다. 백강 전투의 끔찍한 패배 이후 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다자이후에 병영을 만들고 산성을 축조하였지만 오백 년의 세월은 산성의 흔적만 남기게 만들었다. 노리요리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수성전은 멍청한 짓이다 폭풍이 아니면 커다란 화포 위에 천막을 씌워 마음대로 쏘아댈 것이며. 오죠노산성은 오래 전에 세워진 산성인지라 말을 타고 뛰어넘을 수 있다. 독안에든 쥐와 같이 몰살을 당할 것이 아니냐.”
마사스케는 다자이후에서 하카타까지 제법 많은 논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노리요리를 쳐다보았다. 농사를 위해 논두렁을 막아놨으니 약간의 비만 내려도 논은 진창이 되어 기병의 움직임을 막을 것이다.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구나.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멍청한 다다시게도 상황을 알아차릴지 모른다. 혹시 모를 일이니 너에게는 분견대를 지휘하여 나를 호위하도록 명하겠다.”
이번 일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항복하리라. 하지만 완벽한 승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선군을 패퇴시키면 충분하니 전략 자체가 변하였다. 그러니 쇼니 노리요리는 생각하지도 못한 장소에 진영을 만들었다.
“정말 이렇게 질척거리는 논에서 싸우실 작정이십니까? 적을 추격할 수 없으니 승전을 거두어도 효험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정한 일이니 염려하지 말고 진형을 갖추어라. 놈들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기병이지만 기병은 논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힘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
불만이 많았지만 지엄한 주군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질척거리는 논두렁에 병사들이 도열하였고 서늘한 진흙의 감촉을 느끼며 욕을 내뱉었다. 훗날 후쿠오카 공항의 남쪽, 츠키구마(月隈)라는 작은 마을이 쇼니 군의 본영이 되었다.
군영을 차리고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조선군의 선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척후를 보냈는지 미카사강(御笠川)을 따라서 진군하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하카타를 함락시킬 때와 같이 신속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그러면서도 질서 정연하게 다가오는 모습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비가 내려 행군을 느리게 하는지 아니면 숨겨둔 계략이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패전의 기록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의 병력은 보인을 제외하고 2만, 자신들의 병력은 보인을 포함하여 4만이었으니 병사의 수는 거의 비슷하였다. 조선군이 오백 보(800m)에 도달하였을 무렵 효시(嚆矢)가 빗발치듯 날아오르고 징과 북이 울리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신속히 진군하라! 모조리 달려들어라! 기세를 이어나가 적들을 몰아붙여라!”
“츠쿠네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미도리오니들을 쳐부숴라! 불길이 꺼진 조선군의 목을 베어라!”
더 이상 지체하면 기세가 꺾일 것이라 염려하여 일제 돌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병사들은 제각기 병장기를 챙기고 가신과 사무라이들의 지시를 받아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쇼니 노리요리를 비롯한 본영의 장수들은 초조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손을 움켜쥐어 핏물이 새어나올 지경이었다. 자신들의 예상이 옳다면 조선군은 화포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윽고 조선군의 후방에서 둔중한 폭음이 들려오며 선두에 선 병사들 근처에 포탄이 떨어졌다. 포탄에 직격당한 병사들의 움직임이 둔해졌지만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본영에 세운 사다리 위의 병사가 외쳤다.
“조선군 전열과의 거리는 약 일백 보(160m)! 병사들의 기세가 꺾이지 않습니다!”
“손실이 클 것이니 예비대를 바로 투입하라! 첫 격돌에 나서는 이들은 대부분 죽을 것이다!”
천천히 대열을 이루며 접근하여 포탄에 얻어맞느니 손실을 크게 입더라도 백병전을 택했다. 접근하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면 사기가 급락하여 모조리 퇴각하리라.
“놈들이 비가 내리니 투석기를 준비했을 것이다! 피해가 크지 않으니 염려하지 마라!”
포탄을 투석기라 속여라. 간단한 명령이지만 빗소리와 함성에 폭음이 묻히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의 본영에 다가설수록 병사들도 위화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둔중한 천둥소리가 들리고 주변의 병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다. 분명 투석이라 하였지만 하늘을 보아도 날아오는 돌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궁시로 지원하지 않습니까? 놈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궁시는 무슨! 놈들의 활은 각궁(角弓)이라 아교가 녹을 것인데 대체 뭐로 으아아아아악!”
멋들어진 오오요로이(大鎧)를 입은 가신이 강한 화살에 배를 관통당해 바닥을 뒹굴었다. 화살 비를 뒤집어쓴 병사들은 대응사격으로 적의 궁시를 막아낼 궁병을 찾았지만 궁병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 특유의 활은 아교를 사용하지 않아 습기에 강하지만 위력이 약했다. 위력을 보충하기 위해 최소 여섯 자(180c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가 되었고 돌격 따위는 엄두에도 내지 못하며 성큼성큼 뛰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가까스로 조선군의 전열과 마주친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대열을 만들고 창을 들어올렸다. 조선군은 그저 창을 내밀고 눈을 부라리고 있었으니 평상시와 같이 창을 내리치면 충분하다 여겼다.
“어?”
자신이 힘껏 내리친 창은 조선군의 창 끄트머리도 아닌 중간을 조금 넘어설 뿐이었다. 이전에는 비슷했던 창이지만 훨씬 길어졌으니 자신의 공격이 닿을 이유가 없었다. 의문도 품을 틈도 없이 대장창이 천천히 앞으로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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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절은 미리 만들어둔 정란(井欄 - 공성병기. 나무로 만든 탑을 쌓아 사다리를 걸거나 활을 쏜다) 형태의 이동식 망루에 올라 천리경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적의 판단은 대부분 옳았지만 단 하나의 사실 때문에 패하게 되었다.
화포를 사용하지 못하게 비가 오는 날을 노린 점, 기마병을 활용하지 못하게 논을 사용한 점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변수가 없으니 오로지 병사들의 능력으로 결판날 싸움이었다.
“소이교뢰(쇼니 노리요리)는 제법 뛰어난 장수로군.”
“저 또한 놀랐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전장을 택하는 모습이 바람직하였으나 상대를 잘못 만났지요.”
“이미 볼 것은 다 보았다네. 자네는 어서 기마로 후방을 급습할 준비를 마치게.”
“크게 돌아가야 하니 세 각(45분)은 걸릴 것입니다. 적의 본영은 이미 파악하였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정진영이 망루에서 내려가 여진족 기병과 함께 서쪽 멀리 사라졌다. 주요 전장이 논밭이라 하여도 적의 본진은 엄연히 마을 인근에 있었다. 전장을 크게 우회하여 강을 넘어 돌격하면 허를 찌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전선을 훑어보던 권절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지금까지 놈들의 돌격에 대응하기 위해 천자총통과 자모포를 쏘아 전면을 타격하였다면. 전선이 형성된 지금은 본격적인 포격에 나설 차례였다.
“대완구를 다루는 화기도감 병사에게 명령을 하달하라! 본영으로부터 육백 보 거리에 적의 원병이 있으니 칠백 보를 노려 쏘아라!”
성급히 싸울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 싸움에 나서면 처음에는 흥분과 생사를 오가는 공포에 사로잡혀 주변을 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잠시라도 사유(思惟)할 시간이 주어지면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위협적인 무언가를 찾기 마련이었다.
전열을 형성한 훈련도감 병사들과 일반 병졸들은 처음 접해보는 대규모 실전에 허둥거렸지만 훈련 덕분에 점점 실력이 늘어가고 있었다. 점차 조선군의 진격속도가 빨라졌다.
“내 창 토막 났다! 단창! 단창 줘!”
“놈들이 근접하여 단궁으로 활을 쏜다! 장패로 막아봐!”
“그런 소리는 대장창을 거두고 하란 말이다! 낭창진의 기본이 뭐야! 대장창으로 적을 파고드는 거잖아! 우리는 너희를 보호하면 충분하다고!”
낭창진은 사선이 겹친 진형으로 적의 돌격을 받아내고 역으로 공격하는 전술이다. 주력은 장창수이며 장창을 가슴 높이로 곧게 들어 천천히 진격하는 일이 전부이다. 적이 필사적으로 돌격하면 미늘창이 막아내고, 장창수를 노리면 방패수가 보조한다.
도감군도 다른 조선 병사들도 피해를 입었지만 크지 않았다. 기껏 해야 발악적으로 던진 단창이나 급히 활줄을 매어 쏘는 단궁과 궁시, 혹은 교묘하게 장창의 틈을 노린 사무라이가 날뛰는 일이 전부였다.
반면 왜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장창의 벽을 막아낼 방법이 없으니 죽음을 부르는 벽과 같았다. 단 네 자의 차이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심지어 왜군 방향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궁시! 궁시를 날려!”
“궁수들도 모조리 고슴도치가 되어버리는데 뭘 어쩌란 말이야!”
후방에 집결한 궁수들은 철궁의 사격을 맞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선에서 즐겨 사용하는 각궁과 달리 60보(96m)를 쏘는 일도 벅찼지만 몸을 관통하고 여력이 남을 지경이었다.
“젠장! 죽고 싶지 않아! 부처님! 부처님!”
한 병사가 애처롭게 자신의 배에 박힌 장창을 손으로 움켜쥐었지만 한 걸음씩 다가오는 박자에 맞추어 장창이 조금씩 박혀 들어갔다. 병사가 입으로 피를 쏟으며 절명하자 조선군 장창수는 창을 휘둘러 시체를 털어내고 바로잡아 천천히 진격했다.
분통을 터트리던 사무라이가 와키자시(소도)를 들고 창 아래로 파고 들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방패수의 환도였다. 엎드린 등으로 내리쳐진 환도에 갑주가 박살나고 바닥에 뻗어 숨을 거두었다.
“요놈의 쥐새끼! 어디서 다리를 베려고 달려들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한 왜병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윽고 한 병사가 장창이 스치고 가 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
“너무 커! 미도리오니는 역시 오니가 분명해!”
“저게 뭐가 크다고 그러나! 옆에 계신 나리도 크긴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전부 다 크잖아······. 역시 조선에서 오니가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해! 주변에 있는 미도리오니들은 모두 사람이 아니야! 사람의 탈을 쓴 요괴였다고!”
전열을 담당하는 훈련도감 병사들의 평균 신장은 167cm에 달했다. 신체 조건으로 선발하며 뒤늦게라도 체격을 키우기 위해 훈련소에서 아낌없는 식사를 제공하고 지속적인 단련을 한다.
보통 왜인들의 시선으로 보면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커다란 사람들. 신장만 큰 것이 아니고 덩치 자체가 거대한 괴물들이 천천히 접근하며 죽음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머리 위를 가로지른 비격진천뢰가 질척한 논에 박혔고. 진영 뒤에서 폭발하며 지원 병력에게 파편 세례를 퍼부었다. 병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불이야! 다시 불벼락이 쏟아진다! 앞이 아니고 위에서 쏟아진다!”
“놈들이 다시 카쿠츠치를 불렀다! 히메노미코토시여! 어디 계시나이까? 더욱 많은 비바람을 불러주시옵소서!”
“퇴각하지 마라! 도망가지 마! 맞서 싸워! 야 이 새끼야 어디서 도망가!”
가신들이 방법을 찾으려 하였지만 변수를 만들어 내려 하여도 처음 전장을 정한 시점에서 병사들의 역량 차이로 승패가 결정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더욱 많은 병사를 투입해도 좁은 지형이니 한계가 있었고. 기병은 애초에 접근하기도 힘든 지형이었으니 본진을 지키며 허송세월을 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퇴각하여도 답이 없었다.
진창을 허우적거리며 사방으로 달아나는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본진 근처까지 들려왔다. 이미 돌이킬 방법이 없었으니 쇼니 노리요리는 한숨을 내쉬며 부채를 마사스케에게 건네주었다.
“지금부터 가주는 네가 되었다. 책임을 지고 셋푸쿠(切腹 - 할복)를 행할 것이니 가이샤쿠(介錯 - 배를 가른 이후 목을 베는 것)는 없어도 된다.”
“아버지!”
“명국의 사신이 분노를 품을 것이나 배를 가른 내가 사지를 뒤틀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분노가 풀릴 것이다. 그리고 다다시게 자네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당장 퇴각하게. 오늘의 전훈을 잊지 말고 큐슈를 수호하게나.”
노리요리는 이를 악물고 와키자시를 들었지만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대마도로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한 일. 현재 대마도주인 히코시치(彦七 - 소 사다쿠니의 아명)와 인연을 맺은 일. 그리고 사이가 멀어지며 조선의 편을 들길 거절한 일.
그의 얇은 뱃가죽에 시퍼런 칼날이 박히는 순간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와키자시를 떨어트린 노리요리의 귀에 들리지 말아야 할 단어였다.
“도이(刀伊 - 여진족 해적)다! 도이 수천이 서쪽에서 들이닥친다! 주군을 수호하라!”
적군이 본영으로 들이닥쳤는데 한가롭게 할복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자신의 가문을 물려받은 아들이 살해당하기 이전에 항복해야 한다. 꿰뚫린 뱃가죽에서 핏물이 새어나왔지만 노리요리는 마지막 힘을 다해 군영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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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경을 말안장에 넣은 정진영, 한때 건주 양위의 하질이였던 장년의 남성은 돌격 직전 사기를 북돋기 위하여 앞으로 나섰다. 적의 눈을 피해 천천히 진격한 덕분에 일천 보(1.6km)거리인데도 적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안장에 놓인 칼집에서 석 자(1m)에 달하는 검. 한때 이징옥이 사용한 어사도를 물려받아 사용하는 정진영은 칼날을 빛내며 사기를 북돋는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는 조선의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 살기 전에 우리가 어디의 사람이었느냐!”
“자랑스러운 아이신 구룬(금나라)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렇다! 아이신 구룬의 백성들은 살 길이 막막해지면 청해(靑海 - 동해)를 가로질러 왜적을 약탈하였다! 이것이 잘못된 일이더냐!”
“아닙니다! 옳은 일입니다!”
김시습이 북방을 오가며 여진족의 역사와 풍습에 대한 지식을 설법(說法)을 빌어 알려주었고. 여진족들은 자신이 조선에 속한 금나라의 후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뿌리를 남겨둔 덕분에 결속할 수 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해적들은 고려와 일본을 평등하게 약탈하였지만 그런 일은 김시습이 적당히 검열하였다. 어디까지나 고려를 괴롭히던 왜구들을 역으로 약탈한 정당한 행위라 포장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입은 것이 무엇이더냐! 찰갑도 아니며 마갑도 없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나섰던 대로 피갑(皮甲)을 입고 있을 뿐이다! 아이신 구룬은 사라지고 조선의 백성이 되어 살지만 우리의 뿌리가 무엇이냐! 조상이 행했던 올바른 일을 다시 시작하자!”
삼천에 달하는 여진족 기병, 한혈마 혼혈종을 타고 몸을 아낌없이 단련한 이들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점점 속도를 높였다. 비가 내려 연약해진 땅이기에 무거운 갑주 대신 조상들이 입던 피갑을 입었지만 오히려 효과가 좋았다.
쇼니 가의 본영에 빗줄기를 뚫고 온 몸에 가죽을 두른 거대한 기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보아온 말과 사람이 아닌 너무나 거대한 말이었다.
“도이다! 도이가 나타났다!”
“도이가 아니다! 저놈들은 요괴다! 너무 거대하지 않느냐! 오니가 오니말을 타고 다닌다!”
본진의 병력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였다. 닥치는 대로 사람을 베고 말로 짓밟으며 진군한 정진영의 눈에 한 무리의 병사들, 늠름하게 원형에 검은 줄 세 개가 그어진 깃발을 들고 있는 기병과 보병이 섞인 이들이 포착되었다.
“조상해(趙上海)! 저놈이 적장이 분명하니 한번 쏘아보게!”
“야! 이 왜놈의 새끼야!”
일대에서 이름난 명궁인 조상해의 활이 허공을 가로질러 일백 보 넘게 날아가 적장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말 위에서 멍하니 있던 적장의 사타구니에 적중하였다. 고통을 상상하며 잠시 몸서리치던 정진영은 적장이 쓰러진 틈을 노려 적병을 짓밟기 시작했다.
본영에 남아있던 마지막 병사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거대한 말을 막아낼 방법도 없었으며 기껏 창을 들어도 잠시 뿐이었다. 재빨리 우회한 병사들에게 짓밟히거나 습기에 강한 만주궁을 쏘아 몸에 화살을 쑤셔박았다.
퇴각하는 와중에도 굳게 치켜든 가몬(家紋 - 가문을 나타내는 문장)은 좋은 목표였다.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고 쏘아버리며 본영을 피바다로 만든 정진영을 멈춘 것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두 사람이었다.
“항복! 항복하겠소! 당장 항복할 것이니 멈추어 주시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부자(父子)로 보이는 둘이 나란히 고개를 조아리니 분명 높은 직위에 있으리라. 정진영을 비롯한 여진족들은 전의를 잃은 이들을 모조리 포박하여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