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6화 - 뺨을 때렸으니 맞아야지 >
진주에 있던 도감군의 지휘관 장효손(張孝孫)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전장을 돌아보았다. 급히 달려온 덕분에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못하였고 지원군은 한참 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적의 병사만 일천 이상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그렇다고 나중에 도착할 병력을 기다리면 산성까지 도주하지도 못하고 잡색군이 몰살당할 상황이었기에 적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천리경을 들어 왜구를 살피니 피해를 입은 자는 고작 십여 명에 불과하였지만 운총병이 노려 쏜 적의 장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말에 올라탄 장수만큼 좋은 표적이 없으니 대부분 죽었으리라.
“홍 부사직(副司直)님! 보총 사격은 효험이 없습니다.”
“효험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연무가 산으로 올라가니 적도가 연무의 틈을 노릴 가망이 크구나. 전열에 명령을 하달해 호각이 울리면 포복 후 일제사격을 준비하라 전하라.”
명령이 하달되기 이전에도 화기도감의 보총수들은 장전에 여념이 없었다. 탄약포를 찢어 장약을 쏟아 붓고 약포와 탄환을 집어넣고 여러 번 바닥에 두드렸다.
희뿌연 화약 연기가 걷힌 순간이었다. 왜구들은 시야가 트이자 일제히 돌격하였으며 장효손의 호령이 떨어지고 훈련도감의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었다.
“후열! 일제사격!”
호각의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일제사격이 날아왔다. 보총의 유효사거리 이하인 40보(약 80m)거리에서 200명의 보총수 전원이 사격을 날리자 적의 전열이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적의 기세는 멈출 줄 몰랐고 가장 앞에 나선 방패수의 원패(圓牌)에 왜도가 내리 꽂혔다.
----------
진스케가 기세 좋게 칼을 뽑으며 말의 배를 걷어찬 순간이었다. 갑자기 산 아래 조선군의 진영에서 콩을 볶는 소리가 겹쳐 들리며 말이 쓰러졌다. 갑자기 넘어진 자신의 말을 다그치려 하였지만 칼이 부러져 있었다.
“진스케님! 불벼락입니다! 미도리오니들이 불벼락을 쏘았습니다!”
“불벼락이라니! 조선이 요괴가 사는 나라라도 된다는 말이냐? 하야토! 켄지! 네놈들은 무엇을······.”
“모두 벼락을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고개를 돌려 전장을 보니 말을 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애마에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보니 말을 탄 장수를 노려 쏘는 것이 분명했다. 칼이 탄환을 튕겨내고 부러져서 죽음을 면한 것이 분명했다.
소름이 돋은 진스케는 몸을 더듬었다. 조선군의 화살을 막으려고 갖춘 오오소데(大袖 - 보호용 덧판) 중 하나에 탄환이 스쳤는지 반쪽이 되었으며 멋들어진 투구에는 바람구멍이 뚫렸다. 진스케의 머리가 격렬하게 돌아갔다.
“지금이라도 당장 퇴각해야 합니다. 불벼락을 쏘는 놈들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불벼락이라니! 조선 놈들이 화포를 쏘는 것은 잊었느냐? 싸울 적에 함부로 등을 보였다가는 배로 돌아가기도 전에 화포에 등을 맞아 죽을 것이다! 그러니 놈들에게 돌진하라!”
“불벼락을 맞으면 어찌······. 으억!”
항의하던 고참병의 배에 망설임 없이 칼을 박아 넣은 진스케는 다시금 고함을 쳤다. 설령 살아 돌아갈 수 있어도 철저히 장수를 노리는 조선군이 자신을 노릴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화포라 하여도 가까이 붙으면 쏠 수 없다. 돌격하여 놈들의 멱을 따버리고 승리를 거두자. 후퇴하다 비참하게 죽을 것이냐! 놈들과 당당히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둘 것이냐!”
“진스케님! 투구를 벗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와 같이 화포를 맞아 죽더라도! 조금이라도 빨리 달려 놈들에게 칼을 박아 넣기 위해서이다. 나는 화포 따위는 두렵지 않다!”
다른 장수들이 모조리 죽고 자신도 천운으로 살아남았으니 다음 사격을 피해야 한다. 화려한 투구장식은 좋은 목표가 될게 분명하니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은 그런 모습을 보더니 사기가 급격히 치솟아 올랐다.
“역시 진스케님이시다! 저승이라도 함께 하겠습니다!”
“조선 놈들이 화포를 쏘기 전에 어서 돌격하라!”
연무가 걷힌 순간 모든 병사들이 고함을 치며 능선을 달려 내려갔다. 백 보, 구십 보 그리고 팔십 보에 접어선 순간에 적의 전열이 몸을 웅크리며 다시 화포 사격이 쏟아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진스케는 화포 사격에 맞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용맹한 모습을 보고 생로(生路)라 여겨 전력으로 돌격하였으며. 은근슬쩍 세 열 정도 뒤로 빠진 덕분에 보총사격을 맞아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다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놈들이 벼락을 계속 쏘아댑니다! 오니들이 천둥을 다룬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닥쳐라! 오니도 아니며 피와 가죽으로 이루어진 사람에 불과하다! 시마즈의 가신 진스케! 네놈을 죽여 일번검이 되겠다!”
상대의 방패를 단번에 쪼갤 생각으로 거세게 검을 내리쳤다. 온 힘을 다한 일격이었는지 일본도가 다소 휘어버렸지만 상대는 멀쩡하고 방패도 멀쩡했다. 방패수는 훈련대로 몸 전체를 이용해 충격을 흡수한 덕분이었다.
- 마! 니 자신 있나! 무슨 자신으로 뎀비는데!?
“네놈이 진짜 미도리오니였구나!”
진스케는 불행이자 행운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진짜 미도리오니를 상대한다면 다른 병사들은 일반 병사와 싸울 것이다. 상대가 휘두른 칼을 피해 자세를 바로잡는 순간 창날이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런 미친! 틈을 노려서 창을 뻗어!”
- 아 시끼 모가지를 조사삘라 했는데 빠르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호흡이 맞는 두 병사의 모습을 보자 진스케의 등골에 식은땀이 맺히며 불안감이 솟구쳐 올랐다. 방패수가 고개를 젖히자 창날이 날아들었으니 오랜 시일 합을 맞춘 것이 분명했다.
하나만 놓고 싸우자면 승산이 있었다. 힘이 좋았지만 기술이 부족하니 계속 싸우면 언젠가는 이길 것이다. 하지만 둘이 되자 진스케의 승산은 점점 줄어들었다. 다시 검을 부딪치고 뒤로 물러나자 상대는 방패를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 야 이 게쉐끼야! 뒤질라카나! 경원에서 사비로 사들인 원패인데 흠집났구만! 니 칼은 왜 보는데? 칼 휘었구마. 그놈의 칼은 엿으로 만들었나?
진스케는 이상한 소리를 냈던 자신의 카타나를 들어 보았지만 상대의 괴력과 부족한 내구도가 어우러졌는지 날이 휘어 있었다. 비싼 돈을 주고 사들인 카타나였지만 이미 두 자루가 고물이 되어버렸다.
“네놈의 카타나는 뭘로 벼린 것이냐! 무엇이기에 내 카타나가 휘어지는 것이냐!”
- 니 칼 지금 뽑은게 끝이제? 더 없제? 없제? 한눈에 봐도 안다. 딱 대라.
마지막 예비도이니 함부로 검을 마주칠 수 없었다. 몸을 엉거주춤 뒤로 빼자 상대가 틈을 보였고 기회라 여겼다. 난데없이 거대한 도끼가 내리 찍히며 몸을 그나마 갖춰 입은 갑주가 부서지며 고철더미가 되었다.
- 장 형은 참 좋은데 아쉽구마. 저 등신쉐끼 갑옷 다 조솨놔서 고마우니 내가 죽이겠소.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슬쩍 바라보니 주변의 병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미 전열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밀리고 있었다.
----------
일본에서 일반 병사가 사용하는 창술은 창의 길이를 살려 높게 치솟은 다음 내리 찍는 독특한 창술이다. 탄력이 월등한 삼나무의 장점을 이용하는 창술이며 부실한 잡철의 강도를 보완하는 수법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전열을 갖춘 왜구들이 창을 높이 들고 내리 찍었지만 고통에 찬 비명은 없었다. 오히려 한 병사는 질질 끌려가는 자신의 창을 잡고 있다가 앞으로 넘어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창날이! 끌려간다!”
“저 머리통만한 창은 뭐야! 저걸 어떻게 휘두르지?”
아직 전국시대 이전이니 창의 길이가 1장(3m)에 불과하였지만 길이는 상관이 없었다. 왜구들의 창술을 처음 접해본 방패수들은 내리 꽂히는 창을 원패로 막으며 천천히 나섰다.
원패에 막혀 멈춘 창을 미늘창(할버드)을 사용하는 장검수들이 놓칠 이유가 없었다. 할버드는 강력한 도끼이자 찌르는 창이며 무언가를 당길 수 있는 부리를 갖춘 다용도 병기였다.
왜구의 창이 등패에 막혀 멈춘 사이 미늘창의 날 반대편에 있는 고리가 창날을 휘감았다. 온 힘을 다해 미늘창을 당기자 창을 잡고 있던 왜구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창날이 박살났다.
창대가 부러지면 나은 편이었다. 손에 힘이 부족하면 창이 빠져나와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했다. 그런 틈을 노린 훈련도감의 창수들은 단창을 힘차게 던져 무기를 돌려줬다. 물론 목숨을 가져가며 무기를 돌려줬다.
“창이! 내 창!”
“무기가 없는데 어떻게 싸우라는거······. 억!”
“그렇구나! 이걸 쓰면 되겠네! 으악!”
처음에는 생소한 전술에 당황하였지만 충분한 훈련과 뛰어난 완력은 사소한 차이를 무시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전투를 시작하고 한 각(15분)이 지나기도 전에 분열이 시작되었다. 후열에 있는 병사들이 주변을 돌아보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왜적이 퇴로를 찾아 분열할 것 같습니다. 놈들이 달아나면 큰 일이 아닙니까.”
“염려하지 말게. 이미 동래에도 소식이 전해졌으니 동래에 머물던 함선 모두가 인근의 포구를 탐망하고 있을 거라네. 중요한 일은 놈들을 포구로 몰아내는 것인데 성가시기 이를 데 없군.”
분열한 왜구들보다 성가신 적은 없었다. 놈들이 진주 일대로 패주하면 큰 손해는 없더라도 크나큰 문책을 당할 것이다. 장효손은 눈을 굴리며 전장을 바라보다 다급히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와해된다! 보총수가 앞으로 나서 일제사격 이후 자율사격을 실시하라! 훈련도감 병사를 쏘지 않게 충분한 틈을 노리도록 해라!”
호각이 울리기가 무섭게 보총의 일제사격이 이어지며 전투의 쐐기를 박았다. 더 이상 진형을 유지하기도 힘든 지경이 된 왜구들은 무기를 버리고 일제히 남쪽의 사천포를 향하여 도주하였다.
훈련도감 병사들은 섣불리 추격하지 않았다. 거짓퇴각일 수도 있으며 포구로 도망쳐 보았자 동래에 정박하고 있던 함대가 나서 적을 마무리 지을 것이 분명하였으니. 하지만 장효손의 눈에 서른 정도의 왜구가 숲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도주하는 것이 보였다.
“저놈들은 또 뭐란 말인가! 어찌하여 진주 방향으로 도주하지? 어서 추포(追捕)하라!”
훈련도감 병사들이 달려갔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병사들은 도주하며 내다버린 무기와 옷을 한아름 들고 돌아왔다. 다들 지쳐 있었으니 얼마나 격렬한 추격전인지 짐작이 갔다.
“속곳만 입고 도망치는 놈을 무기를 갖추고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추포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사람을 보내 진주에 알리게. 그나저나 이 복식은 문양이 있고 섬세한 녀석이니 귀한 이들이 입는 복식이군. 왜구의 장수가 벗어던진 것이 분명하지만 참으로 멍청한 자이군.”
십자 문양이 새겨진 하카마(웃옷)를 보던 장효손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저으며 장계를 작성했다. 자신이 왜구를 놓쳐 서른 가량이 진주로 향했으니 서둘러 수색에 나서라는 내용이었다.
----------
사천포 일대를 약탈하는 왜구들은 대부분 노를 젓는 격꾼이었다. 이들은 단순 노역에 종사하였지만 적어도 와키자시(脇指 - 짧은 일본도)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며 왜구에 속하니 약탈에 나서는 일은 당연하였다.
“이건 또 뭐지? 조선은 이런 이상한 토란을 먹는 건가?”
“토란치고는 찐득거리고 단 맛이 나는걸. 역시 진스케님의 말씀대로 부유한 고장이 맞는 것 같아. 토란을 꿀에 절이다니.”
“이거 보게! 이건 마구로(참다랑어)가 아닌가. 이런 기름진 생선을 두다니 참으로 신비한 일인데?”
사람이 도망친 평범한 민가에 난입한 격꾼들은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종이의 공급이 많아지니 값이 내려 바닥에는 어설픈 장판지가 깔려 있었으며. 양모의 공급이 늘어나니 목면의 가격이 내려 솜을 누벼 넣은 이불도 있었다.
“이렇게 두툼한 이불을 덮으면 겨울에 불을 때지 않아도 좋겠어.”
“꿀에 절인 토란이 많이 있군. 자네도 먹어 보겠나?”
“이보게. 이 집에는 책이 있어! 무슨 책인지는 모르지만 털어 가자고. 고서(古書)라면 부르는 게 값이니까.”
흉년을 대비하여 심은 고구마를 보며 귀한 음식이라 감탄하고. 싼 값에 사들인 누비이불과 훈민정음 교재 인쇄본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격꾼들은 북쪽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에 화들짝 놀라 밖으로 나섰다.
“당장 배로! 배로 돌아가!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고!”
“지금 한참 재미보고 있는데 조선의 대군이라도 왔습니까? 진스케님은요!”
“미도리오니다! 미도리오니가 천 명이 넘게 몰려왔다고! 진스케님? 불벼락에 맞아 죽었겠지! 이 고장에 오는 것이 아니었어. 조선은 요괴들이 사는 땅이야!”
출병할 때는 이천 명에 달하던 병사였지만 돌아온 것은 칠백 명 이하였다. 처참한 패전에 할 말을 잃은 격꾼들은 모조리 함선으로 돌아갔지만 물때가 지나 간조(干潮)에 접어드는 시점이니 배는 모조리 갯벌에 있었다.
“염병할! 물때가 지났으니 한참을 밀어야 하네!”
마을 저 너머에서 다시 보총의 총성, 왜구들이 불벼락이라 여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백하게 질린 병사들은 온 힘을 쥐어짜내 배를 밀어냈고 가까스로 모든 배가 갯벌을 빠져나와 바다를 가로질렀다.
“빨리!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데 뭐가 그리 급하나!”
“물길이 빠지고 있으니 저도 경로를 잡기 힘듭니다. 그런데 저게 뭡니까!”
왜구들의 고바야부네나 세키부네와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선박. 군용으로 개수된 풍역선 다섯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구들이 갯벌에서 배를 끌어내는 동안 풍역선은 해류를 거슬러 올라 닥나무 섬이라 불리던 저도 인근까지 도달하였다.
“남 사직(司直 - 정오품 무관)님! 왜구가 사천포에 있었습니다! 함선이 일흔 척이 넘습니다!”
“마침 잘 된 일이군. 장효손이 제대로 손 본 녀석들이니 모조리 몰아쳐라! 포로로 잡을 스물을 제외하고 모조리 죽여라!”
“우와! 목이다! 다시 목들이 몰려온다!”
“목 따내다가 죽지 말고 다 죽인다음 목을 베어라!”
이미 사기가 떨어지다 못해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왜구의 퇴로를 다섯 척의 풍역선이 막았다. 갑판의 운총수가 사람을 노렸지만 총성을 듣자 왜구들은 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을 시작했다.
더 이상 불벼락을 맞아 죽을 수 없으니 해로를 역행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왜구들은 악착같이 간조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려 하였지만 해류가 거세기로 유명한 것이 간조 때의 저도였다. 그렇게 왜구들의 발이 묶이자 남이가 명령을 내렸다.
“먼저 벽력포를 쏘아붙여라! 놈들이 해류를 거슬러 올라가다 진이 빠지면 돌아올 것이다!”
“벽력포 순차 방포!”
저속으로 수백발의 산탄을 날리는 벽력포. 훗날 서양에서 카로네이드로 명명될 화포가 세키부네에 쏟아졌다. 선체를 구성하는 얇은 삼나무 판이 완전히 꿰뚫리지 않으며 파편을 흩뿌렸지만 파편은 사람의 몸을 찢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벽력포 여섯 발이 함선 하나를 노리고 쏘아지자 갑판 위의 왜구들은 육편이 되어 갑판과 바다를 붉게 물들였고. 함선 내부의 격꾼들은 수백 발의 산탄이 박살낸 나무 파편에 사지가 찢겨 몰살당했다. 남이는 그런 모습을 보고 명령을 하달했다.
“이미 왜선 수십 척을 격침하였으니 크게 다를 것이 없구나! 계속 쏘아라! 화약은 넘쳐나니 염려하지 마라!”
풍역선이 일제히 벽력포를 쏘면 한 척의 배가 침묵한다. 그렇게 스무 척의 왜선이 박살나자 왜구들도 분노하여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화포를 쏘지 못하게 달려들어라! 놈들의 멱을 따고 놈들의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충분한 승전이다!”
“그래! 미도리오니가 배에 없을지도 몰라! 가자!”
남이는 왜구들의 행동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평상시와 같이 화포를 쏘아 제압하면 발악을 하며 백병전을 시도한다. 차라리 도망가면 살 지도 몰랐지만 백병전을 택한 순간 자살을 택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남이는 임해도감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 척에 한 놈만 남기고 다 죽여!”
“명을 받들겠습니다!”
갈고리가 걸리고 왜구가 칼을 휘두르며 뛰어 올라오며 일번검을 외쳤지만 그의 입에 임해도감 병사가 집어던진 도끼가 박히고 배로 떨어져 즉사했다.
- 사토시! 이봐 사토시!
“이얏호 모가지다! 일단 다 죽이고 보자!”
세키부네가 출렁거리며 밧줄을 타고 내려온 임해도감 병사들의 몸을 받아냈다. 양 손에 도끼를 빼들고 천천히 접근하는 임해도감 병사의 앞에 왜구 한 명이 카타나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 네놈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
“뭔 소리인지 모르지만 여섯 번은 들은 소리다!”
옆으로 쳐올리는 한손 도끼와 사선으로 내리친 카타나가 허공에서 충돌하였다. 충돌하기 직전 미소를 지은 왜구는 자신의 예리한 카타나가 한손 도끼를 박살내고 상대의 몸통에 파고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일본도가 무참히 박살나고 도끼가 다시 내리 꽃혔다. 왜구의 맨질맨질한 이마 위로 도끼날이 두 치(6cm) 깊이로 박혀 들어가며 왜구의 코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새로 받은 도끼 좋네. 왜도를 부숴도 날이 조금만 나가니까 쓸 만 하겠어.”
임해도감 병사가 시체를 발로 걷어차자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뇌수와 피에 절은 도끼가 뽑혀 나왔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혀를 낼름거리는 모습에 왜구들은 공포에 떨며 갑판 아래로 도망치기 시작했다.