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9화 - 경인년 전쟁(1) >
11월이 되자 오우치의 대규모 사절단이 무턱대고 동래에 상륙하였다. 평상시에는 먼저 조치를 취하고 경과를 대충 보고하면서 줄타기를 하던 자들이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백 명이 넘는 사절단은 홍위를 만나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하였고. 홍위는 마음을 숨긴 채로 이들을 방치하였다. 처음에는 예조판서인 신숙주가 나서 대화를 하였지만 통하지 않았다. 다음 차례는 오우치와 면식이 있는 내가 나섰다.
얼마나 다급한 일이었는지 오우치 노리히로의 아들인 오우치 마사히로(大内政弘)가 사절단의 대표로 방문하였다. 창백한 얼굴로 인사를 올렸지만 심드렁한 얼굴로 받아쳤다.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이대로 있다가는 가문이 멸망하게 생겼습니다.”
“대내씨가 어인 일로 이렇게 다급해 하는지 알 길이 없구려. 지금껏 서한을 보내어도 언제나 먼저 행동하고 상황이 급박해져도 서한만 올렸는데 갑자기 나서니 별 일이 다 있구려.”
오우치가 조선에, 정확히는 홍위와 형님에게 예쁨을 받으려면 적어도 행동과 동시에 서한을 올려서 정보를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이놈들은 끝까지 줄타기를 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여기까지 상황을 악화시켰다.
“조선의 병사가 강맹하여 저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여겼습니다.”
“하지만 대내씨는 족리가문에서 책봉한 호족이니 함부로 정할 일이겠소? 자칫 잘못하면 번국간의 싸움을 벌이는 일이니 이는 옳지 않은 것이지.”
조선에서 백제의 후손임을 인정하여 약간의 녹봉도 지급하였지만 전혀 충성심이 없었다. 하다못해 충성심 이전에 신의 자체가 없는 녀석들이다. 어린 마사히로도 이런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 식은땀을 질질 흘리며 고개를 텅텅 박아댔다.
“가문의 어른이신 소젠님이 급사하신 이후로 의견이 나뉘며 가신들이 이탈하고 분열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비록 승려지만 덕망이 있으시며 심계가 깊으신 분이셔서 빈 자리가 컸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조선에서는 신미대사를 통해 야마나 소젠의 정체를 알아차렸지만 끝까지 발뺌한다. 기분이 더러워져서 소젠을 생각하는 척 합장하고 불경을 외우자 마사히로는 자신도 위패에 절을 올리고 오겠다며 나가서 고함을 치고 욕설을 퍼부었다.
칙쇼, 빠가, 니쿠 그리고 키니쿠 다루마(근육달마, 근육돼지를 뜻한다) 등등의.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일본어 욕설이 슬쩍 들렸지만 고인을 애도하는 자리이니 아무런 생각이 없이 불경을 마쳤다. 잠시 뒤 흥분한 얼굴의 마사히로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이십 만(일본은 정군과 보인을 합산하니 실질 병력은 10만 내외)의 병력이 집결하였습니다. 이대로 오우치가 몰락한다면 조선은 충실한 가신 하나를 잃는 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지 궁금하군. 이미 명나라에서 구주의 왜구들에 대한 토벌 칙서가 전달되었으며 아국은 전력을 다해 구주의 왜구를 토벌할 준비를 마치는 형편이거늘.”
“왜구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큐슈의 와코(왜구)들은 모두 영주의 병사들이며. 영주들은 호소카와에게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확실한 증좌는 있소? 확실한 증좌가 있다면 양면 전쟁을 벌일 각오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국의 병사들을 반으로 나누어 더욱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요.”
이미 정해진 일이지만 튕기는 것이 이득이다. 조선은 양면 전쟁을 벌일 것이며 먼저 큐슈를 급습하여 적들을 혼란에 빠트린 이후 병력을 상륙시키고 나중에 오우치에 지원 병력을 보내는 것이 골자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려줄 이유는 없지. 마사히로는 창백해지다 못해 하얗게 변한 얼굴로 아무런 말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결국 명백한 축객령을 받은 마사히로는 ‘가능하면 병력을 보내줄 수 있지만 우선할 일이 아니다.’ 라는 서한 하나만 들고 돌아가게 되었다.
인내의 시일동안 명나라에서는 차곡차곡 물자를 전달하였다. 백만 냥의 은은 먼저 지급 되었으며 미곡 오십만 석은 대방선과 풍역선 30여 척을 동원하여 동래로 운반되었다.
먼저 지급된 은은 전쟁 물자를 준비하는데 쓰였다. 명나라에 있던 화포를 수입하지 않았지만 철과 각종 옷감을 비롯한 기초 물품과 약재는 물론이고 식량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너무나 큰 거래였는지 남경 상인들이 벽란도까지 찾아왔다.
나도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형님과 홍위는 나에게 가장 중요하면서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일을 시켰다. 바로 화약을 만드는 과정의 총괄 감독이다.
전쟁 준비를 위해 수입하는 품목에도 변화가 있었다. 1468년 4월 출항하였던 서행사의 관원들이 돌아오면서 평소의 이만 근이 아닌 십만 근의 초석을 수입했다. 하지만 십만 근의 초석이 문제였다.
“대군어른! 석류황(유황)이 부족합니다!”
“군기시에 있는 모든 석류황을 털어내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근래에 화약을 많이 사용하며 왜국이 석류황을 팔지 않으니 비축분이 고갈되어 일만 근에 불과합니다. 이러다가 명국에서 사들여야 할 지경이지만 오랜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초석이 많다고 화약이 되는 것이 아니다. 유황이 문제였다. 일본에서 밀무역과 공무역을 포함해서 유황 사천 근, 대만 유황광산에서 중죄인이나 왜구를 동원해서 사천 근, 그리고 각지의 황철광을 쪄내서 일천 근의 유황을 생산했다.
하지만 일본의 정세가 불안해져 유황 수입은 이천 근으로 감소하였으니 총 수입량은 칠천 근에 불과했다. 군기시 뒷마당에 임시로 세워진 가건물에 염초가 십만 근이 쌓여있는데 한숨만 나온다. 이대로라면 염초가 남아 돌 지경이다.
물론 화약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니 필요하다 못해 전쟁이 길어지면 닥치는 대로 수입해서 양을 메꿔야 할 지경이다. 지금 조선의 화력이면 전면전을 벌일 경우 일 년 만에 십만 근의 화약을 쓸 수 있다.
40척의 선박이 싸운다 가정하면. 한 전투에서 천자총통 60발만 발사해도 2,400근의 화약이. 전투를 10회 반복하면 24,000근의 화약이 소모된다. 여기에 화기도감 병사들의 화약 소모도 만만치 않다.
하르빈 전투에서 한 번에 소모한 화약이 칠천 근이 넘었다. 이마저도 마지막 날 전면전 기준이고 총 전투를 합산하면 일만 근에 달할 것이다. 결국 내가 내릴 수 있는 명령은 하나였다.
“가장 먼저 세심히 관리하는 보총과 화차의 화약을 생산하도록 하게. 별응법(코닝)으로 만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네. 주상전하께 석류황의 부족에 대하여 말씀 드릴 것이니 먼저 움직이게”
인부들에게 일을 시켰지만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실험이라도 해볼걸 그랬다. 지금에서야 떠오른 생각이지만 유황이 필요 없는 화약도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무연 흑색화약(갈색화약)을 연구할 수도 없고. 염초는 남아나는데 유황이 부족해서 화약을 못 만드는 것이 말이나 되나?”
“수양대군 어른 계십니까? 상왕전하께서 서책을 하사하셨습니다!”
시종이 달려와서 서책을 건네줬지만 지금 상황에서 화약 제조법을 개정해서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한숨이 나오려던 것을 참고 서책을 펼치니 형님이 직접 친필로 작성한 책이다.
“형님도 무슨 일로 어필(御筆)을 사용하신거지. 어중간한 일이 아니라면 안평대군과 함께 단배 인쇄기(구텐베르크 인쇄기의 개조판)를 사용하는데.”
구텐베르크는 아직도 여생을 이어가며 인쇄기를 개량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처음에는 타자기와 비슷한 글씨체가 점점 나아지니 정말 급한 일이 아니라면 대부분 인쇄기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훑어보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다자화약(多紫火藥 - 검은 주홍색 화약)은 또 뭐고? 유황이 필요 없는 화약?”
형님 화력시험과 화포 개량에 나서는 일은 알았지만 너무 많은 화약을 사용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화포 개량 이전에 화약 자체를 개량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놀랍게도 화포 전용 화약으로 19세기에 개발되는 갈색화약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볏짚을 그슬려 섞는 구체적인 방식이며 다자화약을 위한 새로운 코닝 방법도 기록되었다. 지금도 열심히 화약을 만들던 이들에게 서책을 전해주며 말했다.
“상왕전하께서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셨네. 다자화약이라 하여 석류황을 한 근에 한 돈(3.75g)만 넣으면 충분한 방안이라 하더군.”
“저희는 그런 방식은 처음 들어봅니다. 석류황이 없어도 화약을 만들 수 있다 하셨습니까?”
“염초방(焰硝方)에 쓰인 대로 행하면 효험이 있다 하였지. 다만 처음 만들어서 효험을 확인하라 하셨네. 기존에 버드나무 숯을 쓰는 방법이 아닌 그슬린 볏짚을 쓰는 방법이니 시행착오가 다소 있을 거라 하셨지.”
기존 조선 화약의 제조법은 염초 6 : 유황 1.5 : 버드나무 숯 1의 비율이다. 하지만 형님이 저술한 염초방은 염초의 생산 지역마다 배합 비율을 변경하는 방법도 있었지. 군기시의 기술자는 책을 덮고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
“천축산 염초가 상등, 중등 그리고 하등으로 나뉘며 모두 만드는 방식이 다릅니다. 당장 저희가 만들던 화약도 비율이 어긋나 있으니 제법을 고쳐야 하겠군요.”
“그러하면 즉각 시행하게. 화약의 사 할은 총통에 쓰일 녀석이니 석류황이 부족할 일은 없겠군.”
다행이도 하나의 큰 문제는 넘겼다. 처음 일을 받았을 때에는 막막했지만 형님 덕분에 어떻게든 해쳐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사방에서 병사들이 집결하고 원정 준비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제 상세 계획을 세울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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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년 1월, 이미 물자와 병력들이 동래에 도착하였으며 마지막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계획인 일본 내해 공략. 큐슈 전체를 순회하는 함대 계획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왜인들은 뢰호(瀬戸 - 세토)라 칭하는 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산야를 넘나드는 도로를 가지고 있지만 내해의 잔잔한 물결을 따라 물산을 옮기기를 즐겨 하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일입니다. 십칠 년 전의 회례사(回禮使)를 제외하면 모두 왜국의 내해를 통해 이동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제가 왜국을 다녀오면서 회화를 핑계 삼아 정탐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매번 방문하는 고장을 다르게 하여 풍경을 회화로 남긴다 하며 대부분의 항구를 방문했습니다.”
“모두가 허가하는 염탐이라니. 이러한 방법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숙부님 밖에 없습니다.”
안평대군은 홍위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필요한 정보이다. 회화를 위하여 좋은 풍경을 찾는다면서 사방을 돌아다니고. 초본이랍시고 상세한 내용을 적어간다면 충분한 정탐이지.
하지만 상황이 난처했는지 권절도 안평대군도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의 선박인가 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선박이 있었다.
“주상께 아뢰옵니다. 선박을 산출한 결과 왜인들이 내해에서 사용하는 선박이 최대 천이백 척이 넘는다는 결론이 나왔사옵니다. 여기에 뢰호내해는 수심이 얕고 틈이 좁아 풍역선과 같은 거대한 배가 넘나들기 힘든 고장이옵니다.”
“바꿔 말한다면 뢰호내해에서 전투를 벌인다면. 적들의 손바닥 위에서 일천 척이 넘는 왜선들이 몰려든다는 말이 아닙니까. 뢰호 내해를 종횡하는 계획은 중단해야 하겠습니다.”
큐슈 일대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그렇다고 함대 포격이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작전 수립을 위해 동평관에 사람을 보냈다. 잠시 뒤 동평관에 있던 소 모리사다가 이궁에 들어왔다.
“대마도주 종정국(소 사다쿠니)의 아들인 종재성(宗盛貞 - 소 모리사다, 아명이다)이 당도하였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 사다쿠니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조선의 신하를 청하였지만 함부로 자리를 비울 방법이 없다. 세종대왕님이 없었지만 형님과 홍위가 있는 것을 본 소 모리사다는 고개를 박다시피 인사를 올렸다.
“신 종재성, 머나먼 대마도에서 건너와 주상전하를 뵙사옵니다.”
“아국의 말에 능숙하군. 언제 배운 것인가.”
“부친께서 십 년 전부터 조선에 귀부하기로 마음을 먹어 시간을 쪼개가며 배웠습니다. 하오나 저희의 능력이 부족하여 어명을 완수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정탐의 효험이 없었단 말인가. 석 달 정도면 충분한 시일이 아니었는가.”
모리사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도와 서책을 홍위에게 전달하였다. 정음을 배웠는지 한문과 정음이 섞여 있는 자료였는데 홍위는 한참을 살펴보더니 형님에게 전달하고 약간 분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구주(큐슈)는 경상도와 비슷한 크기라 하였네. 비록 형세가 복잡하고 물산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하여도 상세한 내용은 없지 않은가. 언어가 통한다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지 않는가.”
“하오나 왜국은 백 년 전만 하여도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고. 이후에도 각 지방의 영주들이 쿠니의 승계를 자청하며 서로를 질시하는 형편이옵니다.”
홍위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서로 질시하고 전쟁을 벌이기를 밥 먹듯이 하였으니 사람이 오고 가는 일이 힘든 것은 당연하며 염탐이 힘든 일은 당연하다.
그런 고난을 염두에 두니 소 사다쿠니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냈는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짐작이 갈 지경이다. 각지의 병력 규모나 장수 목록과 요새가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곳이 비어있다.
“대우씨(大友 - 오토모)의 영지인 풍후(豊後 - 분고)일대의 정보는 거의 비어있구려. 당도하지 못한 것이오?”
“주상전하께 불순한 말씀을 올려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호소카와가 큐슈 일대의 전쟁 징후를 알아차렸는지 이가류(伊賀流)와 코가류(古賀流)의 시노비(忍者)를 파견한 것 같사옵니다.”
“이하류와 고하류는 무엇이고. 인자라는 이들은 무엇이오?”
엥? 시노비? 이가류? 코가류?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는데 진짜 전투 병력으로 닌자가 존재했나? 닌자는 모두 첩보원이랑 정보조직이 아니었나? 그렇게 다들 멍하니 있는데 모리사다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가국과 코가국은 산세가 험하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고장입니다. 반면 살아가는 이들은 악착같이 삶을 이어가며. 험준한 산세를 거닐며 몸을 자연스럽게 단련합니다. 이러한 이들이 훈련을 거듭하여 정보수집과 암살을 병행하옵니다.”
“계속 하시오.”
“각지의 영주들에게 보수를 받으면 어떠한 일도 거리낌 없이 행하옵니다. 식량고에 불을 지르는 일부터 후방을 침략하여 어지럽히는 일은 당연하고. 저희가 보낸 첩자들도 상당수 검거되어 제거된 것이 분명하옵니다.”
험준한 산을 거닐고 몸을 단련하고 정보수집과 암살이라. 정보수집만 제외하면 완전 임해도감인데? 홍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좋은 정보요. 한 달 뒤에 원정을 행할 것이니 이를 보조하며 탐망을 게을리 하지 마시오.”
“저희 종씨 가문은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고자 고개를 조아릴 뿐이옵니다.”
논의도 끝났고 이제 내 일은 끝났다. 병권을 쥐고 있는 형님이 동래로 내려가서 분조(分朝) 개념으로 원정을 실행하면 되니 내가 할 일은 후방에서 이런 저런 잡무를 하면 되겠지.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형님이 나와 안평대군을 돌아보며 미소를 짓고 계신다. 아무리 봐도 나도 동래로 내려가라는 소리 같은데 이걸 거절할 방법이 있을까.
“금상은 정무에 힘을 쓰십시오. 이제 두 종친과 함께 전쟁을 지휘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도 안평대군도 서로를 마주보면서 웃었다. 그렇게 형님과 함께 동래로 내려가니 2월이 다 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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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일대는 사람들로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최소한의 여유와 후방 교육이나 기타 필수적인 자리에 있는 인원을 제외하고 훈련원 휘하 삼군이 모두 결집한 것이다.
임해도감은 서행사의 호위를 자처한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 전원 참전, 훈련도감과 화기도감은 정원의 절반인 오천 명이 참전했다. 피렌체의 미술가들은 병사들이 집결한 장면을 회화로 남기며 감탄을 마지 않았다.
“기껏 해야 토벌에 나서는데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도열한단 말입니까. 조선의 저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저희는 오천 명이 넘으면 대군이라 칭하는데 병사만 사만에 달하지 않습니까.”
훈련원 삼군 병사 12,500명, 북방과 한양을 오가던 기마갑사 5,000명, 일반 병사 15,000명. 여기에 북방의 여진족 토관 출신 기병 5,000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일제히 집결한 함대였다.
적게 잡아도 20문 이상의 화포를 장착한 풍역선 35척과 대방선 30척. 대방선이야 노후한 함선이라 전면전에 나서지 않지만 이것만 하여도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명나라에서 파견한 병부상서 백규(白圭)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왜구의 본고장인 구주 일대를 징벌하기에 차고 넘치는 병력이 아니겠습니까. 번국이 이렇게 충심을 아끼지 않는다니 참으로 흠복이 따로 없습니다.”
물론 백규에게 상세한 작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큐슈 일대에 상륙해서 상륙지점에 가만히 있으며 전해오는 수급과 보고를 받으면 충분한 일이다.
훗날에 이 전쟁을 경인년의 전쟁으로 기록하리라. 왜구가 먼저 침략하여 벌어진 전쟁이니 경인왜란(庚寅倭亂)이라 칭할지 경인왜변(庚寅倭變)이라 칭할지는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